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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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徐庶)

삼국 시대 촉나라 영천(潁川) 사람. 유비(劉備)의 참모로 자는 원직(元直)이며, 본명은 서복(徐福)이다. 젊었을 때는 임협(任俠)으로 칼을 쓰며 살다가 나중에 생각을 고쳐 학문에 힘썼다.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에 살았는데 제갈량(諸葛亮)과 친구로 사귀었다. 유비가 신야(新野)에 진을 쳤을 때 찾아가 귀순하여 신임을 받았다. 어머니가 조조(曹操)에게 붙잡혀 협박을 받자 조조에게 돌아갔다. 그때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했다. 위문제(魏文帝) 황초(黃初) 연간에 관직이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올랐다. 병으로 죽었다.

그의 집안은 단가(單家)였다.

격검(擊劍)의 명수였으며, 의협심이 강하여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다가 관원에게 붙잡혔다.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났고, 이후 칼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때 동향인 석도(石韜)와 교제하였다.

중평(中平) 연간에 전란을 피하여 석도와 함께 형주(荊州)로 갔고, 사마휘(司馬徽)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이때 제갈량(諸葛亮) · 맹건(孟建)과 교제하였다.

서서(徐庶) · 맹건 · 석도는 학문을 깊이 이해하려 하였으나, 제갈량은 요점을 익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서서(徐庶) · 맹건 · 석도는 임관하면 자사(刺史)나 태수(太守) 정도는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때 즈음에 유비(劉備)는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는 유비를 만났고, 유비는 그를 유능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서서(徐庶)는 제갈량을 천거하였고, 유비가 자신이 제갈량을 데려오도록 하자 "저는 그를 만날 수는 있지만, 데려오지는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고사하였다. 이로써 유비가 직접 가 제갈량을 데려왔다.

이후 조조는 유비에게 패하였고, 이때 서서(徐庶)의 모친이 조조군의 포로가 되었다. 서서(徐庶)는 유비에 작별 인사를 하고 조조에게 갔고, 위(魏) 건국 후에는 팽성상(彭城相)을 지내는 한편 우중랑장(右中郞將) ·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승진하였으며 석도는 태수와 전농교위(典農校尉)를 역임하였다. 맹건은 정동장군(征東將軍) ·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되었다.

훗날 제갈량은 북벌(北伐)을 할 때, 서서(徐庶)와 석도의 관직을 듣고는 "위에 인재가 그렇게 많은가? 어찌하여 두 사람이 쓰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청룡(靑龍) 2년(234년), 서서(徐庶)는 팽성(彭城)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서서(徐庶)는 어사중승 재임 시에도 서복(徐福)이라 하였기 때문에, 말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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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徐偃王(서언왕)(伯益卅三世孫)—二世徐寶宗字棟、徐寶衡、徐寶明——三世徐滄——四世徐平——五世徐瑯——六世徐璞——七世徐瑩——八世徐陽——九世徐仁——十世徐忠——十一世孫徐興、徐君(徐國國君)——十二世徐秀字章翳——十三世徐雅居南昌郡——十四世徐勝——十五世徐樞居河南偃師——十六世徐釗——十七世徐相——十八世徐匯——十九世徐燁——二十世徐坩——廿一世徐銘遷東海郡瑯琊——廿二世徐龍——廿三世徐福(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徐遜(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徐真、——廿六世徐尚——廿七世徐天——廿八世徐守、——廿九世徐魯——三十世徐振、徐揆——卅一世徐錫——卅二世徐芳、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徐秋(志子)——卅四世徐昶——卅五世徐晟、——卅六世徐綬——卅七世徐升、——卅八世徐喬——卅九世徐琰、——四十世徐垓——四一世徐怡居河南偃師——四二世徐賢——四三世徐禮——四四世徐宗——四五世徐成——四六世徐漢——四七世徐靈——四八世徐中(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徐佃——五十世徐豫、徐章(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徐倉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徐田(衢州2代)——五三世徐泉(衢州3代)——五四世徐昌(衢州4代)、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徐陵(507-583,儒士)、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徐惟(衢州9代585-668)、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徐盛公(洎次子)居江西、徐奇(洎季子)居丹陽、徐洪官衢州刺史(洎四子)居信安、徐攀(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徐柔(633-715,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徐矜(636-720,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徐務(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徐敏(衢州12代字大立,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徐珍公(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徐玖守居浙江信安、徐珖居建安、徐玠(937-942,南唐宰相)、徐宰(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徐晦長子)遷居臨沂、徐湖(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徐江(狀元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徐回(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徐陶(700-770,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徐堅(衢州15代,回公長子)、徐寅(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徐商(859-873,字義聲,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宰相)——六十七世徐仁嗣(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徐孝嗣(商公次子)、徐彥若(888-904,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宰相)——六十八世徐綰(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徐溫(862-927,字敦美,吳國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徐知訓、徐知詢、徐知誥(南唐皇帝養子李升)、徐知諫、徐知證、徐知諤、徐知海(885-968)——七十一世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中華徐氏入閩徐矜公(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一門22名進士:1、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삼국지(三國志) 현인 서서(徐庶)와의 만남

