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서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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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 ||
− | [[이천서씨]]는 [[서신일]],[[서필]],[[서희]], [[서눌]] [[서유걸]], [[서정]] [[서존]], [[서균]] [[서린(고려)|서린]], [[서원]] [[서공]] [[서성]] [[서순]],[[서숭조]],[[서릉]], [[서신계]],[[서린(고려1)|서린]],[[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윤(고려)|서윤]],[[서신(고려)|서신]],[[서호(고려)|서호]] 등 명재상을 배출하여 고려 최고 문벌귀족 집안이 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 [[서성(조선)|서성]] 후손이 3정승([[서종태]],[[서명균]],[[서지수]]),3대제학(서유신,[[서영보(조선)|서영보]],서기순)을 6대 | + | [[이천서씨]]는 [[서신일]],[[서필]],[[서희]], [[서눌]] [[서유걸]], [[서정]] [[서존]], [[서균]] [[서린(고려)|서린]], [[서원]] [[서공]] [[서성]] [[서순]],[[서숭조]],[[서릉]], [[서신계]],[[서린(고려1)|서린]],[[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윤(고려)|서윤]],[[서신(고려)|서신]],[[서호(고려)|서호]] 등 명재상을 배출하여 고려 최고 문벌귀족 집안이 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 [[서성(조선)|서성]] 후손이 3정승([[서종태]],[[서명균]],[[서지수]]),3대제학(서유신,[[서영보(조선)|서영보]],서기순)을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배출하여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徐閑)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에서 분파하여 [[서진(고려)|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달성 서씨]] 즉 고려 후기에 [[서진(고려)|서진]],[[서기준(고려)|서기준]],[[서영(고려)|서영]],[[서균형]] 등 명재상을 배출한 [[달성 서씨]] 집안이 진정한 [[달성 서씨]] 경상도 양반 가문이다. [[달성 서씨]] 시제는 한식일(4월5일)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30길 54-7.(지번)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329에서 거행된다. 21세기에 두 집안은 원래 한 뿌리여서 대구달성 [[서씨]]로 모임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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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韓國現代史)에서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동학지도자: 2명, 독립군 총재: 1명,항일의병장: 1명,독립운동가: 150명, 사진선구자: 1명, 대통령후보:1명, 정당대표: 2명, 국무총리급: 1명,국회부의장: 1명,국회의원: 9명, 그룹총수(회장): 3명, 장관:5명, 차관:3명, 종교지도자: 2명, 대학자:11명,시장: 1명, 군수: 2명, 세계적인 예술가: 2명, 연예인:6명, 운동선수:7명, 장군:6명, 역전의 용사:5명이다. | 한국 현대사(韓國現代史)에서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동학지도자: 2명, 독립군 총재: 1명,항일의병장: 1명,독립운동가: 150명, 사진선구자: 1명, 대통령후보:1명, 정당대표: 2명, 국무총리급: 1명,국회부의장: 1명,국회의원: 9명, 그룹총수(회장): 3명, 장관:5명, 차관:3명, 종교지도자: 2명, 대학자:11명,시장: 1명, 군수: 2명, 세계적인 예술가: 2명, 연예인:6명, 운동선수:7명, 장군:6명, 역전의 용사:5명이다. | ||
+ | == [[이천서씨]] 분파 == | ||
+ | * [[서린(고려1)|서린]](徐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 ||
+ | * [[서눌]](徐訥) 원숙공파(元肅公派) | ||
+ | * [[서념]](徐恬) 문한공파(文翰公派) | ||
+ | * [[서선(조선)|서선]](徐選) 공도공파(恭度公派) | ||
+ | * [[서윤]](徐玧) 시랑공파(侍郞公派) | ||
+ | * [[서보]](徐輔) 전서공파(典書公派) | ||
+ | * [[서광]](徐珖) 예빈공파(禮賓公派) | ||
+ | * [[서익]](徐翼) 부령공파(副令公派) | ||
+ | * [[서학종]](徐鶴踵) 참봉공파(參奉公派) | ||
+ | * [[서첨]](徐詹) 소윤공파(少尹公派) | ||
+ | * [[서릉]](徐稜) 절효공파(節孝公派) | ||
+ | * [[서유(고려3)|서유]](徐愈) 양경공파(良景公派) | ||
+ | * [[서척(조선)|서척]](徐陟) 창사공파(倉使公派) | ||
+ | * [[서진(고려2)|서진]](徐晉) 교리공파(校理公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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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서익명(고려)|서익명]](徐益明 첨절제사) | ********** 손자: [[서익명(고려)|서익명]](徐益明 첨절제사) | ||
*********** 증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 | *********** 증손자: [[서준호(고려)|서준호]](徐俊豪 창신교위충무위부사직) | ||
− | ************ 고손자: [[서희적(조선1)|서희적]]:(徐希積 | + | ************ 고손자: [[서희적(조선1)|서희적]]:(徐希積 관호당공파) |
*********** 증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 | *********** 증손자: [[서준영(고려1)|서준영]]:(徐俊英 충순위공파) | ||
********** 손자: [[서언명(고려)|서언명]](徐彦明) | ********** 손자: [[서언명(고려)|서언명]](徐彦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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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 대종회 [[http://icheonseo.com/]] | 이천서씨 대종회 [[http://icheonseo.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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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 == | ||
+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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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이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 ||
== [[이천서씨(利川徐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 | == [[이천서씨(利川徐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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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의 좌대는 시조를 의미하며 그 위로 뻗어나가는 산의 형상은 [[이천서씨]]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함 | 하단의 좌대는 시조를 의미하며 그 위로 뻗어나가는 산의 형상은 [[이천서씨]]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함 | ||
+ | ==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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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희테마파크]]([[서희역사관]]) == | ||
+ | 위치는 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130 | ||
+ | 도로명: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130 | ||
+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은 이천에서 태어나시어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태보내사령까지 오르셨던 문신이셨습니다. 특히 서기 993년 (성종12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당시, 단신으로 적장 소항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으로 내몰고, 위태롭던 나라를 구해내시고 끊이지 않는 북진개척 정신으로 우리 민족의 영토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8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 일대까지 넓힌 훌륭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이셨습니다. 이러한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의 위업을 되살려 그 업적을 확산, 보급하고 국가의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한 ‘이천시 [[서희]](徐熙)선양사업 추진위원회’를 통해 대대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서희역사관은 이 모든 것들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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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숭의전]](崇義殿) == | ||
+ | 조선 시대 고려 태조와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성종(成宗)•목종(穆宗)•현종(顯宗) 및 정몽주(鄭夢周) 등 15인의 공신을 제사지내도록 한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음. 태조 6년(1397)에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정종 원년(1399)에 고려 7왕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세종 5년(1423)과 문종 2년(1452)에 중건하였는데 문종 때에 숭의전(崇義殿)이란 전호(殿號)를 내려 고려 왕씨의 후손들로 부사(副使) 혹은 사(使)로 삼아 봄•가을로 제사하고 관리하도록 하였음. 제전(祭田)으로 숭의전전(崇義殿田) 12결이 지급되었고, 매년 1차례씩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하여금 봉심(奉審)토록 하는 한편, 승지(承旨) 등을 보내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음. 그 소속 관원으로는 종3품의 사, 종4품의 수(守), 종5품의 영(令), 종6품의 감(監), 종9품의 여릉 참봉(麗陵參奉) 1원(員)이 있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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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의전.<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을 주었다. 세종 7년이 되어 유사가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습니다.” 하므로, 이에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으로 향축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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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徐熙)•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 등을 배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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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崇義殿<在郡西五里 本朝太祖元年 命禮曹立廟於麻田縣 祭高麗太祖惠宗成宗顯宗文宗元宗忠烈王恭愍王 給祭田 至世宗七年 有司言 國家宗廟只祭五室 而前朝之廟乃祭八位 未合於禮 於是 只留太祖顯宗文宗元宗 以春秋二仲朔傳香祝致祭 文宗二年 求高麗後王循禮 俾主其祀 仍名其廟爲崇義殿 以循禮爲副使 以卜智謙洪儒申崇謙庾黔弼裴玄慶徐熙姜邯贊尹瓘金富軾金就礪趙冲金方慶安祐李芳實金得培鄭夢周配享>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13, 16장 앞쪽~뒤쪽, 경기 마전군 사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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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잿머리성황당]](城頭里城隍堂) == | ||
+ | 고려시대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성황당으로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산76에 위치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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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성종 때 내부시랑이었던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 잿머리 해안에서 배를 타려고 하자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든 [[서희]]의 꿈에 소복을 입은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여인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장모 안씨였는데 그들은 사당을 마련해 경순왕과 두 모녀의 영정을 두고 제사를 지내 한을 풀어주면 파도를 잠재워 항해를 돕겠다고 했다. 잠에서 깬 [[서희]]가 그들의 바람대로 관아의 수장을 불러 사당을 짓게 하고 화공을 불러 영정을 그리게 하여 며칠 후 모두 완성되자 거칠던 바다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그 후로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사당에 제를 올리며 순탄한 항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현재 세워져 있는 성황당은 1990년에 개축된 것이며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았던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5년부터 안산의 문화행사로 이곳에서 가을성황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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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주 상산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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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재지 : 산북면 후리 | ||
+ | □ 시 대 : 조선(현대 중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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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산재는 고려의 명재상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 901~965)과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942~998)를 모신 재실로, 후리 뒷골마을의 동쪽 외곽에 건립되어 있다. 단층의 양옥 건물로 지었으며 옥상에 별도의 구조물을 설치하여 “상산재”라 써 놓았다. 두 분의 묘소가 재실 앞쪽의 상두산(象頭山)에 자리 잡고 있어, 그 명칭을 상산재라 한 것이다. 재실의 앞쪽에는 최근에 건립한 [[서필]]과 [[서희]]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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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필선생묘]](徐弼先生墓)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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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 /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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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나와 3번 도로를 타고 여주, 이천쪽으로 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양평 쪽으로 간다. 렉스필드 CC 입구를 지나 여주군 산북면으로 가다 상품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라는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작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묘소에 들어가기 전 입구 터가 나온다. 이 입구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과 [[서필]]와 [[서희]] 부자의 신도비(神道碑), 사적비, 그리고 묘소를 관리하는 [[여주 상산재]](象山齊)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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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희]] 선생과 관련한 여러 유적에 ‘[[서희]] 장군’이라고 표기되어있고, [[서희]] 선생의 묘소도 ‘서희 장군의 묘’라 표기되어있으나 정확하게 [[서희]] 선생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으므로 ‘장군’이라는 표기는 잘못 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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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도비(神道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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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필]] 선생의 것과 [[서필]] 선생의 아들 [[서희]] 선생의 것 2개가 서 있다. 정면에서 보자면 왼편의 것이 [[서필]] 선생, 오른편이 [[서희]] 선생의 것이다. 신도비의 하단부에는 거북상이 있고, 그 위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정면에는 고려시대에 두 선생들이 지냈던 벼슬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다. 옆면에는 두 선생과 관련된 일화가 한글로 기록되어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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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희선생묘]](徐熙先生墓)== | ||
+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 / 경기기념물 제36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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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나와 3번 도로를 타고 여주, 이천쪽으로 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양평 쪽으로 간다. 렉스필드 CC 입구를 지나 여주군 산북면으로 가다 상품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라는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작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묘소에 들어가기 전 입구 터가 나온다. 이 입구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과 [[서희]]와 [[서필]] 부자의 신도비(神道碑), 사적비, 그리고 묘소를 관리하는 [[여주 상산재]](象山齊)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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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섭대천]](利涉大川) == | ||
+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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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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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 | ||
+ | 새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듯이 “빛으로” 찬란하게 예술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또는 자신만의 색채로 우리 이천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합니다. | ||
+ | 우리 이천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이듯이 이천의 혼불로 르네상스를 이천예총 각협회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 ||
+ | 이천예총은 8개협회(국악협회/무용협회/문인협회/미술협회/사진작가협회/음악협회/연극협회/연예예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
+ | 이천예총이 창의적 생각과 열린마음으로 예술인들의 끼와 혼을 발산시키고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바로 [[이섭대천종합예술제]]입니다. | ||
+ | |||
+ | == [[서희청소년문화센터]](徐熙靑少年文化center) == | ||
+ | 서희청소년문화센터는 청소년활동진흥법 11조(수련시설의 설치·운영 등)1항, 2조에 의거 이천시장이 설치한 기관으로 (재)이천시청소년재단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 ||
+ | |||
+ | ‘꿈꾸는 자유공간! 즐거운 청소년활동! 청소년이 주인인 문화센터’ 라는 비전 아래 청소년들의 문화,예술,체육활동을 비롯한 리더십함양,진로탐색활동 지원은 물론 자율적인 청소년활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
+ | 또한 이천시민들을 위한 공연 및 세미나 평생교육프로그램 운영으로 이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
== [[설봉서원]](雪峯書院) == | == [[설봉서원]](雪峯書院)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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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인 영덕재(永德齋)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다. | 강당인 영덕재(永德齋)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다. | ||
그밖에 내삼문과 창고·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 | 그밖에 내삼문과 창고·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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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주 사롱사]](四聾祠) == | ||
+ | 세조가 단종으로 부터 강제로 왕위를 양위받자, [[서호(고려1)|서호]](徐顥(灝). 남원부사. 정 3품. 전남도지사.차관.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정 2품. 장관)의 큰 아들인 [[서효리(조선)|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은 벼슬을 버리고,남평 본집에 돌아와 세 아우들과 사룡사를 구축하고 은퇴하여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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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우인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서효당]](徐孝堂. 익롱공(益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이 그 말을 듣고, 의리에 합당한 일이라고 여기고 역시 맏형을 따라 듣는 것을 피하는 귀머거리가 되니, 당시 마을 사람들이 사롱(四聾)이라 하였다. 또한 호도 귀머거리 롱(聾)자를 써서,예롱(豫聾),수롱(隨聾),점롱(漸聾),익롱(益聾)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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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거가십훈]](居家十訓) == | ||
+ | 「거가십훈」은 고려 고종 때 관료를 지냈던 [[서능]]이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 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만들어 가르쳤던 것이다. 모두 10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서 삼경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거가십훈」을 최초로 수록한 간본은 1578년 또는 직후에 간행된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가십훈」이다. | ||
==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 | ==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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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 | [[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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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주 귀산서원]](龜山書院)== | ||
