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서씨
성씨 = 달성 서씨 (達城 徐氏)
관향 = 대구광역시
중시조 = 서진(徐晋)
인물 = 서균형, 서침, 서사선, 서변, 서중호, 서종철, 서정화, 서석재, 서정돈, 서석구, 서상기 , 서병수, 서승환, 서범수, 서영교, 서용교 서석준, 서규용, 서정돈, 서돈각,서일교
년도 = 2015
인구 = 407,431명
달성서씨(達城徐氏)는 대구광역시 대구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목차
- 1 역사
- 2 가족
- 3 항렬자
- 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 5 기자조선의 후손설
- 6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 7 백제 부여씨의 분파
- 8 부여 부여씨의 인물
- 9 백제 부여씨의 인물
- 10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 11 역대 서국(徐國) 국왕
- 12 부여왕 계보
- 13 백제왕 계보
- 14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 15 서씨 분파
- 16 대구 서씨와 구분
- 17 집성촌
- 18 인물
- 19 달성 서씨 분파
- 20 달성공원(達城公園)
- 21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 22 달성공원 서침나무
- 23 구암서원(龜巖書院)
- 24 숭현사
- 25 중심재(中心齋)
- 26 대구 숙천동 원모재(大邱淑泉洞遠慕齋)
- 27 옥천서당(玉川書堂)
- 28 덕산서원(德山書院)
- 29 첨모재 (瞻慕齋)
- 30 분양서원 (汾陽書院)
- 31 낙재집(樂齋集)
- 32 구계서원(龜溪書院)
- 33 다사읍 이천리 이강서원(伊江書院)
- 34 구고서원 추향제
- 35 분양서원 (汾陽書院)
- 36 용담재(龍潭齋)
- 37 다산사(茶山祠)
- 38 서인충 묘비(徐仁忠墓碑)
- 39 망조당유사(望潮堂遺事)
- 40 다운동 다전마을 달성서씨 세거지
- 41 증산사(甑山祠)
- 42 장기향교(長鬐鄕校)
- 43 동산재(東山齋)
- 44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 45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
- 46 대구 도동 향산마을 백원서원(百源書院)
- 47 옥계서원(玉溪書院)
- 48 임재집(臨齋集).
- 49 임재일기(臨齋日記)
- 50 낙동정사(洛東精舍).임재 서찬규 기념관
- 51 조선국권회복단
- 52 민족일보
- 53 대구 3·8만세운동
- 54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 55 조양회관
- 56 서상일묘
- 57 대동청년당
- 58 백산서원(白山書院)
- 59 대구 내곡동 심락재(大邱內谷洞尋樂齋)
- 60 대구 대림동 서종호 주택
- 61 달성서씨 시조 서진의 7대손인 서건손이 울산입향조
- 62 달성 서씨 대종회 옛 구암서원 기부채납..."구계 서침 선생, 정신 계승"
- 63 언제나 꼿꼿했던 달성서씨 문중, 손님맞이 음식 - 사천리 달성서씨 새내마을
- 64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재사(榮州 龍穴里 達城徐氏 齋舍)
- 65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 달성서씨 집성촌
- 66 양산 달성서씨집성촌(達城徐氏集姓村)
- 67 중방동 달성 서씨 집성촌(中方洞 達城 徐氏 集姓村)
- 68 칠곡 달성서씨(達城徐氏)
- 69 청도 달성서씨(達城徐氏)
- 70 창원 달성서씨(達城徐氏)
- 71 김천 달성서씨(達城徐氏)
- 72 성주 달성서씨(達城徐氏)
- 73 경산 달성서씨(達成 徐氏)
- 74 영천 달성서씨(達城徐氏)
- 75 음성 달성서씨(達城徐氏)
- 76 순창 달성서씨(達城徐氏)
- 77 부안 달성서씨(達城徐氏)
- 78 여수 달성서씨(達城徐氏)
- 79 마산 회원동 달성 서씨 시혜불망비(馬山檜原洞達城徐氏施惠不忘碑)
- 80 대구 중구 진골목
- 81 청호재(菁湖齋)
- 82 감모재(感慕齋)
- 83 서문시장(西門市場)
- 8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85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86 황룡(黃龍)
- 87 곡창(鹄蒼)
- 88 泰山(태산)=서산(徐山)
- 89 월병(月餠)
- 90 토루(土樓)
- 91 고려도경(高麗圖經)
- 92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93 고군산군도
- 94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95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96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97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98 서귀포(西歸浦)
- 99 서불과차(徐不過此)
- 100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101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 102 밴드 가입방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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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같이 보기
역사
이천서씨(利川徐氏)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 8세손인 중시조 서진(徐晉)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부인은 초계 주씨이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은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2세는 문하시중(門下時中)찬성사(贊成事) 서기준(徐奇俊), 3세는 문하시중(門下時中)찬성사(贊成事) 서영(徐穎)이다.
4세 서균형(徐鈞衡, 1340년 ~ 1391년)이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 등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시 왕명으로 폐왕 우왕을 강릉에서 살해하였고, 1390년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1391년 양광도도관찰사가 되었다. 시호는 정평(貞平)이다.
