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총관(副摠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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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중앙군을 통솔하던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소속의 종2품 관직.

개설

조선초기 중앙군의 군사 조직이 오위(五衛)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총괄 관서인 오위도총부가 설립되었다. 오위도총부의 관제에 따라 도총관과 부총관(副摠管)의 직무가 설정되었다. 부총관은 총관이라고도 통칭하였다. 총관이라는 명칭은 어떤 일이나 부서를 담당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료에서 ‘총관’이 부총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하지만 궁궐의 숙위(宿衛)와 왕의 호위에 관련한 직책을 의미할 때는 총관이 오위도총부의 부총관과 도총관을 의미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문총관과 무총관도 포함하였다.

부총관은 군무(軍務)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영조대인 1738년(영조 14)에 부총관 김환(金鐶)은 왕이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고, 성지(聖志)를 세우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고, 풍속을 바로잡기를 요청하였다. 당시 김환은 나이가 90세로서 군직을 감당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1755년 부총관에 승진된 승지송수형(宋秀衡)은 문학과 재망(才望)이 형편없었지만 특별히 나이가 많다는 것 때문에 영조가 가련하다고 부총관에 임명하였다. 정조는 1776년에 즉위하면서 김용겸(金用謙)을 부총관으로 삼았는데, 예학(禮學)에 익숙하기 때문에 궁궐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부총관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군직이라기보다는 궁궐에 소속되어 왕의 측근이 될 수 있는 지위로 변질되었다. 물론 정조대 입직(入直) 총관이 궁궐 문을 단속하지 못한 죄로 삭탈관직되기도 하였지만, 부총관은 문관직의 전유물로 바뀌어갔다.

담당 직무

조선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중앙군의 핵심이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 등의 군영으로 옮겨갔다. 따라서 오위도총부의 기능은 약화되었고 부총관의 기능도 유명무실해져 갔다. 다만 부총관은 본래 정원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품계에 따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였으며, 5명을 정식(定式)으로 삼았으므로 왕이 자의로 임명할 수 있는 직책이기도 했다.

1857년(철종 8)에는 문관도 총관에 임명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인 정조 때부터 부총관은 군직(軍職)이라기보다는 왕의 총애를 받는 문신(文臣)이 임명되는 특수직 혹은 명예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783년(정조 7)에 강세황(姜世晃)을 특별히 승진시켜 도총관으로 삼았는데, 강세황의 나이가 71세였다. 또한 1794년 이시수(李時秀)를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관으로 삼았는데, 이시수가 금방 상을 마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도총관은 더 이상 군무(軍務)를 맡는 중책이라기보다는 임시로 부여되는 명예직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고종대까지 부총관 제도가 유지되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오위도총부는 도총관 5명, 부총관 5명, 경력(經歷) 6명, 도사(都事) 6명, 서리(書吏) 13명, 사령(使令) 2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부총관의 임무가 명예직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정조대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즉위년에 겪은 암살 사건으로 궁궐 내 숙위 체제의 개편을 단행했다. 1777년 궁궐 내의 숙위군(宿衛軍)인 위장(衛將)·부장(部將)·금군도감(禁軍都監)의 군병·각 문의 수문장(守門將)·국별장(局別將)·궁궐 담장 밖 삼영(三營)에서 입직한 순라(巡邏)들을 모두 숙위대장(宿衛大將)에게 소속시켰다. 그리고 도총부와 병조는 순찰하는 등의 일을 숙위대장에게 공문으로 보고해야 했으므로 부총관이 숙위를 담당할 여지가 없어졌다.

더욱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5위를 중심으로 하는 군제가 약화되어 오위도총부가 명색만 남고 쇠잔해졌다. 오위도총부는 숙위에 임하는 경우가 없었고 부총관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결국 1882년(고종 19) 관제 개편 때 감생청(減省廳)에서는 5위의 군제가 실속 없이 헛된 명성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도총부를 혁파하고 총관은 모두 없애, 부총관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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