+ |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서원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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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6년(정조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유(고려3)|서유]](徐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귀산서사(龜山書社)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48년에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지요.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198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
+ | 매년 2월 상정(上丁)과 8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 ||
== 전라도(광양) [[옥평사]](光陽 玉坪祠) == | == 전라도(광양) [[옥평사]](光陽 玉坪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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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공(文毅公) [[서호(고려)|서호]](徐浩 고려 충신.재상),[[서열]](徐悅 백운거사),[[서천일]](徐千鎰 암연처사) 등이 있다. | 문의공(文毅公) [[서호(고려)|서호]](徐浩 고려 충신.재상),[[서열]](徐悅 백운거사),[[서천일]](徐千鎰 암연처사) 등이 있다. | ||
− | == [[ | + | == [[충현서원]](忠賢書院) == |
+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청도 최초로 세워진 사액 서원. | ||
+ | 공주시청에서 대전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8㎞ 달리면 공암이 나온다. 대략 27분여의 시간이 소요되며, 충현서원은 마을의 중앙에 있다. | ||
+ | |||
+ | == [[충현서원유적]](忠賢書院遺跡) == | ||
+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조선시대 학자 [[서기]](徐起)가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시도기념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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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충현서원 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 | ||
+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에 있는 서원 사적비. | ||
+ | [[충현서원 사적비]]는 [[충현서원]](일명 공암서원) 안에 있는 서원 사적비로, 1712년(숙종 38) 연천의 임장서원에서 주자의 화상을 모사해와 신판 뒤에 봉안한 과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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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공주 충현서원 문화제]] == | ||
+ | 충현문화제 등은 공주시 반포면 공암 옛 장터길 충현서원특설무대 등 일원에서 열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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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화순 성산사]] == | ||
+ | 1579년경 [[이천서씨]] [[서의립]](徐義立1547~1631)이 화순현 소곡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한 고촌이다. | ||
+ | |||
+ | 1907년 건립했던 강당 충의당(忠義堂)과 독특한 형태의 사당 성산사(星山祠)가 외삼문, 충의당 뒤로하고 자리하고 있다. 핑게 없는 무덤 없듯이 사연없는 목조물은 없다. | ||
+ | |||
+ | 이곳에는 고려말 절인이었던 여와(麗窩) [[서견]](徐甄)과 송담(松潭) [[서강(조선)|서강]](徐岡)을 향사하고 있다. 규모는 정 3칸, 측1칸, 맞배, T자형으로 구성됐다. 충의사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다,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내부에는 대청형으로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 | ||
+ | |||
+ | == [[섬계서원]](剡溪書院) == | ||
+ |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에 있는 조선 [[서즐]](徐騭) 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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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 | ||
+ |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조선후기 강감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내용충현서원은 원래 1658년에 강감찬(姜邯贊), [[서견]](徐堅), 이원익(李元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고려의 강감찬이 주향되어있고, [[서견]], 이원익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사(三賢祠)라 불리었는데, 1676년에 충현서원(忠賢書院)고 사액이 내려지고 예조좌랑이던 박징(朴徵)이 치제하였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원래 창건된 곳이 금천현 한천동인데 그 지명을 따서 한천사(寒泉祠)라 하기도 하였다. 이원익의 영당(影堂)인 관감당이 1694년에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다. 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원 충현서원지가 현 위치가 아님이 밝혀져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 ||
+ | |||
+ | == [[김해성전투]](金海城戰鬪) == | ||
+ |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에 [[서예원]](徐禮元) 등이 김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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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차 진주전투]] == | ||
+ |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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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 == | ||
+ |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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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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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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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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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육절려]](六節閭) == | ||
+ | 강원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 산11에 있는 정려각.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 1817년(순조 17),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서예원]](徐禮元)과 그의 처, 아들, 며느리, 사위, 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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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진주성 비가- 조열태저자]] == | ||
+ | 1951년 가을, 밀양성 축조 공사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진주성 2차전 성주 [[서예원]](46세)과 밀양 평촌 마을의 최억술(41세)이다. 전반부 축성과 개전전야를 통해 그 당시 민초들이 전쟁준비로 해서 겪었던 고통이 그려진다. 1952년(임진년)에 전쟁이 터지는 것은 밀양 장날 최억술이 봉화 신호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억술이 장에 갔다가 봉화를 본 직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피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때 김해성에 있던 [[서예원]] 역시 봉화를 보고서는 즉각 교전태세에 들어가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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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접]] == | ||
+ | 동학의 분파 중 하나 | ||
+ | [[서장옥]]이 이끄는 동학으로 종교적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했던 북접과 달리 정치적 개혁을 추구했던 조직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인 전단계였던 1893년 3월 금구군 원평 집회([[금구취당]])는 남접파의 집회로 [[서장옥]]과 전봉준이 주도하였다. [[서장옥]]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으로 남접파의 거두이며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도하였다. 북접이란 용어가 남접에 대응하여 나왔을 정도였다. | ||
+ | |||
+ | ==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 ||
+ |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 ||
− | + | == [[삼례집회]](參禮集會) == | |
− | + |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 | |
− | == | + | == [[금구집회]](金溝集會) == |
− | + |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북도 금구에서 개최한 집회. | |
− | + | == [[동학농민운동]] == | |
+ | 1894년([[조선 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 ||
− | + |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 | |||
−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 | + | == [[1차 동학농민운동]] == |
+ | 1894년([[조선 고종|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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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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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차 동학농민운동]] == | ||
+ | 1894년([[조선 고종|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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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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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 == | ||
+ | 매년 양력 5월 개최되는 행사로서 조선시대 봉건제도의 학정에 대한 순수한 농민의 개혁혁명운동의 발상지로서 근대화를 앞당겼고 민족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의미있는 행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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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수(國手) -김성동 역작]] == | ||
+ | 한국문학의 살아 있는 거장, 김성동 작가의 장편소설 『國手』가 솔출판사에서 전 6권으로 출간되었다. 1991년 11월 1일 [문화일보]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27년 만에 완간한 『國手』는 오랜 시간 김성동 작가의 집념과 혼으로 완결시킨 작품으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를 잇는 대서사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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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흥 죽산재]](高興 竹山齋) == | ||
+ | [[고흥 죽산재]]는 서재 겸 재실로 활용되었고, 기단이나 초석을 잘 다듬어 품격을 높인 근대기(1933년) 의 목조건축물이다. 건축적으로 부재의 기법이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민화풍의 해학적인 느낌과 단청은 불교적인 요소와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을 표현하는 등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사례이다. 특히 이 건물은 죽파 [[서덕봉]](字 [[서화일]], 1860~1933)이 서재로 쓰고자 지었으나 준공 후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월파 [[서민호](1903~1974)선생이 부친의 제실과 서재로 썼다. [[서화일]]은 지주로 사회사업과 복지, 교육 등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아들인 [[서민호]]는 조선어학회사건과 항일독립운동을 한 근대 역사인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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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산재 건립연대는 1933년이다. 2013년 보수정비 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송병섭 찬)에 따르면 1933년 4월에 상량했음을 알 수 있고, 10월에 [[서화일]]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실과 서재로 활용 된 것을 알 수 있다. [[고흥 죽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ㄷ’자형 구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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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 | ||
+ |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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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민중당]](民衆黨) == | ||
+ | 1965년에 창당되었던 정당.연원 및 변천1963년 단일야당의 형성에 실패한 이래로 야권은 계속 통합노력을 기울인 끝에 1965년 5월 3일 민정·민주 양당이 통합선언대회에서 이 당의 창당을 선언하고, 같은 해 6월 14일 함당 전당대회를 통해 창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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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종교]](大倧敎) == | ||
+ |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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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 | ||
+ |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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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광단]](重光團) == | ||
+ |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 ||
+ |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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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 | ||
+ |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 ||
+ |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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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 ||
+ |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 ||
+ |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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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 ||
+ |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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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산리대첩]] == | ||
+ |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 ||
+ | |||
+ | ==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 | ||
+ |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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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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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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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 | ||
+ |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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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 | ||
+ |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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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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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 | ||
+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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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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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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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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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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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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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회삼경]](會三經) == | ||
+ |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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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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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 ||
+ | |||
+ | ==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 | ||
+ |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 ||
+ | |||
+ |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 ||
+ | |||
+ | == [[서오전]](鼠獒傳) == | ||
+ |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 | ||
+ | |||
+ |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 | ||
+ | |||
+ |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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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매학선생유고]](梅壑先生遺稿) == | ||
+ | 2권 1책(영본). 목활자본. 원래 본집 15권과 부록으로 되어 있었으나, 산질되어 현재는 권15 「존문록(尊聞錄)」과 부록만이 전한다. 자세한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권두에 1916년에 쓴 송인학(宋寅學)ㆍ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1729년(영조 5) 나이빈(羅以彬)이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안종학(安鍾鶴)이 쓴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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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차에 의하면 권1∼4에 시, 권5에 소(疏), 권6∼8에 서(書), 권9ㆍ10에 별지(別紙), 권11에 잡저, 권12에 휴암선생입사실기(休庵先生立祠實記), 권13에 불립당사우연원후(不立黨師友淵源後)ㆍ잠(箴)ㆍ명(銘)ㆍ송(頌)ㆍ제문ㆍ축문, 권14에 상량문ㆍ행장ㆍ유사, 권15에 존문록과 부록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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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문록」은 제자가 스승 안방준에게서 들은 학문 강론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에는 조상우(趙相愚)가 쓴 연보와 종사록(從師錄)ㆍ동유록(同遊錄)과 윤증(尹拯)이 쓴 유사,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장, 윤상익(尹相翊)이 쓴 추장(追狀), 유지빈(柳之彬) 등이 지은 제문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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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대의 석학인 윤증(尹拯),유필원(柳必源) 등과 교류 하였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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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은집]](鬧隱集) 가운데 저자에 대한 부록을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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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용강사]](龍岡祠) == | ||
+ | [[용강사]](龍岡祠)는 용구(龍邱) [[서봉령]](徐鳳翎)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서봉령]]의 호를 따서 [[용구사]](龍邱祠)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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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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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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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 ||
+ |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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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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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 | ||
+ |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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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 |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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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 | ||