5세 서침(徐沈)은 조선조에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전라도처치사를 지냈다. 조선 세종조에서 대구 달성을 나라의 관방으로 쓰겠다며 거두어 들이고자 하며 그 보상책을 논하자 침이 보상받기를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부민들이 관청에 바치는 적모의 이자를 한 석당 닷되씩을 감해 줄것을 주청하니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대구 부민들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받았다. 서침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 감복(感服)한 대구 사림(士林)들이 1665년에 대구에 구암서원을 건립하고 서침을 봉안하여 매년 제향하였다. 세종이 회화나무를 심어 침의 마음을 기리게 했는데 현재 달성공원 (대구)달성공원내에 있는 달성공원 서침나무가 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침은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서문간(徐文幹)도 중시에 올라 현감을 역임했으며, 3남 서문덕(徐文德)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대사간이었던 서충(徐衷)의 증손인 서한정(徐翰廷)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기슭에 은거하였다.[1]
임진왜란 때 서응시(徐應時)는 중봉 조헌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이조판서에 추증), 서인충(徐仁忠)은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다. 또 서수천(徐壽千)은 이순신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증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손자 : 서문한(徐文翰 현감)
- 증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증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고손자: 서지원(徐智元 학자)
- 고손자: 서인원(徐仁元 목사)
- 고손자: 서용원(徐勇元 생원)
- 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
- 고고손자: 서우(徐佑 (증贈) 형조참의(刑曹參議))
- 증손자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
- 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
- 손자 : 서문한(徐文翰 현감)
- 동생 : 서습(徐漝 생원)
- 동생 : 서환(徐渙 생원)
- 본인: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증조할아버지: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증조할아버지: 서원(徐遠 생원)
- : 서충(徐衷) 대사간)
- : 서사민(徐士敏 지군사(知郡事))
- : 서균(徐均 생원)
- : 서한정(徐翰廷 증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 서진(徐震 종사랑(從仕郞))
- : 서호(徐浩 전연사 직장)
- : 서치(徐治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 : 서진(徐震 종사랑(從仕郞))
- : 서한정(徐翰廷 증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 서균(徐均 생원)
- : 서사민(徐士敏 지군사(知郡事))
- 작은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 서충(徐衷) 대사간)
- 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증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항렬자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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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幹) 상(相) |
병(炳) 흠(欽) 광(光) 口열(烈) 병(丙) |
태(泰) 口기(基) 정(廷) 재(載) 口곤(坤) 口규(奎) |
석(錫)口 화(和) 진(鎭)口 |
口수(洙) 口원(源) 口호(浩) |
동(東)口 병(柄)口 상(相)口 정(正)口 |
口교(敎) | 보(輔)口 규(逵) |
口덕(德) | 영(永)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
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기자조선의 후손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대구 서씨와 구분
달성(達城)서씨와 대구(大丘)서씨는 족보상으로 시조가 다르다. 달성 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 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閈)을 시조로 한다.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근원이 같다고 추측되지만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할 수 없다. 달성서씨는 판도공파 또는 향파(鄕派)라 하고, 대구 서씨는 소윤공파 또는 경파(京派)라 한다. 두 파는 1702년(肅宗 28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1736년(영조(英祖) 12년)에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 서씨(大丘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임오보에서 판도공파(달성 서씨) 계보 서두에 기록된 원문에 "版圖公派亦系達城必是同貫而世代已遠譜牒無徵未能明知故不敢渾錄於本譜姑爲別譜以附篇末(같은 관향인데 세대가 멀고 보첩으로 증명할 수 없어 능히 알지 못하므로 본보에 섞어서 기록하지 못하고 별보로 하여 책 끝에 붙인다)"하였다. 과거에 본관을 혼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구 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본관이 달성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고, 달성 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본관이 대구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조 방목 등 각 문헌에 대구 서씨 인물들의 관향이 달성으로도 되어 있다.
집성촌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동
- 대구광역시 동구 (대구광역시)동구 도동
-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태전동 (이매)
-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고성군 삼산면 병산리
- 경상남도 밀양시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예둔리
- 경상북도 영천시 본촌동,봉동,작산동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어은리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평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가안리 가천마을-의병장 서인찬(徐仁瓚) 의사와 항일의병 활동을 한 서중표(徐仲杓) 의사의 고향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 경상북도 안동시 수하동
-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장재리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지경리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전라남도 순천
- 서울특별시 송파구
인물
- 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
- 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
- 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
- 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
- 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
- 서섭(徐涉 남은(南隱).유학자)
- 서사원(徐思遠 학자)
- 서한정(徐翰廷 학자)
- 서효재(徐孝載 학자)
- 서사진(徐思進 임진왜란 의병장.이재(怡齋))
- 서인충(徐仁忠 임진왜란 장군(의병장))
- 서몽호(徐夢虎 임진왜란 의병장)
- 서방경(徐方慶 임진왜란 의병장)
- 서응시(徐應時 임진왜란 의병장)
- 서수천(徐壽千 이순신장군 막하 수문장)
- 서시립(徐時立 효자)
- 서변(徐忭 학자)
- 서찬규(徐贊奎 한말 학자)
- 서상일(徐相日 항일 독립운동가)
- 서상한(徐相漢 항일 독립운동가)
- 서재승(徐在承 항일 의병장)
- 서병희(徐炳熙) 항일의병장)
- 서상경(徐相庚 독립운동가)
- 서병오(徐丙五 동양화가)
- 서동균 (서화가)
달성 서씨 분파
•현감공파(縣監公派 : 서제(徐濟)
•학유공파(學諭公派 : 서도(徐渡)
•판서공파(判書公派 : 서섭(徐涉)
•감찰공파(監察公派 : 서근중(徐近中)
•진사공파(進士公派 : 서석련(徐錫蓮)
•생원공파(生員公派 : 서석명(徐錫蓂)
•석령 진사공파(서석령(徐錫笭 進士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 서종일(徐宗一)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 서진(徐震)
달성공원(達城公園)
달성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에 있는 공원이다. 본래 달성토성이었다. 면적 12만 8,700m2. 도심 속에 숲이 우거진 시민의 휴식처로서, 삼한시대에 부족국가를 이루었던 달구벌(達句伐)의 성터라고 한다. 고려 중엽 이후 달성 서씨(達城徐氏)가 대대로 살던 사유지였으나, 조선 세종(世宗) 때 서씨 일문이 헌납하여 국유로 귀속되었다. 1905년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67년 5월 대구시에서 새로운 종합공원 조성계획을 세워 현재의 대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은 토성(土城) 1,600m의 사적과 산책도로 ·잔디 ·광장 ·화단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 600평의 종합문화관을 비롯하여 동물원 ·관풍루(觀風樓) ·망향루(望鄕樓)가 있다. 그 밖에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동상, 의병장 허위(許蔿)의 공덕비,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어린이 헌장비, 이상화 시비(李尙火詩碑) 등과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달성공원 서침나무
구계 서침선생이 헌납한 달성공원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한때 서침의 세거지였던 이곳을 지켜주는 수문장이다. 그의 올곧은 인품을 상징하여 '서침나무'라 불린다. 이 노거수는 대구시 보호수(지정번호 1-3)로 지정된 나무이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에 있는 서원이다. 1975년 2월 5일에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 1982년 3월 4일에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구암서원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구계선생이 조선초에, 달성 서씨 胄孫(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는데 임금께서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고 하면서 命換其址(명환기지)케 하고 蓮信(현재의 영선시장자리)과 新池(현재의 서문시장)下의 蒙利土地(몽리토지)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하고,南山古驛(남산고역)과 東山一帶(동산일대)의 땅을 下賜하며,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胄孫(주손) 구계선생이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臣(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 라고 쾌연히 사양하고는 일가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 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대구지방의 還穀利子(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주시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아 실시 하게 되었다. 그 뒤 대구부민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관리사인 백인당, 정문인 연비루, 동재(경례재), 서재(누학재), 강당(초현당), 내삼문(경앙문), 맨위에 사당인 숭현사가 있다. 구암서원은 정남향으로 대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망을 가지고 있고,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년)에 연구산(連龜山) 서남쪽(현재 대구초등학교 서남쪽 언덕)에 숭현사(崇賢祠)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을 봉향하였다. 이후 1717년(숙종 43년)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고, 1718년(숙종 44년) 3월에 서거정을 추가 배향하고, 1741년(영조 17년) 2월에 약봉 서성(徐渻)을, 1757년(영조 33년) 8월에 함재 서해(徐嶰)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복설하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 하였고, 숭현사를 1974년에 보수하였다. 1975년 2월 5일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되었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에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로 17길 20번지 연암공원내로 옮기고 2008년 8월27일 유림에 의해 약재 서사원(徐思遠)을 추향하였다
숭현사
숭현사(崇賢祠)는 先賢(선현)을 높이 받들어 제향하는 사당으로써 1665년(현종 6년)에 연구산(連龜山)에 세워졌는데, 1718년(숙종 44년)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의 구암서원 내에 있다.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배향 인물이 달성 서씨 대구 서씨이기 때문에 문중서원 성격이 강하다.
