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京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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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앙 각 관서(官署)와 그 관직(官職), 또는 그 관원(官員).

개설

관서, 관직, 관원을 아울러 관(官)이라 한다. 경관(京官)은 중앙에 있는 관서, 그 관서에 설치한 관직, 그 관직을 맡은 관원을 뜻한다. 조선의 경관은 태조 개국 초의 관제가 태종대에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으로 인하여 틀이 바뀌고, 세조대의 종합적인 정비를 거쳐 『경국대전』의 관제가 되었다. 이후 조선중기와 후기의 변천이 『속대전』, 『대전통편』을 거쳐 『대전회통』에 종합되어 있다. 조선의 경관은 왕권 아래에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각 사의 속아문(屬衙門) 틀과 당상(堂上)-참상(參上)-참외(參外)의 구분으로 짜여 있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에는 본관제의 틀 위에서 경관과 향리(鄕吏)로 나뉘었다. 고려의 경관은 향리와 짝을 이루는 말이었다. 고려중기를 지나면서 본관제가 해이해져 해체되고, 후기에 유향품관 내지 재지사족이 보편화하고 관과 이(吏)가 분화하면서 경관은 외관과 짝을 이루는 말로 바뀌어 갔다. 세종대에는 경관과 외관을 통합하는 인사 관리의 틀이 갖추어지자 경관에 대한 우대가 줄어들었다.

1. 조선 개국 초의 관서와 관직

조선 태조 초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아래에 육조와 여러 관서가 딸려 있는 도평의사사 중심의 체제였다. 재상인 문하부(門下府)의 좌우 시중(侍中)이 도평의사사의 판사(判事)를 겸하여 의정을 주도함으로써 삼사(三司)의 재정과 중추원(中樞院)의 군사에 대해서도 총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상서사(尙瑞司)의 판사를 겸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도평의사사의 2품 이상 관원이 육조와 여러 관서의 판사를 겸하고 도평의사사에 경력사(經歷司)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를 두어 실무를 분장하게 함으로써, 재상이 주도하는 도평의사사 중심의 체제가 유기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관직의 편제를 보면, 관계(官階)를 기준으로 동·서반 각 아문의 관직과 관원을 편제하고 잡직을 구별하였다. 2품 이상 당상관의 2/3가 도평의사사 구성원이었다. 참상관의 대표적인 관직을 품별로 보면, 정3품은 제사(諸司)의 행수(行首)인 판사, 종3품은 판사의 차관인 감(監)과 경(卿), 정4품은 제사의 소경(少卿)과 육조의 의랑(議郞), 종4품은 제사의 소감(少監)과 소경, 정5품은 육조의 정랑(正郞), 종5품은 제사의 승(丞)과 종5품 아문의 행수인 영(令)·사(使), 정6품은 육조의 좌랑(佐郞), 종6품은 제사의 주부(主簿)와 종5품 아문의 부사(副使) 등이었다. 참외관은 관원과 이전(吏典)의 이중 구성인데, 1품 아문은 정7품 도사(都事)·주사(主事)가, 3품 아문은 종7품 직장(直長)이, 5품 아문은 종7품 직장과 종8품 주부가 각각 중심이었다. 종9품은 종5품 아문의 녹사(錄事)가 대표적이다. 같은 관직이라도 아문의 격에 따라 관품이 달라 관서를 위주로 관직을 편제하던 틀이 남아 있다.

2. 태종대의 의정부-육조-각 사의 체계화와 관직의 정비

태종대의 개혁으로 재상이 주도하는 도평의사사 중심의 체제가 왕이 주도하는 의정부-육조-각 사의 체제로 바뀌었다.