+ |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 ||
+ |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 ||
+ | 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 ||
+ |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 ||
+ |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 ||
+ |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 ||
+ |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 ||
+ |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 ||
+ |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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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곡창]](鹄蒼) == | ||
+ | 곡창(鹄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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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초 개이름. | ||
+ |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 ||
+ |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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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泰山(태산)=[[서산]](徐山) == | ||
+ |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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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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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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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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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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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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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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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월병]](月餠) == | ||
+ |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 ||
+ |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 ||
+ |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 ||
+ | 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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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 ||
+ |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 ||
+ |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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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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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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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 ||
+ |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 ||
+ | |||
+ |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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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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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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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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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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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토루]](土樓) == | ||
+ |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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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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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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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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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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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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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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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도경]](高麗圖經) == | ||
+ |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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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 ||
+ | 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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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군산군도]] == | ||
+ |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 ||
+ | 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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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 ||
+ | 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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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 ||
+ |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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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 ||
+ |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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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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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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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 ||
+ |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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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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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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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불과차]](徐不過此) == | ||
+ | |||
+ |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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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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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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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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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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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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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 | ||
+ |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 ||
+ |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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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 ||
+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 ||
+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 | ==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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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서씨]] | * [[멕시코서씨]] | ||
* [[불가리아서씨]] | * [[불가리아서씨]] | ||
+ | * [[헝가리서씨]] | ||
* [[중앙아시아서씨]] | * [[중앙아시아서씨]] | ||
* [[카자흐스탄서씨]] | * [[카자흐스탄서씨]] |
2024년 11월 5일 (화) 21:07 기준 최신판
이천서씨(利川 徐氏)
목차
- 1 관향
- 2 시조
- 3 주요 집성촌
- 4 주요 인물
- 5 인구(2000년)
- 6 서씨(徐氏) 분파
- 7 이천서씨 분파
- 8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 9 기자조선의 후손설
- 10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 11 백제 부여씨의 분파
- 12 부여 부여씨의 인물
- 13 백제 부여씨의 인물
- 14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 15 역대 서국(徐國) 국왕
- 16 부여왕 계보
- 17 백제왕 계보
- 18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 19 서씨 분파(徐氏分派)
- 20 본관의 유래
- 21 본관 연혁
- 22 분파(分派)
- 23 시조
- 24 직계
- 25 가족
- 26 가족 관계
- 27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 28 인물
- 29 여수기
- 30 부여씨 관련
- 31 이천 서씨(利川 徐氏) 가볼만한 곳
- 32 중국
- 33 서씨 분파
- 34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
- 35 이천서씨(利川徐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 36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 37 서희테마파크(서희역사관)
- 38 숭의전(崇義殿)
- 39 잿머리성황당(城頭里城隍堂)
- 40 여주 상산재
- 41 서필선생묘(徐弼先生墓)
- 42 서희선생묘(徐熙先生墓)
- 43 이섭대천(利涉大川)
- 44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 45 서희청소년문화센터(徐熙靑少年文化center)
- 46 설봉서원(雪峯書院)
- 47 전라도(나주) 철천사(哲川祠)
- 48 나주 사롱사(四聾祠)
- 49 거가십훈(居家十訓)
- 50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 51 장성 서능 정려비 (長城 徐稜 旌閭碑)
- 52 전라도(장성) 용전사(龍田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 53 재각 용전재(龍田齋)
- 54 모암서원(慕巖書院)
- 55 화남사(華南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 56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 57 경주 귀산서원(龜山書院)
- 58 전라도(광양) 옥평사(光陽 玉坪祠)
- 59 충현서원(忠賢書院)
- 60 충현서원유적(忠賢書院遺跡)
- 61 충현서원 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 62 공주 충현서원 문화제
- 63 화순 성산사
- 64 섬계서원(剡溪書院)
- 65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 66 김해성전투(金海城戰鬪)
- 67 2차 진주전투
- 68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
- 69 육절려(六節閭)
- 70 진주성 비가- 조열태저자
- 71 남접
- 7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73 삼례집회(參禮集會)
- 74 금구집회(金溝集會)
- 75 동학농민운동
- 76 1차 동학농민운동
- 77 2차 동학농민운동
- 78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
- 79 국수(國手) -김성동 역작
- 80 고흥 죽산재(高興 竹山齋)
- 81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 82 민중당(民衆黨)
- 83 대종교(大倧敎)
- 84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 85 중광단(重光團)
- 86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 87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88 청산리대첩
- 89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 90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91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 92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 93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 94 회삼경(會三經)
- 95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 96 서오전(鼠獒傳)
- 97 매학선생유고(梅壑先生遺稿)
- 98 용강사(龍岡祠)
- 99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100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101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 102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 103 황룡(黃龍)
- 104 곡창(鹄蒼)
- 105 泰山(태산)=서산(徐山)
- 106 월병(月餠)
- 107 토루(土樓)
- 108 고려도경(高麗圖經)
- 109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110 고군산군도
- 111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112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113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114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115 서귀포(西歸浦)
- 116 서불과차(徐不過此)
- 117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118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 119 밴드 가입방법[[66]]
- 120 카톡방 가입방법[[67]] 클릭후 가입 완료 부탁드립니다
- 121 같이 보기
관향
경기도 이천
시조
서신일(徐神逸)
주요 집성촌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서군리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전라남도 무안군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주요 인물
서목, 서필, 서희,서봉,서눌,서유걸,서유위,서주행,서준방,서준영,원목왕후,서한,서석,서추,서약진,서정,서존,서균,서숭조,서공,서순,서성,서안정,서언,서웅,서익,서린,서청습,서진부,서균한,서효리,서찬,서희팔,서춘,서릉,서적,서박,서직,서준,원묘국사 요세,서윤현,서념,서첨,서영계,서중계,서원계,서돈경,서민경,서원경,서신계,야사불화,서윤,서충,서성윤,서희찬,서후상,서맹원,서온,서인,서욱,서의,서정희,서인한,서홍찬,서인조,서인한,서문한,서천량,서수,서구방,서효손,서진,서기준,서영,서중보,서보,서희준,서광준,서식,서신,서견,서원(고려1),서운,서인비,서원기,서치감,서문보,서유(고려1),서진(고려1),서선(조선), 서호(조선),서효리(조선),서효주,서효환,서효당,서즐,서강(조선),서경생,서기,서림,서윤련,서지(조선1),서우(조선1),서연(조선),서경충,서인원(조선1),서예원,서경춘,서득천,서사원,서사적,서홍도,서응두,서응시,서대근,서경붕,서우신,서희신,서춘무,서일남,서진걸,서승춘,서련,서봉령,서달증,서숭로,서문보,서국장,서국빈,서국정,서한중,서경창,서흔남,서태금,서열,서천일,축원,치익,자흔,서인주,서병학,서봉관,서일,서상용,서두수,서승태,서기환,서민호,서왈보,서종채,서상렬,서광조,서태석,서성우,서진수,서성달,서성길,서우순,서상록,서정범,서종식(현대),서정수(현대),서연식(현대),서희환,서남표,서향순,서남동,서경수(학자),서석조,서성환,서준산(회장),서홍송(회장),서경보(스님),서재응,서영택,서영훈,서용희,서기호,서향희,서용택,서기원,서인석,서혜정,서봉연,서준호,서윤복,서장훈,서인영,서현,서희경,서규용,서남수,서생현,서진규,서정원,서현진,서지혜,서형정,서정민,서상섭,서한샘,서갑수,서종석,서태선,서정선,서혜숙,서만술,서송숙,서수민,서영배(회장),서경배(회장),서영필,서준혁(대명),서혜경,서관모,서교일,서거석,서재홍,서영수,서강수,서유석,서원석,서한옥,서재석,서의열,서영환,서민환,서재관,서혜석,서진환,서경환,서재원,서종화,서균렬,서활,서순팔,서경원,토시가와,대니서,서진형,서병길,서병인,서정욱,서철,서윤석,서관희,서동명,서윤제,서한규,서은광, 서재응, 서건창, 서주현, 서희승, 서재경,서정희, 서갑숙, 서미경, 서정민, 서삼석, 서인석, 서혜경, 서효원,서효명, 서효림, 서지석, 서수남, 서민정, 서영희, 서영은, 서태화, 서영은, 서태화, 서지영, 서우림, 서신애
인구(2000년)
172,072명 (45위)
서씨(徐氏) 분파
이천서씨(利川 徐氏)는 서씨 중 대종 종가이며, 대구 서씨,달성 서씨,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장성 서씨,전주서씨,부여 서씨 등은 이천서씨의 별파이다. 서씨(徐氏)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 이다.
통일신라시대 아간대부를 지내시고 이천(利川)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천서씨는 서신일,서필,서희, 서눌 서유걸, 서정 서존, 서균 서린, 서원 서공 서성 서순,서숭조,서릉, 서신계,서린,서원경,서충,서윤,서신,서호 등 명재상을 배출하여 고려 최고 문벌귀족 집안이 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 서성 후손이 3정승(서종태,서명균,서지수),3대제학(서유신,서영보,서기순)을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배출하여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閑)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에서 분파하여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달성 서씨 즉 고려 후기에 서진,서기준,서영,서균형 등 명재상을 배출한 달성 서씨 집안이 진정한 달성 서씨 경상도 양반 가문이다. 달성 서씨 시제는 한식일(4월5일)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30길 54-7.(지번)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329에서 거행된다. 21세기에 두 집안은 원래 한 뿌리여서 대구달성 서씨로 모임을 갖고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
서(徐)씨는 이천서씨를 비롯하여 달성(達城·대구 포함),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당성(唐城), 평당(平當), 복흥(福興), 의령(宜寧), 남양(南陽), 황산(黃山), 염주(鹽州), 군위(軍威) 등 20본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53본, 일제강점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176본으로 기록되어 있다.서씨는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고 있는 이천서씨가 종가라고 할 수 있다.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 시조이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신통(徐神通) 아들 서목(徐穆)(이천백.문하시중)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이섭대천(利涉大川)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이처럼 이천서씨는 고려 황제국 건국에 협력해 내의령 서필(徐弼 종1품) 평장사 서봉(徐逢 정2품), 내사령 서희(徐熙 종1품), 문하시중 서눌(徐訥 종1품) 좌복야 서유걸(徐惟傑 정2품) 장야서령 서유위(徐惟偉) 달성군 서주행(徐周行),원목왕후,형부상서 서준방(徐俊邦) 연성군 서준영(徐俊英 정3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서수 (徐琇 종1품) 판삼사사 서정(徐靖 종1품) 병부상서 태원군(太源君) 서존(徐存 정3품) 군기소윤 서한(徐閈),좌복야 서균(徐均 정2품) 판대부사 서린(徐嶙 종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 좌복야 서진부(徐振扶 정2품),평장사 서성(徐成 정2품) 동지추밀사 서순(徐淳(諄) 종2품) 판삼사사 서공(徐恭 종1품) 7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고려 최고의 명문 귀족가문이 됐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 후손설
(부여(扶餘=餘=徐) (토템은 녹(鹿.사슴).성수(聖數) 9)이 같다.
단군조선(檀君朝鮮)에는 여수기(餘守己=余守己=예맥족(濊貊族)장 "濊王之印"),
서우여(徐于餘) = (번한조선(奇子朝鮮=番韓朝鮮).번한서인(番韓徐印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 왕족(賢人) 기자(箕子=胥餘)와 다르다)
서구왕(駒王=徐駒王)
서언왕(徐偃王 =(동이족(東夷族) 후손(한국사람).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시조. 중화서씨(中華徐氏) 시조-서복 徐福(徐市)이 후손)
부여(扶餘)에는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서울(여울)(餘蔚=徐蔚),서암(여암)(徐巖=餘巖) 서숭(여숭(餘崇=徐崇),
서울(여울)(餘鬱=徐鬱),서초(여초)(徐超=餘超) 서치(여치(徐熾=餘熾)
고구려(高句麗)에 여씨(餘氏=徐氏)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9대 고국천왕 10대 산상왕
백제(百濟)는 (부여(扶餘=餘=徐) 1대 온조왕 - 8대 고이왕 9대 책계왕 -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1대 온조왕(徐溫祚)부터-31대 의자왕(徐義慈까지.여씨(서씨)(餘氏=徐氏)이고
아들 서융(여융=부여융)(扶餘隆=餘隆=徐隆)
여계백(서계백=부여계백 扶餘階伯 餘階伯=徐階伯)
서풍(여풍=부여풍)(徐豊=餘豊=扶餘豊)서태(여태=부여태)(徐泰=餘泰=扶餘泰)
서문사(여문사=부여문사)(徐文思=餘文思=扶餘文思)
서효(여효=부여효)(徐孝=餘孝=扶餘孝)
서태비(여태비=부여태비)(徐太妃=餘太妃=扶餘太妃)
서연(여연=부여연)(徐演=餘演=扶餘連)
서용(여용=부여용)(徐勇=餘勇=扶餘勇)
서충승(여충승=부여충승)(徐忠勝=餘忠勝=扶餘忠勝)
흑치상지(부여상지=여상지=서상지)(黑齒常之=徐常之=扶餘常之)
서덕장(여덕장=부여덕장)(徐德璋=餘德璋=扶餘德璋)
서경(여경=부여경)(徐慶=餘慶=扶餘慶)
도모왕(서도모)(徐都慕王=都慕王) 덕좌왕(서덕좌)(德佐王=徐德佐王)
백제조신(百濟朝臣) 관야조신(菅野朝臣) 불파련(不破連)
서선광(부여선광=여선광) (扶餘禪廣=餘禪廣=徐禪廣 일본(日本) 백제왕씨(百濟王氏)시조)
서순타(여순타)(徐淳陀=餘淳陀)
(무령왕 태자; 일본(日本) 대화사(大和史) 시조-일본(日本)왕실(王室) 외가(外家)=
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
서조신(여조신=화조신)(徐朝臣=和朝臣) 百濟朝臣 百濟公 都慕王 百濟王 百濟技
서자진(여자진)(徐自進=餘自進 - 일본 후손: 다카노미야코(高野造)시조)
서복신(여복신=부여복신)(徐福信=餘福信=扶餘福信)
신라(新羅)때 서두라(徐豆羅=(수유족(須臾族=부여(扶餘)우두머리 - 성수는 9) )가
신라 개국 공신 아성(예 이천(利川 지명) 대장군(차관)이 되고,
서간(徐趕) 공이 통일신라 선덕여왕 때 태사(정 1품.국무총리) 가 되었다.
