정침(正寢)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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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침 |
한글표제 | 정침 |
한자표제 | 正寢 |
상위어 | 궁궐(宮闕) |
관련어 | 연조(燕朝), 연침(燕寢), 침전(寢殿), 편전(便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강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침(正寢)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2년 7월 27일 |
궁궐에서 왕의 일상적인 의례(儀禮)가 이루어지는 중심적인 건물.
개설
중국 고대 예제(禮制)에 근거한 정침의 본래적 의미는 왕이 사는 궁궐 가운데 의례를 실행하는 건물이다. 조선초기 궁궐에서는 의례 실행이 편전(便殿)에서, 일상생활은 침전(寢殿)에서 이루어져 편전이 정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의례가 점차 유연하게 실행되고, 임진왜란 이후 온돌이 궁궐에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점차 침전에서의 의례 실행이 빈번해졌다. 그리고 정침의 개념이 침전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내용 및 특징
고대 중국의 예제에서 정침은 정사(政事), 즉 ‘다스림’을 위한 주거 내의 공간이었다. 주거 내에 다스림을 위한 공간을 둔다는 생각은 유교의 기본적인 태도인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 비롯한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위해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의 독립된 공간을 두어 정침이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주거는 의식주(衣食住)가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의 공간인 ‘연침(燕寢)’과 집안의 정사를 다스리는 공간인 ‘정침’이라는 2개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이때 정사는 단순히 정치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예(禮)를 구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기본이 된다.
궁궐에서 정침의 개념 역시 이러한 거처 내에서 예제의 중심 공간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궁궐의 공간은 의례의 성격에 따라 외조, 치조, 연조(燕朝)로 나뉘며 정침과 연침은 왕의 거처인 연조의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치조와 연조는 노문(路門)으로 경계를 형성하는데, 왕은 노문에 나와 치조의 일을 관장하고 조회가 끝나면 노침으로 돌아가 청정(聽政)하도록 되어 있다. 이때 청정하는 건물이 바로 정침에 해당한다.
궁궐 정침에서는 연거(燕居), 청정(聽政), 연향(宴享), 종친들의 가사(嘉事), 조회(朝會) 등의 행위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정종(正終)이라 하여 왕이 반드시 정침에서 승하하도록 규정하여 후사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혼란을 방지하였다. 즉, 궁궐의 정침은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중요한 의례를 거행하는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이에 대해 연침은 『예기(禮記)』의 「공영달(孔穎達)의 소」에 의하면, 정침의 주변에 놓여 월령에 따라 순환하여 사용하도록 규정된 공간이다. 연침의 수는 신분에 따라 줄어드는데 중국 청나라 때의 해석에 근거할 때 천자는 5개, 제후는 3개를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침, 노침, 연침의 개념과 형식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고, 혼용해서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정침 또는 노침이라는 용어는 한정적인 용례로 등장한다. 중국 사람들 집에는 다 정침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정침이 없다는 이황(李滉)의 지적처럼 정침의 제도는 조선초기까지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정침의 용례를 찾아보면,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압축된다. 첫째, 제사청(祭祀廳)이나 재숙소(齋宿所)의 의미이다. 이는 길례(吉禮) 의례를 위주로 사용되었으며 산릉이나 사우(祠宇) 등과 연관된다. 둘째, 연거지소(燕居之所)의 의미이다. 예를 들어, 1440년(세종 22)의 가사 규제에는 공주 이상은 정침과 익랑의 보 길이가 10척, 도리 길이는 11척, 기둥 높이는 13척이라는 규정이 등장한다(『세종실록』 22년 7월 27일). 여기에서 정침은 정당(正堂) 혹은 안채와 동의어로 보인다. 셋째, 궁궐의 정침 의미이다. 이것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례이다. 궐내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에서 특정한 전각을 지칭하기 위해서, 또는 왕이 승하한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궐내 의례에서의 정침 개념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상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침의 본원적 개념에서 유추하건대, 외전에서 행해지는 행례에 있어 군주의 동선이 출발하고 마무리되는 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군주가 치조의 조회를 위해 노문으로 나가는 행위와 동일한 동선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정침은 특정한 건축 공간의 구성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정침의 건축은 당(堂) 혹은 대청(大廳)처럼 빈번한 동선 출입과 진설(陳設)에 편리한 개방 공간이나 협실(夾室)과 같이 제기(祭器) 등의 저장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정침의 건축은 시대·지역·문화에 따라 형식이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시대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규범으로 보기 때문에 공통적인 공간 구성을 취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예제 공간으로서 『의례(儀禮)』에 나오는 묘침제(廟寢制)가 이러한 정침을 규정한다. 여기서 묘(廟)는 공식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침(寢)은 비공식적인 활동, 즉 연거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궁궐의 공간에 적용될 경우 묘는 정침, 노침 등의 이름으로 정사(政事)를 하거나 재계를 하는 의식적(儀式的) 공간이 되고, 침은 연침이란 이름의 연처(燕處) 공간이 된다.
