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義禁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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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특명을 받아 특수한 범죄에 관한 조사 및 처리를 담당하던 최고 사법기관.

개설

의금부는 왕명을 받들어 추국(推鞫)하는 일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지체된 어려운 사건의 처결과 사대부 관련 범죄에 대한 처리, 그리고 강상윤리에 관계된 사건 등을 담당한 관서이다. 고려말 조선초 왕조교체기에 군사적 기능을 가지고 금위친병과 포도(捕盜), 금란(禁亂) 및 형옥(刑獄) 사무를 맡았던 순군제(巡軍制)가 변천하여 1414년(태종 14) 왕명에 의해 조옥(詔獄)을 주관하는 사법기관으로 개편되었다.

의금부의 기능은 정치경제적 변화상을 반영하여 바뀌었다. 고려말 조선초 정치 불안이 지속된 상태에서는 병권장악이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관건이 되었기 때문에 의금부의 사법적 기능은 순작(巡綽), 포도, 금란과 같은 군사적 기능보다 부각되지 못했다. 하지만 왕권이 확립되고 정치체제가 정비되어가는 태종대부터는 군사적 목적을 가진 순군체제에서 벗어나 사법적 기능을 전담하는 독립된 부서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의금부는 정권을 옹호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왕족 범죄, 국사범, 반역죄 등 큰 범죄를 비롯하여 강상윤리에 관계된 범죄, 사헌부에서 적발한 사건, 타 기관에서 판결이 어려워 오랫동안 지체된 사건을 처결하고 양반 관료층을 재판하는 특별사법기관으로 정립되었으며, 왕명에 따라 재심과 상고심을 담당하는 최고 재판기관으로서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의금부의 전신인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는 고려말 원 지배하에서 치안 유지를 위한 군사기구로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군사적 기능과 체포와 재판 절차가 따로 규정되지 못하고 두 가지 임무를 함께 수행하면서 고려말 혼란기와 조선왕조 초기 체제가 정비되기 이전 왕권을 안정시키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순군만호부가 명칭을 바꾼 순위부(巡衛府)와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는 정권 반대파 제거를 위한 형식적 정치재판을 수행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 저항사건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에도 충실했다.

왕권과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1414년(태종 14) 8월 의용순금사에서 의금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기능에도 변화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 순작, 포도, 금란 등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면서 병조에 속해 있던 의용순금사는 조선의 군사체제가 정비되고 새로운 병종들이 생기자 군사적 기능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하였다. 이후 의금부는 사법전담기관으로 변화하여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의금부로 이름을 바꾸고 왕명을 받들어 추국을 담당하는 사법기관으로 개편된 이후 의금부는 반대파 제거를 위한 형식적 정치재판,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의 반항에 대한 탄압재판, 유교 윤리 옹호를 위한 재판, 각종 미해결된 사건과 사회체제를 위협하는 중대 사건의 최종판결, 대외관계 범죄의 전담기관, 관료의 직무상 범죄를 취급했다. 한편 양반관료의 우대를 위한 양반재판소로 왕권을 확립·강화시키고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의금부는 왕권의 확립과 절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 최고 사법전담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사법기관으로서 의금부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의금부 사법기능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왕권을 옹호하는 역할이었다. 왕권의 확립과 유지에 필요한 일체의 반란 및 음모 그리고 난언(亂言)이나 요언(妖言)을 처단하였고 왕명을 거역하거나 왕의 심경을 거스르는 경우 의금부가 동원되었다. 반란과 모역 등 대역에 관계된 범죄와 능상방화자 전패훼손자 등 직접 왕권 침해에 관계된 사건은 특별히 궁정재판소인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다음으로 의금부는 유교 윤리 옹호기관으로서 조선시대 기본윤리인 유교도덕에 어긋나는 행위 즉 강상(綱常) 범죄를 전담하여 다스리고 처벌하였다. 또 왕의 교지를 받들어 추국하는 최고 사법기관으로 다른 법사에서 추핵하던 사건을 재심 혹은 시정한다든지 이관받아 재판하는 것도 의금부 임무였다. 양반관료 범죄도 다루었는데 비록 범죄자라 할지라도 일반 평민과 구분하여 치죄(治罪)함으로써 신분사회 조선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의금부 체제였다. 중기 이후에는 사법기관으로서의 의금부와 형조의 담당을 분명히 하여 의금부는 관직자의 독직(瀆職)과 강상의 문제에 있어서 정과 출신 및 동·서반 정직자에 한하여 추국하도록 제한함으로써 진신(搢紳)의 옥(獄)으로 정립되었다. 조선후기 유수원(柳壽垣)은 ‘중대사건의 경우 삼법사의 사례에 따라 의금부, 사헌부, 형조의 당상들이 한데 모여서 의논하여 보고해도 좋을 텐데 이를 반드시 의금부로 돌려보내고 형조는 마치 천한 죄수나 다스리는 관청으로 보는 것이 문제’라며 의금부에 판결 권한이 집중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의금부는 대외관계 범죄의 전담기관이었으며 왕명을 받들어 특수임무를 수행하거나 그 밖의 잡무에도 종사하였다. 구체적으로 외국공관의 감시, 밀무역사범의 단속, 외국인의 무례한 행위, 외국인 범죄 등을 의금부에서 처리하였다. 왕명으로 실정을 파악하거나 민폐를 금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죄인으로부터 몰수한 재산 처리를 담당하였다. 또 금화도감(禁火都監)의 주 구성원으로 의금부 관원이 참여하였으며 고사장(考査場) 금란 임무를 수행하였고 나례(儺禮) 의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초기 의금부 구성은 당상관인 제조와 낭관 및 하부구조로 구분되었다.