서선행(徐善行) 공이 통일신라 판관(判官 부총리),
서준평(徐準平) 공이 통일신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장관)를 지내셨으나
서씨(徐氏)를 중건한 통일신라 아간대부(정2품 부총리) 서신일(徐神逸) 선생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서씨(徐氏) 계보
1세 이천서씨(利川徐氏) 시조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2세 서목(徐穆) (후삼국 이천 호족(利川 豪族).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국무총리)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염(徐廉)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서영(徐英)
서봉(徐逢) (광평시랑 평장사(廣評侍郞 平章事) .정 2품.부총리)
서후(徐厚) (대장군(大將軍) .종 3품. 차관.남양군)
4세 서눌(徐訥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
서유위(徐維偉 장야서령(掌冶署令). 정 3품. 장관)
서주행(徐周行 달성군(達城君). 장관)
서숭(徐崧) (사재승(司宰丞).강조의 변.차관)
서긍(徐肯) (중낭장 (中郞將)
5세 서수(徐琇 문하시중(門下侍中) 봉 희양대군. 종 1품. 국무총리)
원목황후 서씨 (徐氏) 현종의 비)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판삼사사(判三司事).종 1품.국무총리)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연산서씨,부여서씨(扶餘),장성서씨,남양(南陽)서씨(당성唐城)서씨 중조)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서석(徐碩)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 최충 12학도)
서웅(徐雄) (위위경지 태사국사(衛尉卿知太使局事).정3품.장관)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서정(徐程) (성운위관 소감(少監). 종 4품)
서한(徐閈) (군기소윤(軍器少尹).종 4품.판도판서(判圖判書). 정3품.장관. 대구달성(大丘)서씨파 중조)
서대창(徐大昌) (충신)
서필중(徐必重) (충신)
6세 서장기(徐長己 병부시랑(兵部侍郞).종 3품.차관)
서균(徐鈞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서단(徐亶) (함문통사 사인.종 5품.국장)
서경의(徐聲宜) (교위주부(衛尉注薄) .차관보)
서화흡(徐化洽)(장작소감 (將作少監). 정 3품.장관)
서조(徐助) (요나라 축하사절). 장관)
서추(徐諏) (예빈 소경((禮賓少卿). 차관)
서선(徐禪) (박사(博士). 차관)
서방(徐昉) (진봉사(進奉使). 장관)
서염(徐琰) (어사대(御史臺) 어사중승(御史中丞). 정 3품.장관)
서안정(徐安貞) 문림랑수궁서령겸직사관
(文林郞守宮署令兼直史館). 장관-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 참여)
서준방(徐俊邦)(형부상서(刑部尙書).정 3품.장관-평당(平當)서씨파 중조)
서신(徐愼)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부판사(吏部 判事)
.종 1품. 국무총리)
7세 서진부(徐振扶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
서영관(穎觀)은 현화사(玄化寺) □자대사(□紫大師)
서공(徐恭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평장사(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 국무총리)
서순(徐淳(徐諄) □□□동정(同正).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 종 2품. 부총리)
서성(徐成 내시 수서랑동정(內侍 授書郞同正).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2품.부총리)
서염(徐廉 춘방공자(春坊公子). 사복부령(司僕部令). 종2품.부총리)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서보(徐甫)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정 2품.부총리)
서약진(徐若珍 봉성군(鳳城君).장관)
서무질(徐無疾) 밀직사(密直司使. 종 2품. 부총리)
8세 서희적(徐希積. 내의시랑(內議侍郞).종 3품. 차관)
서인(徐諲 교수(敎授).승지(承旨).정3품.장관.대학자)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서저(徐氐 병부낭중(兵部郎中). 종 3품. 차관)
서평(徐坪 판도좌랑(版圖佐郎).차관)
서광(徐珖 예빈소경(禮賓少卿).차관)
서연(徐延)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종 3품.차관)
서희량(徐希亮((병부상서(兵部尙書).정 3품.장관)
서숭조(徐崇祖) (중추원사(中樞院事).종 2품.부총리)
서진(徐晉) (판도판서(版圖判書).정 3품.장관.대구달성서씨파)
9세 서영보(徐永甫.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부제학(副提學).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서의(徐義 감찰어사(監察御使).정 3품.장관)
수호당서씨(壽壺堂徐氏). 서인(徐諲 교수(敎授).승지(承旨)의 자녀.
수호당서씨공양아미타9존도계(壽壺堂徐氏供養阿彌陀九尊圖系)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서언(徐彦) (혁명가(革命家))
서준명(徐俊明) 좌영낭장(左營郞將)
서유정(徐惟挺) 교위(校尉)
서흥조(徐興祖)
서령(徐領) (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
서돈경(徐敦敬) (상장군(上將軍).정 3품. 장관.무신시대 재상)
서유(徐裕) (상장군(上將軍).정 3품.장관.무신시대 재상)
서균한(徐均漢) (상장군(上將軍).정 3품.장관.무신시대 재상)
서찬(徐贊) (낭장(郞將)
서선 (徐瑄) (중정대부(中正大夫).종 3품.차관)
서혼(徐琿) (만호(萬戶).종 4품.차관보)
서자민(徐子敏)
서칭(徐偁) (장군(將軍)
서정(徐挺) (장군 將軍)
서필중(徐必中)(호장 戶長)
서무(徐茂 문림랑위위시주부동정(文林郞衛尉寺主簿同正)
서광순(徐光純) (장군將軍)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정 3품. 장관)
서문한 (徐文漢) (시중랑 侍中郞)
서문찬(徐文贊)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서희찬(徐希贊) (이부시랑 평장사((吏部侍郞平章事). 정2품.부총리)
서전금(徐田金( (호장戶長)
서순인(徐純仁) (호장 戶長)
서효관(徐孝寬) (항적(降賊)
서정(徐靖 낭장(郞將)
서지(徐趾)
서황(徐晃) (소감(少監 ).정 3품.장관)
서기준(徐奇俊)(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정 2품.부총리)
10세 서선(徐瑄 .중정대부(中正大夫). 종 3품. 차관)
서춘(徐椿, 정순대부(正順大夫). 판내부사사(判內府事).정 3품.장관
-부여(扶餘)서씨파 대종)
서릉(능)(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
서박(徐樸 부여(扶餘)서씨 봉례공파)
서적(徐迪) (판도판서(版圖判書).정 3품.장관급- 남양(南陽)서씨파)
서직(徐稷 연산(連山)서씨파)
서온(徐溫.합문사(閤門使).승지(承旨).정 3품.장관.송나라 아악 전수)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서복(徐福) (호장戶長)
서자번(徐自蕃) (호장戶長)
서중린(徐仲麟) 통직랑지서주사(通直郞知瑞州事).장관)
서영(徐穎)(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
서요세(徐了世) (천락사 대사-원묘국사(圓妙國師)
11세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서진(徐晉 사재감정(司宰監正).정3품. 장관)
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서희(徐曦) (대장군(大將軍).종3품.차관)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연산(連山)서씨파 시조)
서념(徐恬)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 2품.부총리. 문한공파)
서구방(徐九方) (수월관음도-일본 교토대 보관중. 고려 최고 화가)
서지만 (徐智滿) (내시(內侍). 관경16관변상도)
서오(徐敖) (낭장(郎將)
서윤공(徐允公) (별가(別駕))
서의 (徐議) (호조전서(戶曹典書).정 3품.장관)
서의(徐誼)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차관)
서간(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종 3품 .차관)
서복례(徐復禮) (생원(生員)
서시의(徐時義)(비서성소감(秘書省少監).정 3품.장관)
서성윤(徐成允)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종 2품.부총리)
서인한 (徐仁漢)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부총리)
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종 2품.부총리)
12세 서원계(徐元桂 군수(君守))
서중계(徐仲桂 검교사인(檢校舍人)
서신계(徐臣桂) (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종 2품.부총리)
서야사불화(徐埜思不花.서호(徐昊)) (어향사(御香使)
서응려(徐應呂)(상호군(上護軍).정 3품.장관급- 몽고 지배 시대)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
서충(徐忠 판밀직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
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 종 2품.부총리 (육군참모총장)
서원경(徐元敬) (문하시중(門下侍中).종 1품.국무총리)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몽고 지배 시대. 재상)
서천부(徐天富) (회덕현(懷德縣) 감무(監務) )
서양수(徐良守 내수(內竪) )
서천길(徐天吉)
서공기(徐公騏)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차관)
서규(徐規) (이성림 당인.혁명가(革命家))
서능준(徐能(陵)俊) (전공총랑(典工摠郞). 정 4품.차관보)
서중보(徐仲輔) (봉정대부(奉正大夫).정 4품.차관보)
고려의 충신. 두문동 72현(서견,서중보,서보,서광준)
서보(徐輔) (공조전서(工曹典書).정 3품.장관.전서공파)
서신(徐信) (목사.종 3품.차관.
문하시중(門下侍中).종 1품.국무총리.목사공파)
서언(徐彦) (기거사인(起居舍人). 종 5품.국장)
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判內侍府事).정 3품.장관)
서현(徐顯) (요동진무사(遼東鎭撫使) .장관)
서윤현(徐允顯)(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부총리.법명은 覺喜)
서숙(徐淑) (우승지(右承旨).정 3품. 장관)
서린(徐吝)
서관(徐寬) (사마(司馬)
서금광(徐金光) (장군(將軍)
서혼(徐混 우승지(右承旨).정 3품.장관)
서의(徐義)(호조전서(戶曹典書).정 3품.장관)
서영계(徐永桂) (밀직사사(密直司使). 종 2품.부총리)
13세 서의(徐誼 성균제주(成均祭酒).정 3품.장관)
서간 (徐諫 병부시랑(兵部侍郞) . 종 3품. 차관)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서원(徐遠 밀직사(密直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
서유(徐逾 비인현사(庇仁縣事) .청백리.비인공파 .시장)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정 3품. 장관. 고려충신)
서광준(徐光俊 사재감정(司宰監正).정 3품.충신)
14세 서후장(徐後長 군수(君守)
서후상(徐後祥 추밀원사(樞密院事 종 2품). 이부시랑 평장사(吏部侍郞 平章事). 정 2품. 부총리)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浩 정치도감(整治都監) 좌랑(佐郎) 차관. 공신.충신)
서맹원(徐孟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 이조참판. 정 3품. 전남도지사.차관
서견(徐甄)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서천량(徐天亮) (밀직사사(密直司使). 종 2품.부총리)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 효행으로 유명)
고려시대 이천서씨는 15대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여 최고 명문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이 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서씨(徐氏)는 국무총리급(종1품): 10명, 부총리급(정2품,종2품): 23명,장관급(정3품): 28명 ,차관급(종3품): 12명,차관보(정4품): 5명, 고려장군(상장군,대장군포함.정3품.종3품): 19명,고려명신: 60명, 고려공신: 24명,고려충신: 25명, 고려처사:14명, 고려국사: 1명, 고려대사: 2명,고려 호장: 5명, 고려 음악가: 1명, 고려 화가: 1명, 고려 대학자: 5명이다.
