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희(朴世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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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1년(성종22)~1530년(중종25) = 4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경기도 남양(南陽) 출신이다.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박사화(朴士華)의 아들이고, 송촌(松村)박세훈(朴世勳)· 상촌(桑村)박세도(朴世燾)의 아우이며, 인재(認齋)박세후(朴世煦)의 형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4년(중종9) 별시(別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에 나이가 24세였다.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고, 1515년(중종10)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홍문관수찬(修撰)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어, 훈구파(勳舊派)의 인물들을 탄핵하였다. 1516년(중종11) 천문(天文) 이습관(肄習官)이 되었으며, 1517년(중종12)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비변사(備邊司)종사관(從事官)으로 옮겼다. 1518년(중종13)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가, 이조정랑(正郞)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사림파(士林派)의 인재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홍문관응교(應敎)을 거쳐서 시강관(侍講官)에 임명되었다. 1519년(중종14) 사간원사간(司諫)에 임명되었고,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는데,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벼슬에서 쫓겨나 평안도(平安道)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10여 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30년(중종25) 7월 7일 강계에서 풍토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40세였다.

조광조의 친분과 기묘사화의 피화

박세희(朴世熹)는 조광조와 어릴 때부터 사귄 친구였다. 1510년(중종5) 박세희가 20세 때 조광조와 함께 진사시(進士詩)를 보았는데, 조광조가 1등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박세희는 1514년(중종9) 별시(別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조광조는 그 다음해 별시에서 을과 1위를 했다. 중종이 반정(反正)한 뒤에 혁신정치를 하려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자, 많은 사림파(士林派)가 조정에 진출하여, 요직에 자리 잡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날 무렵 젊은 유학자들이 성리학(性理學)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구현하려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다. 그 중심에는 대사헌조광조와 좌부승지박세희를 비롯하여, 우참찬(右參贊)이자(李耔), 형조판서김정(金淨), 도승지(都承旨)유인숙(柳仁淑), 우부승지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박훈(朴薰), 부제학(副提學)김구(金絿), 대사성(大司成)김식(金湜) 등이 있었다. 그들은 중종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기 위하여 경연(經筵)에서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강론하였다. 1518년(중종13) 승정원(承政院)에서 『성리대전』을 강론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박세희를 비롯하여 26인의 유학자를 선정하여 아뢰었다. 조광조가 항상 말하기를 “박세희는 나의 외우(畏友)이다.” 하였는데, 젊은 30대의 사림파 가운데 박세희가 가장 뛰어난 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광조를 뒷받침하여 사림파의 친구들 사이에 우의를 돈독히 하며, 현량과(賢良科)를 통하여 등용된 신진 사류(士類)들을 격려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체포되어 충암(冲庵)김정과 함께 하옥(下獄)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는데, 박세희는 “신은 나이 28세입니다. 나이가 젊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또한 거칠고 어리석어서, 행검(行檢)이 없었습니다. 조광조는 신이 어려서부터 교유하였고, 김정· 김구는 항상 사귀었으니,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 줄은 모르고 그대로 따랐을 뿐이고, 아부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공초하였다. 처음에는 경상도 상주(尙州)로 유배가게 되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극변(極邊)인 강계(江界)에 안치(安置)되었다. 평안도 강계에 귀양 가서도 그는 두려워하거나 기탄하는 바가 없이 관부(官府)에 드나들고, 본부(本府)의 수령들도 그를 후한 예로 대우하였는데, 대간(臺諫)에서 이것을 문제로 삼아 그를 추고(推考)하도록 청하였다. 1522년(중종17) 중종이 전교하기를, “박세희는 추고하는 것이 옳겠다.” 하여, 다시 추국(推鞫)을 당하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10여 동안 극변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풍토병에 걸려 겨우 40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성품과 일화

박세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품성이 맑고 도량이 커서 어릴 때부터 이미 큰 선비의 국량(局量)이 있었다. 14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슬퍼하면서 형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큰형 박세훈(朴世勳)은 일찍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명성이 사림(士林) 사이에 높았다. 그는 여막(廬幕) 안에서 큰형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한 책상 한 이불로 지내면서 밤낮으로 강론하였다. 아버지의 3년 상기(喪期)가 끝나 상복을 벗을 때에 큰형이 아우들에게 타이르기를, “나는 본시 성질이 세상살이에 어둡고 느리어 벼슬길에 뜻이 없었으니, 우리 집안 문호(門戶)를 오직 두 아우에게 부탁한다. 또 너는 재주와 학문이 족히 세도(世道)를 도울 만하니, 과거를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조광조와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조광조와 사귀었고, 젊어서 김식· 김정· 김구 등과 사귀면서 서로 도학(道學)을 토론하고, 스스로를 깨우쳤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안곡(安谷)에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양의 안곡서원(安谷書院)과 순천(順天)의 이천사(伊川祠)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묘록보유(己卯錄輔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