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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3일 (일) 00:49 판
목차
- 1 교육가 최부
- 2 교재 표해록
- 3 표해록 간행
- 4 소학
- 5 격물치지
- 6 휴타고지
- 7 클래스 설계
- 8 록 권1
- 8.1 성화(成化)23년 정미년 가을 9월 17일
- 8.2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
- 8.3 윤 정월 1일
- 8.4 1월 2일
- 8.5 1월 3일
- 8.6 1월 4일
- 8.7 1월 5일
- 8.8 1월 6일
- 8.9 1월 7일
- 8.10 1월 8일
- 8.11 1월 9일
- 8.12 1월 10일
- 8.13 1월 11일
- 8.14 1월 12일
- 8.15 1월 13일
- 8.16 1월 14일
- 8.17 1월 15일
- 8.18 1월 16일
- 8.19 1월 17일
- 8.20 1월 18일
- 8.21 1월 19일
- 8.22 1월 20일
- 8.23 1월 21일
- 8.24 1월 22일
- 8.25 1월 23일
- 8.26 1월 24일
- 8.27 1월 25일
- 8.28 1월 26일
- 8.29 1월 27일
- 8.30 1월 28일
- 8.31 1월 29일
- 8.32 2월 1일
- 8.33 2월 2일
- 8.34 2월 3일
- 8.35 2월 4일
- 9 록 권2
- 9.1 2월 5일
- 9.2 2월 6일
- 9.3 2월 7일
- 9.4 2월 8일
- 9.5 2월 9일
- 9.6 2월 10일
- 9.7 2월 11일
- 9.8 2월 12일
- 9.9 2월 13일
- 9.10 2월 14일
- 9.11 2월 15일
- 9.12 2월 16일
- 9.13 2월 17일
- 9.14 2월 18일
- 9.15 2월 19일
- 9.16 2월 20일
- 9.17 2월 21일
- 9.18 2월 22일
- 9.19 2월 23일
- 9.20 2월 24일
- 9.21 2월 25일
- 9.22 2월 26일
- 9.23 2월 27일
- 9.24 2월 28일
- 9.25 2월 29일
- 9.26 2월 30일
- 9.27 3월 1일
- 9.28 3월 2일
- 9.29 3월 3일
- 9.30 3월 4일
- 9.31 3월 5일
- 9.32 3월 6일
- 9.33 3월 7일
- 9.34 3월 8일
- 9.35 3월 9일
- 9.36 3월 10일
- 9.37 3월 11일
- 9.38 3월 12일
- 9.39 3월 13일
- 9.40 3월 14일
- 9.41 3월 15일
- 9.42 3월 16일
- 9.43 3월 17일
- 9.44 3월 18일
- 9.45 3월 19일
- 9.46 3월 20일
- 9.47 3월 21일
- 9.48 3월 22일
- 9.49 3월 23일
- 9.50 3월 24일
- 9.51 3월 25일
- 10 록 권3
- 10.1 3월 26일
- 10.2 3월 27일
- 10.3 3월 28일
- 10.4 3월 29일
- 10.5 4월 1일
- 10.6 4월 2일
- 10.7 4월 3일
- 10.8 4월 4일
- 10.9 4월 5일
- 10.10 4월 6일
- 10.11 4월 7일
- 10.12 4월 8일
- 10.13 4월 9일
- 10.14 4월 10일
- 10.15 4월 11일
- 10.16 4월 12일
- 10.17 4월 13일
- 10.18 4월 14일
- 10.19 4월 15일
- 10.20 4월 16일
- 10.21 4월 17일
- 10.22 4월 18일
- 10.23 4월 19일
- 10.24 4월 20일
- 10.25 4월 21일
- 10.26 4월 22일
- 10.27 4월 23일
- 10.28 4월 24일
- 10.29 4월 25일
- 10.30 4월 26일
- 10.31 4월 27일
- 10.32 4월 28일
- 10.33 4월 29일
- 10.34 4월 30일
- 10.35 5월 1일
- 10.36 5월 2일
- 10.37 5월 3일
- 10.38 5월 4일
- 10.39 5월 5일
- 10.40 5월 6일
- 10.41 5월 7일
- 10.42 5월 8일
- 10.43 5월 9일
- 10.44 5월 10일
- 10.45 5월 11일
- 10.46 5월 12일
- 10.47 5월 13일
- 10.48 5월 14일
- 10.49 5월 15일
- 10.50 5월 16일
- 10.51 5월 17일
- 10.52 5월 18일
- 10.53 5월 19일
- 10.54 5월 20일
- 10.55 5월 21일
- 10.56 5월 22일
- 10.57 5월 23일
- 10.58 5월 24일
- 10.59 5월 25일
- 10.60 5월 26일
- 10.61 5월 27일
- 10.62 5월 28일
- 10.63 5월 29일
- 10.64 6월 1일
- 10.65 6월 2일
- 10.66 6월 3일
- 10.67 6월 4일
- 11 출처/참고
교육가 최부
관서재
해남의 입장에서 보면 금남 최부의 가치는 그의 문필가로서의 역할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즉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삶이다.
해남정씨[1]는 금강동(현 해리)에서 살았는데 해남정씨와 통혼한 5가문도 모두 금강동에 자리 잡아 이후 금강동은 해남 사족들과 학문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최부는 이곳에 와서 '관서재'를 열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금남을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고 했다. 첫째는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2]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3]
해남정씨와 결혼해 해남인이 된 금남 최부는 호남의 4대 학맥 중 한 맥을 형성하며 해남의 학문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의 학풍은 귤정공 윤구와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변방에 지나지 않던 해남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문과 문예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금남 최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학사상의 선구자로도 꼽히는 금남은 1454년 나주에서 태어난다. 문장과 경술이 뛰어났던 금남은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과 함께 수학하게 된다. 금남 최부는 나주 출신이지만 해남정씨 무남독녀와 결혼하면서[4] 해남과 인연을 맺게 된다. 결혼 후 해남동문 밖 부촌동(지금의 해리)에 거주하게 된 금남은 이곳에 관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다.[5]
최부 학문 계보
금남 최부(錦南 崔溥:1454~1504)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조선의 땅 끝 벽지인 해남 땅에 유학(儒學)과 절의정신을 꽃피게 했던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준다. ‘표해록’의 저자로, 나주 출신이면서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이유로 그곳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해남에 어느 곳보다 뛰어난 유교문화를 전파하고 진리와 정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높은 절의정신의 전통을 세워주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하던 최부는 호남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 가문에 혁혁한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이다. 연동마을에 윤씨들이 들어온 것은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1543)대부터이다. 윤효정은 해남의 최부 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6][7] 강진과 해남을 오가다 해남의 대부호인 정귀영의 마음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됐다. 터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 큰 인물이 나온다는 생각에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백련동(연동마을)을 찾아냈다. 전남 강진 일대에서 살던 윤씨들은 연동으로 들어와 마을을 꾸몄다. [8] 갑자사화와 을사사화에 절의와 정도를 지키다 효수 당했던 스승인 금남의 정신을 이은 윤효정은 진사과에 합격한 뒤로 패악한 정치에 발을 끊고 고기 잡고 풀 베는 일에 숨어버리고 세상과 단절하는 의리를 지켰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의 당당한 문신이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더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다. 윤구의 증손자가 바로 고산 윤선도(1587~1671)다.
