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長興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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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와 조선시대에 돗자리와 기름 먹인 종이 등의 조달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장흥고는 설치 이후 관용 및 왕실에 소용되는 돗자리나 기름 먹인 종이, 후백지(厚白紙) 등 일반 종이의 조달을 관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장흥고는 고려후기인 1308년(고려 충렬왕 34) 종전의 대부상고를 개편하여 설치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장흥고를 설치하고는 포필(布匹)·지석(紙席) 등 물품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403년(태종 3) 관제 개편 당시 흥신궁을 병합하였고, 이후 풍저창도 병합하였다. 1405년(태종 5) 호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편입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후기에는 종5품의 사(使) 1명, 종6품의 부사 1명, 종7품의 직장 1명 등의 직제로 편제되었다. 공민왕 때 사를 강등하여 종6품으로 하면서 부사와 직장을 폐지하고 대신 종8품의 주부를 설치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종5품 사 1명, 종6품 부사 1명, 종7품 직장 2명, 종8품 주부 2명의 직제로 편제되었다. 1414(태종 14)에 주부를 부직장으로 일컬었다가, 뒤에 제조 1명을 더 두었는데, 1432년(세종 14)에는 이를 이조 우참판으로 하여금 겸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11일). 1460년 직장과 부직장 각 1직이 혁파되었고, 1466년에는 사가 영(令)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는 영·주부·직장·봉사 각 1명씩으로 정원이 규정되었으며, 이 가운데 직장 이하 1명은 구임관으로 규정되었다. 이속은 서원(書員) 6인, 고직 6명, 사령 5명, 군사 1명이었다.

장흥고는 조선조 설치 초기에는 베와 종이, 돗자리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경국대전』에서는 일부 변경이 있어 돗자리와 기름 먹인 종이, 종이 등의 물품 조달을 관장하도록 규정되었다. 장흥고는 이 밖에도 사기(砂器)와 목기(木器) 조달을 관장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7년 4월 20일).

관사는 예전에는 남부 장흥방(長興坊), 즉 오늘날의 중구 남대문로와 충무로, 회현동 일대에 있었는데 뒤에 서부 인달방(仁達坊), 즉 오늘날의 종로구 내수동, 내자동, 적선동 일대로 옮겼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장흥고의 업무가 분화되고 다양화된 듯하다. 그리하여 고종 초에 편찬된 『육전조례』에서는 장흥고 소속의 담당 부서로, 석자색(席子色)·지색(紙色)·풍저창(豊儲倉)·미면색(米麵色) 등이 확인된다. 석자색은 돗자리와 버드나무 상자나 키 등을, 지색은 기름 먹인 종이나 초주지(草注紙), 저주지(楮注紙) 등의 조달을 관장하였다. 풍저창은 미·두(米·豆)나 종이를 관장하였는데, 문무 장원에 하사하는 미곡과 대신이나 봉조하의 주급미(周急米) 등을 관장하였다. 미면색 역시 미·두를 관장하였다. 1894년(고종 31) 관제 개편 때 궁내부 예하로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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