서침(徐沈)
서거정(徐居正, 1420년 ~ 1488년)
서해(徐解)
서성(徐省, 1588년 ∼ 1631년)
중심재(中心齋)
대구시 동구 용천로 30길 54-7
달성 서씨 시조 서진(徐晋)의 현손인 구계(龜溪)서침(徐沉)의 묘제를 주관 하는 제실 이다,
대구 숙천동 원모재(大邱淑泉洞遠慕齋)
대구광역시 동구 숙천동에 있었던 1900년대 건립된 달성 서씨 문중의 재실.
대구 숙천동 원모재는 조선 후기 대구의 유학자인 서사선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달성 서씨 인물인 서사선은 조선 후기 대구의 유학자이다. 서사선은 자가 정보(精甫), 호가 동고(東皐)이다. 사촌형인 낙재 서사원과 한강 정구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유일(遺逸)로 예빈시참봉에 올랐다. [[서사선₩₩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창의한 바 있다.
옥천서당(玉川書堂)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에 있는 조선 후기 서당.
옥천서당(玉川書堂)은 조선 후기 문신 서사선(徐思選)[1579~1651]을 제향하기 위해 1786년(정조 10)에 옥천서원으로 건립되었다. 서사선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정보(精甫), 호는 동고(東皐)이다. 종형 서사원(徐思遠)을 비롯하여 장현광(張顯光)·곽재겸(郭再謙)·손처눌(孫處訥)·정경세(鄭經世)에게 학문을 배웠다.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당시 경상도관찰사 정경세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한 후 거두어 모은 병기와 양식들을 국가에 바쳤다. 1636년(인조 14)에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한 후 동고정사(東皐精舍)를 건립하였고, 동고정사와 고산서원(孤山書院) 등지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옥천서당은 경상북도 경산시 도심에 위치해 있다. 경산오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180m 가량 떨어진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옥천서당은 1604년(선조 37) 서사선이 처가가 있는 경산현 상방동(上方洞)[현 경상북도 경산시 상방동]으로 이거하면서 세운 동고정사(東皐精舍)가 모체이다. 동고정사를 바탕으로 1786년(정조 10)에 지역 사림들이 경산현 북쪽 동산(東山) 아래[현 경산시청 주변]에 서사선을 제향하는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설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69년 방호리(芳湖里)에 있는 서사선의 사묘(私廟) 인근에 옥천서원 옛 건물의 부재를 활용하여 강당을 건립한 후 편액을 ‘옥천서당’이라 하였다. 이후 건물이 쇠락하자 문중 부로(父老)들이 회합하여 1948년 현재 위치에 강당과 사당, 동재·서재를 갖춘 옥천서당을 새롭게 재건하였다. 2009년에 서재를 참고하여 동재를 새롭게 건립하였다.
옥천서당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외삼문인 이연문(怡然門)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강당,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각각 위치한다. 이연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솟을지붕 건물로, 가구 형식은 3량가이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가구 형식은 5량가이다. 중앙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2칸씩 두었다.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여 대청과 이어지며, 건물의 좌우 측면과 배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동선을 편리하게 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홑처마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사당인 옥천사(玉川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구 형식은 3량가이다.
옥천서당은 사당인 옥천사에서 매년 음력 7월 17일에 서사선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내며, 매년 음력 3월 17일에는 부인 진산진씨(珍山陳氏)의 제사를 봉행한다. 또한 매년 5월 첫째 주에 후손들의 모임인 달성 서씨동고공종친회(達城徐氏東皐公宗親會)의 정기총회가 열린다.
옥천서당은 17세기 경산 지역을 대표하였던 서사선의 제향처로 조선 후기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또한 지역 유림의 공의로 서사선이 불천위로 지정된 후 지금까지 이곳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어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 배치 형태 등 조선 시대 서원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자료이다.
덕산서원(德山書院)
덕산서원(德山書院)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56번지에 있다. 대구 시민들은 도로명 주소 '청호로 46길 5-3 덕산서원'으로는 잘 가늠하기 어렵지만, '황금동 256 덕산서원'이라면 신천지아파트 입구 일대라는 것을 대략 떠올린다.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인 서원은 보통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황금동 신천지아파트 입구는 예전처럼 산 좋고 물 좋은 청정 지역은 못 된다. 오늘날의 덕천서원 자리는 산 속이 아니라 신흥 개발지 한복판이 되고 말았다. 물론 덕산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회 지역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이는 황금동의 본래 이름이 증언해준다. 황금동의 본명은 황청동(黃靑洞)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 부민들 일부는 이곳 산골로 피란했는데, 두 달 가량 뒤 의병을 일으키는 손처눌 선생이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들녘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룬다'는 뜻에서 이 일대에 "황청(黃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1977년, 저승의 다른 말인 황천(黃泉)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명을 황금동으로 바꾸어버렸다.
어쨌든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숨고,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덕산서원의 애초 터는 지금과 달리 한적한 자연 속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저 세월이 흐르고 개발과 도시화의 바람에 못 이겨 덕산서원도 결국은 주택가 안에 자리잡은 평범한 기와집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 덕산서원의 현판과 강당 마루가 보이는 풍경
덕산서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서섭은 달성서씨 판서공파의 파조(派祖)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아득한 뒷날, 서섭의 충절을 알게 된 자손들과 유림에서 1926년 그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에 덕산서원의 모태인 첨모재를 건립했다. 1954년 중수했고, 최근 대대적으로 경역을 확장하고 당우(堂宇)를 신축하여 덕산서원이라 편액하였다.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안내판을 읽으면서 본문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추정을 해본다. 서섭의 호에 은(隱)이 들어 있는 까닭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숨을 은'은 본래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등 이성계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고려 충신들의 호에 즐겨 사용된 글자이다. 그렇다면 서섭은 누구에게 협조를 하지 않다가 피해를 입었을까?
▲ 덕산서원 경내에 세워져 있는 서섭 선생 신도비
본문이 서섭을 '조선 초기의 문신'이라고 밝힌 점에 주목한다. 서석은 이성계 또는 이방원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숨어 살았던 인물인가? 그런데 뒤에 '세종 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서섭이 수양대군, 즉 세조의 권력 찬탈에 저항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서섭은 '간신들을 물리치소서'라는 취지의 '척간소(斥姦疏)'를 단종에게 올린다. 그는 '척간소'에서 '선왕(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죽고 난 뒤 경등을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보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곁에서 들은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나이다.' 하고 말한다. 서섭은 이 일로 귀양을 가고, 1453년(단종 2)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聞昔長沙有此人 듣자하니 옛날 장사에 귀양 간 사람이 있다던데 今人我亦被誣人 오늘날 나 또한 남의 모함을 당했네 天必降人同賦性 하늘이 사람에게 같은 성품을 내렸으니 惡何人也善何人 악한 사람 누구이며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귀양을 간 서섭은 위의 시 '재적소시(在謫所時)'를 남겼다. '재적소시'는 '유배지에 머물면서' 정도의 뜻이다. 시의 내용은 대략 하늘은 이 땅에 같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어째서 누군가는 악인이 되고 누군가는 선인이 되는지 알 수 없다는 탄식으로 헤아려진다. 과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남을 죽이고 내치고 구석진 곳에 가두는 것일까? 서섭은 권력을 향한 수양 무리의 잔인함을 개탄했다.
