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提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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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이후 당상관이 없는 육조(六曹)의 속아문 등에 두었던 2품 이상이 겸하던 관직.

개설

제주, 좨주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육조 소속 관서로 국용 물자 조달이나 건물의 신축과 수리[營繕], 창고·어학(語學) 등을 관장하던 관서인 경우 당상관이 배치되지 않으면 제조(提調)를 두어 업무를 총괄하였다.

제조는 중국 송·원나라 이후 등장하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대개 2가지 의미로 통용되었다. 하나는 ‘다스린다’ 하는 의미의 동사로 사용되었고, 다른 하나는 특정의 관직명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의 경우 고려말 도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김자(金資)가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에 제수되거나 정방(政房) 제조·경사도감(經史都監) 제조 등을 역임한 사실이 확인된다.

우리의 경우도 고려말까지는 대개 2가지 용례로 사용되다가 조선초에 관직명으로 정착되었다. 태조대부터 왕강(王康)이 역임한 습악제조(習樂提調)를 비롯해 설장수(偰長壽)가 역임한 사역원(司譯院) 제조나 종묘 건설을 위해 임시로 뽑은 태묘동역제조관(太廟董役提調官) 등의 용례가 확인된다.

태종대 도제조는 1품, 제조는 2품, 부제조는 3품 관원으로 뽑도록 규정화되었다. 다만, 조선초기에는 종친이 담당하기도 하였고, 내시가 임명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1397년(태조 6)에 김사행(金師幸)이 문묘조성도감 제조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1423년(세종 5) 2월 이조(吏曹)의 건의에 따라 각 관서 소속 제조 인원이 조정되었다. 그리하여 봉상시의 경우 4명에서 1명이 축소되었고, 훈련관은 8명의 제조에서 2명이 축소되어 6명이 되었다. 내자시의 경우 5명에서 2명이 축소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관서들과는 달리 제용감의 경우 1명 정원에 1명이 추가되었고, 사농시의 경우는 정원 1명의 제조직이 신설되었다. 같은 해 3월에 다시 한 번 각사 제조의 수가 조정되어, 모두 67개 관서에 134명의 정원으로 되었다. 이후에도 일부 관서에서 조정이 있었던 듯하며 『경국대전』에서는 43개 관서에 57명 이상의 제조가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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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임시로 설치되어 노비 변정이나 각종 토목 공사를 비롯해 왕실의 가례나 책봉례, 국상 등을 주관하던 관서에도 제조직을 두었다. 제조에 제수되면 녹봉이 따로 지급되지는 않았으나, 외출 시 시중드는 근수노비[跟隨奴]의 수나 기타 대우 등은 당상관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의 제조는 실안제조(實案提調)·상사제조(常仕提調)·위두제조(爲頭提調) 등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실안제조는 관서의 여러 제조 중 고정적으로 임명되어 해당 관서의 일을 책임지고 총괄하는 제조를 말한다. 상사제조는 매일 출근하는 제조를 말하며, 위두제조는 관서 소속 여러 명의 제조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제조를 말하였다.

각사의 제조는 배속된 관서의 소관 업무를 총괄하였다. 전의감 제조는 약재의 상태를 보아 수납을 결정하였고, 혜민국 제조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군기감 제조는 병기의 제작을 관장하였고, 선공감 제조는 토목 공사를 관리·감독하였다. 사옹원 제조는 진연(進宴) 때 왕에게 바치던 음식상[饌案]을 직접 운반하기도 하였다.

도제조가 있는 관서에서는 제조와 도제조가 상의하여 관서 일을 총괄하였다. 물품의 조달을 담당하던 교서관·상의원·내의원·장원서를 비롯해 군기시·전의감·혜민서 등의 관서에서는, 물품 출납 시 승정원에서 발부하는 전지(傳旨)를 받은 첩인(帖印)을 확인하여 내주되, 이때 사헌부 감찰이 출납을 담당하였다. 또한 의학이나 천문학 등을 관장하던 관서의 제조는 예조와 함께 취재(取才)를 담당하였다. 왕실의 교육을 담당하던 종학(宗學)의 경우도 종부시 제조가 종학의 관원들과 함께 강경(講經)을 시행하였다. 군기시의 제조는 매 계절 마지막 달에 병조와 도총부의 당상관 등과 함께 교외에 나가서 화포 쏘는 것을 연습시켰다.

소속 관원들의 직무 평가[褒貶]도 담당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관원들의 등급을 매겨 왕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직무 평가 때에는 반드시 관청에 출근해야 하고, 만약 도제조가 있는 관원의 경우는, 이를 도제조에게 보고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후기가 되면, 관서의 설치와 폐지에 따라 제조 직제가 소멸되거나 신설되는 관서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비변사로, 비변사의 관원은 제조·부제조·낭청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비변사를 관장하는 도제조격인 대신(大臣)과 당상인 제조·부제조 그리고 낭청으로 세분되었다. 이 가운데 제조가 포함된 당상은 임명 방법에 따라 계차당상(啓差堂上)과 예겸당상(例兼堂上)으로 구분되고, 역할에 따라 유사당상(有司堂上), 구관당상(句管堂上), 일반당상 등으로 나뉜다. 계차당상은 비변사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서 왕에게 보고하여 필요한 인물을 뽑아 쓴 경우이다. 예겸당상은 어떤 직위에 있으면 당연히 당상직을 겸직하는 관원으로, 공조(工曹)를 제외한 5개 조(曹)의 판서와 군영대장 등이 포함되었다. 유사당상은 비변사의 실무를 주관하며, 구관당상은 비변사 사안 가운데 특정한 분야를 주관하여 처리하는 당상이었다.

비변사 이외에도 장흥고에 1명, 선혜청에 3명이 신설되었다. 선혜청 제조 가운데 1명은 호조 판서가 겸직하도록 하였다. 준천사는 6명을 두었는데, 병조 판서·한성부 판윤·훈련대장·금위대장·어영대장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규장각에 2명을 두었고, 경모궁에 1명을 두었으며, 장생전에 3명을 두어 호조·예조·병조 판서가 겸직하였다. 영희전(永禧殿)에 1명, 화성(華城)의 화령전(和寧殿)에 1명을 두었다. 오군영 가운데 훈련도감 2명, 금위영 1명, 어영청 1명을 두었고, 경리청(經理廳)에도 역시 1명을 신설하였다. 반면 수성금화사나 문소전·전연사·소격서·사섬시 등은 관서가 혁파되면서 제조도 소멸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업무의 전문성과 연속성, 내지는 책임감을 고려하여, 어떤 직제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각사 제조를 겸직[例兼]하게 하는 사례가 많이 생겼다. 위에서 제시한 사례 이외에도 사복시 제조 2명 가운데 1명은 의정이 겸임하도록 하였고, 호조 판서는 군자감과 예빈시·사축서·선공감의 제조를 겸하였으며, 병조 판서는 군기시와 금위영·어영청의 제조를 겸하였다. 예조 판서의 경우도 도화서의 제조를 겸하였다. 총융사는 조지서의 제조를 겸하였는데, 이는 총융청 인근에 조지서가 위치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1868년(고종 5) 삼군부(三軍府) 설치 후에 병조 판서가 제조를 겸하도록 하는 등 제조 직제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갑오개혁 당시의 대대적인 개편에도 제조는 존속하며 순종대까지 이어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송희, 『조선초기 당상관 겸직제 연구: 동반 경관직 임시직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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