조선 태조 때 개국원종공신 사재감 서인비(徐仁庇 정3품),개국원종공신 사재령 서원기(徐元奇 정3품), 태종 때 익대좌명공신 예조판서 서유(徐愈 정2품), 사재감정 서진(徐晉 정3품), 남원부사 서호(徐顥(灝 정3품), 세종 때 우군도총체(右軍都摠制) 서선(徐選 종1품),목사 서경흥(徐敬興 정3품),사헌부 장령 서근(徐赾), 단종 때 암행어사 서호(徐皞), 사롱사 형제 (단종 충절) 종묘서령 서효리(徐孝理) 무공랑별제 서효주(徐孝宙) 예빈사정 서효환(徐孝寰) 전생서판관 서효당(徐孝堂),우승지 서혼(徐混 정3품),세조 때 예문관 직제학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 《손자주해(孫子註解)》를 편찬한 서강(徐崗 정2품), 예종 때 익대공신 서경생(徐敬生), 중종 때 반정(反正)에 참여 이조판서에 오른 서지(徐祉 정2품),충순위병절교위 서우(徐祐),장령 서산보(徐山甫),참봉 서학종(徐鶴踵),참봉 서연(徐演), 성균관 전적 서희려(徐希呂), 선조 때의 학자 서기(徐起),임진왜란 때 좌부장으로 함흥ㆍ홍원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서경충(徐敬忠),서득천(徐得天)과 서사원(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私財(사재)를 털어 武器(무기)와 식량을 구입하여 義兵(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고,호조참의 선무원종일등공신 서사적(徐思迪),의병장 서대근(徐大謹),서홍도(徐弘渡),서진걸(徐晋傑),서승춘(徐承春),서적(徐迪),서의(徐誼),서희복(徐希福),서희우(徐希祐),서희례(徐希禮),서영우(徐永佑),서사도(徐思道),서정원(徐廷原),서영상(徐永祥),서약(徐鑰),서응후(徐應厚),서덕숭(徐德崇),서천동(徐千童),서계철(徐繼哲),서인손(徐仁孫),서연후(徐延厚), 수군첨절제사 서덕룡(徐德龍),병조좌랑(兵曹佐郞) 서경춘(徐景春),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받은 서춘무(徐春武),서응두(徐應斗)는 의병장으로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나갔는데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뒤에 호조참판에 추증,조헌(趙憲)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戰鬪)에서 칠백의사((七魄義士)와 함께 순절(殉節)한 서응시(徐應時)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서정후(徐廷厚)와 서진문(徐振文)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선무원종 1등 공신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행차하였던 서경붕(徐慶鵬), 정묘호란 때 의병장 서일남(徐馹男), 병자호란 때 의병장 서국장(徐國章),서흔남(徐欣男),서언길(徐彦吉),이조좌랑 서국정(徐國楨),성균관 전적 서국빈(徐國濱), 공조참판 서국평(徐國平 종2품), 절제사 서국보(徐國寶 종2품), 제주판관 서련(徐憐),조선 학자 서경덕(徐敬德),서봉령(徐鳳翎),서달증(徐達曾),서의중(徐義中),서경창(徐慶昌),서영환(徐永煥),서한주(徐漢柱),서일원(徐一元),서걸(徐傑),서종하(徐宗夏),서자통(徐自通),서응문(徐應文),서억만(徐億萬),서문숙(徐文淑),서원지(徐元之),서태원(徐兌元),서복기(徐復基),서몽희(徐夢曦),서상덕(徐尙德),서상남(徐尙男),서우량(徐友諒),서응회(徐應會),서자적(徐自適),서태수(徐台壽),서한남(徐漢男),서천일(徐千鎰),서할(徐劼),서승우(徐承佑),서만조(徐萬組),서효원(徐孝源),서문숙(徐文淑),서석린(徐錫麟),서우흠(徐于欽),서상렬(徐相烈),서강수(徐江水), 위항시인 서병옥(徐秉玉),서병수(徐秉수),서의석(徐義錫), 조선 화가 서문보(徐文寶), 조선음악가 서창서(徐昌瑞), 조선 효자 서즐(徐騭),서채량(徐采亮),서병홍(徐柄泓),서준여(徐俊汝),서태금(徐太金),서영측(徐永側),서영팔(徐永八),서봉주(徐鳳周),서덕길(徐德吉),서만(徐萬),서재대(徐再大),서언유(徐彦儒),서윤옥(徐崙玉),조선 혁명가 서림(徐林) 서윤련(徐閏連) 서양갑(徐羊甲),병조참판 서숭로(徐崇老 종2품),공조참의 서봉록(徐奉祿 정3품),부총관 서보우(徐補禹 종2품),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서홍련(徐鴻連),도호부사 서확(徐臒 정3품),도호부사 서일명(徐一明 정3품),군자감정 서의건(徐義健 정3품),군자감정 서효행(徐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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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국무총리급(정1품): 0명, 부총리급(종1품): 2명,장관급(정2품): 12명 ,차관급(종2품): 50명,차관보(정3품 당상관): 165명, 조선 명신: 30명, 조선 공신: 10명,조선 충신: 15명, 조선 처사: 20명, 조선 화가: 1명, 조선 음악가: 1명, 조선 시인: 3명, 조선대사(고승):3명,조선 학자: 48명, 조선 의병장: 35명이다.
동학의 지도자 서장옥(徐璋玉),서병학(徐丙鶴), 청산리전투 승리 총재 서일(徐一), 일제강점기 의병장 서상국(徐相國), 독립운동가 서종채(徐鍾採),서태석(徐邰晳),서광조(徐光朝),서상렬(徐相烈),서왈보(徐曰甫),서승태(徐承台),서기환(徐基煥),서영환(徐永煥),서봉화(徐鳳化),서기창(徐基彰),서성모(徐成模),서병하(徐炳河),서병하(徐丙夏),서달수(徐達洙),서동일(徐東日),서윤제(徐允濟),서상용(徐相庸),서학이(徐學伊),서병철(徐丙轍),서상봉(徐相鳳),서의배(徐義培),서영석(徐永錫),서원준(徐元俊),서성학(徐成學),서필환(徐必桓),서성군(徐成君),서운선(徐云先),서영백(徐英伯),서춘만(徐春萬),서광도(徐光道),서여선(徐汝善),서상기(徐相基),서쇄용(徐鎖用),서정만(徐貞萬),서태식(徐泰植),서병두(徐丙斗),서몽조(徐夢祚),서상업(徐相業),서화일(徐化壹),서승렬(徐承烈),서성윤(徐成允),서진령徐鎭(水令), 서청산(徐靑山), 서초(徐超), 서병선(徐秉善),서순채(徐淳彩),서삼진(徐三辰),서장주(徐璋珠),서병순(徐秉舜),서병수(徐丙需),서상호(徐尙虎),서세충(徐世忠),서점수(徐點守),서정규(徐正奎),서장관(徐壯寬),서병림(徐丙林),서영해(徐嶺海),서진구(徐鎭九),서재익(徐在益),서대순(徐大順),서상경(徐相庚),서경식(徐璟植),서단파(徐檀坡),서상오(徐相午),서동익(徐東翼),서동화(徐東和),서상우(徐相祐),서정오(徐廷五),서영달(徐迎達),서봉원(徐鳳元),서정렬(徐正烈),서삼종(徐三鍾),서석근(徐石根),서정기(徐正基),서기옥(徐琦玉),서재수(徐在守),서경태(徐敬兌),서성국(徐成局),서호순(徐鎬淳),서봉운(徐奉雲),서재록(徐在祿),서동식(徐東植),서용석(徐龍錫),서재옥(徐在玉),서순옥(徐順玉),서성근(徐成根),서병규(徐丙珪),서재석(徐載錫),서인환(徐仁煥),서은구(徐殷九),서기예(徐基澧),서병돈(徐丙敦),서영백(徐英伯),서완득(徐完得),서상린(徐相燐),서대순(徐大順),서창석(徐倉錫),서옥봉(徐玉奉),서응삼(徐應三),서재만(徐在萬),서몽조(徐夢祚),서인국(徐寅國),서우범(徐禹?),서민석(徐岷晳),서벽환(徐壁煥),서원태(徐元泰),서석주(徐錫柱),서성칠(徐星七),서순봉(徐淳鳳),서영완(徐永琬),서광진(徐洸璡),서인필(徐仁弼),서정량(徐廷亮),서병선(徐炳善),서우석(徐禹錫),서상석(徐象錫),서홍구(徐洪勾),서용하(徐用河),서영석(徐永錫),서형묵(徐亨默),서광주(徐光周),서달제(徐達悌),서재영(徐在英),서복손(徐福孫),서진(徐震),서상원(徐相沅),서하원(徐河源),서순석(徐舜錫),서병수(徐丙需),서낙서(徐洛西),서금룡(徐今龍),서정후(徐廷侯),서유준(徐有俊),서창림(徐昌林),서기풍(徐基?),서성근(徐成根),서응만(徐應萬),서창무(徐昌務),서흥석(徐興錫),서두성(徐斗星),서재윤(徐載閏),서삼식(徐三植),서학종(徐學鍾),서재순(徐在順),서신영(徐信榮),서동수(徐東洙),서난수(徐蘭洙),서응삼(徐應三),서재호(徐在皓),사진선구자 서순삼 (徐淳三),육탄 10용사 소위 서부덕,목포무안군 최초 카톨릭신자 서권수(徐權洙),한양대 인문대학장 서정수(徐正洙),무안군 감사 서종식(徐鍾植),애국지사 서준식(徐俊植),KMTV설립자 서연식(徐連植), 국회부의장 서민호(徐珉濠), 국회의원 서성달,서한샘, 서재관,서혜석, 서경원,서상섭, 서기호, 이천그룹 회장 서상록(徐相錄), 태평양그룹 회장 서성환(徐成煥),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徐慶培),재현산업 회장 서유석, 성원제강 회장 서원석, 세진무역 회장 서한옥, 서안개발 회장 서의열, 성균관대총장 서성우, 복천학원설립자 서우순, 숭문중고교설립자 서기원, 봉선학원부천여상고교설립자 서성길, 고원진선중학교설립자 서덕구, 서울식품공업회장 서준산, 조해산업회장 서준호,대한이화학사장 서정구,한국기술투자회장 서갑수, 국무총리 서영훈 , 총무처장관 서석순, 건설부장관 서영택 ,과기부장관 서정욱 ,한국은행 총재 서진수, 교육부차관 서범석, 건설부차관 서종대,국가정보원기획실장 서동만, 용인시장 서정석,서울시정연구원장 서준호, 세계불교법왕 서경보, 전 조계종총무원원장 서의현,카이스트 총장 서남표, 조선대총장 서재홍,한글학자 서정범, 서정수, 불교학자 서경수, 핵학자 서균렬, 의학자 서병설, 서활,서순팔, 서한태, 신학자 서남동(徐南同), 서예가 서희환(徐喜煥),서태종 금감원 부원장,서근우 신용보증기금이사장, 서재경 서울신용보증재단이사장, 서기동 구례군수,서삼석 무안군수, 서종화 서울시의원, 피아니스트 서혜경, 발레리나 서희,가수 서현,서인영,배우 서인석, 서지혜,서현선 ,서희승, 서재경, 운동선수 서윤복, 서정원, 서향순,서재응,서장훈,서희경,서훈 국정원원장, 서윤택육군소장,서경석육군소장,서길원육군중장,서상국육군소장,서정열육군소장,서욱 국방부장관,서호 통일부차관,연평해전 중사 서후원,하사 서정우, 천안함 하사 서승원,하사 서대호,서해길 충남대교수, 서정일 경희대교수, 서봉연 서울대교수, 서연호 한양대교수, 서태영 부산대교수, 서두환에너지연구소물리실장,서두옥 제주대교수,서남규,서진헌 텍사스공대교수, 서광벽 공학박사, 서종범 경북대교육대학원장, 서인석 순천대교수, 서경림 제주대교수, 서광민 강원대교수,서정규 계명대교수, 서수지 계명대교수, 서원벽 의학박사, 서성인 한양대교수, 서성봉 경북대교수, 서기옥 의학박사, 서성훈 경희대교수, 서성무 중앙대교수, 서운택 대구대교수, 서익환 한양대교수, 서해호 원광대교수, 서정기 광주교대교수, 서원호 대전실업전문대교수, 서태상 동국대경주분교교수, 서봉호 항공대교수, 서재현 목포대교수, 서창호 공주대교수, 서주노 해군사관학교교수, 서영환 창원대교수, 서진환 성공회대 교수,서용택 인창중고교교장, 서한제 순천금당고등학교교장, 서병재 광양다압다사중학교교장, 서강희 전주남중학교교장, 서동훈 소설가, 서혜정 음악박사, 서영종 서예가, 서원규 내과의원장, 서홍준 소아과의원장, 서정열 신경외과의원장, 서용하 서용하의원장, 서정진 삼선의원원장, 서창용 자선의원원장, 서근호 동부시립병원안과과장, 서창선 성제의원장, 서재선 삼원의원장, 서강석 천혜의원장, 서정성 안과원장, 서민환 환경부 이사관,서경환 서울회생법원장, 서향희 변호사, 서성환 변호사, 서영수 대전지검검사,서병조 정보통신부정책관,서해엽 환경부사무관,서규식 코멕스카본사장,서병선 한동대교수,서원철 미국듀폰대교수,서찬식 건양대교수,서병기 배제대교수,서수한 대구대 교수,서순식 춘천교대교수,서영식 충남대교수,서원석 미국펜실베니아연구교수,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원장.행복한아이연구소장,서흔수 화이자제약,서병화미국일리노이대학교연구원, 인권운동가 서승, 서준식, 서경식 , 서윤기 서울시의원, 서주선 서화가, 서인석 시인, 서정윤 시인, 서정인 소설가, 서영은 소설가, 서용달 모모야마가쿠인대 교수,오케스트라 지휘자 서훈, 서희태 등 인물이 있다.