그러나 서섭은 자신의 귀양보다도 더한 슬픔과 고통을 불과 2년 뒤에 겪게 된다. 1455년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을 죽인다. 서섭은 충신들이 6월 9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네 마리 말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은 '문육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擧天奉日死於忠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받들어 충의로 죽으니 萬古吾東第一忠 만고의 우리나라 제일 가는 충신일세 男兒此世生無面 남아로서 이 세상에 살 면목이 없으니 誰識中心有血忠 누가 마음에 피 맺힌 충성 있음을 알리
1457년(세조 3) 10월 결국 단종은 세조의 핍박에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 세조가 보낸 사약(賜藥)을 든 사신이 유배지 영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그 순간, 단종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민간에는 단종의 주검이 청령포(淸?浦)에 떠있는 것을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莊陵) 자리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서섭은 단종의 원통한 마지막 순간을 듣고 통곡했다. 어린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산은 문득 텅 빈 듯했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하늘의 해도 빛을 잃었다. 모든 백성들이 목을 놓아 울부짖으니 집집마다 부모가 별세한 듯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 장차 죽어 저승에서 어린 임금을 어찌 뵐 수 있을까! 서섭은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을 써서 소년 임금의 애통한 원혼을 위로하고, 또 자신의 참담한 심사를 애써 달래었다.
山空木落日無光 산은 비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해도 빛을 잃었는데 痛哭家家考?喪 통곡소리 집집마다 요란하니 부모를 잃은 듯 堪愧微臣生在世 부끄럽구나 못난 신하 살아 이 세상에 있으니 他時地下面何相 뒷날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뵈올 것인가
세조의 후손들은 그 이후에도 잔인했다. 비명에 죽은 단종이 복원되는 데에는 240년도 더 걸렸다.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산군(魯山君) 대신 단종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당연히 서섭이 남긴 책과 글들도 금서(禁書)가 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쉬쉬' 하며 숨기기에 바빴다.
그 후 1920년, 후손 서의곤이 집을 수리하던 중 서섭이 남긴 문장들이 상자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무려 400년만에 서섭의 행적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난 찰나였다.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 서섭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재실 첨모당을 건축했고, 첨모당은 1994년에 이르러 덕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덕산서원 강학 공간에는 4칸 강당인 충정당, 각각 3칸 건물인 동재 구인재와 서재 존성재가 있다. 강당 뜰 남쪽에 서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과 구인제 사이 삼각지에는 서섭 선생 신도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제향 공간인 사당 경의사는 강당 뒤에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을 보여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유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서원 정문인 외삼문의 현판에는 숭절문(崇節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외삼문 현판에 '절개 절(節)'이 들어 있는 것은 서섭의 호 중 한 글자가 '숨을 은(隱)'인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첨모재 (瞻慕齋)
남은(南隱) 서섭(徐涉)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과 유림에서 묘소가 있는 이곳에 세운 건물이며 첨모재(瞻慕齋)이다. 서섭(徐涉)의 호는 남은(南隱), 判書公派(판서공파)의 派祖(파조)로 世宗朝(세종조)에 文科(문과)에 급제하여 文宗(문종)을 거쳐 端宗(단종)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大護軍(대호군)을 거쳐 資憲大夫吏曹判書(자헌대부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端宗初(단종초)에 王族(왕족)과 奸臣(간신)들의 跋扈(발호)를 경계하여 斥姦疏(척간소)로 改革(개혁)을 주장하다가 流配(유배)당하기도 하였다. 首陽大君(수양대군)의 王位纂奪(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落鄕(낙향)하여 號(호)를 南涯(남애)에서 南隱(남은)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도 그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聞寧越事變痛哭(문녕월사변통곡), 聞六臣殉節感吟(문륙신순절감음), 在謫所時詩(재적소시시)와 與孫格齋(여손격재) 業瑞(업서), 戒子孫說(계자손설), 伯兄親監祭文(백형친감제문)들이 포함된 遺稿(유고)와 그 行狀(행장)이 1924년 그가 살던 낡은집 친정에서 발견되어 늦게나마 그의 忠節(충절)을 알게 된 후손과 儒林(유림)에서 1926년 그의 墓所(묘소)아래 膽慕齋(담모재)를 건립, 그를 主享(주향)하고 1994년 그의 子(자)인 徐次元(서차원)과 아울러 두 父子(부자)를 配享(배향)하면서 儒林(유림)에서 德山書院(덕산서원)으로 改稱(개칭) 重建(중건)하였다. 坎元(감원)은 成宗(성종)때의 忠臣(충신)이며 成均生員(성균생원)으로 求言上疏(구언상소)를 올려 成宗(성종)의 失政(실정)을 直談(직담)하였다가 忠反爲罪(충반위죄)로 심한 고문을 당한 直臣(직신)인데 成宗實錄(성종실록)에도 詳載(상재)되어있으며 文集(문집)도 刊行(간행)하였다. 境內(경내)에는 位牌(위패)를 모신 景義祠(경의사)를 비롯하여 방 3칸, 대청 1칸의 正寢外(정침외)에 東西(동서)의 存誠齋(존성재), 求仁齋(구인재)와 南隱先生(남은선생) 神道碑閣(신도비각)이 함께 있다.
분양서원 (汾陽書院)
<전라북도 무주군 무퐁면 지성리에 있는 서원으로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취정(翠亭) 서효재(徐孝載)를 배향>
종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소재지; 전북 문주군 무풍면 지성길 119 (지성리 366-2)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 자리잡고 있는 「분양서원(汾陽書院,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조선 초기의 문신인 남은(南隱) 서섭(徐涉), 취정(翠亭) 서효재(徐孝載)를 배향하고 있습니다.서섭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후일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 하여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과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현재 「분양서원」에는 사우인 숭모사(崇慕祠)와 강당, 분양정사묘정비, 내·외삼문 등이 있습니다.
분양서원 연혁
- 1901년 달성서씨 문중의 서당 풍성당(豊城堂)을 현 위치로 옮기고 분양정사(汾陽精舍)로 개명 후 제향
- 1945년 숭모사(崇慕祠) 건립
- 1973년 분양서원(汾陽書院)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름
남은 서섭과 취정 서효재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 서섭은 세종(재위 1418∼1450)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후일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 하여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과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다.