1401년(태종 1)에 고려시대 이원적인 구성이던 문하부를 의정부와 사간원(司諫院), 중추원을 승추부(承樞府)와 대언사(代言司)로 분리하였다. 대언사는 훗날 승정원으로 바뀌었다. 도평의사사는 해체하여 의정은 의정부로, 군사는 승추부로 옮겼다. 1405년에는 육조를 정2품 아문으로 올려 재정 기밀 인사와 의정부의 일부 서무를 담당하게 하고, 직무에 따라 육조에 속아문(屬衙門)으로 각 사를 배속하였다. 각 조에는 당상관 3명을 두어 서무를 의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이와 함께 육조는 의정부에 당참(堂參)하도록 함으로써 왕이 주도하는 ‘의정부-육조-각 사’의 체계가 잡혔다. 태종 후반에 종친과 외척을 구별하여 통제하면서 종친부와 돈녕부(敦寧府)를 두어 예우하고, 지방 관제와 중앙의 여러 시(寺)·감(監)·서(署)의 관직명을 관계를 기준으로 통일성 있게 정비하였다. 이후 1414년(태종 14) 육조에 명하여 맡은 서무를 직계(直啓)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태종이 추진하던 왕 중심의 육조 체제로 개편이 마무리되었다.

속아문의 관직명을 시·감·서 단위로 통일성 있게 정리하면서 관서에 따른 관직 차별이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서 위주의 틀에서 관계 위주의 틀로 바뀌는 중요한 변화였다. 육조에서 속사제(屬司制)의 시행으로 직사 중심의 당상-낭청(郎廳) 관계가 굳어져, 속아문에서도 직사를 매개로 하는 ‘3·4품-5·6품-이전(吏典)’의 상하 관계가 굳어져 갔다.

3. 세종대의 조정과 관계의 분립

세종 연간에는 제도가 보완되고 체제가 조정되었다. 1419년(세종 1)에 집현전(集賢殿)을 두어 경전과 고제(古制)를 연구하게 함으로써 수준 높은 유교 정치의 제도적 토대를 강화하였다. 이어 각 사의 제조(提調)를 정리하였다. 그 뒤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없애고 중추원을 다시 두어 병조에 집중되었던 권한을 분산시켰다. 1436년(세종 18)에는 의정부서사(議政府署事)를 복구하였다. 각 조에서 가부(可否)를 의정하여 의정부에 올리면 영의정 이하가 동의하도록 하였고, 인사권과 병권을 이조·병조에 속하게 하여 왕이 장악하였다. 이로써 왕의 주도권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의정부 대신의 권한이 확대되었으며, 왕이 주도하는 ‘의정부-육조-각 사’의 체제가 조화롭게 운영될 수 있었다. 1444년(세종 26)에는 관계가 관직에서 분리 독립하여 관서·관직·관원을 편제하는 기준으로 확립되었다. 아울러 당하관에 대한 보편적 인사 관리 틀을 마련하여 동반과 서반, 경관과 외관의 차별대우를 완화하며 통합하였다.

4. 세조 말의 종합적 정비와 『경국대전』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 편찬과 연결하여 관계를 기준으로 종합 검토를 거쳐 관제를 정비하였다. 이 결과 왕이 주도하는 ‘의정부-육조-각 사’의 체제가 관서·관직명의 통일성이 제도 전체 차원에서 크게 높아졌다.

관서는 관계를 기준으로 격이 비슷한 아문의 명칭에 부(府)·조(曹)·원(院)·시(寺)·감(監)·사(司)·서(署)·학(學) 자(字)를 넣어 관서명을 통일하였다. 한편으로는 맡은 일이 비슷한 관서에는 같은 글자를 넣어 역할이 비슷함을 나타내었다. 이로써 육조의 속아문제를 축으로 관계를 기준으로 편제되는 관서 체계로 정비되었다.

관직은 3품 아문의 경우, 시와 감으로 통일시키고 동반과 서반을 통일시켰다. 관직은 각 품별로 정·부정·첨정·판관·주부·직장·봉사·부봉사·참봉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크게 정·부정·첨정, 판관·주부·직장, 봉사·부봉사·참봉의 셋으로 나뉜다. 관품으로 보면 4품 이상은 ‘정’을 붙였고, 8품 이하는 ‘봉’ 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5·6·7품인 판관·주부·직장은 각 품에서만 통일되었다. 4품 아문은 수(守)·주부·직장·봉사·부봉사로 바뀌었고, 종5품 아문은 영(令: 한자 중복 삭제)·주부·직장·봉사로 바뀌었다. 이는 4품 아문의 장관을 ‘수’로, 5품 아문의 장관을 ‘영’으로 바꾸고, 나머지 6품 이하는 정3품 아문과 통일시킨 것이다. 또한 서반 관직을 동반과 같은 기준에서 개정하였다.