최부의 외손자에는 미암 유희춘[9]이 있다. 미암도 사화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귀양살이로 젊음을 바쳤다. 문인·학자에 절의정신이 높던 미암도 해남 출신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윤선도는 정의감과 절의정신이 몸에 배었고, 나라가 바르게 가지 못하거나 나라의 예(禮)에 어긋남이 있으면 곧바로 상소하고 항의하는 직신(直臣)의 정신을 올곧게 지켰다. 그래서 전후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윤효정·윤구의 정통을 이은 후손들도 만만찮은 존재가 많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尹毅中)은 좌참찬이라는 고관을 역임하고 그 아들 윤유기(尹惟幾)는 강원도 관찰사이니 바로 고산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였다. 어머니 순흥 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자가 약이(約而), 호는 고산, 해옹(海翁)으로 많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했던 윤선도는 10여세의 나이에 경사(經史)는 물론 의약·복서·음양·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여 문장과 식견이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탐진최씨 금남 최부(1454~1504)가 강진과 해남등에 유학의 씨앗을 뿌리며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최부의 외손자인 대유학자 유희춘은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윤효정, 유희춘 자신, 유계린등을 가르치면서 해남이 확 바뀌었다’고 적었다. 최부가 이 지역에 미친 학문적 영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지금 해리 금강골 해촌서원에는 해남육현이 모셔져 있는데 그들은 금남 최부 귤정공 윤구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취죽헌 박백응 고산 윤선도다. 최부는 사람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인으로 해남정씨와 결혼해 처향인 해남으로 거처를 옮겨 해남의 학문적인 구심이 됐다. 최부는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했고 중국표류기인 표해록을 기록했으며, 무오사화로 참형된 후 중종 때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됐다.
최부는 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을 수제자로 삼았고 이들은 호남학맥 중 한 파를 형성했으며 해남을 문헌지방으로 만들었다. 최부는 선산 유씨 유계린을 사위로 맞아 유성춘과 유희춘을 배출한다. 최부는 해리에 거주했으나 그의 후손들은 마산면 상등리로 거처를 옮긴다. 귤정공 윤구는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이다. 윤효정은 최부에게 수학했으며 최부와는 사촌동서간이다. 윤효정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그의 자식들에게 학문을 물려주었는데 그중 귤정공 윤구는 중종 때 교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삼산면 나범리에 유배됐다. 그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로 불리며 뛰어난 문장을 자랑했다.
해남윤씨는 윤효정 이후 5대에 걸쳐 문과 9명 무과 15명의 급제자와 34명의 관직 진출자를 내면서 해남정씨처럼 해남을 기반으로 인근지역 광산이씨, 나주나씨, 반남박씨, 여산송씨 등과 통혼해 호남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또한 윤효정의 손자대에 미암 유희춘과 석천 임억령과도 통혼을 맺어 해남정씨를 통해 맺어진 통혼관계가 3∼4대 후에 해남윤씨를 통해 다시 재결합했다. 해남윤씨는 이후 연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석천 임억령은 해남정씨와 통혼을 한 임수의 손자다. 임수는 우원 우형 우리 우정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해리서 태어났다. 그중 우형의 가계가 가장 번성했는데 해남육현인 석천 임억령을 비롯해 천령, 만령, 백령, 구령 등 5형제 중 억령 백령 구령이 관직에 진출했다. 이들은 장흥임씨 임희성, 무안박씨 박안, 담양 김성원, 광산 고맹영, 영암 최경창 등과 통혼을 했다.
석천 임억령은 박정의 문인인데 박정은 김종직의 문하로 임억령 역시 김종직의 학맥을 이어받았으며 문학쪽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담양 성산 식영정과 해남의 마산면 장촌리에 마포별업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렀는데 제봉 고경명, 취죽헌 박백응, 정언홍, 예양군 임발영, 윤홍준·의중 형제, 민구, 정운 등이다. 임씨들은 마산면 장촌리, 영암, 경기, 충청으로 이거했다.
미암 유희춘은 최부의 외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순천인 유계린(선산 유씨)으로 최부가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순천으로 돌아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의 아들인 성춘은 중종 때 개혁정치에 참여했다가 28세에 요절했으며 희춘은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 때 석방됐다. 그후 교리 부제학 전라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을사명현으로 선조 때 크게 문명을 떨치며 호남지방의 학풍을 주도했다.
성춘의 후손은 장성으로, 희춘의 후손은 담양으로 이거해 해남과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희춘은 해남윤씨를 사위로, 장성의 하서 김인후의 딸은 며느리로 맞았다. 취죽헌 박백응은 선산임씨와 통혼한 무안박씨 박안의 손으로 석천 임억령의 생질이며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박백응은 진사로 효성과 학문이 뛰어나 진안 현감을 지냈고 동생 중응은 시에 능했다.
해남정씨 이후 해남을 대표하는 성씨로 해남윤씨와 더불어 여흥민씨가 있다. 해남정씨와 혼인한 여흥민씨 민중건은 오(鰲)와 구(龜) 그리고 열녀를 자녀로 뒀다. 구는 석천임억령에게 수학했으며 1549년 해남향교 대성전 중수시에 실질적인 책임자인 감역을 담당했으며 이후 16∼17세기에 해남 향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재지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여흥민씨는 보은이씨, 원주이씨, 해남윤씨, 김해김씨, 언양김씨, 무안박씨, 장흥임씨, 순천김씨 등 해남을 근거로 한 성씨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해남지방에서 해남윤씨와 함께 큰 성씨를 이뤘다. 여흥민씨는 마산면 화내리로 거처를 옮겼다.
16세기 이후에는 해남정씨와 통혼관계를 맺은 8개 성씨 이외에 사화를 피해 해남으로 낙남한 보은이씨, 원주이씨, 순천김씨, 김해김씨, 선신김씨, 동복오씨, 연안이씨, 충주한씨 등이 해남의 다수성씨로 자리잡게 된다.
최부는 윤효정, 유계린, 임우리 등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은 후일에 호남 사림의 주축이 되었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기묘명현이 되었다. 유계린은 최부의 사위가 되어 김굉필을 사사한 후 아들 유성춘·유희춘을 두었다. 그리고 최부의 외손자 나사침은 정여립 사건 때에 희생되었다. 이발의 아버지 이중호도 최부의 학맥을 이은 사람이다.