달성 서씨 문중의 서당이었던 풍성당을 무풍면 지성리로 옮겨 고쳐 짓고, 1901년 분양정사라 하고 제사지내 오다가 1945년 동편에 숭모사를 세웠다. 1973년 분양서원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숭모사, 강당, 화수헌 1동, 수직사 1동 등이 있다. 숭모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강당은 앞면 4칸·옆면 1칸 크기이며,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 남은문집(南隱文集), 서섭의 문집. 1925년경 서석호가 편집·간행.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서섭(徐涉, 생몰년 미상)】조선 전기의 문신·유학자. 호 남은(남은). 본관 달성(달성). 경북 대구 금호읍 출생.
【서효재(徐孝載,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 계광(啓光). 호 취정(翠亭). 본관 달성. 대구출생. 성품이 순하고 말이 적었으며 효심이 지극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에 대구에서 대덕산 아래 무풍으로 이사하여 가족이 모두 무사하였다.
낙재집(樂齋集)
조선 중엽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서사원(徐思遠)의 문집. [저자] 서사원(徐思遠)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이다.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사망하였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구계서원(龜溪書院)
구계서원(龜溪書院)은 남차1리에 세웠던 서원으로, 광해군 5년(1613)에 현감 조인행(趙仁行)과 신경행(辛景行) 등이 인근의 사람들에게 통문을 보내, 청안현감과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서사원(徐思遠), 보령현감을 역임한 이득윤의 스승 박지화(朴枝華), 괴산현감을 지낸 이득윤(李得胤)을 배향하였다. 그 후 현종 7년(1666)에는 송시열의 문인 황처검(黃處儉) 등이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다시 이준경(李浚慶)과 헌릉참봉을 지낸 이당(李塘)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때 송시열에게 문의해 위치를 정하였는데, 이준경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서사원ㆍ박지화ㆍ이득윤ㆍ이당을 차례로 배향했다. 숙종 5년(1679)에는 현감 남한명(南漢明)이 상량문과 서원기 및 고적 사실을 써서 걸었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없어지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은 당시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중심이 되어 영조(英祖)와 노론(老論)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모반사건이다. 이인좌는 경기도와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의 선비들과 난을 모의했으며, 이들은 상여를 가장해 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수름재’를 거쳐 청주로 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주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도안을 비롯한 청안 일대가 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때 곡산연씨 가문의 연세홍(延世鴻)ㆍ연수창(延壽昌)은 의병을 모아 이인좌의 무리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연수창은 상당산성의 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사족(士族)들은 소론계도 있었지만, 노론계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계서원’은 고종 6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지금은 초석만 남아있다. 구계서원 터는 증평군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다사읍 이천리 이강서원(伊江書院)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39년(조선 인조 17년)에 창건해 19세기 중엽에 중건됐다.
이강서원은 산기슭 경사진 곳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으며 경내에는 강당인 완락당(琓樂堂), 동경재, 서의재, 이락루(二樂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완락당은 전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앞에 있는 이락루는 3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서사원은 조선 중기 명종에서 광해군 때의 학자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악재(樂齋)다. 전교 서흡(徐洽)의 아들이며, 큰아버지 서형(徐浻)에게 입양되었다. 달성 이천 출신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년) 청안현감에 부임해 학문 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뒤 1597년 옥과현감에 임명됐지만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했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 청안의 구계서원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악재집'(樂齋集)이 있다.
구고서원 추향제
단산면 사천1리에 소재한 구고서원은 단종때의 절신 돈암 서한정을 모신 서원이다.
서한정은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단종(端宗)이 손위(遜位: 왕위를 사양함)하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달성에서 가족을 이끌고 소백산(小白山)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구고리사(九皐里社)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돈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서한정의 학문에 대한 언급은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권득평이 쓴 제문에는 “청아한 절개와 탁월한 행실[淸操卓行]이 있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가장(家狀)에서도 학문과 관련한 것으로는 “과거를 폐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고 거상(居喪)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예에 따라 어김이 없었다.
밤낮으로 단정히 앉아서는 성리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였다.”라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여기서의 예는 당대 학자들이 모두 실천하고자 했던 『주자가례』로 보여진다.
이러한 구문을 통해 성리학을 체득하고, 몸소 실천하려 했던 조선 전기 학자의 모습을 서한정에게서도 잘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단종의 폐위와 함께 벼슬길을 접었던 그의 행적은 선비의 고고한 절개와 신하의 충을 실천한 것으로 후대에도 길이 남겨지게 되었다.
돈암 서한정을 배향한 서원으로 구고서원(九皐書院)이 있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어 구고서당(九皐書堂)이라는 현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구고서원 현판과 여러 부속건물의 현판은 책실(冊室)에 보관하였었는데, 근래에는 소수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한다
분양서원 (汾陽書院)
<전라북도 무주군 무퐁면 지성리에 있는 서원으로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취정(翠亭) 서효재(徐孝載)를 배향>
종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소재지; 전북 문주군 무풍면 지성길 119 (지성리 366-2)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 자리잡고 있는 「분양서원(汾陽書院,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
조선 초기의 문신인 남은(南隱) 서섭(徐涉), 취정(翠亭) 서효재(徐孝載)를 배향하고 있습니다.서섭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후일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 하여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과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현재 「분양서원」에는 사우인 숭모사(崇慕祠)와 강당, 분양정사묘정비, 내·외삼문 등이 있습니다.
용담재(龍潭齋)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1134-1번지에 있는 재실.
용담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재(怡齋) 서사진(徐思進)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효종 1년(1605)경에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 대지는 그 당시 서사진이 강학소를 만들어 교육에 전념하던 곳이라 한다.
상량문에 보이는 ‘숭정기원후오무자(崇禎紀元後五戊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연대를 가리킨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터를 매각하고 1976년 1km쯤 떨어진 북쪽 종중산에 그대로 옯긴 것이다. 웃면을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건물 전면에는 원주를, 나머지는 모두 네모 기둥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맨좌측에 2칸의 우물마루 대청을 두고 그 우측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 온돌방의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설치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놓인 제형판대공이 마루 도리를 받는 3량가로, 장혀와 상인방 사이에는 소로로 수장하였다. 용담재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견실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대체로 양호한 조선후기 재실이다.
다산사(茶山祠)
울산 다운동 음(陰) 10.10 1791년 서인충의 5세손인 서달급(徐達伋)이 다산사를 지어 제향하였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때 다산사도 훼철되었다.
서인충 묘비(徐仁忠墓碑)
울산광역시 동구 동부동에 있는 조선 후기 울산 출신 무신 서인충의 묘비.
망조당유사(望潮堂遺事)
1847년에 간행된 울산 출신 무신 서인충의 실기. 『망조당유사(望潮堂遺事)』는 임진왜란 때 울산과 인근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한 울산 출신 무신 서인충(徐仁忠)[1554~1610]의 행적을 담은 실기(實記)이다. 서인충의 본관은 달성서씨(達城)이며, 자는 방보(邦輔), 호는 망조당(望潮堂)이다.
다운동 다전마을 달성서씨 세거지
울산광역시 중구 다운동 다전마을에 있는 달성서씨 세거지. 다운동(茶雲洞)은 다전마을(茶田-)과 운곡마을을 합친 이름이다. 다전마을은 예전부터 차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증산사(甑山祠)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재실.