변천
조선왕조에 있어서 비록 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던 곳은 침전이었지만 경복궁에 있는 사정전(思政殿)과 같은 편전이 왕실의 정침으로서 의례를 행하는 건물이었다. 이는 외전에서 행해지는 행례에 있어 왕의 동선이 출발하고 마무리되는 위치로 판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하(朝賀), 조참(朝參), 상참(常參)으로 대표되는 조의(朝儀)의 규정을 보면, 모든 의례에서 왕의 움직임이 시작하고 끝나는 곳은 사정전이다. 근정전 앞마당에서 하는 조하나 근정문(勤政門) 앞에서 하는 조참의 경우, 왕의 동선은 사정전에서 출발하여 여(輿)를 타고 행례 장소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사정전으로 돌아오도록 구성되었다. 또한 국왕이 병환이 있을 때 사정전에 자리를 만드는 것이 규정이었다. 이를 통해 왕이 사정전에서 승하할 때 비로소 정종(正終)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음이 확인된다. 조선초기 사정전의 모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보면 동서로 이방(耳房)이 있었으며, 중앙에 청(廳)이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실내 배치는 정침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다양한 의례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경복궁의 사정전과 동일한 기능의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경희궁 자정전(資政殿) 등은 왕의 승하 등 주요 의절과 환내(還內)의 규정에 의해 조선왕실의 정침으로 인식되었다. 다만, 이는 의례적 개념 속에서의 정침일 뿐이며, 궁궐 공간의 실제 사용을 살펴보면 연거의 공간은 편전 용도의 전각이 아니었다. 그 단적인 예는 역대 왕의 승하 장소로 편전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정침의 기능이 두 갈래로 나뉘어서 각각 다른 건물에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의 제도와는 다르게 생활 영역에서 온돌(溫突)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생활 방식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에 적극적으로 온돌이 보급되고, 의례를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하게 되면서 편전이 지니던 일부의 기능이 다른 건물로 옮겨지게 되었다. 조선초기 사정전 등 조의(朝儀)를 실행했던 건물들은 중앙 3칸에 대청(大廳)이 자리하고 그 동서로 이방이 위치하였다. 여기에 온돌이 설치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러한 건물 내의 영역 구분을 통해 조의(朝儀)를 실행하는 주체인 왕이 ‘환내(還內)’, 즉 건물 내의 원래 있던 특정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사정전을 제외한 다른 편전의 경우 동서이방(東西耳房)으로 나뉘었던 공간의 구획이 사라지고 단일한 청(廳) 공간으로 실내가 통합되었다. 이와 같은 건물의 형태는 의례상 환내의 규정을 변경하게 되는 상황을 야기했다. 한편 일상생활을 수용한다는 정침의 본래적 의미를 고려하더라도, 온돌이 없이 마루로 이루어진 청 공간은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에는 실제적인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청 공간으로만 이루어진 편전에서는 상참을 정지하거나 청정(聽政)의 일을 중지하는 경우가 잦았다.
왕은 정침에서 승하하는 것이 ‘정종(正終)’이라 하여 후사 문제로 대표되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요하게 지켜야 할 사안이었다. 그런데 역대 왕들의 승하 장소로 편전은 사용된 적이 없었고 대부분 청과 방(房)으로 구성된 침전 용도의 전각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정침 개념이 변동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정침 개념의 변동은 영조 연간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등장하는 ‘상존호’ 의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왕은 경복궁의 사정전에 해당하는 창덕궁의 선정전에서 의례의 시작과 끝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침전인 대조전을 사용하였다.
요컨대, 조선초기의 궁궐 정침 개념은 의례 규정에 의해 편전 용도의 사정전에 투영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연거 장소는 침전 종류의 전각이었다. 즉, 왕의 일상으로서 의식과 연거 양자가 편전과 침전으로 분화되어 있었던 것이 조선 정침의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사정전 공간과는 다른 형태의 편전에서는 의식적 기능조차 완벽하게 충족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편전을 혼전으로 전용하여 온 현실적인 문제, 온돌 난방의 생활적 요구 등이 맞물리면서 점차 침전 용도의 대조전 등이 정침의 개념을 흡수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의례를 중심으로 한 궁궐 건축 계획이 실제적인 생활에 중심을 두는 쪽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윤정현, 「조선시대 궁궐 중심공간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기철, 「17세기 사림의 ‘묘침제’ 인식과 서원 영건」,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조재모, 「조선왕실의 정침 개념과 변동」,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20권 제6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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