한국 현대사(韓國現代史)에서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동학지도자: 2명, 독립군 총재: 1명,항일의병장: 1명,독립운동가: 150명, 사진선구자: 1명, 대통령후보:1명, 정당대표: 2명, 국무총리급: 1명,국회부의장: 1명,국회의원: 9명, 그룹총수(회장): 3명, 장관:5명, 차관:3명, 종교지도자: 2명, 대학자:11명,시장: 1명, 군수: 2명, 세계적인 예술가: 2명, 연예인:6명, 운동선수:7명, 장군:6명, 역전의 용사:5명이다.
이천서씨 분파
- 서린(徐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 서눌(徐訥) 원숙공파(元肅公派)
- 서념(徐恬) 문한공파(文翰公派)
- 서선(徐選) 공도공파(恭度公派)
- 서윤(徐玧) 시랑공파(侍郞公派)
- 서보(徐輔) 전서공파(典書公派)
- 서광(徐珖) 예빈공파(禮賓公派)
- 서익(徐翼) 부령공파(副令公派)
- 서학종(徐鶴踵) 참봉공파(參奉公派)
- 서첨(徐詹) 소윤공파(少尹公派)
- 서릉(徐稜) 절효공파(節孝公派)
- 서유(徐愈) 양경공파(良景公派)
- 서척(徐陟) 창사공파(倉使公派)
- 서진(徐晉) 교리공파(校理公派)
서(徐)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93,954명으로 조사되었다.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3위이다.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
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기자조선의 후손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
서씨 분파(徐氏分派)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상서우복야.정2품)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본관의 유래
서목(徐穆)은 시조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문하시중. 종1품)으로 봉했다.
본관 연혁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 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고려 인종은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고종 때는 영창(永昌)이라 불렀으며 공양왕은 조비 신씨(祖妣 申氏)의 고향이라 해서 남천군(南川君)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에 이르러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44년 조선 세종(26년)에 이르러 호수(戶數)가 1000호 이상이 되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613년(광해군 5년) 현으로 강등됐고, 1623년(인조 1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돼 이천군에 합병되었다. 1996년에 이천시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서(徐), 신(申), 안(安), 한(韓), 장(張), 왕(王), 홍(洪), 황(黃)의 여덟 성씨가 살았는데 일곱 성은 모두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으며 오직 서씨만이 뒤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분파(分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9세손 휘린(諱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6세손 휘연(諱演) 강호공파(江湖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7세손 휘념(諱恬) 문한공파(文翰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0세손 휘선(諱選) 공도공파(恭度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공도공(恭度公) 서선(徐選) 10세손 휘기(諱起) 문목공파(文穆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8세손 휘윤(諱玧) 시랑공파(侍郞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0세손 휘보(諱輔) 전서공파(典書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3세손 휘호(諱皞) 사인공파(舍人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현손(玄孫) 휘광(諱珖) 예빈공파(禮賓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증손(曾孫) 휘익(諱翼) 부령공파(副令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8세손 휘학종(諱鶴踵) 참봉공파(參奉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7세손 휘첨(諱詹) 소윤공파(少尹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6세손 휘릉(諱稜) 절효공파(節孝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6세손 휘릉(諱稜) 후손 휘영우((諱永佑) 목사공파(節孝公後牧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2세손 휘눌(諱訥) 원숙공파(元肅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휘유(諱愈) 양경공파(良景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휘척(諱陟) 창사공파(倉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휘진(諱晉) 교리공파(校理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교리공(校理公) 서진(徐晉) 후손 휘인원(諱仁元) 명암공파(嗚嚴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1세손 휘신(諱信) 목사공파(牧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1세손 휘유(諱逾) 비인공파(庇仁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직장공파 (直長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사직공파 (司直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부사공파(府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판서공파(判書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평장공파(平章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현령공파(縣令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판윤공파(判尹公派)
시조
이천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 817~902년)은 신라 말기에 벼슬이 아간(阿干. 부총리)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려놨다. 그의 생애 동안 헌덕왕에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이 난무했다.
그는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한천(漢川 : 지금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孝養山) 아래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효양거사라 칭하고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니, 제자들이 몰려와 집 안팎으로 가득찼다.
서신일은 74세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이에 제자들이 “저희 가운데 스승님의 대를 잇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훗날 스승님의 묘(廟)를 누구에게 의탁하겠습니까. 다시 부인을 얻으시어 아들을 얻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청하여 그는 아내를 다시 얻었다. 어느 봄날 서신일이 노비들을 거느리고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에 꽂힌 사슴 한 마리가 불쑥 그의 앞으로 뛰어와 쓰러졌다. 서신일은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른 다음 멍석 아래 사슴을 숨겼다.
곧이어 사냥꾼이 나타나 사슴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서신일은 “사냥꾼인 당신을 두려워하여 도망쳤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사슴이 왔겠소?”라며 사냥꾼을 돌려보냈다. 덕분에 사슴은 사냥꾼의 눈을 피했고, 상처를 치유받아 숲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밤 서신일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낮에 살려준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했소.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재상(宰相)에 올라 영달(榮達)을 누리도록 도우리라.”
그 일이 있은 뒤 서신일이 나이 85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내의령(內議令)에 올랐다. 내의령은 내의성(내사성과 문하성을 합친 최고의 중앙기관)에서 가장 높은 종1품의 수상격에 해당한다. 서필의 아들이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다. 서희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의 땅을 회복한 장군이자 문신이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서씨 가문은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묘소와 관련 사슴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서신일이 천수를 다하니, 사슴이 나타나 상주(喪主)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상히 여긴 상주가 사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어느 양지바른 산기슭에 멈추어 서서 발굽으로 자꾸만 땅을 파헤쳤다. 이것은 필시 산신령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장사하니 지금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마을 뒤의 효양산 산록에 있는 시조 서신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직계
•부인 : 합천 홍씨(陜川 洪氏) - 아버지는 홍찬(洪贊)
◦아들 : 서필(徐弼 내의령.종1품.국무총리)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 黃氏)
◾첫째 손자 : 서염(徐廉)
◾둘째 손자 : 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첫째 증손자 : 서눌(徐訥 문하시중.종1품.국무총리)
◾둘째 증손자 : 서유걸(徐惟傑 좌복야.정2품.부총리)
◾셋째 증손자 :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3품.장관급)
◾넷째 증손자 : 서주행(徐周行 달성군)
◾셋째 손자 : 서영(徐英)
◾동생 : 서신통(徐新通)
◾동생의 아들 : 서목(徐穆 문하시중.종1품. 국무총리)
가족
가족 관계
- 본인: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 부인 :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
- 아들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黃氏)
- 손자 : 서염(徐廉)
- 손자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손녀: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徐氏)
- 고손자: 서수(徐琇 종1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 고고손자: 서장기(徐長己 정4품 병부시랑兵部侍郞)
- 고고손자: 서준방(徐俊邦 정3품 형부상서(刑部尙書). 평당 서씨(平當徐氏) 시조)
- 증손자: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고손자: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손자: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 고고고손자: 서원(徐元)(정2품 평장사)
- 원손자: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
- 아들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고손자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고고손자 :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 고고손자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 고고손자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 고고손자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고고고손자 :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 서울시장.장관)
- 고고고손자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고고고고손자 : 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
- 고고고고손자 :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
- 고고고손자: 서상(徐祥)
- 고손자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증손자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손자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
- 손자: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아들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원손자: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 종1품)
- 고고고손자: 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
- 고고고손자: 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고손자: 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
- 고고고고손자: 서저(徐氐 병부낭중. 종 3품. 차관급)
- 고고고고손자: 서평(徐坪 판도좌랑)
- 고고고고손자: 서광(徐珖-예빈소경))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손자: 서녕(영)(徐寧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左承旨)정3품.장관)
- 고고고고고손자: 서온(徐溫.승지.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충(徐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정 2품. 부수상)
- 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감찰어사.정 3품.장관)
- 고고고손자: 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
- 고고고손자: 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
- 고고고손자: 서원(徐元)(정2품 평장사)
- 고고손자: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 고손자: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손자: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춘(徐椿 부여서씨파(扶餘徐氏派 대종)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2품)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릉(서능)(徐稜 장성서씨파(長城徐氏派)=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박(徐樸(부여서씨(扶餘徐氏) 봉례공파(奉禮公派))
- 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남양(당성)서씨파(南陽((唐城)徐氏派)
- 원손자: 서원길(교리공(校理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직(徐稷(연산서씨파(連山徐氏派)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종수(徐宗秀 현감(縣監))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민(徐義敏 참군(參軍))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 고고고고고고손자: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
- 고고고고고손자: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 고고고고손자: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 고고고손자: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종2품)
- 증손자: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손자: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고고손자: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고고고손자: 서찬(徐瓚 (정4품 장령)
- 고고고고손자: 서인(徐諲 교수(학자)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徐勖 정3품 승지)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사천(徐思川)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근(徐楊根)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서경흥(徐敬興.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晋 정3품 사재감정 교리공파(校理公派))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 고고고고고손자: 서욱(徐勖 정3품 승지)
- 고고고고손자: 서인(徐諲 교수(학자)
- 고고고손자: 서찬(徐瓚 (정4품 장령)
- 고고손자: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고손자: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증손자: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손자: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손자: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고고고고고고손자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손자: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손자: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손자: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손자: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증손자: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손자 : 서영(徐英)
- 동생 : 서신통(徐新通)
- 조카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4]]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현종비 원목왕후
인물
•서희(徐熙, 942~998년)는 고려의 외교관이자 문신, 군인이다.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등용됐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돼 귀국했다. 성종 12년(993년) 거란(契丹)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히 반대해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 결과 고려는 거란과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 곧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를 포함한 강동6주의 영토를 수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숨을 거뒀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됐다.
•서일(徐一, 1881~1921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우리정부는 서일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여수기
생몰년 미상. 단군시대의 예국군장(濊國君長).
성은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이다.
예국 땅은 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 왕 즉 부여(扶餘) 지역이다.
9명의 아들이 여러 군을 나누어 다스려 백성들에게 공이 있고, 백성들이 따르자 서씨 (徐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천 서씨와 관계
여수기 (餘守己)군장은 서씨(徐氏)에 조상이며 멀게는 서국(徐國)에 서구왕 (徐九王)와 서언왕 (徐偃王), 그리고 방사 서복(徐福)의 선조다. 또한 단군조선(檀君朝鮮)-부여(扶餘)- 백제(百濟)- 고려(高麗)에 서씨(徐氏) 역사이다.
부여씨 관련
여수기(餘守己) 군장에 후예로 부여 (扶餘) 혹은 여 (餘)왕족의 성씨. 현재는 소실되었다. 고구려왕족과 백제왕족이 부여씨 혹은 여씨(餘氏)를 계승하고. 고려시대에는 서씨(徐氏)가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를 계승한다.
이천 서씨와의 관계
여수기 군장이 서씨에 시조이고, 부여씨에 원조이므로 중화 서씨(中華徐氏) 서언왕(徐偃王)후예와 한국서씨(韓國徐氏) 서신일(徐神逸) 후예는 동성동본이다. 서신일 후예는 이천 서씨,달성 서씨,대구 서씨,연산 서씨,부여 서씨,장성 서씨,전주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이다.
