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參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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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돈녕부·관상감(觀象監)·군기시·군자감·내의원 등 여러 관서에 소속된 종9품 관직.

개설

조선시대의 최하위 문반직인 참봉(參奉)은 세조 말에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시(寺)·감(監)·서(署) 및 한성부 오부(五部) 등 25개 관서와 10여 개의 능(陵)·전(殿)에 소속되어, 해당 관서의 실무를 맡아보거나 능·전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정무를 담당한 관서의 참봉은 대부분 혁파된 반면, 능·원(院)의 관리를 맡은 참봉은 크게 늘어났다. 선왕·선후의 능·원 관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 책임자로 종5품 령(令), 종7품 직장(直長), 종8품 봉사(奉事), 종8품 별검(別檢) 등을 대거 설치할 때, 그 모두의 하관(下官)으로 50여 명을 두어 령 등의 지휘를 받아 능·원을 관리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능의 참봉 곧 능참봉은 참봉과 동일시되었고, 최하위 관직을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를 통하여 정무아문에 편제된 참봉은 해당 아문의 최하위에서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능의 참봉은 조선전기에는 능·전의 관리를 총관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상관인 령·봉사·별검·직장 등의 지시를 받으며 능·전을 관리하였다.

변천

1466년(세조 12)에 육조속아문(六曹屬衙門)의 정3품 당하관 이하의 모든 관직을 정(正) 이하 참봉까지로 통일하도록 직제를 개편하였다. 그에 따라 종9품직인 관상감 사진(司辰)·전의감(典醫監) 조교(助敎)·사직서(社稷署)녹사(錄事)를 참봉으로 개칭하고, 돈녕부와 봉상시 등 21개 관서와 문소전·목청전·건원릉 등 9개 능에 새로이 각각 1~4명을 두는 등 총 68명의 참봉을 두면서 정립되었다. 이어 1484년(성종 15)까지 사옹방(司饔房)이 승격된 사옹원에 3명, 새롭게 설치된 연은전에 2명을 두었다. 『경국대전』에는 표와 같이 돈녕부와 봉상시 등 25개 관서와 문소전·건원릉 등 4전 9릉에 각 1~5명 등 총 73명으로 법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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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전회통(大典會通)』이 편찬된 1865년(고종 2)까지, 기능의 성쇠에 따른 관서의 혁파와 관직의 증감, 선왕·선후의 능·전 관리 등과 관련되어 적지 않은 변천을 거쳤다. 돈녕부·군기시·내자시·내섬시·사도시·예빈시·제용감·선공감·사재감 등에 편제된 참봉이 1명씩 혁파되었고, 예빈시에는 1명이 증원되었다. 문소전과 연은전에 속한 참봉 모두와 건원릉을 비롯한 9개 능의 참봉은 각 1명씩 감원되었다. 또 경기전(慶基殿)·영희전(永禧殿)·현륭원(顯隆園)·휘경원(徽慶園)과 안릉(安陵) 등 35개 능에는 각 1명씩, 예릉(睿陵)에는 2명이 새로이 설치되었다. 그 결과 돈녕부 등 10개 관서에 18명, 3전·46능·2원에 51명 등 총 60여 명으로 조정되어 1894년(고종 31)까지 계승되었다. 그 뒤 갑오개혁 과정에서 관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할 때, 정무아문의 정 이하 모든 관직이 주사(主事)로 통합되면서 소멸한 것과 달리 령과 더불어 궁내부(宮內府)에 속한 종묘서(宗廟署)·사직서·영희전·능원관(陵園官)에 판임관(判任官)으로 존속하다가 1907년(융희 1)에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한충희, 「정치구조의 정비와 정치기구」, 『한국사』 23, 1994.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속아문연구 2 - 관직의 정비를 중심으로」, 『계명사학』 1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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