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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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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徐命膺)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온라인 참조:"서명응초상",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대표명칭 서명응
한자표기 徐命膺
생몰년 1716-1787
본관 대구(大邱)
보만재(保晩齋)
군수(君受)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직함 부제학, 이조판서, 정승
서종옥(徐宗玉)
이집(李㙫)의 딸
자녀 서호수(徐浩修)


정의

서명응(1716∼178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서문유(徐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李㙫)의 딸이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형이다.

활동사항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상신(相臣: 정승)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 절대적인 찬획(贊劃: 영향)을 끼쳤다.

학문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학문 정신은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

악보 편찬

조선후기 방대한 분량의 악서를 남겼다.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의 악고(樂考)를 지었다. 1759년(영조 35) 당시 왕명으로 진행된 악보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과 함께 세종·세조 때의 궁중음악의 악곡들을 수집·정리하여 『대악전보』 『대악후보』를 편찬했다. 영조(1724~1776) 때 그는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궁중의식을 위한 악장집인 『국조악장』(國朝樂章)을 편찬하였다. 정조대의 『시악화성』(詩樂和聲)· 『국조시악』(國朝詩樂)· 『악통』(樂通)과 같은 음악이론서는 모두 서명응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저술한 악서(樂書)이다. 정조가 악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한 것은 모두 동궁시절 스승이었던 서명응의 영향에 기인한다.[2]

시각자료

갤러리

지식 관계망

  • 대구 서씨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서명응 서호수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서호수 서유구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서명응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서명응 서명선 A는 형제 B가 있다 A ekc:hasBrother B
서명응 초상 서명응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서명응 정조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태진, "서명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온라인 참조:"서명응",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장원목, 「보만재 서명응의 생애와 사상 ; 보만재 서명응의 생애와 학문 -학문적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vol.22,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 조창록, 「조선조 개성의 학풍과 서명응 가의 학문」, 『대동문화연구』vol.4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4
    • 조창록, 「여행의 역사 -여행과 한문학1 : 徐命膺(서명응)과 趙嚴(조엄), 두 실학자의 백두산기행 - 「遊白頭山記(유백두산기)」」, 『동방한문학』vol.59, 동방한문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