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전(慶基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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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거행하던 조선후기의 건물.

개설

경기전은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14년(광해군 6)에 재건되고, 1872년(고종 9)에 크게 수리된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태조진전(眞殿)이다. 경기전은 경주, 평양, 개성, 함흥 등지의 진전과 함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진전도(眞殿圖)」에서 보이는 형식으로 건립되었다.

위치 및 용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위치한다. 태조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며 제사를 지내던 진전이다.

변천 및 현황

1) 경기전의 창건과 관리 체재 완비

조선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의 어진은 1396년(태조 5)에 함흥, 1398년(태조 7)에 경주, 평양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1409년(태종 9)에는 전주부(全州府)에서 태조의 어진 봉안하기를 요청하여, 경주의 어진을 서울로 옮겨와 모사하도록 허락하였다(『태종실록』 9년 2월 17일). 이후 새 어진을 전주에 봉안한 때가 1410년 9월이었다(『태종실록』 10년 9월 28일 2번째기사). 이보다 앞서 7월 26일에는 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의 신위를 종묘에 부묘(祔廟)하고, 7월 29일 태조와 신의왕후의 어진을 문소전에 봉안하였다(『태종실록』 10년 7월 26일).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주부는 부묘를 앞두고 어진 봉안과 어용전(御容殿)의 건립을 추진한 것으로 해석된다.

1412년에는 전주, 경주, 평양의 어용전을 태조진전(太祖眞殿)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1월 15일). 1419년(세종 1)에는 개성에도 어진을 봉안하고 계명전(啓命殿)이라 부르다가 1422년에 목청전(穆淸殿)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태조의 진전이 계명전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명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은 함흥, 평양, 개성, 경주, 전주 등 지방 5곳과 창덕궁 문소전 1곳 등 6곳에 이르게 되었다.

1432년(세종 14)에는 경주·전주·평양 등의 진전 폐지를 의논하기도 하였지만 폐지되지는 않았다. 1442년(세종 24)에 이르러 전주·경주·평양의 진전 이름을 경기전(慶基殿), 집경전(集慶殿), 영숭전(永崇殿) 등으로 정하고 각기 전직(殿直) 2명씩을 두게 하였다. 또한 조정의 관리를 보내어 수리하는 등 정부의 관리 책임 아래 두었다. 1445년에는 8결 99복 6속의 제위전(祭位田)을 국고에서 공급하였고(『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1462년(세조 8)에는 관노(官奴) 1명과 양민(良民) 18명을 수복(守僕)으로 정하여 번갈아 수직(守直)하게 하였다(『세조실록』 8년 8월 6일).

이때에 확립된 진전 제도는 『국조오례서례』「단묘도설(壇廟圖說)」진전(眞殿)조에 실려 있는 것처럼, 남향한 정전이 3칸이고 좌우에 동랑과 서랑이 있으며 남쪽으로 3칸짜리 문 두 채가 있는 형식이었다. 신좌와 영정은 북쪽에 두어 남향하도록 하였다.

1443년(세종 25)에는 ‘태조 어진 봉안 의식’을 제정하여 어진을 봉안할 때 성용함(聖容函)을 탁자 위에 놓고 연 다음 어진을 걸어 봉안하고 신하들이 네 번 절하며, 봉안을 맡은 사신이 안신제(安神祭)를 거행하도록 정하였다. 반면에 태조와 태종의 어진을 새로 그리고 세종과 왕비의 영정을 그리게 하여 모두 경복궁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외방의 태조 진전을 어진에 대한 의례를 거행하는 유일한 장소로 정하였다. 이때 경기전, 집경전, 영숭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모두 서울로 가져와 비교·검토해서 그렸다(『세종실록』 26년 10월 22일).

1485년(성종 16)에는 순찰사를 보내어 쇄소(灑掃)·점화(點火)·금화(禁火) 등의 일을 살펴서 보고하게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에 이르러 세밀한 관리 지침이 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16년 1월 9일).