이천 서씨(利川 徐氏) 가볼만한 곳
이천 서희 역사관 서희 테마파크[[5]]
이천 효양산 전설문화 축제[[6]]
이천 이섭대천 기념비[[7]]
이천 서신일 시조 묘소[[8]]
이천 서희선생 추모제[[9]]
이천 설봉 서원. 서희선생[[10]]
이천 설봉 공원.서희선생[[11]]
여주 서필선생 묘소[[12]]
여주 서희선생 묘소[[13]]
안산 잿머리 성황당[[14]]
광명 충현서원[[15]]
고양시 덕양구 이축선생부인 이천서씨 묘[[16]]
파주 고려 통일대전[[17]]
파주 서성환선생 묘소[[18]]
연천 숭의전[[19]]
포천 양경공파 문중[[20]]
구리 망우리 묘지 -서광조선생[[21]]
구리 망우리 묘지 - 서동일선생[[22]]
가평 교리공파 종회[[23]]
의왕시 서견선생 묘소[[24]]
서대문구 홍은동 대종교 총본사. 서일선생[[25]]
외교안보연구원 서희선생 흉상[[26]]
용산 전쟁 기념관 서희선생 흉상[[27]]
용산 이천서씨 대종회[[28]]
동작동 현충원- 서일선생[[29]]
횡성 서득천.서진영부자 효자각[[30]]
춘천 명암공파 종회[[31]]
광양 원숙공파 종회
광양 옥룡면 옥평사[[32]]
순천 방원공룡박물관[[33]]
화순 부양정. 삼산정[[34]]
화순 성산사[[35]]
화순 서상룡선생 [[36]]
나주 철천사[[37]]
나주 서상록선생 묘소[[38]]
나주 만호정[[39]]
나주 병부상서공 종가[[40]]
나주 철천리[[41]]
나주 용강사지[[42]]
나주 다시 서효환선생 묘[[43]]
함평 와촌[[45]]
함평 동강사
함평 영사재[[46]]
무안 강호문중 영사재[[47]]
무안 월산사[[48]]
무안 모사재
무안 석송 목장
완도군 애국지사 서재만선생 [[49]]
신안 서태석선생 묘소[[50]]
장성 용전사[[51]]
장성 서능선생 정려비[[52]]
김제 독립운동가 서정천선생[[53]]
고창군 독립운동가 서종채 선생 생가
순창 화남사[[54]]
공주 서기선생 묘소[[55]]
공주 충현서원[[56]]
경주 귀산서원[[57]]
경주 양경공 종가(효우당)[[58]]
안동 이천서씨 열녀비[[59]]
김천 섬계서원
중국
중국의 서(徐, 병음 : Xu)씨는 중국에서 성씨 순위 10위이다.인구수는 대략 2,00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고조선[古朝鮮] 창의(昌意) 계통인 소호(少昊), 고도(皋陶)、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을 원시조로 한다. 약목의 후손 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과 32세 서언왕(徐偃王)- 동이족(東夷族).한국사람]이 유명하다.서언왕은 중원대륙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와 서서(徐庶)가 유명하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쳤다.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지리학자 서하객(徐霞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서황(徐晃),서개(徐蓋),서패(徐覇),서상(徐詳),서원(徐原),서원(徐元),서간(徐幹),서질(徐質),서혁(徐奕),서막(徐邈),서곤(徐琨),서성(徐盛),서소(徐韶),서윤(徐胤),서봉(徐奉),서구(徐璆),서영(徐栄),서훈(徐勛),서화(徐和),서타(徐他),서수(徐隨)가 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 [[60]]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61]]
달성서씨 서진 시조묘소 참배 [[62]]
대구서씨 서한 시조묘소 참배 [[63]]
연산서씨시조 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64]]
이천서씨 대종회 [[65]]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부여의 어원인 녹산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상이다. 부여가 사슴이란 견해는 여러 갈래로 존재한다. <자치통감>은 부여의 원거주지가 녹산(사슴산)이라 했다. 사슴은 부위·부윈(퉁구스어), 푸후(만주어), ‘부요’(여진어)인데 그 한자어가 부여라는 견해, 예맥(濊貊)의 ‘예’의 한자 음인 ‘후이’가 부여라는 견해도 있다.
이천서씨(利川徐氏) - 대전 효월드 뿌리공원
이천서씨 상징 조형물
작품명 : 은혜(恩惠) 갚은 사슴
작가 : 한국환경조각연구소 신동수
인간의 선한 본성을 통한 생명 존중과 존엄성을 표현하고 이는 지혜와 온건함, 순수함과 신의, 높은 기상과 강한 의지,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천서씨의 본연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화강암 좌대위에 사슴 암수 한쌍을 새겨 사슴의 은혜를 상징화시킴. 십장생과 일원 자연은 문중의 번영을 표시함. 여섯 개의 산봉우리는 강동육주와 8성 280리를 획득한 구국의 영웅 서희선생의 업적을 표시함. 하단의 좌대는 시조를 의미하며 그 위로 뻗어나가는 산의 형상은 이천서씨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함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
서희테마파크(서희역사관)
위치는 경기 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130 도로명:이천시 부발읍 무촌로18번길 130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은 이천에서 태어나시어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태보내사령까지 오르셨던 문신이셨습니다. 특히 서기 993년 (성종12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당시, 단신으로 적장 소항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으로 내몰고, 위태롭던 나라를 구해내시고 끊이지 않는 북진개척 정신으로 우리 민족의 영토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8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 일대까지 넓힌 훌륭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이셨습니다. 이러한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의 위업을 되살려 그 업적을 확산, 보급하고 국가의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한 ‘이천시 서희(徐熙)선양사업 추진위원회’를 통해 대대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서희역사관은 이 모든 것들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숭의전(崇義殿)
조선 시대 고려 태조와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성종(成宗)•목종(穆宗)•현종(顯宗) 및 정몽주(鄭夢周) 등 15인의 공신을 제사지내도록 한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음. 태조 6년(1397)에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정종 원년(1399)에 고려 7왕을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며, 세종 5년(1423)과 문종 2년(1452)에 중건하였는데 문종 때에 숭의전(崇義殿)이란 전호(殿號)를 내려 고려 왕씨의 후손들로 부사(副使) 혹은 사(使)로 삼아 봄•가을로 제사하고 관리하도록 하였음. 제전(祭田)으로 숭의전전(崇義殿田) 12결이 지급되었고, 매년 1차례씩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하여금 봉심(奉審)토록 하는 한편, 승지(承旨) 등을 보내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음. 그 소속 관원으로는 종3품의 사, 종4품의 수(守), 종5품의 영(令), 종6품의 감(監), 종9품의 여릉 참봉(麗陵參奉) 1원(員)이 있었음.
숭의전.<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을 주었다. 세종 7년이 되어 유사가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습니다.” 하므로, 이에 태조•현종•문종•원종만 남겨 놓고, 봄•가을 이중삭으로 향축을 보내어 제사했다.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로 삼았다.
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徐熙)•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 등을 배향했다.
崇義殿<在郡西五里 本朝太祖元年 命禮曹立廟於麻田縣 祭高麗太祖惠宗成宗顯宗文宗元宗忠烈王恭愍王 給祭田 至世宗七年 有司言 國家宗廟只祭五室 而前朝之廟乃祭八位 未合於禮 於是 只留太祖顯宗文宗元宗 以春秋二仲朔傳香祝致祭 文宗二年 求高麗後王循禮 俾主其祀 仍名其廟爲崇義殿 以循禮爲副使 以卜智謙洪儒申崇謙庾黔弼裴玄慶徐熙姜邯贊尹瓘金富軾金就礪趙冲金方慶安祐李芳實金得培鄭夢周配享>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13, 16장 앞쪽~뒤쪽, 경기 마전군 사묘]
잿머리성황당(城頭里城隍堂)
고려시대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성황당으로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산76에 위치해 있다.
고려 성종 때 내부시랑이었던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 잿머리 해안에서 배를 타려고 하자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든 서희의 꿈에 소복을 입은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여인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와 장모 안씨였는데 그들은 사당을 마련해 경순왕과 두 모녀의 영정을 두고 제사를 지내 한을 풀어주면 파도를 잠재워 항해를 돕겠다고 했다. 잠에서 깬 서희가 그들의 바람대로 관아의 수장을 불러 사당을 짓게 하고 화공을 불러 영정을 그리게 하여 며칠 후 모두 완성되자 거칠던 바다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그 후로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사당에 제를 올리며 순탄한 항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현재 세워져 있는 성황당은 1990년에 개축된 것이며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았던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5년부터 안산의 문화행사로 이곳에서 가을성황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여주 상산재
□ 소재지 : 산북면 후리 □ 시 대 : 조선(현대 중수)
상산재는 고려의 명재상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 901~965)과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942~998)를 모신 재실로, 후리 뒷골마을의 동쪽 외곽에 건립되어 있다. 단층의 양옥 건물로 지었으며 옥상에 별도의 구조물을 설치하여 “상산재”라 써 놓았다. 두 분의 묘소가 재실 앞쪽의 상두산(象頭山)에 자리 잡고 있어, 그 명칭을 상산재라 한 것이다. 재실의 앞쪽에는 최근에 건립한 서필과 서희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서필선생묘(徐弼先生墓)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 /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함.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나와 3번 도로를 타고 여주, 이천쪽으로 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양평 쪽으로 간다. 렉스필드 CC 입구를 지나 여주군 산북면으로 가다 상품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라는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작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묘소에 들어가기 전 입구 터가 나온다. 이 입구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과 서필와 서희 부자의 신도비(神道碑), 사적비, 그리고 묘소를 관리하는 여주 상산재(象山齊)가 있다.
서희 선생과 관련한 여러 유적에 ‘서희 장군’이라고 표기되어있고, 서희 선생의 묘소도 ‘서희 장군의 묘’라 표기되어있으나 정확하게 서희 선생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으므로 ‘장군’이라는 표기는 잘못 된 것이다.
신도비(神道碑)
서필 선생의 것과 서필 선생의 아들 서희 선생의 것 2개가 서 있다. 정면에서 보자면 왼편의 것이 서필 선생, 오른편이 서희 선생의 것이다. 신도비의 하단부에는 거북상이 있고, 그 위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정면에는 고려시대에 두 선생들이 지냈던 벼슬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다. 옆면에는 두 선생과 관련된 일화가 한글로 기록되어있다.
서희선생묘(徐熙先生墓)
위치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 53-1 / 경기기념물 제36호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나와 3번 도로를 타고 여주, 이천쪽으로 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양평 쪽으로 간다. 렉스필드 CC 입구를 지나 여주군 산북면으로 가다 상품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라는 작은 안내판이 나온다. 작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묘소에 들어가기 전 입구 터가 나온다. 이 입구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과 서희와 서필 부자의 신도비(神道碑), 사적비, 그리고 묘소를 관리하는 여주 상산재(象山齊)가 있다.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새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듯이 “빛으로” 찬란하게 예술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또는 자신만의 색채로 우리 이천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합니다. 우리 이천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이듯이 이천의 혼불로 르네상스를 이천예총 각협회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천예총은 8개협회(국악협회/무용협회/문인협회/미술협회/사진작가협회/음악협회/연극협회/연예예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천예총이 창의적 생각과 열린마음으로 예술인들의 끼와 혼을 발산시키고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바로 이섭대천종합예술제입니다.
서희청소년문화센터(徐熙靑少年文化center)
서희청소년문화센터는 청소년활동진흥법 11조(수련시설의 설치·운영 등)1항, 2조에 의거 이천시장이 설치한 기관으로 (재)이천시청소년재단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꿈꾸는 자유공간! 즐거운 청소년활동! 청소년이 주인인 문화센터’ 라는 비전 아래 청소년들의 문화,예술,체육활동을 비롯한 리더십함양,진로탐색활동 지원은 물론 자율적인 청소년활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천시민들을 위한 공연 및 세미나 평생교육프로그램 운영으로 이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설봉서원(雪峯書院)
1564년(명종 19)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서원
경기도 이천시에 있었던 조선전기 서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564년(명종 19)에 이천부사 정현(鄭賢)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재상)·이관의(李寬義)·김안국(金安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1593년(선조 26)에 이천읍 관고리로 이건하였으며, 최숙정(崔淑精)을 추가 배향하였다. 2022년에 서선(徐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재상).증 우의정(右議政).정1품)선생이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단(壇)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 왔다.그 뒤 1977년 9월에 현충탑을 건립하여 네 명 선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는 글을 새겼으며, 그 옆에 설봉서원유허비(雪峯書院遺墟碑)를 세워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현충탑과 유허비 외에 하마비(下馬碑)와 6칸의 재실이 있으며, 서원 복원을 추진 중에 있다.
전라도(나주) 철천사(哲川祠)
위치는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 병부상서공파 중시조인 11세 서린(徐鱗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을 배향하고 있다.
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중시조로,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에 이르렀던 고려시대의 문신 서린(徐鱗 1222~1305)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1794년(정조 18) 지역 유림이 세운 사당이다. 1947년 중건되었고, 그 후 한 번 더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 사우(祠宇)는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며, 강당인 영덕재(永德齋)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밖에 내삼문과 창고·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
나주 사롱사(四聾祠)
세조가 단종으로 부터 강제로 왕위를 양위받자, 서호(徐顥(灝). 남원부사. 정 3품. 전남도지사.차관.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정 2품. 장관)의 큰 아들인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은 벼슬을 버리고,남평 본집에 돌아와 세 아우들과 사룡사를 구축하고 은퇴하여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
아우인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서효당(徐孝堂. 익롱공(益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이 그 말을 듣고, 의리에 합당한 일이라고 여기고 역시 맏형을 따라 듣는 것을 피하는 귀머거리가 되니, 당시 마을 사람들이 사롱(四聾)이라 하였다. 또한 호도 귀머거리 롱(聾)자를 써서,예롱(豫聾),수롱(隨聾),점롱(漸聾),익롱(益聾)이라 하였다.