수경 선생과의 자리를 물리고 잠자리에 든 유비는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것은 수경 선생으로 부터 조언 받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생각이 산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밤이 한층 깊어가는 중에, 수경 선생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 원직이구먼, 유표를 만난다고 형주에 가지 않았나 ?"

느닷없는 수경 선생의 소소한 말소리에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경 선생의 질문이 이어진다.

"어쩌다가 한밤중에 여기까지 왔는고 ?"

그러자 늦은 밤중에 찾아온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주부에 다녀오긴 했으나, 유경승 그 사람은 선량하기는 하나, 큰 뜻을 품지 않고 허명이나 구할 뿐이더군요. 이틀 만에 단점이 눈에 뵈더이다. 유표는 선(善)은 좋아하나 제대로 쓰진 못하고, 악(惡)은 미워하나, 제거하진 못했습니다. 밖으론 장수(將帥)들을 부리지 못하고, 안으로는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더군요. 그러니 그쪽에 투신했다간 조만간 화를 입겠습니다. 그래, 저를 붙잡을까 봐 서둘러 밤중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수경 선생은 밤중에 찾아온 사내를 집 안으로 들이면서,

"쉿... 조용히 하게, 다른 손님이 계시다네."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밤중에 찾아온 사내는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아, 그렇습니까 ? 누가 오셨는데요 ?"

하고, 물었는데, 이미 유비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사내가 들어 오고 있는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예를 표하며 인사하였다.

"좌장군 유비가 인사드립니다."

"이제보니 유황숙이셨군요. 인연이 있었습니다."

"응 ? 선생이셨군요."

유비는 비로서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들고 보니, 이 사내는 아침에 양양 거리에서 자신이 타고온 적로마를 평가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 유비는 반가운 얼굴로 묻는다.

"혹시 선생이 와룡이나 봉추 선생이십니까 ?"

"저는 와룡도 봉추도 아닙니다. 제 이름은 서서(徐庶)이고 자는 원직(元直)이라 합니다."

"방금 안에서 선생 말씀을 들었는데, 한번에 유경승의 폐단을 꿰뚫어 보시더군요. 또 아침에는 적로마 조차 알아 봐 주시고...선생은 와룡과 봉추를 능가하시는 분이 틀림 없습니다."

하고, 유비가 말하자, 서서는,

"저를 와룡과 봉추에 비교하면, 별빛을 달빛에 비교하는 꼴이지요."

하고, 대답한다. 유비가 그 말을 듣고, 허리를 굽히며,

"선생, 너무 겸손하십니다."

하고, 말을 하니, 서서에 뒤에 서있던 수경 선생이 입을 연다.

"이보게,원직, 현덕 말이 맞네.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은 자는 종종 겸손을 가장하지..."

서서는 수경 선생의 말을 듣자, 빙그레 웃어 보인다. 그러면서,

"황숙, 앉으시지요."

하고, 유비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한다.

이리하여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앉게 되었다.

서서가 유비에게 입을 연다.

"유황숙께서 인의로우시다는 말을 듣고, 그때 적로마로 시험해 보았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더군요."

유비가 대답한다.

"적로마가 주인을 해친다는 선생의 말씀이 적중했지요. 그때 말이 단계에 빠져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요."

"네, 적로마가 해치는 것은 평범한 주인이고, 현명한 주인은 해치지 못합니다. 제가 형주에 가기 전에 신야에 들렸는데, 백성들이 민요를 부르더군요.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

서서는 이렇게 말하며 신야의 백성들이 즐겨 부른다는 민요의 가사를 읽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新野牧 (신야목)

劉皇叔 (유황숙)

自到此 (자도차)

民農足 (민농족)


신야목

유황숙

이곳에 온 뒤로

우리 살림이 좋아졌네.


