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관당상(句管堂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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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 또는 의정부의 실무를 맡은 종2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

개설

구관당상(句管堂上)은 조선시대 의정부나 비변사에서 실무를 맡은 당상관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비변사의 당상관인 종2품 이상의 제조(提調)로서 8도의 군사 관계 일을 각각 나누어 맡은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숙종은 비변사 안에 8도 구관당상제를 확립하고 군무(軍務)는 물론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하였다. 8도 구관당상이 업무의 전문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구관당상을 중심으로 왕과 대신(大臣), 육조(六曹)의 판서들이 정책을 협의·결정하였기 때문에 구관당상은 정치 운영의 중심에 위치했다. 1865년(고종 2)에 의정부와 비변사가 합쳐지면서 구관당상의 직임과 역할은 사라졌다.

담당 직무

구관당상은 비변사의 고위 관직으로 일정한 정원은 없으나 으레 종2품 이상의 제조가 겸임하면서 특정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조선초기는 정무(政務)와 군무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무관은 정무에 관여하지 않았다. 정무는 민정(民政)은 물론 군정(軍政)도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모두 의정부가 맡았다. 그러나 성종 이후 북쪽에서 야인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문관만으로 정확한 대책을 수립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변경(邊境)의 사정에 밝은 종2품 이상의 무관들이 문관과 함께 회의에 참여하여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정무와 군무 운영 체계는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그대로 이어졌다.

1550년(명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효과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도체찰사(都體察使) 직임을 두었다. 병조(兵曹) 안에 1사(司)만을 두고 종사관에게 사무를 맡기면서 비변사라 불렀다. 당시의 비변사는 그 자체가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고, 병조 안에 임시로 1사가 설치된 것에 불과했다. 비변사는 도체찰사의 설치·폐지와 맥을 함께하였으며, 변경 지역에 문제가 발생하면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戰時)에 설치되는 임시 관청이었을 뿐, 관제에 정식으로 편재된 것은 아니었다.

비변사가 독자적인 합의 기구로 편재된 것은 1554년이며, 이듬해 청사가 설치되면서 관원들이 확정·배치되었다. 도제조·제조·낭청이 그들이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권한이 강화되었다. 단순히 변경 지역의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무도 비변사에서 논의·결정되기에 이르렀다.

비변사의 도제조는 정1품으로서 현직·전직의 의정(議政)이 겸임하였다. 제조는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형조(刑曹)의 판서와 훈련대장, 어영대장, 개성유수와 강화유수, 대제학 등이 으레 겸임하였다. 『대전통편』에 의하면 이후 금위대장, 수어사, 총융사도 제조를 겸임하도록 규정을 개정했다. 그리고 당상관 정3품 문신(文臣) 중 병무(兵務)를 아는 사람은 부제조로 흡수했다. 이로써 국가 중요 기관의 장(長)은 모두 비변사의 제조·부제조가 되었으며 의정부와 육조는 권위와 역할이 약화·축소되었다. 비변사는 실제 국정 전반에 걸친 중대사를 토의·결정하게 되었고, 각 도에서 올라오는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는 모두 구관당상이 맡아보았다.

구관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구관당상은 처음에는 특정한 임무를 관장하는 당상관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1610년(광해군 2)에 비변사는 양남주사(兩南舟師) 구관당상을 남쪽 변방에 파견하여 변정을 구획하게 하였다. 또한 조총(鳥銃) 구관당상을 임명하여 대포 주조와 조총 제작을 힘쓰게 했다. 인조 연간에는 강도(江都) 구관당상이 임명되어 강화도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 자본을 모으는 방안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귀(李貴)를 염철(鹽鐵) 구관당상에 임명하여 소금과 철의 이익으로 국가 예산에 보충하게 하기도 했다. 현종 연간에는 진휼재생(賑恤裁省) 구관당상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는 기민(飢民) 구관당상을 임명하여 굶주린 백성을 감독하고 진휼하게 했다.

변천

숙종은 구관당상제를 통해 국가 난제를 해결하려 했다. 양역 변통을 위해 양역(良役) 구관당상을 두어 방안을 강구하게 했다. 전정(殿庭)의 헌가악(軒架樂)에 쓰는 악기인 종(鐘)과 석경(石磬)을 만들기 위해 김주신(金柱臣)·김석연(金錫衍)을 구관당상으로 차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연해(緣海) 방비책을 위해 민진후·이기하(李基夏)를 해방(海防) 구관당상으로 삼고, 민진후는 북한산(北漢山) 구관당상도 함께 맡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변사의 8도 구관당상제가 확립되었다. 1713년(숙종 39) 좌의정이이명(李頤命)은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담당 업무가 없는 것은 각 도를 분장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비변사의 당상관이 8도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각 도의 장문(狀聞)과 공문서는 반드시 구관당상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이명은 만약 의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대신(大臣)이 다른 당상관과 더불어 의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8도 구관당상과 4명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의 업무 분장과 역할이 명백하게 되었다.

이후 구관당상은 주로 민호(民戶)와 군역, 공물, 양전(量田)과 양역(良役) 등의 일을 도맡았고 이러한 일들은 민생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도민호군역(諸道民戶軍役) 구관당상, 재생(裁省) 구관당상, 양전(量田) 구관당상관과 양역 구관당상 등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8도 구관당상의 역할이 분명한 경계를 가지거나 업무가 전문화된 것은 아니었다.

영조는 1734년(영조 10)에 비변사의 8도 구관당상제를 재확립했다. 그러면서 구관당상이 비변사에서 문서를 정리하는 데 머무는 것을 넘어 각 도를 직접 왕래하면서 심찰(審察)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여러 지방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아 정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구관당상의 적임자로는 일찍이 관찰사를 역임하여 그 지역의 사정을 익숙하게 아는 자로 한정하였다. 이는 묘당과 관찰사의 이해 간극이 줄어야만 폐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왕과 대신, 육조의 판서와 8도의 구관당상이 정무를 협의·결정하는 정치 운영의 틀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비변사는 회안(會案)을 통해 스스로 구관당상 인사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국내외 군무의 기밀을 담당하던 비변사는 1865년에 의정부와 합부되면서 구관당상의 직임과 역할도 사라졌다. 비변사의 유사당상, 구관당상의 역임자에 대한 명단과 이들이 논의한 중요 사안은 『비변사등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연갑수, 「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권력 구조의 변화」, 『한국사론』 27,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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