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원(司譯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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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을 담당하는 역관을 양성하던 예조(禮曹)의 관서.

개설

고려 충렬왕대에 중국어 교육을 위해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였고, 공양왕대에는 한문도감(漢文都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건국 후 1393년(태조 2) 사역원으로 개칭하고 중국어와 몽골어를 가르치게 하였다. 이후 세종대에 이르러 일본어, 여진어 교육 과정도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중국어 교육이 단연 중시되어 역과에서 배정된 중국어 전공자가 13명이었고 몽골어·일본어·여진어 전공은 각 2명이었다. 사역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친 것은 맞지만 업무적으로 상대국의 문서를 번역했다고 기술하는 것은 아직 입증된 바가 없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건국 초 대명 외교에서 잠시 긴장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이내 문명 선진국인 중국과의 관계는 사대교린으로 자리 잡았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국초에 제도를 정비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중국 외교가 필수적이었다. 진정 기미를 보이는 왜구를 평화 외교의 범위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왜학 역관의 양성도 필요했다. 만주 일대와 압록강·두만강 남쪽에까지 들어와 살던 여진족을 위무하기 위해서는 여진학 역관도 필요했다. 여기에 1세기 동안 고려를 지배했던 몽골의 재침을 우려하여 몽학 역관 또한 양성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사역원은 대략 34개 청(廳)에 600여 명의 관원으로 채워졌다. 문관이 겸직하는 도제조 1명, 제조 1명, 교수 2명을 제외하면 역관에게 배당된 실직(實職)은 교수 2명과 훈도(訓導) 10명이었다.

명(청)나라 사신의 행사가 있을 때 이들을 응대하고 도성까지 왕복 안내하기 위하여 의주에서부터 주요 경로에 한학 역관이 배치되었다. 왜학 역관은 15세기부터 삼포 왜관, 경상도·전라도·제주도·충청도수영(水營)에 배치되어 일본 사신을 응대하거나 이들 지역으로 표류해 오는 일본·중국 표류선을 조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여진학(청학) 역관은 강계(江界)·회령(會寧)을 비롯하여 평안도·함경도의 요처에 외관직 역관으로서 배치되었다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몽학 역관은 평안도 선천(宣川)에 외관직 역관으로 존재하였다. 이들 외관직 역관은 훈도 또는 역학겸군관(譯學兼軍官)이라 불렸다. 대체로 역학겸군관의 부임지는 중앙에서 멀고 대우가 좋지 않아 역관들이 기피하는 자리였다.

외관직 역관은 실직(實職)이었는데, 모두 사역원에서 교육을 받아 역과(譯科) 시험에서 합격하거나 취재(取才) 과정을 거친 사람은 아니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부터 병자호란 전까지 활동한 만포(滿浦)의 여진학 역관은 그 지역에서 여진어를 배운 사람으로, 향통사(鄕通事) 또는 훈도로 지칭되었다. 여진학 역관은 여진족의 성장이 두드러져 조선의 국경을 압박하고 요동 지역을 위협했던 선조 말년에서 인조 전반기까지의 정세를 탐지하여 시시각각으로 국내에 알려 왔다.

사역원 제도는 역관들에게 권장(勸獎)이라는 명목으로 각종 평가를 시행하여 관원 수에 비해 적은 자리를 돌려 가면서 배당하였다. 우선 역과에 합격하면 회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한 해에 네 번 치러지는 원시(院試)에 응해야 했다. 원시에서 일정 점수를 얻어야 취재(取才)에 나아갈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원시의 점수는 서용될 수 있는 우선 조건이었다. 그리고 한 해 두 번 실시되는 녹취재(祿取才)에 응시해서, 녹봉을 받는 녹직(祿職)에 서용될 수 있었다. 녹취재는 직원 능력 평가인 양도목(兩都目)을 1년 받고 2차 원시(院試)를 마친 다음 행해지는 시험이었다. 녹취재에 통과하여 녹직을 제수받는다 할지라도 6개월은 녹봉으로 쌀을 받지만 6개월은 무록관(無祿官)으로 근무해야 했다.