서서의 말이 이어진다.

"이런 민요를 듣고 나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유현덕이란 사람이 신야에 온 지 고작 1년밖에 안 되었는데, 백성들의 이런 칭송을 받다니.. 과연 유현덕은 인의 군자로다 ! 하고 말이죠. 앞으로 황숙이 영광을 누리든 몰락하든 , 이기든 지든 간에, 항상 민심은 따를 것이다 생각했지요. 또 민심을 얻는 사람이 천하를 얻게 될 것은 자명(自明)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서서가 말을 마치자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가서 무릅을 꿇어 앉는다.

"현덕 ! 왜 이러시오 ?"

서서는 놀라며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그러자 자세를 바로 한 유비가 두 손을 모아 올리며 입을 열어,

"방금 원직 선생의 말씀이 제 평생 가장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칼로 가슴이 에이는 듯 하군요. 통쾌합니다. 선생 ! 유비가 재주가 없으니 선생께서 군사(軍師)가 되어 조석으로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고, 경건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러자 서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비의 앞으로 다가와 예를 표하며,

"저는 재주와 학문이 모자라, 그런 큰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유비의 부탁이 이어진다.

"저는 20 여 년을 선생 같은 현인이 도와주시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선생과의 만남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습니다. 부디 선생께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유비는 말을 마치고 스승에 대한 예로써 서서에게 절을 해 보였다.

서서가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황숙의 마음은 감격스러우나 , 군사같은 큰 책임은 정말 맡을 수 없습니다."

유비가 그 말을 듣고 낙담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던 수경 선생이,

"이보게 서서, 유황숙이 이렇게 몸을 낮춰 부탁하잖나, 무릎을 꿇은 것 만으로도 이미 성의는 보였네. 승낙하게나."

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서서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서서는 얼굴을 들어 수경 성생을 바라보았다. 수경 선생은 서서를 향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네의 학문은 쓸모없는 것이 되지 않겠나 ? 자고로 현명한 주인은 얻기 어려운 법이네, 유황숙께서 지금까진 시운이 따르지 않았으나, 현명한 주인임은 틀림 없지. 조만간에 대업을 이룰 분이야. 오늘 두 사람이 여기서 만나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지..."

수경 선생이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 서서는 수경 선생과 유비를 번갈아 쳐다보며 갈등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이런 모습을 지켜 보던 유비는 수경 선생의 말씀이 끝나자, 서서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려 보이며,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또 다시 절을 해 보였다. 그러자 서서가 유비의 앞으로 다가가, 두 무릎을 꿇고 몸믈 세우며,

"서서,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유비에게 답례의 절을 해보인다. 유비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하오 !(好) 선생, 일어나시지요."

하고, 서서의 몸을 손수 일으켜 주었다.

두 사람 사이로 수경 선생이 다가오며 기쁜 어조로 말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극히 경사스런 일이오. 축하하오. "

그때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공, 주공 !"

"오 ! 자룡이군 !"

목소리를 알아 본 유비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제 부장 조운이 찾으러 왔군요."

수경 선생이 그 소리를 듣고,

"상산 조자룡, 그 이름은 천하가 다 알지 않소 ? 어서 들어오라고 하시오."

유비가 방문을 열고 밖을 향하여 소리친다.

"자룡 ?"

"주공 ?"

어둠 속에서 조자룡이 부하 군사들과 함께 초당 앞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무릅을 꿇으며,

"주공 !"

"자룡, 여긴 어떻게 찾아 왔는가 ?"

"밤새 주공을 찾아 다니다가 말발굽 흔적을 발견하고 뒤따라 왔습니다."

"충성스럽구나."

유비는 이렇게 말하고 난 뒤, 조운의 손을 잡고 수경과 서서를 향해,

"이쪽은 수경 선생과 서서 선생일쎄, 이쪽은 조운, 조자룡입니다."

하고, 양쪽을 번갈아 소개하였다.

이튼 날, 유비와 서서는 조운의 호위를 받으며 신야성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유비는 수하 장수를 모아놓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다할 전략없이 싸움에 임한 관계로 번번히 패하기만 하였소. 그러나 이제는 지략과 권모가 뛰어난 현인을 모시게 되었으니 한없이 기쁜 일이오. 허니, 여러분들께서는 서서 선생의 말씀을 쫒아 모든 일을 행하도록 하시오. 선생의 말씀은 곧 군령이니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 주오. 그러면 작금의 정세에 대해 선생께서 말씀하시겠소. 자 선생 !..."

