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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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군 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軍令) 기관.

개설

조선은 커다란 전란을 통해 세워진 국가는 아니었으나, 태조 이성계의 뛰어난 군사 활동이 건국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건국 후 장수들을 통제할 제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고려시대 후기 이후에 장수들이 사적으로 군사를 장악하고 지휘하는 관행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잘 짜인 군령 체계를 갖추어야 할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성격이 서로 다른 병종(兵種)의 군사들을 한데 묶어 오위(五衛)라 하여 5개의 부대로 편성하고 있었던 점도 오위도총부가 설치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직후 태조는 병권(兵權)을 통합하기 위하여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였고, 뒷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실권을 장악한 뒤 사적으로 군사를 장악하고 지휘하는 관행을 폐지하였다. 이어서 삼군부(三軍府)가 설치되었다가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된 뒤 지위가 높아진 병조(兵曹)에 병합되면서, 병조에 의해 군령이 행사되는 체계가 수립되었다. 그 뒤 다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신설되어, 문관(文官)의 기구라고 할 수 있는 병조와 무관(武官)의 기구인 삼군진무소의 협조에 의해 군령권이 행사되는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틀 위에서 삼군진무소가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에 이어 오위도총부로 개편됨으로써 조선시대 전기의 군령 체계가 완성되었다.

오위도총부는 병조와 횡적으로 협조하며, 오위에 소속된 중앙군의 각 단위부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병조는 오위를 속아문(屬衙門)으로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군사 행정을 총괄하면서 무반의 인사에도 중요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런 까닭에 오위도총부는 전반적으로 병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조선은 문민(文民) 우위의 군령 체계를 갖추어 운영하였던 것이다. 오위도총부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중앙군이 오군영(五軍營) 체제로 개편됨에 따라 기능이 정지되었고, 개항 후 신식 군제가 도입될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성계는 요동(遼東)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권력을 장악한 뒤 새 군령 기구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뒤인 1393년(태조 2)에는 이를 개편,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건국의 핵심 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을 통해 여러 왕자와 장수들의 군사 지휘권을 통제하려 하였다. 흔히 ‘왕자의 난’이라 부르는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1400년(정종 2), 장수들이 사적으로 군사를 장악하고 지휘하는 관행을 없앴다.

태종은 즉위한 뒤 1401년(태종 1)에 군기(軍機)와 숙위(宿衛)를 관할하고 있던 중추원(中樞院)을 의흥삼군부에 병합하여 군사 지휘권을 일원화하였다. 그러나 무장들을 주축으로 한 기구가 군권을 독점하고 있는 점과, 의정부(議政府)의 정승들이 군사 동원을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우려하여 의흥삼군부를 승추부로 개칭하였다가 1405년(태종 5)에는 병조에 통합하여 당시 태종은 육조(六曹)를 정2품 아문으로 승격시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였다. 육조를 왕에게 직속시킴으로써 의정부의 권한을 약화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인데, 마찬가지로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병조에 군사 지휘권까지 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 조치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여, 1409년(태종 9)에는 삼군진무소를 최고 군령 기관으로 설치하여 병조에 집중되어 있던 군사 업무를 분산시켰다.

그런데 삼군진무소가 군령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병조의 협조가 있어야만 했고, 그에 따라 두 기구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자 세종은 명확하게 병조가 삼군진무소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도적으로도 병조는 군사 행정 전반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무관에 대한 인사 권한, 삼군진무소에 대한 감독권 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삼군진무소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고려시대 말의 삼군도총제부에서 태종~세종 연간의 삼군진무소에 이르는 군사 기구는 중앙군의 다양한 병종을 평상시에도 중군(中軍)좌군(左軍), 우군(右軍)의 삼군으로 나누어 소속시켜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대로 지휘 체계로 운영할 수 있도록 마련한 기구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종은 중앙군 각 부대를 5개의 상급 조직으로 편성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삼군을 오사(五司)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이를 이어받아 1457년(세조 3)에 오위로 이름을 바꾸고, 위(衛)에서 부(部), 여(旅)를 거쳐 오(伍)에 이르는 조직 및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자세한 훈련 방식도 정하였다. 이때 최고 군령 기구의 명칭도 오위진무소로 바뀌었는데, 그 뒤 1466년(세조 12)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명칭이 정해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됨으로써 제도로 확립되었다.

조직 및 기능

오위도총부는 서반의 정2품의 아문(衙門)으로서, 오위에 대해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오위는 중위(中衛)의흥위(義興衛), 좌위인 용양위(龍驤衛), 우위인 호분위(虎賁衛), 전위인 충좌위(忠佐衛), 후위인 충무위(忠武衛)로 구성되어 있었다. 관원으로는 정2품 도총관(都摠管) 5명, 종2품 부총관(副摠管) 5명이 지휘부를 구성하였는데, 모두 다른 관서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대개 종친(宗親)이나 부마(駙馬), 의정(議政) 등 왕이 신임하는 최고위 관원들이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그 밑에는 종4품 경력(經歷) 4명, 종5품 도사(都事) 4명이 있어 행정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 밖에 서리(書吏) 13명, 사령(使令) 20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속대전』 단계에서는 경력과 도사가 각각 2명씩 추가되어 정원이 6명이 되었다.

오위도총부의 임무는 오위의 군무(軍務)를 관장하여 다스리는 것이라고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오위가 평상시에 담당한 임무는 여러 중앙군의 병종이 궁궐을 호위하고 지키기 위해 정해진 자리에서 숙직하고, 도성 안을 돌아다니며 순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위도총부의 임무는 이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중일시재(中日試才) 등 각종 시재를 주관하였다. 또한 국왕의 거둥이나 전좌(殿座) 때에 도총부 소속의 당상과 낭청이 모두 시위에 참여하며 당상 가운데 4명이 보검(寶劍)으로 차출되었고, 국왕의 궐외 거둥 때에 당상과 낭청 각 1~2명이 궁궐에 머물며 경비를 담당하였다. 중앙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전쟁에 나가는 경우에는 별도의 지휘부가 구성되었으므로, 오위도총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오위도총부 역시 삼군진무소와 마찬가지로 군령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병조의 협조를 얻어야 했으며, 병조가 실질적으로 오위도총부를 감독하고 통제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이 문관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가였다는 특성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군령 체계의 특성은 또한 조선에서 무관이 주도하는 반란이 쉽게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판 구실을 하였다.

변천

오위도총부는 16세기에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어 군사 업무와 일반 국정(國政) 즉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담당하게 되면서 차츰 그 기능을 상실해갔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비롯한 오군영이 설치되어 중앙군 조직이 오군영 체제로 바뀜에 따라 오위의 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휘 감독할 대상이 사라진 오위도총부는 법제상으로만 존재하는 기구로 남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군제 개혁에 의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한우근 외, 『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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