역관들의 시험에는 녹취재 이외에도 부경취재(赴京取才)와 위직취재(衛職取才)가 있었다. 역관들의 본업 또는 외국어 실력을 점검하고 독려하기 위해서 서도고강(書徒考講), 2·6고강(二六考講)의 제도도 있었다.

부경취재는 매해 봄·여름 예조에서 녹관직을 시험 보는 날에 차상통사청(次上通事廳)·압물통사청(押物通事廳)·몽학통사청(蒙學通事廳)의 역관 원체아(元遞兒)를 대상으로 해당 시기의 본업을 시험 보는 것이었다. 차상통사(次上通事)·압물통사(押物通事)는 부경취재에 참가할 자격을 부여하는 조건에서 하위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즉, 부경체아(赴京遞兒)의 서열에서 압물통사 → 차상통사 → 연소총민 → 교회(敎誨) → 한학상통사(漢學上通事) →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이어지는 순위에서 하위였다. 몽학은 부경에서 왜학을 제외하고 갈 수 있는 기회가 가장 적었고 외관직의 훈도 또는 역학겸군관으로 나갈 기회 또한 적었다.

서도고강은 한 해 네 번씩 어전교회(御前敎誨)·교회전함(敎誨前銜)·연소총민(年少聰敏)·우어별차(偶語別差)를 대상으로 각기 본업과 경서, 역사서를 가지고 시험 보는 제도였다. 이 가운데 우수자를 뽑아 어전교회·교회전함에게는 해당 직과의 위직(衛職)에 서용하였다. 연소총민·우어별차에게는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부경사행(赴京使行)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2·6고강은 매달 2와 6이 들어 있는 날에 훈상당상(訓上堂上)이 순서를 나누어서 예비 생도부터 상통사(上通事)까지 시험 보는 제도였다. 서도고강에 비해서 2·6고강은 외국어 학습을 태만히 하지 말 것을 감독한다는 목적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사역원 제도에서 17세기 이후로 외형상 큰 변화는 1667년 여진학이 청학으로 개칭되고, 90년 뒤인 1765년(영조 41) 청학이 몽학·왜학을 제치고 제2위를 점한 일이다. 청학이 몽학·왜학에 비해서 관원, 생도, 부경 대상자가 다소 많았는데도 조·청 관계가 늦게 수립된 데 따른 때늦은 반영이었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긴축 재정에 따라 사역원의 관원을 줄이는 조치가 행해졌다. 그러면서도 외국어에 능숙하고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 역관을 찾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에는 역관을 미천한 무리로 보고 부경의 기회를 노리는 것을 한심한 소치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청나라 사신을 응대하기 위하여 의주(義州)·평양(平壤)·해주(海州)에 파견하는 역관은 근후하고 청 측 사절과 관계가 원만한 인물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동래부의 역관이나 통신사 등의 역관으로 활약한 인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어 역량을 인정받고 경륜이 있으며 쓰시마[對馬島] 측으로부터 신망을 얻는 역관이 중첩적으로 직임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수역(首譯)으로 지칭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로 효종·현종·숙종 초반기까지 군사 무기 수입을 주선하였다. 또한 왜관 이전, 목면(木棉) 적체 등 조·일 양국 간의 긴급한 문제를 완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부경사행에 참여할 기회를 잡는 것은 역관들에게 큰 소망이었다. 그러나 부경사행은 한학 역관에게 기회가 가장 많이 주어졌다. 중국의 백사와 일본의 은이 조선을 거쳐서 활발하게 유통될 시기에 상대적으로 역관 지원자도 많았다. 중계무역의 이득이 줄어든 시기에 접어들면 특정 전공은 정원을 채우지 못했고 따라서 역량을 갖춘 역관들이 배출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사역원 제도가 완만하게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대외 관계의 변화에 따른 역원 수의 증감은 비교적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참고문헌

  • 『역관상언등록(譯官上言謄錄)』
  • 『통문관지(通文館志)』
  • 남계조좌호박사화갑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현대사학의 제문제: 남계조좌호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82.
  • 정광, 『사역원 왜학 연구』, 태학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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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신항, 「이조시대의 역학정책에 관한 고찰: 사역원·승문원 설치를 중심으로 하여」, 『대동문화연구』2,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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