매곡동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서몽호이다. 서몽호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고, 수많은 공을 세우자 권율 장군과 어사 한준겸이 임금에게 그 공을 알려 훈련원주부를 제수받았다. 서몽호가 죽은 뒤에는 충절을 기리고자 영남의 유림들이 건의하여 경상감영의 지원으로 1791년 매곡리에 사당을 지었다. 이때 사우를 증산사라 하고, 당호를 행의당(行義堂)라 하고, 재호(齋號)를 지의재(知義齋)라 하고, 문을 숭의문(崇義門)이라 하였다.
1791년에 창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에 복원하였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이다.
장기향교(長鬐鄕校)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성길 92 (읍내리)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장기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 지었고, 1931년 군수 김영수가 읍성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방경(徐方慶) ·서극인(徐克仁)·이대임·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향교를 옮겨지을 때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내놓아 향교 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동산재(東山齋)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 12번지
서방경(徐方慶), 서극인(徐克仁), 서유원(徐惟遠) 세분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향림과 후손이 건립하였다. 서방경의 자(字)는 군길(君吉), 호(號)는 직재(直齋), 본관은 달성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晉)의 후손으로 귀계공(龜溪公) 서침(徐沈)의 7세손이다. 종질(從姪) 서극인, 죽계(竹溪) 이대임(李大任)과 임진왜란때 곽재우 휘하의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경주판관(慶州判官), 해주판관(海州判官)을 제수받고 세상을 떠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받았다. 서극인은 봉사(奉事)를 제수받았다.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창건된 증산서원(甑山書院)은 충열공 창계 서응시(忠烈公 昌溪 徐應時 ; 1531)을 배향하는 곳으로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복원하여 대지 200평에 건평 60평으로 세운 목조와가(木造瓦家)로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강당이 파손되자 그해 11월에 복원하였다. 강당은 4칸, 별묘 3칸, 고사 3칸으로 구성하였고 매년 음력 삼월 초팔일에 유림들과 함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다.
창계 서응시(昌溪 徐應時公)의 스승은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상소했으나 조정 신료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이때 공이 참모역할을 하다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를 하여 사적 제105호인 칠백의총에 안치 되었다.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
조선시대 학자 서시립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1년에 간행한 시문집.
2권 2책. 목판본. 1921년 후손 서석류(徐錫類)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척기(兪拓基)의 서문이, 권말에 민겸(閔謙)·장석영(張錫英)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수는 삼성록(三省錄), 권1은 시 11수, 잠(箴) 4편, 수록실기(手錄實記) 1편, 부록으로 상량문·행장·묘갈명 각 1편, 만(挽) 10편, 제문 4편, 봉안문·상향축문(常享祝文) 각 1편, 권2는 역시 부록으로 수창시(酬唱詩) 91수, 서찰 12편, 행록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록」은 저자의 할아버지 서언겸(徐彦謙)이 임진왜란 때 온 가족을 데리고 피난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1592년 4월 20일부터 1595년 9월 3일까지 그 때의 참담했던 일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시는 모두 차운(次韻)한 것으로, 수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수준이 높다. 잠은 「효자잠(孝子箴)」·「우애잠(友愛箴)」·「권학잠(勸學箴)」·「수기잠(修己箴)」 등으로, 자손들에게 훈계할 목적으로 쓴 것이다. 「수록실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이 겪었던 일과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기록한 글이다.
대구 도동 향산마을 백원서원(百源書院)
본래 이 터에 건물이 세워진 것은 1600년경이라 한다. 孝子(효자) 徐時立(서시립, 1578∼1665)의 호는 全歸(전귀), 자는 立之(입지)이다 고려 版圖判書(판도판서) 達城君(달성군) 徐晋(서진)의 后(후)로 壬亂時(임란시)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고 八公山(팔공산) 三省庵(삼성암)으로 피난하였는데 그의 극진한 孝行(효행)이 온 고을에 자자하였다. 때마침 정승 五峰(오봉) 李好閔(이호민)이 王子(왕자) 胎室使(태실사)로 南行(남행)하였다가 이 사실을 듣고 達城(달성) 孝子(효자) 徐時立(서시립) 其孝人稱類厥慈今日偶看三省錄(기효인칭류궐자금일우간삼성록) 有慈如比有兒宜(유자여유아의)라 詩(시)를 읊고 堂號(당호)를 全歸(전귀)라 지어주니 부모에게서 실로 온전히 나서 온전히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 旌閭(정여)가 내려오고 1692년(肅宗, 숙종 18) 전귀당 곁에 百源書院(백원서원)을 세워 그를 享祀(향사)했으니 百源(백원)은 孝(효)가 百行之源(백행지원)이라 함이다.
그러나 1864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은 제철되었고 남아오던 전귀당도 1945년 음력 섣달 그믐의 화재로 회진되었다. 다행히 유림의 호응으로 현재의 전귀당을 그 이듬해에 重建(중건)하게 되었다.
옥계서원(玉溪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 있었던 조선후기 서균형과 서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문
1798년(정조 2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균형(徐鈞衡)과 서변(徐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에 복원하지 못하였다.훼철되기 전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신문(神門)·중당(中堂)·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고사(庫舍) 등이 있었다.
임재집(臨齋集).
『임재집(臨齋集)』은 서찬규(徐贊奎)의 시문집으로서, 1909년 이화상(李華祥)의 편집을 거쳐 1931년 신현구(申鉉求)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두에 전우(田愚)의 서문, 권말에 이화상의 발문이 있다. 17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판본이다. 국립 중앙 도서관·성균관 대학교 도서관·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권1·2에 시 132수, 소(疏) 1편, 서(書) 10편, 권3∼권8에 서(書) 311편, 권9∼권12에 잡저 20편, 서(序) 26편, 권13∼권17에 기(記) 26편, 발(跋) 20편, 고축문 10편, 제문 14편, 애사 1편, 묘갈명 12편, 묘표 8편, 행장 7편, 전(傳) 1편, 부록으로 묘갈명 1편, 가장 1편, 가장후(家狀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書)는 스승 홍직필(洪直弼)과 조병덕(趙秉悳)·임헌회(任憲晦)·최익현(崔益鉉) 등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경전(經典)에 대한 질의와 한말의 정세에 관한 논술이 많다. 잡저 중 「기행(紀行)」은 홍직필이 살고 있던 경기도 노호(鷺湖)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문경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의 달천(達川)과 탄금대(彈琴臺)·화양동(華陽洞)·해인사 등지를 거쳐 달성의 본가에 돌아오는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을 상세히 기록한 기행문이다. 「교성보의(嶠省堡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방어책을 논한 것으로, 경상도 일원의 요새지에 성을 쌓고 해안 경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장하는 글이다. 「만필(漫筆)」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는 이(理)와 기(氣)임을 전제하고, 이(理)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氣) 속에 존재하여 이(理)가 기의 주(主)가 된다고 역설함으로써 이기 일원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체의 운행과 음양의 변화 원리를 서술하고 있다. 「잡기(雜記)」는 한말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임재일기(臨齋日記)
조선 후기의 문인인 서찬규(徐贊奎, 1825~1905)가 헌종 11년인 1845년부터 철종 12년인 1861년 5월 20일까지 약 17년간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생활일기.