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호남 사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송흠이 있다. 그는 연산군 학정에 반발하여 관직을 버리고 영광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양팽손·나세찬·송순·안처순 등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이재인이 관직을 그만 두고 장성에 은거했고, 정여해는 화순에 은거했다. 옥과 현감 김개가 지역의 사림과 유배 중인 사람들과 합세하여 군대를 일으켜 반정을 준비하다가 중종 반정이 일어나자 그만 두었다. 이는 이미 전라도 안에 사림파에 의한 정치쇄신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11]
16세기 사화기에 호남지방에서는 많은 문인학자들이 배출됐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언급하였던 해남정씨 정호장 집안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던 인물이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해남정씨 그리고 이들 문인들의 혈연관계로 인해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의 문인학자들이 서로 사림의 한 학파를 이룰 정도로 호남사림의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해남 윤씨가는 최부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는다. 금남 최부(1454~1504), 미암 유희춘(1513~1577), 석천 임억령(1496~1568) 등은 어초은 윤효정이 최부로부터 수학하였듯이 서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은 후에 호남사림의 대표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해남의 육현(六賢)으로 추앙받게 된다. 해남윤씨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의 문인인 최부를 그 연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림파적 성향을 띄었다. 이로 인해 여러 인물들이 16세기 이후 당파로 연결되면서 사화로 인한 심한 부침(浮沈)을 겪게 된다.호남의 사림은 낙향한 재지품관과 이주한 사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김종직과 김굉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종반정 이후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사림은 여러 계보로 이어져 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윤구는 최부의 계열로 이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이중호로 이어진다. 최부는 147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 김굉필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무오사화 때 스승인 김종직의 문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들통나 단천에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형되었다. 최부가 언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처향(妻鄕)인 해남에 거주하면서 사위인 유계린(유희춘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윤효정, 임우리 등을 가르쳐 김종직의 학문이 정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12]
필자는 몇해 전에 호남유학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는‘17~8세기 호남유학의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호남에 최초로 학문과 의리의 씨앗을 뿌린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13]를 이어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한 학자로는 금남 최부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금남은 나주 태생이지만 해남의 정씨(鄭氏)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해남 출신인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첫째는 해남윤씨로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을 가르쳐냈다고 하였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
해남윤씨 윤효정은 윤행(尹行)·윤구(尹衢)·윤복(尹復)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그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석천 임억령의 형제들 또한 조선의 명사들이 많았고 호남문단에 석천이 미친 영향 또한 대단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유성춘·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금남의 사위에는 나주나씨의 나질이 또 있다. 이분의 아들 나사침은 호가 금호(錦湖)로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받아 현감을 지냈는데 금남의 외손자다. 금호는 나덕명(羅德明)…나덕헌(羅德憲)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모두 금남의 외증손들이면서 이른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큰 문사들이었다. 호남의 웅도인 나주 일대에 그들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호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당시는 영광땅이나 지금은 장성땅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이 있었다. 금남보다 5세 연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것은 금남보다 9년 뒤여서 송흠은 금남을 대선배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같은 시기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던 두 사람은 같은 호남출신이라는 인연도 있어 자주 내왕하면서 아주 가까이 지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벼슬 초기에 송흠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왔고, 고향에 체류한다는 금남의 소식을 듣고 금남의 고향집으로 송흠이 인사차 찾아갔다고 한다. 금남이 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향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나라에서 관인에게 내주는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대 집에서 우리 집까지의 교통편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찬가지로 역마를 타고 왔다고 했다. 금남은 벌컥 화를 내며 나라에 고발하겠다고 송흠을 꾸짖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서울 집에까지는 휴가니 의당 역마를 사용할 수 있으나, 자기집에 찾아옴은 사사로운 일이니 역마를 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벼슬아치가 공사를 구별하지 못함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가까운 고향 후배를 끝내 나라에 고발하여 문책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르고 청렴하며 공사에 엄격했던 분이 금남이었고, 이런 경계를 받은 송흠은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 이름난 청백리로 고관대작의 벼슬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송흠의 제자에는 호남의 대학자가 많다.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학포 양팽손 등이 대부분 송흠 문하에서 젊은 시절에 학문을 익힌 분들이었다. 송흠의 학문과 사상 및 청백리 정신이 최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면 호남의 석학들은 대부분 최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고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표해록’의 가치와 중요성은 생략한다. 1769년에 일본에서도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영문이나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세계적인 여행기록으로 정착한 지 오래다.
최부는 직계 후손들의 수도 적고 세력도 미약하다. 금남 최부의 고향 마을에서 생가 터를 확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표해록’을 통해 일찍이 세계화정신을 이 땅에 뿌렸고, 연산군의 패정과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폭로하다 갑자사화로 처형당했다. 그런 만큼 최부의 고향 나주는 그 외로운 의리정신은 묻혀버릴 수 없는 이 땅의 사상적 유산으로 현양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의리 높고 박학한 학자 금남 최부의 혼과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만 우리들의 몫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14]
김종직의 직계 제자가 나주가 고향인 탐진최씨 최부(1454~1504)였다. 최부의 처가가 해남의 해남윤씨 집안이다. 최부가 언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처가인 해남에 거주하면서 사위인 유계린(유희춘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윤효정등을 가르쳐 김종직의 학문을 전한 것으로 기록이 돼 있다. 여기서부터 행당 윤복선생의 집안이 등장한다. 윤효정은 행당 윤복선생의 어버지이다. 그는 윤구, 윤행, 윤복등 세아들을 두었다. 윤효정은 원래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德井洞)에서 살다가 해남의 향족인 정호장의 사위가 되어 해남으로 이주했다. 해남 녹우당을 지은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윤효정은 훗날 해남윤씨를 명문가의 반석위에 올린 주인공이 된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고, 다시 김종직으로 가면 윤효정의 스승이 최부이고, 최부의 스승이 김종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윤효정은 정몽주에서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윤효정의 후손들도 당연히 최부의 학문을 계승하게 된다. 역사학계는 최부에서부터 윤효정, 윤구로 이어지는 학맥을 최부의 계열이라고 분류한다. 이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으로 구도가 그려진다. 그럼 이 계열이 어떻게 영남의 퇴계학문과 연결됐는지 알아보자.[17]
호남의 사족들을 학맥이나 당파로 구분지어보면, 우선 동인계는 최부, 이중호, 정개청을 연원으로 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인조반정 이후 허목⋅윤선도 등의 남인계 인사들과 연결이 된다. 반면 서인계는 김인후, 기대승, 이항과 교류했던 이들이 한 축을 차지하고,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이들은 나중에 노론과 연결된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나주 사족들을 나누어 보면 동인계(토착세력)와 서인계(이거세력)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동인계는 최부를 시작으로 나질과 그의 아들 나사침으로 이어진다. 또한 최부의 제자가 해남의 윤효정이었는데, 그의 아들 윤구는 남평의 광산이씨 이중호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이중호는 이발의 아버지이자 나사침의 스승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발은 선조대에 있어서 동인⋅북인계 사림의 영수로서 반대편에 있었던 서인계 정철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로인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집안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또 다른 동인계 인물로는 나주 출신의 정개청이 있다. 그는 고위관직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호남 내에서의 입지는 컸다. 화순, 함평, 보성 등의 유력한 사족들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나주에서는 나사침의 아들이었던 나덕준⋅덕윤⋅덕현 등이 정개청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덕준 형제들은 나중에 정개청을 경현서원의 초대 원장으로 모신다.