당상관은 정1품 도제조 1인, 종1품 이하 제조 3인을 둔다고 규정하였으나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임기는 따로 규정되지 않았고 왕명으로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의 추국에 관여하였으며 의금부 실무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의금부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왕권 유지에 필요한 정치범 처벌이나 왕권옹호를 위한 특별범죄 처리였기 때문에 의금부 제조 역임은 영광스럽지 못하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의금부 제조를 역임한 관리는 청결이나 신성을 요하는 자리에는 임명되지 못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판사(判事) 중심의 『경국대전』 체제로 개편되었는데 당상관은 4인으로 종1품 판사, 정2품 지사(知事), 종2품 동지사를 두었다. 고위 관직자나 작호를 가진 공신으로 겸임(兼任)하게 하였는데 삼사의 장관과 형판은 겸임을 금하였고 무반인 경우는 병판을 거쳐야만 의금부 판사에 취임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당하관은 의금부의 성립 때부터 무록관(無祿官)이었으므로 적임자 선발이 어려웠다. 특히 의금부 도사는 죄인의 체포, 압송뿐 아니라 재판의 실무를 담당하는 낭관으로서 죄인의 심리 과정을 기록하고 문서 작성의 역할까지 맡으므로 자질이 우수한 관원 확보가 요구되었다. 때문에 낭관은 생진과 출신이나 음관 중에서 엄선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 선발을 신중하게 하였다. 낭관으로는 처음에 정3품 진무(鎭撫) 2인, 종3품 부진무 2인, 4품 지사 2인, 5~6품 도사(都事) 4인을 두었다가 1443년(세종 25)부터 진무와 부진무가 동일화되고 지사와 도사는 왕의 의사에 따라 임명되어 의금부 실무를 담당하였다. 당하관은 10인으로 종4품 경력(經歷)과 종5품 도사를 두었는데 『속대전』 단계에서는 경력도 없어지고 종6품 도사 5인과 종9품 도사 5인만 두었다. 도사는 참상, 참하로 구분하였다.

하급직은 시대에 따라 직명과 정원에 변화가 있었다. 의금부 설치 초기 하부구조는 영사(令史) 40인, 백호(百戶) 80인, 나장(羅將) 100인, 도부외(都部外) 1,000인을 두었다. 영사는 실무와 사무정리를 담당했고, 백호는 군인 신분으로 죄인 감시, 압송·체포가 주 임무였으나 뒤에 없어졌다. 나장은 신문고지기, 수행원, 시위군졸, 죄인 압송을 담당하였고 천역이었다. 도부외는 의금부의 군사적 기능인 포도, 금란, 순작의 임무를 담당하였는데 뒤에 단종 때 없어졌다. 조선후기에는 검률(檢律) 1명, 금형관(禁刑官) 1명, 서리 22명, 당직(堂直)과 대청직(大廳直) 각 2명, 나장 80명, 군사 12명 등 의금부 기능 수행에 필요한 실제적 인원으로 정비되었다.

변천

고려 충렬왕 3년(고려 1277) 치안 유지를 위한 군사조직으로 순마소(巡馬所)를 설치하였는데 충렬왕 26년 순군만호부로 이름을 바꾸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역할 외에 포도를 비롯하여 범죄와 관련된 업무도 수행했다. 순군만호부는 공민왕 18년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로 이름을 바꾸면서 포도, 순작, 금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는 즉위교서에서 사법에 관한 것은 형조에서 맡게 하고 순군 즉 순군만호부는 순작과 포도, 그리고 금란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순군만호부가 1402년(태종 2) 순위부(巡衛府)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다음 해 의용순금사로 다시 이름이 바뀌면서 왕조 창립과 왕권 확립에 공헌하였다. 왕권이 안정되어 정치, 군사제도 정비의 필요성과 국가재정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용관(冗官) 정비 논의와 함께 1414년(태종 14) 의용순금사에서 의금부로 개편되어 사법전담기관으로 독립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의금부 당직청을 확대한 밀위청(密衛廳)이 연산군 정권의 폭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의금부는 1894(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의금사로 개칭되어 법무아문에 속했다가 다음 해 고등재판소로 되었는데 다시 1899년 평리원(平理院)으로 개편되었다.

의의

1414년부터 1882년까지 약 470년에 걸쳐 운영된 의금부는 조선왕조의 왕권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한 조선의 특별사법재판기구였다. 의금부는 왕을 보호하고 주변 상황을 감시하고 조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왕권에 밀착되어 왕권을 위협하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재판소였다. 뿐만 아니라 의금부는 유교 윤리를 국가 운영 원리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유교 윤리를 옹호하기 위한 재판기구였으며 각종 미해결된 사건이나 중대 사건의 최종판결기관이기도 했다. 이 외에 대외관계 범죄를 전담하고, 관료의 직무상 범죄를 취급하는 한편 양반관료를 우대하기 위한 양반재판소로 왕권의 확립과 강화에 기여하고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 최고 사법전담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시대 의금부는 왕권에 밀착하여 군주들에게 신권 탄압의 도구로 활용되어 무한한 권한을 행사하는 기구가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금부의 권한을 축소시키면서 양반관료의 우대를 위한 기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의금부의 양면성은 동일한 기관일지라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오갑균, 「朝鮮朝 鞫廳 運營에 대한 硏究」, 『湖西文化硏究』第3輯, 1983.
  • 이상식, 「義禁府考」, 『法史學硏究』4, 한국법사학회, 1977.
  • 한우근, 「麗末鮮初 巡軍硏究-麗初 巡檢制에서 起論하여 鮮初 義禁府成立에까지 미침-」, 『震檀學報』22, 震檀學會, 196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