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시(宗簿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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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계보를 만들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서.

개설

종부시는 고려시대 왕실의 족보에 관한 일을 맡은 관아로 전중성, 전중시, 종정시, 전중감 등의 관명을 거쳐 1310년에 개칭되었다. 조선 태조는 전중시를 설치하고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관제 개편 시 전중시를 종부시로 하고, 이조에 소속시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1428년 이조는 종친과 종성의 돈목을 꾀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자고 제의하였고, 종족 간의 돈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며 비위사실 등을 규찰 계문하게 하였다. 그리고 10년에 한 번 선원록을 닦고 3년마다 계속 종실의 보첩(譜牒)을 보완하게 했다. 종부시는 『선원록』을 수찬하는 일, 종학의 근만 고찰, 종친들의 과실 규찰 등이 중요한 업무였다. 심지어 종친의 혼인도 관장했다. 종부시는 1864년(고종 1) 흥인군이최응의 상소를 계기로 종친부에 통합되었고, 1894년(고종 31) 종정부로 개편되었다. 종정사, 종정원을 거쳐 1905년 다시 종부사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7년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종부시는 고려시대 왕실의 족보에 관한 일을 맡은 관아로 전중성, 전중시, 종정시, 전중감 등의 관명을 거쳐 1310년에 종부시로 개칭되었다. 당시 관원은 정3품 판사, 종3품 영, 종4품 부령, 종5품 승, 종7품 주부 등이 설치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종정시로 개편되었다가 1362년에 다시 종부시로 개편되었다. 1369년 다시 종정시로 되었다가 1372년에 종부시로 고쳤다.

조선 태조는 전중시를 설치하고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관제 개편 시 전중시를 종부시로 하고, 이조(吏曹)에 소속시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종친 이백온이 백성 오마대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순금사(巡禁司)는 그를 종부시로 보내 장 60대를 치고 함주로 귀양 보냈다. 이것은 종친을 우대한 사례로 지목되어 대사헌이래(李來)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한편 종부시는 선왕 등의 제사에 종친들의 재계(齋戒) 여부도 확인했으며, 최초의 조선 왕실 족보인 『왕친록(王親錄)』 편찬을 시작했다.

1414년 관제를 고치면서 종부시의 종3품 영(領)과 정(正)을 모두 윤(尹)이라 칭하고, 4품 부령(副領)과 부정(副正)을 모두 소윤(少尹)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종부시를 재내제군소에 예속시키고 대군(大君)도제조(都提調)로 삼았다. 그리고 종부시 윤의 수를 늘리고 종3품 전사시 윤 아래 반열에 위치하게 했다. 민간에 흩어져 있는 저화(楮貨)를 수거할 때 종부시는 동부 지역 사람들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직 및 역할

1428년(세종 10) 이조(吏曹)는 종친과 종성(宗姓)의 돈목을 위해 제도를 정비하자고 제의하였다. 『서경(書經)』「주관(周官)」을 상고할 때 직무가 옛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므로 종친으로서 지위가 높고 속친(屬親)의 어른으로 덕망이 있는 2명을 제조로 삼고, 판사 이하는 종성의 조신(朝臣)과 서성으로 교체·임명하게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이 종족 간 돈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며 만일 비리를 저지른 일이 있으면 이를 규찰·계문(啓聞)하게 하였다. 그리고 10년에 한 번 『선원록』을 닦고 3년마다 계속 종실의 보첩을 베껴 적어 올리게 하였다.

1430년 종부시는 신의군인(仁)과 혜령군정을 탄핵했다. 설날 조하(朝賀) 때 온녕군정(裎)과 혜령군정, 신의군인이 상호 간 홀(笏)로 양관(梁冠)을 때려 잠(箴)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발생하자 어른 공경의 도리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종부시는 종학(宗學)에서 예절과 법을 어긴 경우도 예외 없이 처벌을 건의했다. 동시에 강독을 통하지 못해 좌석에서 내려와 앉았던 종친은 만 30일 이후에 다시 제자리로 앉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종부시는 1431년 이와 같은 종학에서의 잡사(雜事)를 맡을 전첨사(典籤司)를 설치했다. 종학에 불성실하고 태만한 원윤이덕생, 이녹생 등은 종부시의 탄핵을 받아 직첩이 환수되었다. 세종은 지속적으로 종학 관리와 규찰을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종부시 판관권준을 강원도와 함길도에 파견하여 기민 구제 상황을 시찰하게 하였다.

1439년(세종 21) 종부시에서 종친의 소송을 수리하여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유사(有司)에서는 종친의 과실을 듣거든 종부시에 알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승정원은 종실의 과실을 규찰하는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며, 총 20여 조목이었다.

종부시는 『선원록』을 수찬하는 일, 종학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찰하는 일, 종친들의 과실을 규찰하는 일이 중요한 업무였다. 다만 종친의 반당(伴倘)과 노비들의 범행은 모두 형조(刑曹)와 한성부가 맡았다. 종친의 혼인도 종부시가 관장하였다. 그리고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의 자손이라고 칭하고 복호(復戶)하려는 자의 심사도 엄격하게 처리했다. 세조뿐만 아니라 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이 종친을 대표하고 거느리기 위해 종부시 제조를 거쳤다는 점은 종부시의 위상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1781년(정조 5) 정조는 종부시의 예에 따라 규장각을 설치했다. 그리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직접 시험하고 수석을 한 이시수를 종부시 정에 임명하여 그 위상을 높였다. 또한 『선원계보기략』, 『팔고조도』, 『왕비세보』 등을 편찬하고 교정한 신하들에게 차등으로 시상한 사례는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확인된다. 1853년(철종 2)에는 영의정김좌근의 요청으로 종부시 주부를 임시 음관(蔭官)으로 삼았다.

변천

흥인군이최응은 상소를 통해 업무의 분장이 관사를 세울 당시의 본의가 아님을 강조하고, 두 관청을 합해 하나의 관청을 만들자고 했다. 이것은 종친 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며, 관리를 임명하는 규정에도 합당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1864년(고종1) 종부시는 종친부에 통합되었다. 신정왕후는 종친에 대한 예우를 명하였고, 종친부의 격상에 따른 관직 제도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후 종친부는 1894년(고종 31) 종정부로 개편되었고, 이듬해 종정사가 되었다. 곧이어 종정원이 되고 1905년(고종 32) 다시 종부사가 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계보에 관한 사무를 맡으면서 종부시의 명맥을 이었다. 1907년 종부사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김병우, 『대원군의 통치 정책』, 혜안, 2006.
  • 남미혜, 「대원군 집권기(1864~1873) 종친부 진흥책의 성격」, 『동대사학』1, 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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