서인계의 경우, 이항의 문인으로는 의병장 언양김씨 김천일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는 정개청을 이어 경현서원 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양산숙⋅양산룡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기대승의 문인이자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활동했던 홍천경도 있다. 그는 정개청 등에 대항하면서 기축옥사를 전후로 한 때에 나주 지역의 사론(士論)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홍천경, 김천일 외에도 박순의 영향력도 컸다. 나주의 서인계 사림들은 월정서원을 건립하여 스승이었던 박순을 모셨다.[18] 최부계열[19] 영호남사림과 최부[20]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80600090001&print=Y
탐라시
허벅으로 물 긷는 기록은 최부(崔溥, 1454~1504)의 <탐라시 삼십오절(耽羅詩 三十五絶)>의 '허벅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負甁村婦汲泉去)'라는 구절은 15세기에 허벅을 지고 물을 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허벅은 물 긷는 용구로서 비교적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좁다. 대구덕 안에 허벅을 앉히고, 물이 든 허벅의 입구를 새(茅)로 틀어서 막는다. 돌길이기 때문에 찰랑대는 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또 허벅은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만일 사돈집에 상(喪)이 났을 때 상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팥죽을 쑤어갈 때도 허벅은 한몫을 한다. [24]
제주도 연등절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1487년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이다. 제주도의 연등하는 풍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에서는 15세기 후반 사찰에서 연등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탐라시 삼십오절」은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록**에 삽입되어 전해지며, 또 1681년에는 이증도 **남사일록**에 옮겨 놓고 있다. 「탐라시 삼십오절」은 최부가 제주도 활동 중인 1487년에 쓴 글이다.
嫌將歲月虛抛擲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照里鞦韆傳自昔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僧刹了無香火時 절에는 향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騈闐簫鼓燃燈夕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김찬흡 외 옮김, **역주탐라지**(푸른역사, 2002), p.24-25.
최부는 연등날 밤 사찰에서 행해지는 제주도의 연등 풍속을 묘사하였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가 예로부터 전해져 지금도 시행되는 모습에서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연등회의 풍속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연등날 저녁이면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동원하여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절에 모여 향을 공양하고 악기를 동원하여 왁자지껄한 연등날 저녁을 즐기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백희가무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고려시기 연등회의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상원연등회가 금지된 시기였으나 민간에서는 고려시기의 연등 풍속의 특징을 잃지 않고 북과 퉁소로 흥을 돋우며 사찰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풍작을 기원하는 놀이였다. 그네뛰기는 봄이 되면 여자들이 생산의 의미나 풍작의 주술적 의미를 담고 하던 놀이였다. 고려시대에는 궁중과 상류사회에서 성행하였고 백희가무에서 그네뛰기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층에서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멀리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평상시에도 즐겼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이다. 제주도 연등 풍습을 표현한 최부의 시각에서도 연등회가 제천기농(祭天祈農)의 성격을 이어가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25]
교재 표해록
표해록에 담긴 정보가 유용하게 쓰였으리라고 짐작되는 분야는 항해술 분야다.
선원들은 육지가 가까워졌다고 추측되면 온갖 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육지나 도서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이때 시도한 구체적인 항해 방법은 물빛을 보고 육지에 가까워진 것을 짐작하는 것이었다. 본래 바닷물의 색깔은 깊은 대양에서는 검푸른 빛을 내며, 육지 가까이 수심이 낮은 곳에서는 녹색 또는 황색 빛을 낸다. 1488년에 제주해협에서 조난당하여 29일간을 표류하다 중국 절강성 해안에 표착한 최부崔溥는 표류 중 바닷물 색깔의 변화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짙푸른 색에서 백색, 청색, 적색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바닷물 색깔의 변화는 고대의 유능한 선원들에게 중요한 항해 정보였고, 청색이나 적색이 보이면 육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주야를 불문하고 돛대 위에 감시자를 배치하였다. 또한 이렇게 바닷물의 색깔이 변화하면, 선원들은 수심을 측정하여 암초나 수심이 낮은 곳에 좌초되지 않도록 조심하였으며, 때로는 해저의 토양을 채취하여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26]
이러한 세심한 관찰과 기록은 이용후생의 생각이 없다면 쉽게 실천되기 어렵다. 최부는 모든 기록은 당대 혹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한 쓰임새를 전제로 한 행위였다. 당장 자신은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과 고난에 처해있으면서도 자신이 남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소학에 나오는 행동규범이 표출된 교재이면서 소학의 교재 구성 방식으로 쓰여졌다. 단순하게 중국 현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아니라 고사를 답사하고 난 후에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후에 교재로 사용되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다. 성종에게 바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책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최부는 교육자였다. 자신이 속에 담고 있는 말을 왕에게 전하고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는 부분이 편집되어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종 당대는 정치적으로 유학이 널리 퍼져야만 하는 시대였다. 한글로 만들어진 유학지침서가 있을 정도로 유학 저변 확대는 시대적인 요구였다. 성종은 학문에 몰두하여 신하들과 책을 읽고 학문을 논하는 경연(經筵)을 가장 많이 연 왕으로 기록된다.[27] 반면 성종은 13세에 즉위해 성인이 될 때까지 신하들에게서 군주 수업을 받으면서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도학 군주로 성장했다.[28] 성종은 이렇게 학문하기를 좋아했던 군주였다. 그리고 이즈음 한글로 새롭게 번역된 《삼강행실도》와 《삼강행실 열녀도》가 민간 교육서로 전파되고 정문과 복호라는 실제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자 조선은 급속히 유교화되었다. 유교 질서가 잡히면서 조선의 신분질서가 고착화되었고 신분을 대하는 관념도 건국 초와는 많이 달라졌다. 성리학자들이 군주 수업을 한 결과는 유학적 국가 건설을 꿈꿨던 신하들의 바람대로 유교 원리에 충실한 도학 군주를 만들어 냈고 그 도학 군주는 한글을 이용해 신하들이 원하는 세상을 현실화했다.[29]
최부는 그 특유의 나레이션(그래서 기행문학의 으뜸으로 꼽기도 한다)으로 유학을 퍼뜨리는 데에 중국에서의 표류 데이터를 이용했던 것이다. (세종대에 삼강행실도와 같은 시각적 교재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흥미롭고 쉬운 나레이션으로 이어진 최부의 표해록은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실증적 유학 교양서였다. 딱딱한 행동지침으로 가득한 당시의 유학서와는 달리 중국을 지나가면서 만나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유학교육자의 관점에서 엮어나간 이야기이므로 독자가 에피소드와 소재를 통해 학습할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다.
신중함, 현명함, 인내심, 용기, 자제심, 호기심, 박학이라는 덕목. [30][31]
효사상, 충사상 아래 깔려있는 신중함, 지혜라는 덕목을 당시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있던 사림들이 보고 싶어함. 박학때문에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소설같은 표류이야기에 더 끌려서 읽고 싶어했을 것. '표해록'에 교과서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에. 정보를 알 수 있는 교과서의 역할도 했지만, 덕목을 알려주는 교과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고사)과 사실을 이야기로 잘 엮었기 때문에 흥미롭지 않았을까? 배움에 재미를 살린 교과서인 것이다. 중국의 강남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 대한 문물을 큐레이션 기법으로 재미있게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읽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유용한 정보와 교훈을 담고 있었다는 뜻이다. 글로만 익혔던 내용, 들어서만 알고 있던 내용을 사실적인 필체로 담아내었기 때문에 모두들 일고 싶었을 것이다. 오디세이가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들로 재미를 부가했다면 표해록은 사실을 확인해가면서 알게되는 기쁨을 선사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신의 경험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최부 스스로가 교육자가 되어 그가 생각하는 덕목을 사실을 기반으로 생생하게 알려준다.