19세기 경상도 대구 지역에 살았던 서찬규가 1845년 1월 1일부터 1861년 5월 20일까지 약 17년간 기록한 일기로, 하루에 이렇다 할 내용이 없는 날이라도 날씨만은 꼭 기록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의 일기를 꼬박꼬박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다음해인 1846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암행어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일기에는 이러한 관직생활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친우관계나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 일까지 모두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1800년대 중반 대구 지역에서의 생활 모습과 관직 생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11년에 책으로 발간하였다.
낙동정사(洛東精舍).임재 서찬규 기념관
낙동정사(洛東精舍·대구시 달성군 화원유원지 입구 오른편)가 달성군의 화원유원지 정비계획에 포함돼 헐릴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낙동정사는 구한말 대구지역 유림의 역사 및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보존 가치가 높다.
낙동정사는 1901년에 건립됐다. 이 정사는 구한말 대구를 대표하는 거유 임재 서찬규(1825~1905) 선생이 말년에 이곳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육성하는 강학소로 이용됐다. 대구지역 25개 문중이 4천576량(兩), 약 3억원을 갹출해 지은 건물이다. 임재의 유고집인 '임재문집'과 '임재일기', '낙동정사 도록', 고문서 등 약 1천 점에 달하는 낙동정사 관련 사료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다. 그 중 임재의 제자들로 구성된 '임연당학계안'에는 영남 기호학파의 연원과 인물, 강학 내용 등이 자세히 나와 있다.
임연당학계안에는 대구지역 파리장서(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유림단의 독립청원 운동)를 주도한 서건수(徐健洙) 지사(임재의 손자)를 비롯해 우성동, 우하교, 우경동, 우승기, 우찬기, 박순호, 이복래, 김용호 등 파리장서 관련 독립운동 수훈자 9명도 포함돼 있다. 또 임재 선생의 고손자는 일제 말기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의거'를 주도한 목민(木民) 서상교(徐尙敎) 독립지사다.
우종경 단양우씨 종중 사무국장은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보존이 잘 됐으나, 현재는 방치돼있어 안타깝다. 이곳에 관광호텔을 짓는다고 낙동정사를 허물면 역사적 명소가 사라지는 것이다. 대구지역 '파리장서 기념관' 또는 '임재 서찬규 기념관'으로 활용하면 역사교육 효과와 화원유원지 관광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국권회복단
1915년 2월 28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신상태, 남형우, 김재열, 홍주일, 박영모, 이영국, 김규, 정순영, 서병룡, 황병기 등 13인의 대구 청년들이 안일암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였다.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민족일보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대구 3·8만세운동
3·8만세 운동은 '박상진·윤상태·서상일 등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는 독립운동가 이응창 선생과 서상일 선생이 설립한 70년 전통의 사학으로, ‘진실’이라는 교훈 아래 바른 마음 참된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달서지역 명문 여자학교다.
조양회관
조양회관은 1992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의 주도로 세워진 교육회관으로, 대구 민중계몽운동 진원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현재는 대구 지역 광복회 사무실이 들어서 있으며, 항일독립운동 전시실이 조성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서상일묘
서울 강북구 수유리는 애국지사와 민주열사 등의 묘역이 많다. 4.19국립 민주묘역은 물론 후손이 없는 17위 무후 광복군 합동묘역, 애국선열 묘역 등도 조성돼 있다.
북한산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북한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묘역을 가르키는 표지판도 잘 돼 있다.
대동청년당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비밀결사조직. 대동청년당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계통의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등에 의해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었다
백산서원(白山書院)
O 소 재 지 : 영풍군 단산면 사천리
O 관 리 자 : 사림(士林)
O 주 손 : 충의공의 손자 서병극
망국(亡國)의 설한(雪恨)을 위하여 분기(奮起)한 우국의사(憂國義士) 죽림(竹林) 서재승(徐在承)의 붉은 충절(忠節)을 추모(追慕)하여서 건립(建立)한 서원(書院)이다. 1951년에 사림(士林)이 건의(建議)하여서 창의사(彰義祠)를 짓고 1973년에 사림(士林)은 도회(都會)에서 서원(書院)으로 승격하고 1980년에 사림도회(士林都會)에서 충의(忠義)의 사시(私諡)를 받았다. 경내(境內)의 감모문(感慕門)을 들어가면 명사루(明沙樓) 창의정(彰義亭) 동재(東齋) 월영당(月瀛堂) 학구제(學求齊) 서장각(書藏閣) 서재(西齋) 중앙(中央)에는 강당(講堂)이 있음 동쪽 옆에로 송평정(松坪亭) 대암정사(大巖精舍)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 및 정전재(井田齋)와 주사(廚舍) 충의고택{忠義古宅:12동(棟)99간(間)}등이 즐비하고 총건평(總建坪)이 378평이며 원재(院財)는 논, 밭, 임야등의 총면적이 8만 5청평 그리고 1만 5청권의 장서(藏書)를 소장(所藏)하고 있으며 신도비가 있다 1980년 8월 15일의 광복절을 기하여 건국포상을 받았다.
대구 내곡동 심락재(大邱內谷洞尋樂齋)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에 있는 18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달성 서씨 문중 재실.
대구 내곡동 심락재는 세심헌(洗心軒) 서도형(徐道珩)을 추모하는 재실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구 내곡동 심락재 주인 서도형이 직접 지은 「심락재기」에 고간지(古干支)로 상장:경(上章:庚) 곤돈:자(困敦:子)나타나는 것으로 봐, 대구 내곡동 심락재는 서도형 생존시인 경진년인 1720년으로 추측된다. 서도형은 본래 경산 중방(中方)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이곳 노곡(老谷)[노실]으로 이거하여 많은 문하생을 배출한 인물이다.
대구 대림동 서종호 주택
개항기에 건립된 대구광역시 동구 대림동에 있었던 달성서씨 문중의 재실이자 주택.
1995년 『대구시사』에서는 대구 대림동 서진영 주택으로, 2006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대구 대림동 서종호 주택으로 적혀 있다.