이때의 관서·관직·관원은 거의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려서, 1466년(세조 12)의 개혁이 곧 『경국대전』 체제의 성립이었다.

5. 『경국대전』의 관서와 관직

관계를 기준으로 한 『경국대전』의 경관, 즉 관서·관직·관원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1품 아문은 의정부·종친부·충훈부(忠勳府)·의빈부(儀賓府)·돈녕부·중추부(中樞府), 종1품 아문은 의금부(義禁府), 정2품 아문은 육조·한성부·개성부·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종2품 아문은 사헌부(司憲府), 정3품 아문은 사간원(司諫院)·승정원(承政院)이다. 나머지 관서는 육조에 속아문으로 배속되었다.

이조의 속사는 문선사(文選司)·고훈사(考勳司)·고공사(考功司)이고, 속아문은 충익부(忠翊府)·내시부(內侍府)·상서원(尙瑞院)·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수사(內需司)·액정서(掖庭署)이다.

호조의 속사는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경비사(經費司)이고, 속아문은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도시(司䆃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사재감(司宰監)·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전함서(典艦署)·평시서(平市署)·사온서(司醞署)·의영고(義盈庫)·장흥고(長興庫)·사포서(司圃署)·오부(五部)이다.

예조의 속사는 계제사(稽制司)·전향사(典享司)·전객사(典客司)이고, 속아문은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승문원(承文院)·통례원(通禮院)·봉상시(奉常寺)·교서관(校書館)·내의원(內醫院)·예빈시(禮賓寺)·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양현고(養賢庫)·시강원(侍講院)·종학(宗學)·소격서(昭格署)·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빙고(氷庫)·전생서(典牲署)·사축서(司畜署)·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활인서(活人署)·귀후서(歸厚署)·사학(四學)·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이다.

병조의 속사는 무선사(武選司)·승여사(乘輿司)·무비사(武備司)이고, 속아문은 오위(五衛)·훈련원(訓鍊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전설사(典設司)·익위사(翊衛司)이다.

형조의 속사는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례사(掌隸司)이고, 속아문은 장례원(掌隷院)·전옥서(典獄署)이다.

공조의 속사는 영선사(營繕司)·공야사(攻冶司)·산택사(山澤司)이고, 속아문은 상의원(尙衣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연사(典涓司)·장원서(掌苑署)·조지서(造紙署)·와서(瓦署)이다.

6. 경관직의 구성과 당상관

경관직은 동반 741관직으로 이 중 녹관이 정직 541·체아직 105을 합해 646, 무록관이 95이었고, 서반은 3,324관직으로 정직 319, 체아직 3,005이었다. 합 4,065관직이며, 총 5,605관직의 약 73%이다.

당상관 안의 기본 구분선은 2품 이상과 3품 당상 사이에 있다. 당상관의 단계적 차등을 관직 구조와 연결하여 보면, 1품은 국정 전반에 걸쳐 책임을 공유하였고, 2품은 국정의 특정 부분에 책임을 공유하였다. 정1품은 의정부의 삼의정이 대표이고 종1품은 의정을 돕는 찬성(贊成) 정도였다. 정2품은 육조의 판서와 한성부·개성부의 장관 등이 있었고, 종2품에는 대사헌, 육조의 참판, 한성부·개성부의 차관인 부윤·부유후 등이 있었다. 3품 당상은 보조적이거나 특수 기능을 맡았는데, 왕의 비서인 승지, 간쟁을 맡는 대사간, 교육을 맡는 대사성, 노비 소송을 맡는 판결사 등은 특수 기능이고, 육조 참의와 첨총제 등은 보조적 기능을 하였다.