표해록은 중국을 소개하는 중국학 교과서일 수도 있었고, 유학의 내용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교과서이기도 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설명을 덧붙인 이유도 이런 데 있었다. 소학은 그 '내편'이 교육의 원칙과 오륜의 도리를 서술한 것이고, '외편'이 중국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증명한 것으로 유학사상의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책이다. [32] 그러므로 표해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행실에 대한 내용은 소학의 내편에 해당되고, 중국 고사에 대한 내용은 이와 관련된 소학의 외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표해록은 -객관(경험): 눈에 보이는 것들(풍습), 경험, 격물치지, 과학 -주관(관념): 평소의 소신, 도덕, 소학, (양명학)
이 들어가 있는 경세제민(이용후생)의 교육서다.
최부에게 '마르코 폴로'라는 수사가 붙은 것은 그가 마르코 폴로를 능가하는 훌륭한 중국 견문록을 지었기 때문이다. '표해록'에는 최부 일행의 표류와 여정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어,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묘사되었다. 학자들은 표해록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보다 못할 것이 없으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보다도,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9세기)보다도 가치를 높게 본다. 정해진 루트를 통해서만 중국을 왕래했던 당시에 최부의 기행루트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마치 낯선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처럼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겪어야 했던 이들의 여정은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일행 43명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윤달 정월 3일 제주를 떠나 같은 달 17일 이국땅에 오르기까지 망망대해에서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시달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과 귀국까지의 여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또한 최부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오가는 길에 본 주변 상황을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 표해록을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세기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라고 하는 것은 환관의 정치참여나 명 왕조의 비(非)유교문화에 대한 비판, 사회적 명분질서의 혼란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중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견문기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찍이 고병익 고 서울대 총장은 표해록이 갖는 가치를 다음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문학적 가치로, 표류하다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저자 최부의 문필력으로 인해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점. 둘째는 정신사적 가치로 역경 속에서도 조선의 선비와 관리로서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한 점, 특히 중국 측과의 교섭과정에서 관복을 입지 않고 상복을 고집하며 우리의 법도를 따른 점. 셋째는 사료적 가치로 당시 중국의 남부는 조선의 관리가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으로 그 곳의 습속과 자연은 당시 중국 연구사료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33]
실증적 유학교양서
중국과 관련한 것들의 고증서이고 소학의 정신을 담고 있는 유학교양서이다. 최부의 스타일은 항상 이런 식으로, 보는이의 학습에 도움이 된다.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구성은 박학에 근거한다. 소재에 대한 관찰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최부가 남긴 대표적인 저술은 표해록과 탐라시인데 이 둘 모두 실제적인 관찰 고증과 함께 전달하고자 하는 유학적인 메시지가 잘 드러난다.
또한 소학의 교육가적 실천은 아는 것을 잘 가르치는 것이지 않을까? 우리가 <소학>의 실천성을 교육자에게 적용시켜볼 필요가 있다. 소학이 인성교본이라고 한다면 그 내용이 교육자에게는 행위의 모범도 될 수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방법론)도 될 수 있다. 실천성을 인성교본의 행동지침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실천과 학술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선비 본연의 자세임을 강조하였다. 이때 말하는 실천이라는 것은 몸가짐에 대한 유학적 실천일 수도 있고, 학문의 실천적 자세 즉 관찰과 증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선 최부라는 인물을 통해서 조선조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책임감이 몹시 강했다. 절대절명의 상황을 맞으면서도 주체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의 다양한 체험과 날카로운 관찰력, 비판의식 덕분으로 당시의 한중항로의 실상을 확인하고, 바다의 시대적인 의미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조의 무지와 왜국의 활동 등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명나라의 실용적인 생활태도와 자유로운 사고를 알 수 있으며, 오히려 조선이 더 교조적이고, 중국적 세계관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록물이 당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최부 자신도 가치관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시대정신이 그런 행위와 사고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표해록은 최부라는 세상경험이 부족하고 교조적인 지식인의 한계와 조선조의 비애를 동시에 보여준다. [34] 아니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측면에서는 당시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책은 유학사상을 공고히 하는 데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윤명철 교수의 이러한 지적은 오히려 당시 조선조의 시대정신에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유학사상과 실학사상의 맥이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단순히 표류의 사실 기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성리학性理學적 세계관에 충실한 조선 선비가 유교적 현실에서 보여준 셈이다. [35]
실증적 한문교양서
우리 나라에서 읽혔던 많은 경전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서 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표해록을 저술한 것이다. 표해록은 중국 고사를 고증한 책으로,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러므로 최부를 실학의 선두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수차와 연결할 것.
중국고사, 인명, 지명은 오래 전부터 우리 글에 풍부한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그 활용은 주로 인용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가사나 한시 갈래 등에 활용된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이 인용된 우리 문학작품의 경우, 올바른 독법 및 해석을 위해 원전의 문구나 물명(物名)에 대한 의미 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실학학풍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증명한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실제 생활을 이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시명다식』과 같은 백과사전식 저술은 실학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표해록도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 최부가 스스로 증명한 객관적인 사실(지명, 인명, 고사 등)을 관찰일기식(백과사전식의 또다른 버전)으로 정리한 것이다.
시명다식(詩名多識)은 초(草)·곡(穀)·목(木)·채(菜)·조(鳥)·수(獸)·충(蟲)·어(魚) 등 8개 부문으로 나누어 약 310여종의 물명(物名)을 뽑아 해설하고 있다.『시경』은 물명이 가장 풍부한 경서(經書)로 물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시경』의 경의(經義) 해석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물명들은 본래 중국의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물명과는 차이점이 많다. 우리나라의 물명을 모아 상세히 해설한 책으로는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가 있는데, 『시경』의 물명을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는 이 책과 상호보완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표해록은 시명다식처럼 일종의 기행백과사전을 만든 것이다.
중국학자들마저도 "중국에 관한 이웃나라의 가장 친절한 묘사"로서 5만여자의 "유창한 한문"으로 쓰여졌다고 높이 평가하는 명저 '표해록'은 기행문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기행문의 생명이라고 하는 생동있는 사실성이 돋보인다. 이 책은 중국사서에도 없는, 그리고 중국사람들조차 모르는 많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학계는 경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여타의 역사서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중국 남북을 가로지르는 대운하에 관해 생생한 기술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의 교통제도, 시장, 사찰과 사묘, 심지어 민간 관우묘의 풍경까지도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군사제도인 위소에 대해선 그 명칭까지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최부는 명나라 초기 다시 소통된 대운하의 전 노정을 주파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사실성은 내용의 정밀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기체로 엮어 내려간 기사마다 꼭 구체적인 시간과 지점, 관련인물들의 실명이 기재되어있다. 또한 '표해록'은 바탕으로 삼은 소재나 기법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유학자인 그는 '논어'나 '맹자' 등 오경사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의 중국의 지리학 고전인 '우공'까지도 십분통달해 글 속에서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는데 대해 중국 학자들 마저 경탄한다.
