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전(尹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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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5년(선조 8)∼1637년(인조 15) = 63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초명은 윤찬(尹燦)이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며, 자는 정숙(靜叔) 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후촌(後村)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창세(尹昌世)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淸州慶氏)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경혼(慶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윤희렴(尹希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정림(尹廷霖)이다.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윤황(尹煌)의 동생이고, 윤선거(尹宣擧)의 삼촌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가, 오랑캐 군사에게 잡혀서 순절(殉節)당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 2)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6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에 이르렀다.[『포저집(浦渚集)』 권33 「필선윤공묘지명(弼善尹公墓誌銘)」 이하 「윤전묘지명」] 그런 가운데 1613년(광해군 5) 성균관 유생(儒生) 이위경(李偉卿) 등 19명이 대북(大北)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도록 상소하였다.[「윤전묘지명」] 그러자 윤전은 홍문관 검열엄성(嚴惺)과 정자(正字)권호(權護) 등과 함께 사관(史官)을 모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방(榜)을 붙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5년 7월 11일]

그 뒤에 다시 관직에 임용되어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그러나 1615년(광해군 7) 7월 사헌부에서 윤전이 제멋대로 이위경 등이 과거를 볼 수 없게 했다면서 탄핵하는 동시에 윤전을 파직하고 사판(仕版 : 관리 임용 명단)에서 삭제시키도록 청하자, 광해군이 이를 받아들여 영원히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7월 18일] 이에 윤전은 세상에 대한 욕망을 끊고, 고향 충청도 이성(尼城)의 전원(田園)으로 돌아가서 10여 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글을 읽고 곤궁하게 살았다.[「윤전묘지명」]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서인(西人)들이 먼저 그를 추천하여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공주(公州)에 이르러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서울로 돌아와서는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년 5월 29일, 「윤전묘지명」] 1626년(인조 4) 9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눈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인조실록』인조 4년 11월 23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4년 9월 18일, 「윤전묘지명」]

그리고 얼마 후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미쳐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이에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윤전은 미쳐 호종하지 못하였다. 그때 호소사(號召使)김장생(金長生)이 충청도에서 근왕병을 모우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렀으므로, 충청도에서 군사를 모우는 일을 하다가 겨우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 뒤에 대간에서 윤전이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지 않았다고 탄핵하였다. 이때 인조가 소현세자를 전주(全州)로 보내 분조(分朝 : 세자가 이끄는 작은 조정)를 세우고 후방에서 전쟁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게 하였다. 윤전은 분조의 병조 정랑에 임명되어 세자를 따라서 전주에 내려갔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예빈시(禮賓寺) 정(正)이 되었다.[「윤전묘지명」] 1628년(인조 6) 2월 익산군수(益山郡守)가 되었는데, 이듬해인 1629년(인조 7) 11월 인조에게 전후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나라의 패단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진달하였으나 아무런 비답(批答)이 없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이산으로 돌아갔다.[『인조실록』인조 7년 11월 22일, 『승정원일기』인조 6년 2월 29일, 「윤전묘지명」]

1633년(인조 11) 종묘서(宗廟署)영(令)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1년 1월 26일] 그때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신득연(申得淵)이 후금(後金)의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가서 왕명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윤전이 그를 탄핵하였다. 그러자 상관인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강석기(姜碩期)가 그의 조카인 신득연의 편을 들어 윤빈을 비난하고 배척하였으므로, 마침내 관직에서 물러나서 고향 이성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윤전은 상의원(尙衣院) 정이 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으며, 1634년(인조 12) 11월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陞品)되어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635년(인조 13) 1월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승품되어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다시 예빈시 정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2년 윤8월 19일, 『승정원일기』인조 12년 11월 20일, 인조 13년 1월 16일, 인조 13년 1월 26일, 「윤전묘지명」] 이어 그해 8월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감시의 재차 시험을 보일 때에 과거 시험장을 늦게 설치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인조실록』인조 13년 8월 24일] 1636년(인조 14) 제용감(濟用監) 정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성균관 전첨(典籤)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옮겨 소현세자를 가르쳤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청(淸)나라태종(太宗) 홍타지가 10만 명의 팔기병(八旗兵)을 거느리고 서울로 쳐들어오자,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서 전쟁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인렬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였으므로, 내명부(內命婦)를 통솔하여 강화도로 비난을 갔으며,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이 이들을 호위하며 강화성(江華城)을 수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때 윤전은 소현세자의 부탁을 받고 세자빈 강씨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태종이 동생 예친왕(睿親王) 돌곤에게 3만 명의 팔기(八旗)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게 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예친왕이 삼판선(三板船)을 만들어 임진강을 건너 삽시간에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예친왕은 강화성에 있던 세자빈 강씨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에게 항복을 권유하였고, 결국 강화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때 윤전은 항복하지 않다가 세자빈 강씨 등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마침내 오랑캐 군사에게 사로잡혔으나, 그는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호령을 하면서 저항하다가 청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끝내 죽음을 당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8년 12월 19일, 『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2년 4월 17일] 1706년(숙종 32) ‘충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32년 2월 5일]

그가 죽은 다음에 그가 남긴 시문(詩文)과 친필 서간(書簡)을 모아서 『후촌집(後村集)』을 간행하였다.[『연암집(燕巖集)』 권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

성품과 일화

윤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진실하며 평온하고 조용하였다. 상식을 벗어나는 생각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이 조금도 없었으며, 또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한 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일찍이 남에게 굴복하거나 남의 의견을 따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정이나 잘못된 일을 보면, 자기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미워하였다. 관리가 되어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과감히 분발(憤發)하여 직언하고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서, 누구도 감히 굳건한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이 되어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하고, 외직으로 밀려나는 수가 많았다.[「윤전묘지명」]

한편 1636년(인조 14) 1월 예친왕이 군사를 이끌고 강화성의 남문으로 들이닥치니, 환관 김인(金仁) 등이 배를 구하여 원손(元孫)을 태우고 주문도(注文島)로 도망갔다. 이때 전송하는 사람들에게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배를 타시지요.”라고 외치자,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이시직(李時稷)이 윤전에게 “그대는 필선이니, 따라가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윤전은 “나는 빈궁(嬪宮)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제 변란에 죽지 않고, 비록 원손을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역시 구차스럽게 죽음을 면하는 것뿐이다.”라고 거절하며 따라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헌(忠憲)이며, 조익(趙瀷)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전해진다.[「윤전묘지명」]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와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 별집 권4 「사전전고(祀典典故)」] 처음에 충렬사를 세울 때 강화도의 선비들이 윤전의 죽음에 분명치 못한 점이 있다고 하여 충렬사에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1661년(현종 2) 4월 부제학유계(兪棨)가 상소하여 충렬사에 종향(從享)될 수 있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2년 4월 20일] 또 1707년(숙종 33) 9월 아들 윤원거(尹元擧) 및 조카 윤순거(尹舜擧)와 함께 이산에 있는 윤황의 서원에 추향(追享)되었다.[『숙종실록』숙종 33년 9월 22일]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윤완(尹晥)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은 윤원거이고, 1녀는 김훤(金楦)의 아내가 되었다. 측실 소생 아들은 윤팔거(尹八擧)이다.[「윤전묘지명」]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