거가십훈(居家十訓)
「거가십훈」은 고려 고종 때 관료를 지냈던 서능이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 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만들어 가르쳤던 것이다. 모두 10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서 삼경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거가십훈」을 최초로 수록한 간본은 1578년 또는 직후에 간행된 「고려시중절효선생서공거가십훈」이다.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의 문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에 이르렀던 서능(徐稜 ?~?)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의 터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의 용소(龍沼) 위쪽에 터가 있는데 현재 축대 일부만 남은 상태이다. 1919년 후손 서용호가 이 자리에 ‘절효 서선생 초당 유허비(節孝徐先生草堂遺墟碑)’를 세웠다.
서능은 고려시대의 이름난 효자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기록된 10여 명 중 한 명이며,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에도 그의 효행 행적이 실려 있다. 또한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장성 서능 정려비 (長城 徐稜 旌閭碑)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서능 선생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스무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의원이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때가 한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약탕기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약과 함께 짜서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종이 후에 이 사실을 듣고 표창을 하면서, 그의 효심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각 안에 놓여 있는 이 비는 사암 박순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 글씨를 써 놓았다.
전라도(장성) 용전사(龍田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1587년(선조 20년) 서릉(徐稜)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모암서원이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76년 서릉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건하면서 용전사로 변경되었다.
서릉은 본관이 이천서씨(利川徐氏)로 절효공파((節孝公派) 중시조.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모 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226번지 용암마을에 위치한다.
재각 용전재(龍田齋)
모암서원(慕巖書院)
1587년에 서삼면 모암리에 세워진 모암서원(慕巖書院)은 절효공 서능(徐稜)을 모신 사당(祠堂)과 양편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앞에 큰 강당이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절효공의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벽에 걸어 높고 그 아래서 글을 읽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에 모암서원유허비(慕巖書院遺虛碑)와 칠현비(七賢碑)만 남아있다
화남사(華南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현대에 서릉(徐稜)·서식(徐湜)·서숭로(徐崇老)·서영우(徐永佑)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우.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향토문화유산 제1호.
전남 무안군 몽탄면 한재길 42-4.
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
경주 귀산서원(龜山書院)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서원으로,
1786년(정조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유(徐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귀산서사(龜山書社)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48년에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지요.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198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매년 2월 상정(上丁)과 8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전라도(광양) 옥평사(光陽 玉坪祠)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의 하평마을에 있는 사당이다.
1959년에 건립된 것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문중 사우에 해당된다.
이곳에 배향된 인물로는 원숙공(元肅公) 서눌(徐訥 고려 문하시중.종1품. 국무총리. 고려 현종 묘정 배향.재상) 기은(箕隱) 서희찬(徐希贊 고려 명신.재상) 문의공(文毅公) 서호(徐浩 고려 충신.재상),서열(徐悅 백운거사),서천일(徐千鎰 암연처사) 등이 있다.
충현서원(忠賢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청도 최초로 세워진 사액 서원. 공주시청에서 대전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8㎞ 달리면 공암이 나온다. 대략 27분여의 시간이 소요되며, 충현서원은 마을의 중앙에 있다.
충현서원유적(忠賢書院遺跡)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조선시대 학자 서기(徐起)가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시도기념물.
충현서원 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에 있는 서원 사적비. 충현서원 사적비는 충현서원(일명 공암서원) 안에 있는 서원 사적비로, 1712년(숙종 38) 연천의 임장서원에서 주자의 화상을 모사해와 신판 뒤에 봉안한 과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공주 충현서원 문화제
충현문화제 등은 공주시 반포면 공암 옛 장터길 충현서원특설무대 등 일원에서 열린다.
화순 성산사
1579년경 이천서씨 서의립(徐義立1547~1631)이 화순현 소곡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한 고촌이다.
1907년 건립했던 강당 충의당(忠義堂)과 독특한 형태의 사당 성산사(星山祠)가 외삼문, 충의당 뒤로하고 자리하고 있다. 핑게 없는 무덤 없듯이 사연없는 목조물은 없다.
이곳에는 고려말 절인이었던 여와(麗窩) 서견(徐甄)과 송담(松潭) 서강(徐岡)을 향사하고 있다. 규모는 정 3칸, 측1칸, 맞배, T자형으로 구성됐다. 충의사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다,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내부에는 대청형으로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
섬계서원(剡溪書院)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에 있는 조선 서즐(徐騭) 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조선후기 강감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내용충현서원은 원래 1658년에 강감찬(姜邯贊), 서견(徐堅), 이원익(李元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고려의 강감찬이 주향되어있고, 서견, 이원익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사(三賢祠)라 불리었는데, 1676년에 충현서원(忠賢書院)고 사액이 내려지고 예조좌랑이던 박징(朴徵)이 치제하였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원래 창건된 곳이 금천현 한천동인데 그 지명을 따서 한천사(寒泉祠)라 하기도 하였다. 이원익의 영당(影堂)인 관감당이 1694년에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다. 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원 충현서원지가 현 위치가 아님이 밝혀져 지정 해제되었다. 현재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김해성전투(金海城戰鬪)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에 서예원(徐禮元) 등이 김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2차 진주전투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육절려(六節閭)
강원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 산11에 있는 정려각.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 1817년(순조 17),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서예원(徐禮元)과 그의 처, 아들, 며느리, 사위, 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진주성 비가- 조열태저자
1951년 가을, 밀양성 축조 공사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진주성 2차전 성주 서예원(46세)과 밀양 평촌 마을의 최억술(41세)이다. 전반부 축성과 개전전야를 통해 그 당시 민초들이 전쟁준비로 해서 겪었던 고통이 그려진다. 1952년(임진년)에 전쟁이 터지는 것은 밀양 장날 최억술이 봉화 신호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억술이 장에 갔다가 봉화를 본 직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피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때 김해성에 있던 서예원 역시 봉화를 보고서는 즉각 교전태세에 들어가는데
남접
동학의 분파 중 하나 서장옥이 이끄는 동학으로 종교적 입장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했던 북접과 달리 정치적 개혁을 추구했던 조직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직접적인 전단계였던 1893년 3월 금구군 원평 집회(금구취당)는 남접파의 집회로 서장옥과 전봉준이 주도하였다. 서장옥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으로 남접파의 거두이며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도하였다. 북접이란 용어가 남접에 대응하여 나왔을 정도였다.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삼례집회(參禮集會)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
금구집회(金溝集會)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북도 금구에서 개최한 집회.
동학농민운동
1894년(조선 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동학농민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동학농민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접주 서장옥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
매년 양력 5월 개최되는 행사로서 조선시대 봉건제도의 학정에 대한 순수한 농민의 개혁혁명운동의 발상지로서 근대화를 앞당겼고 민족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의미있는 행사이다.
국수(國手) -김성동 역작
한국문학의 살아 있는 거장, 김성동 작가의 장편소설 『國手』가 솔출판사에서 전 6권으로 출간되었다. 1991년 11월 1일 [문화일보]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27년 만에 완간한 『國手』는 오랜 시간 김성동 작가의 집념과 혼으로 완결시킨 작품으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를 잇는 대서사시이다.
고흥 죽산재(高興 竹山齋)
고흥 죽산재는 서재 겸 재실로 활용되었고, 기단이나 초석을 잘 다듬어 품격을 높인 근대기(1933년) 의 목조건축물이다. 건축적으로 부재의 기법이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민화풍의 해학적인 느낌과 단청은 불교적인 요소와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을 표현하는 등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사례이다. 특히 이 건물은 죽파 서덕봉(字 서화일, 1860~1933)이 서재로 쓰고자 지었으나 준공 후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월파 [[서민호](1903~1974)선생이 부친의 제실과 서재로 썼다. 서화일은 지주로 사회사업과 복지, 교육 등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아들인 서민호는 조선어학회사건과 항일독립운동을 한 근대 역사인물이다.
죽산재 건립연대는 1933년이다. 2013년 보수정비 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송병섭 찬)에 따르면 1933년 4월에 상량했음을 알 수 있고, 10월에 서화일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실과 서재로 활용 된 것을 알 수 있다. 고흥 죽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ㄷ’자형 구조이다.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민중당(民衆黨)
1965년에 창당되었던 정당.연원 및 변천1963년 단일야당의 형성에 실패한 이래로 야권은 계속 통합노력을 기울인 끝에 1965년 5월 3일 민정·민주 양당이 통합선언대회에서 이 당의 창당을 선언하고, 같은 해 6월 14일 함당 전당대회를 통해 창당하였다.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서오전(鼠獒傳)
저자: 서달증(徐達曾 학자)
서오전의 창작 시기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로서 두 차례의 판결과정을 통해 당대 모순된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부각되고 주제의식이 보다 심화 되어 있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용고사 및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의 계층 갈등, 부패한 양반 관료층의 불법적인 횡포와 부당한 판결 등 사회 비판적이고 고발문학적인 교훈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반영론적인 사회상의 사실적 반영과 등장인물의 갈등관계가 증폭되는 독창적인 구성면에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이상 사회와 유능하고 덕망 있는 구원자적 목민관을 기대하는 점에서 향반으로서 이상향을 향한 꿈과 관념세계의 일단을 피력한 작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오전>은 흔하지 않게 작자가 명기된 작품으로 우화소설이 창작되고 향유된 계층과 이들의 시각에 의해 주제의식이 분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앞으로 작자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더 발굴되고 유사한 서류송사형 우화소설(鼠類 訟事型 寓話小說)과의 비교 고찰이 보완되어 문학사의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해본다.
In this paper, the study of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the meaning in <Seoohjeon>. To do this, firstly I tried to identify the author and the period of creation, and focused on the study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it in comparison with <Seodaejujeon> in the same category Seodaljeung (1773 -?), the author of <Seoohjeon>, had Yichon of his family clan , Paekham of adult name, Songwa of pen name and the period of it is guessed to be late 18th century to middle of the mid-19th century This work is a typical fable novel of rats` lawsuit and it`s features are that contradiction of contemporary society was magnified realistically and consciousness of theme was further intensified Exemplified old events and details relate to each other organically and through the description of conflicts among classes of rural society, tyranny and wrongful conviction of the corrupt bureaucrats, the informative nature of social criticism and accusation literature was well retained. We can see the creativity of the author in that realistic reflection of social aspects and conflicts among characters are amplified through original plot. We can understand the author`s writing intention of longing for utopia and ideology as a commoner since he was looking forward to capable and virtuous governors to save his society It is unusual the <Seoohjeon> shows its author expressly and it has high value in that we can confirm the classes of creation of the fable fiction and the division of theme consciousness through their vision. I hope that more new material on authors will be discovered and more comparison with same kind of novel of rats` lawsuit will be added so that new light on this work will be shed and positioned in literary history.
매학선생유고(梅壑先生遺稿)
2권 1책(영본). 목활자본. 원래 본집 15권과 부록으로 되어 있었으나, 산질되어 현재는 권15 「존문록(尊聞錄)」과 부록만이 전한다. 자세한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권두에 1916년에 쓴 송인학(宋寅學)ㆍ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1729년(영조 5) 나이빈(羅以彬)이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안종학(安鍾鶴)이 쓴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목차에 의하면 권1∼4에 시, 권5에 소(疏), 권6∼8에 서(書), 권9ㆍ10에 별지(別紙), 권11에 잡저, 권12에 휴암선생입사실기(休庵先生立祠實記), 권13에 불립당사우연원후(不立黨師友淵源後)ㆍ잠(箴)ㆍ명(銘)ㆍ송(頌)ㆍ제문ㆍ축문, 권14에 상량문ㆍ행장ㆍ유사, 권15에 존문록과 부록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문록」은 제자가 스승 안방준에게서 들은 학문 강론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에는 조상우(趙相愚)가 쓴 연보와 종사록(從師錄)ㆍ동유록(同遊錄)과 윤증(尹拯)이 쓴 유사,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장, 윤상익(尹相翊)이 쓴 추장(追狀), 유지빈(柳之彬) 등이 지은 제문 등이 있다.
당대의 석학인 윤증(尹拯),유필원(柳必源) 등과 교류 하였으며,
요은집(鬧隱集) 가운데 저자에 대한 부록을 지었다
용강사(龍岡祠)
용강사(龍岡祠)는 용구(龍邱) 서봉령(徐鳳翎)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서봉령의 호를 따서 용구사(龍邱祠)라 하였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토루(土樓)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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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
같이 보기
- 이천 서씨
- 대구 서씨
- 달성 서씨
- 부여 서씨
- 연산 서씨
- 남양 서씨
- 당성 서씨
- 봉성 서씨
- 절강 서씨
- 중국 서씨
- 일본 서씨
- 몽고서씨
- 러시아서씨
- 튀르키예서씨
- 멕시코서씨
- 불가리아서씨
- 헝가리서씨
- 중앙아시아서씨
- 카자흐스탄서씨
- 우즈베키스탄서씨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