이 책 속에는 이해를 실감나게 하고 심화시키는 비교법이 자주 눈에 띈다. 사실 문장기법에서 비교법이란 비교하는 두 대상을 깊이 이해해야 쓸 수 있기 떄문에 가장 어려운 기법 중 하나이다. 최부는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과거제도, 환관제도, 관리들의 의관비교, 접대용 차와 술의 비교 등을 통해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남북문화를 비교하는 대목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이라는 평가이다. 강남여자들의 옷은 거의가 좌임이나 강북은 우임이고, 강남사람들은 온순하고 거의 글자를 알고 있으나 강북은 사납고 뭔가 물어보면 "나는 글을 안배워 무식하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강남에서는 돼지고기 한 접시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고작이나 강북에서는 돼지는 통째로, 술은 단지로 대접하니 그 차이가 크다. 모두 치장을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강남사람들은 거울과 머리빗 같은 치장도구를 가지고 다니는데 반해 강북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강남 시장에서는 금과 은이 통화로 사용되나 강북에서는 동전이 쓰인다. 강남은 기와집이나 강북은 초가집이 태반이다... 모두 날카로운 통찰력이 아니고서는 이를 수 없는 기록들이다.
특기할 것은 이 책에 나타난 언어적 소재가 학술적 연구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특히 중국 남북 지방의 서로 다른 구어체 어휘들은 중국 언어학자들의 탐구대상이 되고 있다. 예컨대, '曉得'(샤오떠, 알다)는 강남 일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강북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보편화되었다. 지금 보통어에 쓰이고 있는 '얼'화음이 책 속에는 강북의 지명에만 발견되어 그 어원은 북방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아문'(워먼,우리)는 '아매'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것도 이 책 속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한 외국인의 기행문에서 자국의 언어적 소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최부가 경험하고 목격한 것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기술하고 다양한 소재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관찰력,문장력과 철저한 기록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이러한 기록정신이 없었다면 호송길에 얼른얼른 스쳐 지나간 현장을 극토록 세심하고 정확하게, 단 여드레만에 5만여자로 써낼 수 없었을 것이다. [36] *기록정신은 경세제민
실증적 중국교양서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은 금릉(金陵)에서 제도(帝都)에 이르기까지의 산천·풍속·습속을 갖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하여 알수 있습니다. 청컨대 함께 개간 전파하게 하소서."[37]
'눈으로 보지 않고 중원을 알 수 있는 거필(巨筆)'이었다.[38]
최부의《표해록》은 아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기 명나라 풍속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거전자葛振家 교수(베이징대학)가 묘사했듯이 《표해록》은 "단순히 중국 황제의 공적과 업적이나 중국의 사회, 정치를 묘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 정치에서 중요한 내용 즉, 명나라의 정치·군사적 측면인 해안 방비, 세관 운영 등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히 고찰, 기술했다.
“최부의 표해록은 「동방견문록」보다 큰가치” 『금남선생의 표해록은 명대의 해안방비, 문물, 민속, 지지, 언어 등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1백36일간의 짧고 통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록이지만, 마르코폴로가 17년간 머무르며 쓴 「동방견문록」과 당나라 때 일본승려 원인이 9년여간 보고 쓴 「입당구법 순례기행」보다 가치가 높습니다』 [39]
이 견문록을 읽는 것은, 먼저 이 안에 담긴 사건 자체의 재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능력에 도움을 받아 독자가 지식을 넓히는 방편으로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15세기 말 조선의 역사와 풍속뿐 아니라, 명나라의 그것들까지도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40]
금남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못지않은 표해록을 남긴 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는 금남 최부의 표해록에는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 상황과 지리, 민속, 언어, 문화, 조선과 명의 관계사 등 중국 문헌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귀중한 정보가 실려 있다.[41]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은 조선 숙종 대에 활동했던 관료문인 송정규(宋廷奎, 1656~1710)가 제주목사 시절(1704~1706)에 제주에서 발생 한 표류 관련 사실을 정리한 책이다. 송정규는 제주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과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이 안에 최부의 표해록이 〈표해록 약절〉로 수록되어있다.〈표해록 약절〉은 익히 알려져 있고 여러 종의 번역본도 출간된 최부의《표해록》을 초록한 것인데, 이는 실학적 학문경향을 보였던 송정규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송정규가 살았던 17세기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여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 잡아가던 때였다. 특히 청 조정은 당시 극심했던 왜구의 소요를 통제하고자 '천계령(遷界__)'을 내려 해안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했고, 이로 인해 바다를 통한 교역은 매우 위축되었다. 이와 맞물려 국내적으로도 외부를 향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학술계가 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확연히 줄어들고, 관념적인 소중화론이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지식인들의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태도 또한 외부에 대한 관심을 누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초기와 크게 대비된다. [42] 송정규는《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에 〈표해록 약절〉을 실음으로써 조선 초기의 학문적 분위기와 실증적 연구 자세를 되돌아 보려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제자 이강회(李綱會)도 《운곡총서(雲谷叢書)》와 《유암총서(柳産叢書)》에서 외국 선박의 상세한 제도에 대해 서술하고 또 표류를 당해 필리핀과 마카오까지 다녀온 문순득(淳得)의 이야기를 수록했는데 이는 외국 문물에 대한 지식이 실학파의 중요한 관심거리이자 실천적 연구 자세의 핵심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다로 나아갔던 우리 조상 가운데 표류를 경험한 사람이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품기조차 쉽지 않다. 왜냐하면,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 기》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하멜의 《하멜 표류기》 같은 서양의 걸작 해양문학은 자주 들어봤어도 우리나라의 작품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해양문학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찾지 않으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여 찾아보면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이름의 해외 표류기가 의외로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조선왕조실록》 에서 표류를 주제로 하여 찾아보면 무려 2,000건 이상이 나온다. 지도를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 너머에는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 수많은 나라가 있다. 표류기는 곧 이들 나라와 교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43]
실증적 경세제민서
한편,《표해록》에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농사 기구에 대한 기술도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차水車이다. 최부는 정해현貞海縣 을 지나면서 수차를 보고는 그 지역 사람에게 제작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수차는 물 푸는 데에만 사용할 뿐이어서 배울 것이 못 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최부는 그를 설득했다. "배워다가 동방 백성을 가르쳐서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준다면 족하의 한번 말하는 수고가 우리 동방 사람의 천만대의 무궁한 이익이 될 것 입니다. (...)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리하여 그는 끝내 제작법을 배워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수차를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 이 일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록되었다. 이처럼 《표해록》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선비의 마음도 잘 드러난다.[44]
- 이용후생
표해록 간행
최부의 ≪표해록≫은 조선시대에도 고전으로 취급되어, 여섯 차례나 간행된 바 있다. 조선 말엽의 ‘언해본’을 비롯해 현대어 번역까지 우리말 번역도 10종이 넘는다. 이 점은, 수십 종의 번역이 나와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번역되어 나올 ‘사서삼경’과도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 ≪표해록≫에 대한 관심은 비단 우리나라 안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일찍이 제목을 달리하여 ≪통속 표해록≫으로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구두점을 찍고 주석을 붙인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미국에서도 메스킬(Meskill)의 ≪Ch’oe Pu’s 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University of Arizona Press, 1965)로 영역 출판되어 있다. 이런 세계적 관심만으로도 독자들은 이 책의 진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탐진 최씨 금남선생 표해록≫』 유희춘 서문 ≪금남집≫ 유희춘 서문 ≪최부 표해록≫ 유희춘 발문 ≪최부 표해록≫ 정중원 발문 ≪금남집≫ 나두동 발문
표해록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69년에 평안도 정주에서 그의 외손자인 유희춘에 의해서다. 그 후 1573년에 나주에서 다시 표해록을 간행한다. 외국에서 인정을 먼저 받아 1769년에 일본 청전군금(淸田君錦)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보급하였으며, 1965년에는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존 메스킬(John Meakill)이 영어로 완역하였고, 1979년 최기홍 선생이 국어로 완역하였다. 1985년 금성출판사에서 어린이용 표해록이 발간되었으며 1992년 북경대학 갈진가 교수[45]가 중국에서 역시 발간하였다. 2004년에는 동국대학교 서인범 교수가, 2006년에는 고려대학교 박원호 교수가 출간을 하였고, 2010년 항주 절강대학에서 최부지려(崔簿之旅)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6년에는 최기홍 선생의 아들인 최철호 선생이 발간하였다. [46]
책 제목은 바다에서의 표류를 기록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상 내용의 3분의 2는 중국 강남지대로부터 베이징에 이르는 약 8800리를 135일간 종주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중국에 관한 기록이기는 하지만, 왕명에 의해 중국에 사행한 사신들이 쓴 각종 연행록(燕行錄, 약407건)과는 구별하기 위해 '표해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전한다.