2) 경기전의 소실과 재건

경기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태조의 어진만은 무사히 아산현으로 옮겨졌다. 각지의 태조 어진은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1614년(광해군 6)에 태조 어진을 새로 제작하기 위하여 피난시켰던 어진을 서울로 옮긴 다음(『광해군일기』 6년 5월 18일), 경기전을 재건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12월 5일). 원래의 어진은 1617년(광해군 9)에야 경기전에 다시 봉안되었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17일).

1637년(인조 15)에는 병자호란 때 적상산성으로 피신시켰던 경기전 어진을 도로 본전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1662년(현종 3)에는 정전, 월랑, 내신문, 익랑, 별전, 정자각 등의 비가 새는 곳을 수리하였는데, 여기서 별전과 정자각이 이미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안전(移安殿)은 1676년(숙종 2)에 처음 세워졌는데 1687년(숙종 13) 2월에 소실되었다가 1688년(숙종 14) 4월에 재건되었다. 1688년 3월부터 9월 사이에는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도성 안 남별전에 봉안하고 다시 가져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숙종실록』 14년 3월 3일)(『숙종실록』 15년 1월 19일).

1739년(영조 15)에는 경기전에 비석을 세웠고, 1746년(영조 22)에는 어진을 새로 배접하면서 경기전을 수리하고, 이때 의장도 수리하였다. 1770년(영조 46)에는 전주성 화재로 어진을 전주향교로 피난시켰다가 환안하기도 하였으며, 1771년(영조 47)에는 경기전의 북쪽에 시조묘인 조경묘를 창건하였다(『영조실록』 47년 10월 7일).

1872년(고종 9)에는 어진을 도사(圖寫)하고, 경기전과 조경묘를 크게 수리하였다. 이때 경기전 어진 봉안처의 바닥을 온돌에서 마루로 변경하였다. 이후에도 1880년(고종 17), 1886년(고종 23), 1890년(고종 27)에 조경묘와 경기전을 수리하였다. 1894년(고종 31)에는 동학농민군을 피하여 위봉산성 행궁으로 어진을 옮겼다가 후에 환안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조정의 철저한 보호 아래 건물과 어진이 잘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서쪽 건물군이 철거되고 일본인 소학교(훗날 중앙초등학교)가 세워졌으며, 1937년에는 이안전이 철거되는 등 파괴가 자행되었다. 이안전 자리에는 1976년부터 전주시립박물관이 개관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실록각이 복원되어 있다. 서쪽 건물군은 2004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조선전기 경기전의 모습은 『국조오례서례』「진전도」에서 볼 수 있는데, 조선후기에는 이안전, 정자각 등이 더해지는 등 변화가 있었다. 고종 때 편찬된 『경기전의(慶基殿儀)』(1897)에 정전(正殿)과 별전(別殿), 내신문(來神門), 외신문(外神門), 군막(軍幕), 협문(挾門), 조과청(造果廳), 전사청(典祀廳), 용실(舂實), 누상고(樓上庫), 동재(東齋), 서재(西齋), 마구(馬廐), 재문(齋門), 경덕헌(慶德軒), 수복청(守僕廳), 외문(外門) 등의 건물이 있어서 조선말기 경기전 일곽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4년(고종 31) 4월 동학군이 전주부를 공격하고 함락시킬 때 전라감사(全羅監司)김문현(金文鉉)이 도망갔다. 이후 조정에서는 성을 버린 것보다 경기전과 조경묘를 돌보지 않은 것을 두고 더 큰 논쟁을 했다. 경기전의 국가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참고문헌

  • 『경기전영정가배등록(慶基殿影幀加褙謄錄)』
  • 『경기전의(慶基殿儀)』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전주지도(全州地圖)」『조경묘경기전도형(肇慶廟慶基殿圖形)』
  • 『조경묘경기전수리등록(肇慶廟慶基殿修理謄錄)』
  • 『종묘수개등록(宗廟修改謄錄)』
  • 국립전주박물관, 『왕의 초상: 경기전과 태조 이성계』, 국립전주박물관, 2005.
  • 안선호·홍승재, 「조선시대 태조 진전의 건축 특성과 공간 구성」,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제23권 제7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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