서서는 유비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조조가 원소를 제압한 뒤 1년 동안 휴식기를 가지며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정비했으니, 다시 천하를 노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당연히 형주 9군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표에게 의지하여 신야에 주둔하고 있으니, 당연히 조조로 부터 가장 먼저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조조는 분명 내년 봄에 대군을 일으킬 겁니다. 조조의 평소 용병술 대로라면 대군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정예병으로 형양을 공격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가 원하는 것은 승리나 전리품이 아닙니다. 조조는 선봉군을 이용해 형주군의 방비의 허실과 약점, 심지어는 유표군의 장단점을 캐내려 할 겁니다."

유비가 그 말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예전에 조조와 싸울 적에 이해 안되던 부분이 많았소. 오늘 군사의 말을 들으니 다 이해가 되는구려."

서서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일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운장과 자룡은 각각 부대를 이끌고 신야성 30리 밖에 군영을 구축하고 주둔하시오. 운장의 군영은 허이고 자룡의 군영은 실입니다.

두 군영이 신야성과 협력하며 기각지세를 형성하면 허와 실이 상응하면서 조조군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둘째, 손건과 미방은 계속 군마를 모아 군세를 확충하시오. 내년의 대전에 대비해야 합니다. "

실전 경험을 둘째로 치면 서운해 할 정도로 온갖 전쟁터를 바람처럼 누빈 관우가 조금은 불만을 가진 어조로 입을 연다.

"군사께선 조조의 속 마음을 들여다 보신 듯이 일사천리로 말씀하셨는데, 실전에서는 이론과 다른 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군사께선 우리의 준비만 말씀하셨지 조조가 언제 쯤 공격해올 지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셨소. 우리의 준비가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니오 ?"

서서가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이고 입을 연다.

"앞으로 한 달 이후가 될 것이오. 하루 이틀 이상의 오차는 안 날 겁니다."

그러자 장비가 투덜거리 듯이 반문한다.

"왜 꼭 한 달 이후요 ? 내가 조조라면 내일 당장 올 거요 !"

사실, 장비도 서서가 군사로 추대되어 주군 유비와 단상에 마주 앉고, 관우와 장비, 조운은 단하에 쪼르라니 마주 보고 앉은 것에 불만이 있었다. 한 마디로 굴러 들어온 돌이 (서서), 박힌 돌(관우,장비,조운, 손건,미방 등등...)을 빼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울러 새로 추대된 군사의 실력도 검증 된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 그러려니 장비의 투덜거린 질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장비의 말 끝에 관우조차 한 마디 덧 붙이는데,

"셋째 말이 맞소. 내가 선생처럼 점을 칠 줄은 모르나 약간의 병법은 알고 있소. 신속한 용병이 가능해야 좋은 장수가 아니겠소 ? "

하고, 말하며, 군사 서서의 말을 근거없는 점술(占術)로 치부하듯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이들의 대화를 유비는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그렇다고 애써 모신, 군사 서서의 의견을 묵살할 수도 없고, 도원 결의한 이후로 수많은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의형제의 의견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난처한 유비의 입장을 아는 서서가,

"관장군께선 겸손하시군요. 병법을 잘 알고 계시는 관장군은 좋은 장수십니다. 하지만 병사를 부리려면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지, 의욕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며칠 뒤면 형양 일대는 가을장마 계절입니다. 길게는 20일 까지 가지요. 게다가 땅이 마르려면 닷새는 걸립니다. 조조군이 허도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닷새는 걸리겠지요. 조조의 정예병은 대부분 북방의 철기병이니 진흙탕 속에서 싸우려 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조조군은 한 달 뒤에 온다고 했습니다."

서서가 자신있게 조조군의 공격개시 시점을 이렇게 설명하자, 좌중의 모두는 <앗 !, 응 ?> 하고, 속으로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것은 유비도 마찬가지로, 그는 이전의 분위기에 할 말을 잃고 있다가 서서의 말이 끝나자 눈을 번쩍 떠 보이며 입을 연다.

"여러분 !? 어서 군사의 명령에 따라 맡은 임무를 수행하시오."

순간, 군사의 명을 따르겠다는 의사의 표시로 좌중에 자리한 장수와 모사가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비의 명이 이어진다.

"명심하시오. 군사의 말은 모두 군령이오."

"존명 !"

유비의 명령에는 모두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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