달성서씨 시조 서진의 7대손인 서건손이 울산입향조
태화동에서 태화강을 따라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신삼호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다운(茶雲)동에 들어서게 되고 이곳이 바로 달성 서씨 감찰공파(監察公派)의 집성촌이다. 울산사람들은 흔히 달성 서씨를 다전서씨라 부른다. 400여년 전부터 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달성 서씨 대종회 옛 구암서원 기부채납..."구계 서침 선생, 정신 계승"
달성 서씨 대종회(회장 서영택)가 대구 중구 동산동 한옥마을에 자리한 옛 구암서원을 대구시에 기부했다. 구암서원은 조선조 세종 임금 당시 세거지인 달성공원을 나라에 헌납하고 포상 대신 백성들의 환곡 이자를 감면해 달라는 청이 허락돼,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준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언제나 꼿꼿했던 달성서씨 문중, 손님맞이 음식 - 사천리 달성서씨 새내마을
마을 곳곳에 500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천리 새내마을.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고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돈암 서한정’ 선생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선비 마을인 동시에, 아직까지도 마을 곳곳에 서원이나 정자들이 남아있는 살아있는 역사촌이기도 하다.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재사(榮州 龍穴里 達城徐氏 齋舍)
이 건물은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부호군(副護軍)인 서승절(徐承節)의 묘소수호를 위해 조선후기에 건립된 재사이다. 각 부재에서 중수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여러차례 중수하면서 규모를 눌렸던 것으로 보여진다. 건물배치는 "一"자형 4칸 아래채와 까치구멍집 안채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고 안채 앞 양쪽으로 방안간채와 뒤주채가 마주보고 있다. 안채의 상부가구는 5량가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 달성서씨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1리에 있는 달성 서씨 동성 마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은 달성 서씨(達城徐氏)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1570년(선조 3)경 영동 김씨(永同金氏)들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1670년 조선 효종(孝宗) 때 천안 군수 달성인 서변(徐忭)이 임금에게 직소하였다가 곤장을 맞고 죽자 그 후손들이 피신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서씨들의 세거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양산 달성서씨집성촌(達城徐氏集姓村)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몽호·서의손·서두조를 입향조로 하는 달성 서씨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들. 서씨의 중심 본관은 이천서씨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것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에는 이천서씨에서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부여 등이 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서진(徐晋)으로 고려 때 봉익대부판도판서 벼슬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지고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세거하게 되어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였다.
중방동 달성 서씨 집성촌(中方洞 達城 徐氏 集姓村)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에 있는 달성 서씨 동성 마을. 중방동 달성 서씨 집성촌은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달성 서씨의 동성 마을이다. 달성 서씨 시조는 서진(徐晉)으로, 고려 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서진의 후손들은 대구를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경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로 분가하였다. 중방동에는 1755년(영조 31)부터 달성 서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중방 서씨’라 부르기도 한다.
칠곡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순조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세거 성씨. 달성 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 서진(徐晉)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判圖判書) 등을 역임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져 달성[현재 대구광역시]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곳에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고 있다.
청도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대건(徐大建)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청도군의 세거 성씨. 달성 서씨(達城徐氏) 시조 서진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 판서(判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달성[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시조 서진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穎)까지 삼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고 하며, 이에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달성 서씨는 현감공파(縣監公派)·학유공파(學諭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파로 나뉘어졌다.
창원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사일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 성씨.
김천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수창(徐壽昌)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김천시의 세거 성씨.
성주 달성서씨(達城徐氏)
영조(英祖)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현감공파(縣監公派) 16세손(世孫) 서영석(徐榮碩)이 약(約)250년전(年前)에 성주읍(星州邑) 선남면(船南面), 벽진면(碧珍面), 월항면(月恒面) 인촌리(仁村里) 등지(等地)에 자리를 잡아 현재(現在)까지 세거(世居)해 오고있다.17세손(世孫) 서태걸(徐泰杰)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17세손(世孫) 서만기(徐萬起)는 행검사우진중(行儉士友進重), 영묘박사(英廟博士)였고 21세손(世孫) 서경홍(徐慶弘)은 선원각참봉(璿源閣參奉)을 지냈다. 17세손(世孫) 서태걸(徐泰杰)의 자손(子孫)은 벽진면(碧珍面) 운정리(雲亭里), 월항면(月恒面) 인촌리(仁村里)에 살고 있으며, 21세손(世孫) 서경홍(徐慶弘)의 자손(子孫)은 선남면(船南面) 용신리(龍新里) 등지(等地)에 살고 있다.
경산 달성서씨(達成 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사선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영천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도(徐渡)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세거 성씨.
음성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관준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순창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부안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상구·서산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여수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득선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세거 성씨.
마산 회원동 달성 서씨 시혜불망비(馬山檜原洞達城徐氏施惠不忘碑)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에 있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부인의 비석. 1908년 서모(徐某)라는 여인이 갑부 최씨(崔氏) 가문에 출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이 죽자 전 유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희사(喜捨)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베푼 달성 서씨 부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1916년 4월 동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비에는 ‘부인 달성 서씨 시혜 불망비(婦人達城徐氏施惠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대구 중구 진골목
대구 중구 진골길31에 위치한 진골목은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진(긴)골목입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근면 대회에서 남자들이 나랏빚을 갚기 위해 금연을 결의하자 진골목에 살던 일곱 분의 부인이 패물을 바쳤고 패물 헌납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청호재(菁湖齋)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 있는 달성 서씨 재사(齋舍). 청호재는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과 내외종간(內外從間)의 정을 끊고 의리를 밝혀 영천으로 이거(移居)하여 학문과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마친 서숙원(徐叔元)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구암마을 좌측 경부고속도로 아래 구암안길을 따라서 800여m 가다가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100여m 더 들어가면 있다. 갈림길에서 100여m 직진하면 고속도로 아래 터널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 300m 더 들어가면 상로재가 있다.
청호재는 『중수기(重修記)』 기록에 의하면 1728년에 사림의 공의로 창건되었고, 이후 건물이 쇄락하여 1936년에 중수하고 50년 후인 1986년 풍우로 인해 퇴락한 것을 다시 한번 중수하였다. 2007년에는 기와에 이끼가 끼고 누수가 심해져 도리와 연목이 부식되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중수 번와를 하였다. 이때 서재·대문채·주사 등 부속 건물들도 함께 보수되었다.
감모재(感慕齋)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에 있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재실. 경주시 강동면 단구리 646번지에 있다. 연산군 때 벼슬을 단념하고 단구리에 들어와 마을을 개척한 진사 서용원(徐勇元)과 그의 손자 덕윤(德潤)·덕공(德恭)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1925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4량가(四梁架)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렬로 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으로, 대청과 방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마감하고 중앙에 계단을 만들었으며 막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서문시장(西門市場)
서문시장(西門市場)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재래시장으로, 대구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의 2대 장터를 이루고 있으며, 대구장이라고 불리던 조선 시대부터 서울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주로 섬유와 직물 품목을 취급하고 있으며, 대구권의 중심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6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 내에 4천 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으며, 주위에도 다양한 상권이 발달(동산상가, 건해산물 등)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토루(土樓)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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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
같이 보기
- 이천 서씨
- 대구 서씨
- 달성 서씨
- 부여 서씨
- 연산 서씨
- 남양 서씨
- 당성 서씨
- 봉성 서씨
- 절강 서씨
- 중국 서씨
- 일본 서씨
- 몽고서씨
- 러시아서씨
- 튀르키예서씨
- 멕시코서씨
- 불가리아서씨
- 헝가리서씨
- 중앙아시아서씨
- 카자흐스탄서씨
- 우즈베키스탄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