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사(武備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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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병력과 병기의 관리, 군사의 훈련 관리 등을 맡은 병조(兵曹) 속사.

개설

조선 태조가 왕조를 개창한 직후 문무 관제를 처음으로 정하면서 육조의 하나로 병조를 설치하여 무관의 인사 문제 등을 맡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 기능이 미약했고 직무 분장이 애매했기 때문에 소속 관사는 두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의정부, 육조 중심의 국정 운영 체제를 구축하였고, 이와 관련되어 육조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속사의 설치가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1405년(태종 5) 육조에 각각 3속사씩 18속사가 설치되었고, 그 일환으로 병조에 설치된 속사가 무선사(武選司)·무비사(武備司)·승여사(乘輿司)이고, 그 각각은 병조의 기능을 3등분하여 하나씩을 관장하였다. 무비사는 병력과 훈련, 방어 시설물 관리 등의 중요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 무비사가 조선후기까지 큰 변동 없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태조는 조선왕조를 개창한 직후 문무 관제를 처음으로 정하면서 육조의 하나로 병조를 설치하여 무관의 인사나 병적(兵籍)의 관리, 우역(郵驛) 등의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육조의 기능이 미약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각 조의 직무 분장이 애매하였고 소속 관사도 설치되지 못했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을 계기로 태조가 퇴위하고, 정종을 거쳐 1400년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그동안 국정을 주도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운영 체계를 해체시키고 의정부, 육조 등을 전면으로 내세워 움직이게 했다. 이는 왕을 명실상부한 권력의 축으로 자리 잡게 하는 조치였다. 이에 육조는 정3품 아문에서 정2품 아문으로 격상되어 확실하게 국정을 분장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담당 업무도 크게 증대하여 소속 관사의 설립이 불가피하였다. 마침내 1405년 육조에 각각 3속사씩 총 18속사를 두는 속사제가 실시되면서 병조에도 무선사·무비사·승여사가 설치되었다. 이들 속사는 병조의 기능을 3등분하여 각각 하나씩을 관장하였는데, 무비사는 무비와 관련된 일 즉 중앙과 외방의 갑병(甲兵) 수목(數目), 훈련과 무예의 고열(考閱), 지도 제작, 진수나 성보의 관리, 군대 출정 등의 일을 맡았으며 낭청(郎廳)으로 정5품직인 정랑(正郞) 1명과 정6품직인 좌랑(佐郞) 1명을 두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조직 및 역할

무비사에는 정랑·좌랑 각 2명이 소속되어 당상인 판서(判書)·참판(參判)·참의(參議)·참지(參知)의 지휘를 받아 그 사에 부여된 기능을 관장하였다. 군정 기관으로 병조의 비중이 커지는 것과 더불어 무비사의 역할도 원래 맡았던 군비(軍備)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성부에 인구가 늘고 가옥이 증가하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급증했다. 이에 화재 진압 및 예방 기구로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였고, 소속 관원으로 판관을 두었는데 무비사의 정랑으로 겸하게 했다(『세종실록』 8년 2월 26일).

영토 확장에 따른 북방 야인들 간의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국방에 관한 업무가 증가하는 가운데 무비사의 일도 늘어나 그 소속 낭청이 업무에 능숙해져야 했다. 이에 30개월의 임기를 채워야 교체를 허락하고 좌랑이 유능하면 당상관(堂上官)의 특별 천거에 의해 곧바로 정랑으로 승진시켜 가능한 한 그 직임에 오래 머물게 했다(『세종실록』 13년 11월 1일). 특히 화약 등의 신무기가 제작되고 도성(都城)을 비롯한 여러 성곽들을 수축하거나 수리하는 작업이 활발해지자 그들을 점검하는 무비사의 직무가 현저히 확대되었다.

조선의 통치 체제를 집성했던 『경국대전』에는 군적(軍籍)·마적(馬籍)·병기(兵器)·전함(戰艦)·군사(軍士)의 점검과 사열, 무예의 훈련, 숙위(宿衛)순작(巡綽), 성보(城堡)와 진수(鎭戌), 방어와 정벌, 군관(軍官)과 군인(軍人)의 파견, 교대 근무, 급보(給保)·휴가 지급, 시정(侍丁), 복호(復戶), 화포, 봉수, 개화(改火), 금화(禁火), 부신(符信), 경첨(更籤) 등에 관한 사무를 분장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태종 때 처음 정해졌을 때보다 업무가 크게 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무비사가 성립될 때에는 속관으로 1명씩의 정랑·좌랑이 있었지만 1466년(세조 12)의 『경국대전의』 편찬과 관련된 관제 정비 때에 1452년(문종 2)에 병조의 업무 증가와 관련해 설치되어 운영된 겸정랑·좌랑 각 1명을 녹관으로 전환시키고 무비사에 소속시겼다. 이에 따라 무비사는 그 외의 육조 속사가 각 1명씩의 정랑·좌랑이 1속사를 관장한 것과는 달리 각 2명의 정랑·좌랑이 무비사의 기능을 궁성의 경비 등사와 그 외의 둘로 나누어 하나씩을 관장하게 되었다. 궁성의 경비 등사를 관장한 정랑·좌랑은 아마도 참지와 함께 궐내에 설치되어 궐내의 숙위등사를 관장한 내병조의 운영과 관련된 듯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국방 환경이 바뀜에 따라 무비사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선조 때 새로운 중앙 군영(軍營)으로 훈련도감을 창설하면서 그 운영에 필요한 각종 시설물 등의 축조 사업이나 물자 등의 조달과 관리 등을 맡아서 처리할 관원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무비사의 낭청 1명에게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낭청을 겸하도록 조치했다(『선조실록』 28년 6월 29일).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신해서 군국에 관한 최고의 정무 처리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담당 실무를 수행하도록 종6품 낭청 12명을 두었는데 그중 4명을 문관으로 배정하되 1명은 반드시 무비사 낭관이 겸하게 했다.

그런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시키면서 재차 개편되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무비사의 업무는 『경국대전』과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비변사가 의정부에 합속(合屬)되면서 혁파됨에 따라 무비사 낭관이 비변사 낭청을 겸하는 것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종6품 종사관은 무비사 낭관의 겸직이 되었다. 『육전조례』에는 정랑 1명이 배정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군제 연구: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혜안, 2003.
  • 민현구, 『조선 초기의 군사 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반윤홍, 『조선시대 비변사연구』, 경인문화사, 2003.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한충희, 『조선 초기 육조와 통치 체계』,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 한충희, 『조선 초기 관아 연구』, 국학자료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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