7. 경관의 특징

조선 경관의 특징은 『경국대전』「이전」「경관직」조(條)의 앞에 간추려져 있다. 관원의 직함은 계(階)·사(司)·직(職) 순으로 하되, 계가 높고 직이 낮으면 행(行)을, 계가 낮고 직이 높으면 수를 사 앞에 칭한다. 6품 이상은 근무 일수가 900일이 차면, 7품 이하는 근무 일수가 450일이 차면 자리를 옮기고 가계(加階)하는데, 6품 이상은 포폄에서 성적이 5고 3상, 7품 이하는 3고 2상인 자를 올린다. 의정부·육조·한성부·승정원·장예원·홍문관·성균관·세자시강원의 당하관이 비면 구임(久任)하는 관원 외에 비록 근무 일수가 다 차지 않은 자도 가려 쓴다. 사헌부·사간원은 구임을 물론하고 널리 언사에 강개한 자를 가려 주의(注擬)한다. 승문원 관원의 사자(寫字)와 대중국 외교에서 사용되는 이문(吏文)에 특이한 자, 홍문관 관원·제도의 교관 및 체아직 외에는 수령을 거치지 않으면 4품 이상 계(階)에 올라갈 수 없다. 과거 출신이 아니면 나이 20세가 차지 않은 자는 동반직을 주지 않는다. 뇌물과 관련된 장리(贓吏)의 아들과 손자는 의정부·육조·한성부·사헌부·개성부·승문원·장예원·사간원·경연·세자시강원·춘추관·지제교·종부시·관찰사·도사·수령직에 제수할 수 없다. 옳지 않은 행실을 한[失行] 여성이나 재혼한 여성의 자녀는 동·서반직에 서용할 수 없다. 그러한 여성의 증손에 이르러야 의정부·육조·한성부·사헌부 등 관서 이외에 쓸 수 있다. 제수 후에 3품 이하 관원 및 무록관은 이조·병조에서 그 내력을 갖추어 아뢰고 의정부·사헌부·사간원에 문서를 보내어 그 내용을 확인한다.

조선 경관의 특징으로는 이 밖에도 제조와 무록관, 청요직과 구임을 들 수 있다. 제조는 당상관 주로 2품 이상으로 하여금 겸직으로 당상관이 없는 관서를 통령하는 것이며, 무록관은 녹을 주는 재정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무록관은 근무 일수가 360일이 차면 서용하도록 하였다. 당하의 청요직은 『경국대전』에 문관(文官)을 쓰도록 규정한 관직이 중심인데, 의정부와 육조의 이·예·병조, 홍문관·사간원·성균관·승문원 등이 있다. 청요직은 조선에서 학문을 우대했던 우문정치(右文政治) 표상의 하나이다. 구임은 임기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같은 관직에 있는 것으로, 행정의 안정과 지속을 위해 시행되었다. 주로 전곡(錢穀) 등을 관장하는 관서를 중심으로 1, 2명을 지정하였다.

변천

조선중기에 들면서 당상관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행정 관행이 쌓여 가면서 참상·낭관(郎官)의 행정상 중요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조의 전랑(銓郞)을 축으로 후임을 스스로 선발하는 관행이 성립하면서 언론을 담당하던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삼사와 구조적으로 연결하여 낭관권이 성립하였다. 이러한 낭관권은 사화(士禍)와 훈척 정치를 견디면서 붕당을 형성하고 운영하는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참외직은 정치적 의미가 더욱 축소되어, 참상으로 나아가는 승륙(陞六)이 경관의 의미 있는 관문이 되어 갔다.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경관은 대체로 정쟁을 주도하거나 정쟁에 동원되는 관직과 정쟁과는 거리가 있는 관직으로 나뉘게 되었다. 정치 관직과 행정 관직으로 나뉜 것이다. 이러한 관직의 구별은 정쟁과 국난을 겪으면서 가문의 구별과 연결되어 명가(名家)를 낳았다. 청요직은 명가 출신이 장악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으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붕당 정치에 맞추어 산림직(山林職)이 설치·운영되었는데, 성균관의 좨주(祭酒) 이외에 세자시강원의 찬선·익선·자의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7년의 임진왜란으로 의정부-육조의 틀이 비변사 중심으로 바뀌고, 인조반정 이후 군영(軍營)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경관은 대체로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틀로 운영되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치는 환국기에는 서울과 지방[京鄕]이 사회적으로 나뉘면서 서울 방어 체제를 갖추었다. 서울 외곽에 개성부 외에 수원부·광주부·강화부를 더 두어 4도(四都)라 하여 유수(留守)를 경관직으로 임명하였다.

탕평기에는 붕당 정치기 경관의 자율적인 틀을 왕의 주도 아래 재편하려 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새로 설치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친히 운영하며, 장용영으로 군문(軍門)을 통합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경국대전』으로 확립된 조선의 경관직 체계는 이후 고종대 들어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면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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