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역(良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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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16~60세의 양인 장정이 지던 국역.

개설

조선시대에는 양인과 노비로 신분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를 기반으로 국가 차원의 노동력 징발과 재원을 마련하는 이른바 국역 체제를 운영하였다. 국역 체제는 일정한 연령에 해당하는 양인 남성에게 군역을 부과하여 징병함으로써, 노동력을 직접 징수하는 일종의 부세제도였다. 또한 징병에 대신해서, 혹은 병사의 상번(上番)에 대한 경제적 보조로 군포(軍布)를 납부하는 보인(保人)을 설정하여 이들 역시 군역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군역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의 원칙에 따라 정군에 해당하는 호수(戶首)와 봉족(奉足)으로 구성된 군호(軍戶)를 기초단위로 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나 양인들은 승려가 되든지 아니면 사노(私奴)·고공(雇工)·비부(婢夫) 등, 세력자의 호 내 솔거자로 들어가 국가의 역 부과를 피하는 현상이 점차 심해졌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군적에 군역자로 확보할 수 있는 양인이 줄어들었고 정부에서는 군역자 파악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군역 대상자가 군역을 회피한 경우 그 이웃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인징(隣徵), 이미 사망한 자나 어린아이에게도 정군으로 징병하거나 보인의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 등의 사태가 나타났다.

17세기에 중앙의 각종 군문(軍門)과 지방의 각 군영(軍營)들은 양인들을 각 기관의 소속자로 확보하기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 기관들은 지방 수령을 압박하거나 직접 지방에 출두하여 군역자를 징발함으로써 양인 1명이 2가지 이상의 군역을 부담하는 겸역(兼役)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 실제 군역을 부담할 수 없는 자들의 이름이 군적에 올라서 장부는 허부화(虛簿化)되어 갔다. 그리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하여 다시 새로운 군역자를 징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 부담을 낮추어 양천 신분에 관계없이 소속자를 모집함으로써 양인이 아닌 자들도 군역자로 파악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군역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 온전한 양인으로 군역 액수를 확충하기 위하여 양인으로 군역자를 충당하고자 하는 양역변통(良役變通)이 17~18세기 중엽에 논의되었다. 그와 동시에 군적에 누락된 양인 군역자를 색출하고, 역종별 군액을 정액화하는 정책이 진행되었다. 또한 역가(役價)를 일괄적으로 반감하고, 그 감소분을 토지에 부과하는 각종 양역정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변천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양역변통으로 일컬어지는 군역제 개선 방안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이것은 크게 소변통론(小變通論)과 대변통론(大變通論)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변통론은 양역행정(良役行政)의 합리적인 운영으로 폐단을 최소화하려는 방안으로서, 군제변통론(軍制變通論)·유포론(遊布論)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었다.

군제변통론은 양역 대상자인 양정의 부족 현상을 완화하기 위하여 양란 이후 무질서하게 편성된 각 군문의 군액을 보다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그 편제와 규모를 개편함으로써 오군영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군문의 장관에게 일임되었던 오군영의 운영을 병조 중심으로 일원화해 양역행정을 통일하는 군제정비였다.

한편 유포론은 양인 가운데 역에 응하지 않는 자들을 모아 포를 내게 함으로써 양역의 폐단을 완화하는 방법이었다. 조선후기에는 면역의 특권을 누리는 양반이나 역을 부과할 수 없는 자 외에도 모칭양반(冒稱兩班)이나 유학(儒學)·교생(敎生)인 척 거짓으로 꾸며서 면역하는 자가 많았다. 이들을 색출하여 양역에 보충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포론의 개혁 대상이 주로 유생층이었기 때문에 유포론(儒布論)이라고도 하였다.

대변통론에는 호포론(戶布論)·구포론(口布論)·결포론(結布論) 등이 있었다. 첫째, 호포론은 효종과 현종대에 유계(兪棨)·정태화(鄭太和)·정지화(鄭知和) 등 일부 정부대신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가, 숙종·영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호를 단위로 포를 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종래 군포의 납부에서 제외되었던 양반도 포를 내게 한다는 의미에서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호포론자들이 양반과 평민의 신분적 차등의 폐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즉, 호포는 신역(身役)이 아니라 호조(戶調)임을 강조하여 호포제가 하등 명분에 저촉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이들이 호포를 주장하는 목적은 양반까지 군포 수취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양역의 폐단을 일소하는 동시에 국가재정에도 여유를 두고 군사력의 강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구포론은 구전론이라고도 하며 호포론과 마찬가지로 양반도 군포를 내서 양역폐를 시정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다만 호포가 가호(家戶)를 대상으로 하는 대신 구포론은 인정(人丁) 1명을 단위로 포 혹은 전(錢)을 받는 것이었다. 이 구포론의 대표적인 논자는 숙종대 판중추부사였던 이이명(李頤命)이었다. 그는 양반도 모두 군왕의 신민(臣民)인 이상 출포해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일부 양반의 불만을 사더라도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으로 인한 양민의 원망을 없애는 것이 급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구전론은 모든 사람이 포나 전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공노비·사노비, 충신, 효자, 열녀 및 공신의 적장자와 종친, 문무이품(文武二品) 이상자, 노약자, 유리걸식자, 병자, 장인·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이 된 자, 번상(番上)하는 군사와 훈련도감 군사 등은 면역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구전론을 시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서 호적법의 엄격한 정비와 군제변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셋째, 결포론은 결미(結米)·결전론(結錢論)이라고도 하며 수포의 대상을 인정, 즉 사람에서 전결로 전환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즉, 조선후기 농촌사회 분해 과정에서 몰락해 가는 양인 농민에게 포를 징수하는 대신 경제단위인 토지를 기준으로 땅이 있는 자는 포를 내고, 땅이 없는 자는 포를 내지 않아도 되게 함으로써 양역폐를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일 전면적으로 결포제가 실시되면 이는 경제능력에 따른 부세가 징수되어 철저한 균부균역(均賦均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결포론은 군포의 완전한 폐지와 결포의 전면적인 실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2필인 군포 부담을 1필로 감하고 그 대신 각 읍의 결역가로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상과 같은 대변통론은 당시 양역폐의 원인을 양정 부족과 군역 부담자의 빈곤으로 파악해 이를 지배층인 양반에게도 일부 부담시켜 균부를 실현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양란 이후 동요하는 조선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배층이 최소한의 양보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한의 양보마저도 당시의 양반 지배층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대변통론에 해당되는 주장에는 당시의 신분제를 동요시킬 수 있는 요소가 내포되어 있어 시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양역의 폐단은 정부 차원에서 개혁되어야 할 과제였기 때문에, 결국 영조대 균역법(均役法) 시행을 감필로 귀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결포론이 일부 수용되어 균역사목 내에 결미조가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김우철, 「均役法施行 전후의 私募屬 硏究」, 『忠北史學』 4, 1991.
  • 손병규, 「18세기 양역정책과 지방의 군역운영」, 『군사』 39, 1999.
  • 윤용출, 「17, 18세기 役夫募立制의 成立과 展開」, 『韓國史論』8, 1982.
  • 차문섭, 「양역실총 해제」, 『良役實摠』, 여강출판사 영인, 1984.
  • 정연식, 「조선후기 ‘役總’의 운영과 양역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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