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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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이후 중앙 정계에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이 화를 당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

개설

연산군 이후 명종 때까지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4차례의 사화(士禍)가 발생하였다. 일련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은 계속 화를 당하였으나 16세기 중엽 이후 사림이 전적으로 정치를 주도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내용 및 특징

①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해 사초(史草)를 모을 때 김일손(金馹孫)은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로 제출하였다. 이것을 구실로 1498년(연산군 4)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 등이 주도하여 발생한 사화가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조의제문은 항우(項羽)가 폐위시킨 중국 초(楚)나라의 마지막 왕인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내용의 글로 되어 있다. 김종직은 이 글을 통해 세조의 왕위 승계가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는 사림의 인식을 반영하였다. 이 때문에 이미 죽은 김종직뿐만 아니라 그의 문인 대부분이 화를 당하였다. 사초가 발단이 되어 발생하였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훈구파 간의 알력, 사림과 언관의 도전에 대한 훈구파와 인사권을 담당하던 정조계(政曹系) 노성대신(老成大臣)의 대응, 삼사(三司)의 역할 증대에 대한 일종의 제재 조치, 홍문관의 언관화(言官化) 이후 야기된 정치 구조 변화에 대한 왕과 재상의 결속에 의한 반동 등 여러 요인이 중첩되면서 발생하였다.

② 갑자사화의 발생과 전개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에 『경국대전』의 법 운용 변질과 능상(凌上) 또는 불경죄(不敬罪)를 죄목으로 신료의 탄압이 진행되는 가운데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廢妃)·사사(賜死)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이었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11일). 폐비 윤씨에 대한 원통함을 푸는 성격으로 인해 화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고, 피화인(被禍人), 즉 사화(士禍)에서 처벌된 사람도 무오사화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를 계기로 신구재상(新舊宰相)인 훈신(勳臣)이 제거되고 이미 무오사화로 죄를 받은 인물에게 죄가 더해졌다. 아직 남아 있던 사림도 축출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명실상부한 연산군의 친위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후 연산군은 경연 중지, 홍문관과 사간원의 혁파 등을 통해 언관 언론 기능을 대폭 축소하였고, 궁금(宮禁) 세력과 척신 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였으며 노골적으로 황음적(荒淫的) 성향을 드러냈다.

두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군주가 마땅히 행해야 할 군도(君道)를 잃었고, 옛 제도와 법인 구장법제(舊章法制)의 혁파를 통해 극단적으로 신권이 위축되면서 군신 권력관계가 파탄 났다. 유교 정치와 군신 권력관계의 파탄은, 이후 신료 주도의 정치 운영이 전개될 때, 더욱 철저한 유교 이념과 명분의 반영을 수반하게 되었고, 결국 왕권의 위상이 재정립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③ 기묘사화의 발생과 전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중종의 밀지(密旨)에 의해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기준(奇遵) 등을 체포·구금하면서 발생하였다(『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붕당(朋黨)을 결성하여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인물들을 배척하였다는 것과 후진(後進)을 이끌어 지나치게 격렬한 언사를 자행했다는 것이었다. 조광조의 사사(賜死)를 필두로 신진 사류가 화를 당하여 사림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사림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혁파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곧바로 삭훈(削勳)된 정국공신의 작위가 회복되고, 현량과가 혁파되었으며, 향약이 폐지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기묘사화는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볼 때 왕권과 재상권, 그리고 언관권이 상호 견제·균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언관권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왕권·재상권이 대대적으로 반격한 사건이었다. 그 이면에는 왕위 승계와 관련된 왕권의 성격 변화, 낭관권(郎官權)의 정치력 강화, 언관권의 강화·확대에 따른 재상권에 대한 견제력의 확대라는 정치 구조의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기묘사화 이후 남곤(南袞)·심정(沈貞)·김안로(金安老) 등의 권신(權臣)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중종 33년에 이르러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소통을 주장하는 유생층의 상소를 계기로 기묘 피화인의 대부분이 소통되거나 서용(敍用)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사림이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④ 을사사화의 발생과 전개

중종 말기에 이르러 중종의 후사(後嗣)를 둘러싼 갈등이 생겨났다. 후일 인종에 즉위하는 왕세자-장경왕후(章敬王后)-윤임(尹任) 측과 후일 명종에 즉위하는 경원대군(慶原大君)-문정왕후(文定王后)-윤원형(尹元衡) 측의 갈등이었다. 전자를 대윤(大尹), 후자를 소윤(小尹)으로 지칭하는데 이러한 대윤·소윤의 갈등은 중종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왕위 승계 과정에 외척 세력이 간여하는 정치 상황을 초래하였다. 결국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12세인 명종이 즉위하였다. 명종이 어린 탓으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의 동생인 소윤의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에 발생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8월 22일]. 이 사화에서 소윤의 윤원형 일파가 대윤의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내세운 구실이 이른바 택현설(擇賢說)이었다. 택현설은 인종의 후사로 명종이 아니라 성종의 3남인 계림군(桂林君)이나 중종의 6남 봉성군(鳳城君) 가운데 현인(賢人)을 선택하고자 했다는 주장이다. 결국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허자(許磁) 등이 주도하여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이 탄핵 당하였다.

을사사화 이후에도 계속 고변(告變)과 옥사가 이어졌다. 1547년 9월의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 1548년 2월의 사관 안명세(安名世) 피화 사건, 1549년 4월의 을사사화에 연루된 이약빙(李若氷)의 아들 홍윤(洪胤) 역모 사건 등이 계속 일어났다. 이후 윤원형·이량(李樑) 등에 의한 척신 정치가 계속되면서 일시적으로 사림의 기세가 꺾이기도 하였다. 을사사화는 왕위 승계를 둘러싼 외척 간의 갈등이지만 양측에 모두 사림이 가담했다는 점에서 종래의 사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죽고 곧바로 윤원형이 축출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유생층의 상소를 바탕으로 한 공론이 제기되면서 을사 피화인에 대한 방환(放還)·직첩 환급(職牒還給), 보우(普雨)·윤원형의 처벌, 양종선과(兩宗禪科)의 혁파 등이 이루어졌다. 삼사의 언관 언론과 유생층의 초야(草野) 언론이 모두 당연한 공론(公論) 형성층이라는 관행이 용인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이 전적으로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변천

거듭된 사화를 통해 정치 세력의 측면에서 훈척과 사림의 갈등은 결국 사림의 정계 주도로 귀결되었다. 또한 정치 운영에 있어서는 삼사의 언관 언론과 더불어 유생층의 초야 언론이 공론 형성층으로 용인되는 변화가 관행화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군신 권력관계의 상대화, 왕권의 자의적 지배 영역의 축소와 제도화, 그리고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경향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훈척(勳戚)에서 사림으로 정치 세력이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듭된 사화와 신료 주도의 반정을 거치면서 조선 초기 이래의 군신 권력관계가 새롭게 정립된 사실도 주목된다. 다시 말해 권력관계에서 어느 일방이 절대화되어 전제적(專制的) 또는 권신적(權臣的) 경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양하고, 상대성을 전제로 한 새로운 군신 권력관계가 형성되었다. 요컨대 조선초기의 절대적이며 수직적인 군신 권력관계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대적 군신 권력관계로 재편되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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