원래 이 책은 왕명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처음에서는 조정에서 동활자로 간행했다. 그 후 최부의 외손자 유희춘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며, 유희춘의 부탁으로 전라감사 이양원이 다시 목판본을 재간한다. 그러나 목판본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가 지금은 일본 몇 군데에 흩어져 있다. 조정에서 최초로 간행했던 동활자본 1권만이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부끄러운 일은 이 국보급 진서의 보급이나 연구에서 우리는 후진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가장 먼저 1769년 주자학자 키요타 키미카네(淸田君錦)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일본명 토-도-코-테-키)'라는 이름의 일역본이 나왔고, 미국과 중국에서는 각각 1965년과 2002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우리의 경우 1964년과 1976년에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자료용 번역본이 나왔을 뿐,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뒤늦게나마 남한에서 2004년 처음으로 완역 역주본이 출판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견문록 가운데는 중국의 인문지리에 대한 지식은 물론 중국 관리와의 문답(問答) 내용이 나오는데, 예컨데 조선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답변하면서도, 호구(戶口)나 병제(兵制), 전부(田賦) 등에 대해서는 자신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고 회피하는 등 국익을 생각하여 말을 삼가는 모습이 역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요컨데 조선의 관리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인문학적 소양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그가 표류 전에 이미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의 제작에 참여한 당대의 젊은 학자였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출처 : 월드코리안뉴스(http://www.worldkorean.net)
(조) p. 163 (조) p. 198-203 당초행정기에서 보이는 일본인의 최부 비판
최부의 ‘표해록’은 한국과 중국을 문화적인 동질감을 이끌어내면서도 그 차이를 서로 인정하게 할 수 있는 관광 공연예술상품의 좋은 소재이다.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대형 뮤지컬 작품을 만든다면 사드문제로 서먹해진 양국 간의 친선 회복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 양국이 가지고 있는 특장들을 잘 활용하고 협력하여 좋은 뮤지컬 작품을 제작해 보기를 제안해 본다. http://www.ithemove.com/news/articleView.html?idxno=681
http://m.blog.daum.net/sswwss/13741172?categoryId=725837
- 교과서로서의 최부의 <표해록>[47]
- 최부의 <표해록>에 대한 두 가지 의문, 이복규
- 최부 표해록 연구 [48]
- 최부 『표해록』의 관광학적 고찰 [49]
- 최부 『표해록』 판본고 [50]
- 최부의『표해록』에 나타난 필담 [51]
- 조선 후기 표해록에 대한 경영사적 고찰 [52]
소학
본문은 크게 내편(4권)과 외편(2권) 등 총 386장으로 돼 있다. 내편은 입교(立敎, 교육의 길), 명륜(明倫, 인간의 길), 경신(敬身, 수양의 길). 계고(稽古, 고대의 도) 등 총 214장이다. 외편은 가언(嘉言,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 착한 행동) 등 총 172장이다. 각 편의 모든 글은 기존 문헌에서 따왔다. 내편에 인용된 주요 문헌은 『논어』 『맹자』 『예기』가 전체 76퍼센트(162장)를 차지하고, 외편은 송대 사대부의 행실 사례가 64퍼센트(110장)를 차지한다.[53]
<소학>의 내편은 입교(入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그리고 계고(稽古)로 구성되는데, 앞선 세 가지를 3강령이라고 하며, 마지막(계고)은 성현의 행적을 통해 이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입교는 태교부터 가정교육을, 명륜은 오륜을, 경신은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실천자세를 서술한다. 외편은 계고와 마찬가지로 <소학>의 3강령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한대 이후 북송까지의 현인들의 행적을 담고 있다.
3강령은 교육, 윤리, 그리고 수양을 위한 실천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 입교는 스무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루고, 서른 살이 되면 아내를 맞이하는 것과 같이 일상생활의 의례를 포함한다. 이것은 아무래도 교육 방침이 제대로 지켜져야 이후 다른 교육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명륜은 각종 경전에 기록된 부부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인간이 왜 짐승과 다른지에 대한 유학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경신은 세 번째로 경건한 마음가짐, 몸가짐 등 태도의 중요성을 서술한다. 앞서 입교와 명륜이 교육의 기본적인 방향과 내용을 서술했다면, 경신은 그런 것을 실천하기 위한 자세를 논했다. <대학>의 3강령과 서술 방식에서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소학계’ 는 고려와 조선의 일반적인 契가 가지는 의미와는 달리 조선에 『소학』 교육을 정착시킨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둘째 ‘소학계’의 내용 전반은 『소학』이 실천서로서 조선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이 몰고 온 반주자학적 현실정치는 유교적 질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림들은 이 문제로 고뇌하였고, 결국 ‘수기치인’을 통하여 무너졌던 강상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나선 이들이 ‘소학계’였으며, 그 중심에 점필재 김종직과 그의 문인이자 조선의 대표적인 도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이었다.‘소학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로, 수기적 학문의 성향을 강하게 보인 김굉필ㆍ정여창 등의 부류와, 치인적 성향과 경세적 경향을 띤 남효온 등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일원은 아니었지만 함께 어울렸던 준걸재사에 정여창ㆍ박연이 포함되어 있고, 이심원 역시‘소학계’의 일원은 아니었다. 이러한 정황들은 이들이 같은 시기에 『소학』의 실천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보여 ‘소학동자’로 불리었던 김굉필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54]
사림파는 성종 치세 초반부터 소통과 교류의 장을 찾았다. 강응정(姜應貞), 남효온 등의 '소학계(小學契)'나 김굉필, 최부(崔溥) 등의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등이었다.[55][56] 금남 최부는 수기적 모습을 보인 김굉필과 경세적 경향의 남효온을 합쳐 놓은 인물로 보인다.
