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서(宗廟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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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능원(陵園)정자각(丁字閣)과 종묘를 지키는 일을 맡았던 관서.

개설

종묘서는 왕실 능원을 관리하고 지키기 위해 고려 문종이 처음 설치했다. 고려 충렬왕은 침원서(寢園署)로 개칭하고 전의서(典儀署)에 속하게 했지만, 공민왕은 대묘서(大廟署), 능원서(陵園署)로 확대·개편하였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시는 왕가의 사당으로 종묘를 짓고, 왕실 능원의 정자각과 종묘를 수호하기 위해 종묘서를 설치했다. 종묘서의 구성원은 도제조와 제조, 종5품의 영(領), 종7품의 직장(直長), 종8품의 봉사(奉事), 정9품의 부봉사(副奉事)가 있었으며, 종묘서의 관원은 자주 교체되었다.

종묘서의 임무 중 제기(祭器) 관리가 매우 중요했으며, 기물을 자주 도난당해 담당 관원을 나처(拿處)하기도 했다. 1894년 군국기무처는 궁내부 관제를 발표하면서 종묘서의 관원을 대폭 줄였고, 순종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종묘서의 구성원은 영의정이 겸직하는 도제조와 제조가 각 1명이며, 종5품의 영, 종7품의 직장, 종8품의 봉사, 정9품의 부봉사가 있어 해당 업무를 처리하고 상급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414년(태종 14) 관제를 개정하면서 종묘서의 주부(主簿)를 부승(副丞)으로 고친 흔적도 보인다.

1421년(세종 3) 세종은 조묘 대실 서편에 건축된 영녕전도 종묘서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예조는 종묘의 사시 대향 삭망과 절일(節日)의 별제(別祭) 때 사람 수와 절차를 계문(啓聞)하면서 종묘서 관원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묘서 관원들이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것은 물론 제물(祭物)을 검사하고 진설하게 하였다.

종묘서 관원이 종묘대제에서 잘못을 할 경우에는 중벌을 면치 못했다. 1427년 종묘서 영(令)어변린은 대제를 올리면서 제6실의 향료 불을 꺼지게 한 죄목으로 곤장 70대를 맞았다. 그러면서도 종묘서의 시신은 항상 묘정(廟庭)에서 조회를 모시기도 했다. 그러므로 종묘서의 관원들은 조하(朝賀)와 조참(朝參)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종묘서의 관원은 자주 교체되었다. 그래서 부승의 경우 오래 근무하는 것으로 정하였으며, 실적이 있을 경우 품계를 올려 임명하게 하였다. 1436년(세종 18) 종묘서 녹사 1명이 더 설치되었으나 1460년(세조 6) 부승 1명이 감원되었다. 1441년부터 종묘서 영은 종묘(宗廟) 영으로 개칭하여 명첩(名帖)을 받아 제사 의식에 참여하였으며, 각 사의 원리(院吏) 정원을 정할 때 1명은 구임(久任)하게 했다.

종묘서의 임무 중 제기 관리는 매우 중요했다. 제기 보관 상태에 대한 점검은 수시로 이루어졌고, 제기를 깨끗하게 씻지 않은 관리는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종묘서의 제기가 도둑질을 당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1471년(성종 2) 제기를 지키지 못하고 도둑질당한 관원들이 모두 파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의금부는 종묘서의 기물을 훔친 종들을 잡아 법률에 따라 처벌했다. 1781년(정조 5)에도 종묘서에 잠입하는 자가 있자 정조는 책임을 물어 어영대장을 파직하고 수직장관을 유배보냈다. 이처럼 제기가 자주 도둑질당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종묘서에 이졸(吏卒)이 없고 노비가 또한 적었기 때문이었다.

종묘서는 기물도 자주 도난당했다. 1490년(성종 21)에는 찬탁 9좌를 잃었고, 1705년(숙종 31)에는 금보 9과를 잃었다. 제기 가운데 조두(俎豆)는 예에 맞도록 개조하였고, 상준(上尊)과 하준(下尊) 같은 것은 수리하면서 흠이 나지 않게 삼갔다. 수리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재계하여야 하며, 많은 경우 30여 명이나 되었다.

종묘서 영은 윤대(輪對)에 참여하였으며, 왕의 명령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가 수령들의 불법과 학교 운영 상태를 살피기도 했다. 1483년(성종 14) 종묘서 영양순경은 천안으로 내려가 수령들의 불법을 적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종묘서 영을 지낸 대표적 인물은 계천군손소이며, 통훈대부 종묘서 영김원록은 실록편수관으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41년(영조 7)에는 태묘의 『의궤속록』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예전에 왕의 하교로써 사적을 조사해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

설치경위와 변천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시는 왕가의 사당이며 종묘서는 왕실 능원의 정자각과 종묘를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이다. 종묘서는 고려 문종 때 처음 설치되면서 영(領) 1명과 승(丞) 2명을 두었고, 충렬왕 때 침원서로 개칭되면서 승 1명을 감원하고 전의서에 속하게 했다. 공민왕은 주부 1명을 증원하고 대묘서로 개칭하였으며, 다시 능원서로 확대·개편하면서 사(史) 4명과 기관(記官) 2명을 두었다.

조선 태조도 종묘서를 설치하고 능침과 정자각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한양으로 천도하여 종묘를 건립한 후 종묘 수위를 전담하면서 산릉의 제각(祭閣)을 수호하게 하였다.

1405년(태종 5) 육조(六曹) 직무 분담과 소속 아문을 규정하면서 종묘서는 예조(禮曹)에 속하게 하였다. 종묘서의 원리(院吏)들이 평상시 조문(弔問)과 문병을 다녀와 오염되었다고 핑계 대면서 출근하지 않아 이조(吏曹)가 근무 규정을 강화하기도 했다.

1894년(고종 31) 군국기무처에서 궁내부 관제를 발표하면서 종묘서에는 대종백(大宗伯)이 겸임하는 제거(提擧) 1명과 영(領) 3명, 참봉(參奉) 1명을 두었다. 참봉은 대군, 왕자군, 적왕손, 왕손의 사손(嗣孫) 중에서 임명하되 종친부에서 비망(備望)하여 보내 뽑고 임기가 차면 영(領)으로 승급시켰다. 이후 1896년 제거 직임을 거쳐 칙임관으로 나아갔으며 순종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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