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원(訓鍊院)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군사의 무재(武才) 시험, 무예의 연마, 병서(兵書)의 강습 등에 관한 일을 맡았던 관청.

개설

고려시대에는 군사들의 훈련이나 무예를 시험해서 선발하는 기구를 별도로 설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조 말기에 이르러 새로운 무반층의 양성을 위하여 체계적인 병학 교육과 군사 훈련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조선이 건국한 뒤 곧바로 훈련관(訓鍊觀)을 설치하여 무예를 훈련하고 병서와 전진(戰陣)을 교습시키는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뒤 1394년(태조 3) 중군군후소(中軍軍候所)를 흡수하면서 훈련과 교습을 주관하는 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하였다.

그 뒤 계속해서 기구상의 정비를 계속하다가 1466년(세조 12)에 마침내 훈련원으로 명칭을 고치고 제도적 기틀을 갖추었다. 가장 핵심적인 업무는 무반을 선발하는 각종 시험 따위를 주관하는 일과 군대 훈련에 관한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고급 무반의 후보자를 선발하는 무과(武科)를 비롯하여 도시(都試)라든가 각 병종의 선발 시험 등을 관장하였다. 후자에 있어서는 병서의 습독(習讀)과 습진(習陣) 따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과 함께 혼란한 군사제도를 정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앙과 외방의 품관들을 군사조직에 편입시켜 숙위의 임무를 맡겼으나 워낙 다양한 계층에서 나왔기 때문에 지위나 신분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별도의 교육과 선발 문제를 담당할 기구가 필요했다. 이에 태조가 즉위하자 곧바로 훈련관을 설치하였다.

설치 당시에는 정3품 사(使) 1명, 종3품 군자좨주(軍諮祭酒) 2명, 종4품 사마(司馬) 4명, 종5품 사직(司直) 4명, 종6품 부사직(副司直) 4명, 종7품 참군(參軍) 4명, 정8품 녹사(錄事) 6명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 사직과 부사직 각 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겸직이었다. 1394년에 비슷한 내용의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중군군후소를 흡수하면서 큰 기구로 발전하였다. 특히 진법 훈련이 강화됨에 따라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뒤 1409년(태종 9)에 사직을 고쳐서 판관(判官)으로 하고, 부사직을 주부(主簿)로 변경하는 소폭의 개편이 있었다.

1466년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명칭을 고치는 동시에 그 소속의 관직제도 바뀌었다. 이는 세조 때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개혁정치와 맞물려 추진되었다. 새로이 당상관에 해당하는 도정(都正)·겸도정(兼都正)을 각각 하나씩 두었는데 정3품이었다. 또 사는 정(正)으로, 지사(知事)부정(副正)으로, 부사(副使)는 첨정(僉正)으로, 녹사(錄事)는 봉사(奉事)로 각각 관직명을 바꾸되 부사 둘과 녹사 하나를 없애고 주부 하나를 더 두었다. 이로써 제도적 기틀이 갖추어졌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2품 지사 1명, 정3품 도정 2명, 정3품 정 1명, 종3품 부정 2명, 종4품 첨정 2명, 종4품 판관 2명, 종6품 주부 2명, 정7품 참군(參軍) 2명, 종8품 봉사 2명, 서원(書員) 3명, 고직(庫直) 1명, 사령(使令) 6명, 방직(房直) 1명, 군사(軍士) 7명, 종각직(鐘閣直) 1명, 타종군(打鍾軍) 3명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습독관(習讀官) 30명을 두어 각종 병서 등을 습독하고, 활쏘기와 말 타는 법 등을 연습하도록 했다. 최고 책임자는 지사였지만 겸임으로 파견되었고, 또 문신이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실제적인 운영은 전임 당상관인 도정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록 당하관이기는 하지만 정을 거치면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훈련원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변천

임진왜란을 거친 뒤 군사훈련체계가 크게 개편되었고, 아울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립되면서 훈련원의 위상과 기능이 크게 떨어졌다. 그로 인해 점차로 특별한 소임이 없는 고위 관료들을 우대하기 위한 부서로 활용되었다. 이에 따라 소속의 관직제도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첨정이 2명에서 12명, 판관이 2명에서 18명, 주부가 2명에서 38명으로 늘었다. 마침내 군대 해산과 함께 1907년 폐지되었다.

의의

역사상 처음으로 무재(武才) 시험, 무예의 연마, 병서(兵書)의 강습 등을 전담하는 관청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前期篇』, 陸軍本部, 1968.
  • 朴洪甲, 「조선시대 군사훈련기구 훈련원의 성립과정과 역할」, 『軍史』43, 2001.
  • 박홍갑, 「조선초기 훈련원의 위상과 기능」, 『史學硏究』67,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