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감(司宰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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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이후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 사용하는 어물(魚物)·육류(肉類) 등을 관할하던 호조(戶曹) 소속의 아문.

개설

사재감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물고기를 잡는 장치인 어량(魚梁)과 산·숲·시내·연못[山林川澤]을 관장하던 기관이었다. 조선 건국 후 고려 때의 사재감을 계승하여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땔감[燒木], 소금[食鹽], 육류, 어물 공급을 담당하였고 전국의 어장 등을 관리하였으며 호조 소속의 아문이었다. 원래 정3품 아문이었으나 관원을 줄이면서 조선후기에는 종4품 아문으로 낮아졌다. 1882년(고종 19)의 관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문종 때 어량과 산천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사재감을 처음 설치하였다. 1298년(고려 충렬왕 24) 사진감(司津監)과 사재시(司宰寺), 1308년 도진시(都津寺)와 사재시, 1356년(고려 공민왕 5) 사재감, 1362년 사재시, 1369년 사재감, 1372년 사재시로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조선 건국 후 1392년(태조 즉위) 7월에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사재감을 설치하여 어량·산천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1403년(태종 3)에는 전함(戰艦)의 수리와 운송을 감독하는 사수감(司水監)과 합병하여, 사재감은 선박 관리 업무와 운송 관련 업무도 관할하였다. 그러나 어량·산천을 관리하는 일과 선박을 관리하는 일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1432년(세종 14) 선박 관리 업무를 전담할 사수색(司水色)을 독립시켰다. 1470년(성종 1)에는 사재감에 소속된 수참(水站)의 배와 전라도·충청도의 조선(漕船)에 관한 업무를 모두 사수색을 개칭한 전함사로 옮겼다. 이로써 사재감의 업무는 건국 초기와 같이 궁중에 어물, 소금, 육류, 땔감을 공급하고 어량, 산택을 관리하는 업무만 담당하는 관서로 자리 잡았다. 이 업무 외에도 사재감에서는 궁중에 횃불[炬火]을 공급하는 업무도 담당했으나, 19세기 이후 이 업무는 폐지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 건국 초기 사재감은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 종5품 승(丞) 1명, 종5품 겸승(兼丞) 1명, 종6품 주부(主簿) 2명, 종6품 겸주부(兼主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을 둔 기관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1414년 1월 감을 정(正)으로, 소감을 부정(副正)으로 개칭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부정 1명을 감원하였다가 1419년 2명으로 되돌렸다. 1423년에는 주부 1명을 감원하였고, 1460년(세조 6)에는 부정 1명, 직장 1명을 감원하고, 1466년에 종9품 참봉(參奉) 1명을 다시 감원하였다.

『경국대전』의 사재감 소속 관원은 2품 이상의 제조(提調), 정, 부정, 종4품 첨정(僉正), 주부, 직장, 종9품 참봉 각 1인이 있었다. 주부 이상의 관원 중 1명은 업무의 특수성을 인정받아 임기에 구애되지 않고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구임직(久任職)으로 규정되었다.

사재감에는 경아전(京衙前)으로 서리(書吏)가 20명 있었지만, 『속대전』에서는 서리가 서원(書員)으로 격이 낮아지고 정원도 11명으로 줄었다. 『대전회통』 단계에는 다시 5명으로 줄었다. 또한 차비노(差備奴) 30명, 근수노(根隨奴) 6명이 배정되어 지방의 공노비가 양인 대신 역(役)을 담당[選上立役]하였다. 그러나 『속대전』 단계에 이르면 이것이 폐지되고, 서울 사람으로 뽑아 역을 담당하게 하고 대신 매달 포(布)를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재감은 주로 궁중에 땔감, 소금, 육류, 어물 등을 공급하였고 전국의 어장 등을 관리하였다. 궁중에 횃불을 공급하는 업무도 담당하였으나 『대전회통』 단계에서 그 업무는 폐지되었다.

변천

사재감의 위치는 초기에는 북부 의통방(義通坊)에 있었으나 나중에 순화방(順化坊)으로 이전하였다. 사재감은 조선 초 정3품 아문이었으나 그 후 『속대전』에서는 정3품 정, 종3품 부정, 종9품 참봉이 폐지되고, 종8품 봉사(奉事) 1명이 증원되었다. 책임자가 첨정이 됨으로써 사재감은 정3품 아문에서 종4품 아문으로 격이 낮아졌다. 1882년(고종 19) 관제 개혁 때 혁파되었다.

재정

전국의 어장과 염분 등은 사재감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관련 세금은 사재감에 납부하였다. 사재감에서는 이를 토대로 궁중의 각종 제사와 잔치에 필요한 어물 등을 공급하였다.

사재감에서 사용하는 땔나무와 싸리나무로 만든 횃불은 경역리(京役吏)에게서 징수하였다. 경역리는 지방 관청이 해야 하는 서울에 관한 일을 대행하는 향리로서, 기인(其人)이라고도 불렀다. 『경국대전』에는 기인 332명 중 233명이 사재감에 소속되어 기인 한 명당 하루에 땔나무 57근, 이틀에 싸리나무로 만든 횃불[杻炬] 10근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지방 향리는 땔나무와 싸리나무 횃불 대신 한 달에 면포 5필을 납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역리의 사역은 대동법 실시 이후 기인공물제(其人貢物制)로 대체되었다. 즉, 향리가 서울에 올라와 역(役)을 지지 않고 서울 사람이 대가를 받아서 이러한 물품을 대신 납입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 이후 사재감 재정은 선혜청(宣惠廳) 57공(貢)과 균역청·진휼청·상평청의 17공에 편입되어 조달되었다. 선혜청에서는 1년에 쌀 8,538석, 균역청 등의 3청에서는 포(布) 8동 41필을 배정받았다. 사재감에서는 이를 사재감 소속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였고 공인은 사재감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사재감에서 받은 재정이 부족하여 물품 조달이 어려울 때, 호조에서 추가로 배분해 주었는데, 이를 별무(別貿)라고 한다. 별무는 공물(貢物)을 적어 둔 목록에 있는 물건이 부족할 때 받는 유원공별무(有元貢別貿)와 목록에 없는 것이 필요할 때 받는 무원공별무(無元貢別貿)로 나뉜다. 사재감에 배정된 별무의 규모를 보면, 가장 규모가 컸던 해인 1778년(정조 2)의 경우 유원공별무는 6,028냥이었다. 중간 규모이던 해인 1785년 유원공별무는 1,017냥, 무원공별무 93냥이었고, 가장 적은 해인 1798년 유원공별무는 1,469냥, 무원공별무는 89냥이었다. 사재감의 회계 업무는 호조지조색(支調色)의 계사 6명 중 한 명이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동사강목(東史綱目)』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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