소학동자들[57]
- 김종직, 김굉필, 윤효정, 유계린, 임우리
기축옥사에서 화를 가장 많이 당한 것이 최부의 제자들[58]
- 이발, 이중호
격물치지
주희는 진리탐구를 중시하고 왕수인은 도덕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해석의 차이는 먼저 글자의 뜻을 달리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치지의 ‘격(格)’을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한다’, 즉 ‘궁리(窮理)’의 뜻으로 이해한 반면 왕수인은 격에 자격의 뜻이 있다고 하여, 격을‘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 즉 ‘정기부정(正基不正)’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할 경우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지만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여야 할 ‘주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왕수인은 평소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주자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사상은 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용어에 포괄된다. 가톨릭이 객관주의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주관주의다. 가톨릭은 객관적 권위(교황)를 절대화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이 바이블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업이 객관주의라면 상업은 주관주의다. 농사는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상업에는 매번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16세기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농업에서 상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집권체제와 정착민의 삶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체제와 유목민의 삶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양명학이 대두되었지만 주자학에 밀려 세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주자학과 양명학을 중용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신유학을 구축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일이 아닐지.[59]
멀리 있으면 잘 알 수 없던 사람의 됨됨이가 가까이 대해 보면 잘 드러난다는 의미의 인격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격(格)은 가까이 마주 대한다는 뜻을 가진다. 물(物)은 질량이 있는 물질과 질량이 없는 빛을 통틀어서 물질세계의 모든 것을 일컫는다.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것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치지(致知)는 아는 것의 극치, 즉 대충 아는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정확하고 자세히 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격물치지는 사물을 놓고 최선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은 남들이 적당히 보고 넘기는 일을 철저히 관찰하고 조사하는 데서 발전한다. 물을 끓이는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한 와트나 바람에 날려 온 곰팡이로부터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 등 흥미로운 예는 무수히 많지만 나는 격물치지의 극치로 허블의 안드로메다 연구를 들고 싶다. 하늘의 별 중에는 금성이나 목성처럼 밝은 행성도 있고, 시리우스처럼 크고 밝은 별도 있지만 겨우 보일 정도로 멀리 있는 별들도 많다. 베텔기우스 같이 붉은 별도 있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보면 별 같기는 한데 구름처럼 퍼져 보이는 천체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안드로메다 성운(星雲)이다. 20세기 초반에는 이미 우리가 속한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의 집단인 것이 알려졌고, 자연스럽게 은하수가 우주의 전부인 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도 물론 은하수에 들어있는 좀 별난 천체로 치부되었다.
1920년대 초에 허블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안드로메다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윌슨산의 100인치 망원경을 사용해서 장시간 빛을 모아 사진건판을 현상하는, 지금 눈으로 보면 원시적인 방식으로 몇 년 동안 끈기 있게 안드로메다를 조사하던 허블은 그 성운 안에서 은하수 크기의 10배 이상 거리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했다. 내 키는 2m가 안되기 때문에 20m 거리에 있는 어떤 물체가 내 몸의 일부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드로메다는 은하수의 일부가 아니고 또 하나의 은하인 것이 밝혀진 것이다.
-철저한 관찰·조사에서 시작-
우주의 두 번째 은하를 발견한 허블은 그 후 수년에 걸쳐 20여개의 은하를 더 찾아냈다. 윌슨산 꼭대기 천문대에서 외롭게 성운 하나하나와 맞대결한 결과이다. 이처럼 1920년대에 허블이 관찰한 은하들은 모두 1천만 광년 이내의 거리에 있는, 비교적 우리에게서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 후 채 한 세기가 지나가기 전 오늘날 인간은 약 1백억 광년 거리에 있는, 그러니까 허블이 1920년대에 보았던 은하들보다 1,000배나 멀리 있는 은하까지 보면서 우주의 기원과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까지도 파악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인문적인 의문의 답도 격물에서 얻어진다니 역시 격물은 치지의 출발점인 모양이다.[60]
휴타고지
표해록 관련 참고내용
https://www.ilovesea.or.kr/img_upload/20140424/8340A97AB96E4DD58654882CBFDF850A.pdf https://www2.dhii.jp/nijl_opendata/searchlist.php?md=idl&bib=200014032 http://www.digerati.kr/mediawiki/index.php/%EC%B5%9C%EB%B6%80(%E5%B4%94%E6%BA%A5)_%EC%9D%BC%ED%96%89_%ED%91%9C%EB%A5%98%EC%82%AC%EA%B1%B4 http://digerati.aks.ac.kr/smu/graph/index.html https://kicho.tistory.com/tag/%EB%8A%98%EC%96%B4%EC%A7%80%EB%A7%88%EC%9D%84
클래스 설계
정치: 왜적, 요동 외교: 조공, 황화집, 표류인, 해양사 지리: 조선, 중국의 여정 문화: 조선, 중국 각각 관제, 과거시험, 학교제도, 복식, 음식, 명절 등 역사: 조선, 중국의 역사, 임정청사(상하이, 항주) 한문학: 조선, 중국의 문학가 번역: 한문, 고증 경영: 인사 경제: 자본주의 철학: 유교, 불교, 도교 과학: 기후, 천문, 수차 건축: 교량, 성 인물: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
중국의 민속 등을 보고 조선의 것에 비교
록 권1
喪人臣崔薄,自濟州漂流, 泊甌東, 過越南, 經燕北,以今六月十四日到靑 坡驛,敬奉. 傳旨, 一行日錄撰集以進.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薄)[61][62]는 제주(濟州)로부터 표류해서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I. Ch'oe Pu, while in mourning, went adrift from Cheju,1 landed east of Ou, and passed from south of Yüeh to north of Yen.2 On the 14th Day of this Sixth Month [July 22, 1488] I reached Ch’ðngp’a Station” and respectfully received a Royal edict for a diary of the journey. I have compiled it and now submit it.
1. 喪人=喪制라고도 한다. 부친상을 당한 최부가 喪中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自稱이다. 2. 는 秦漢시대 浙江 남부에 있었던 東國을 말한다. 甌東이란 東盛의 동쪽 지역 즉 절강 동남부 연해 지역을 가리킨다. 3. 越은 春秋戰國時代에 江蘇일대에 있었던 越國을 가리킨다. 越南은 월국의 남쪽 지역 즉 오늘날 강소 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4. 燕은 戰國時代 北京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燕國을 가리킨다. 燕北은 연국의 북쪽 지역 즉 河北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5. 이 해는 성종19년으로서, 明 弘治 원년이고, 서기 1488년이다. 6. 朝鮮 漢陽의 崇禮門 밖 약 3리의 거리에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지역에 해당한다. 한양을 出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驛으로서 兵曹의 직할이었다. 驛에는 3등馬 50필이 배정되어 傳命을 받으면 즉시 달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의 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세조3년(1457) 驛丞을 察訪이라 개칭하고 전국에 538개의 역을 두고, 이를 4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을 두었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察訪驛이라 불렀다. 역은 대체로 30리에 하나씩 두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형 등의 형편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성화(成化)23년 정미년 가을 9월 17일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
윤 정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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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日,在廣寧驟,是日雨,太監、總兵官、都御史、都司、參將等,令柳源及驛寫字王禮等,載衣服、帽華等件來騷,分給臣及從者,臣所受,生福青圓領一件、白夏布擺295一件、白三棱布衫一件、大氈帽一項、小衣一件、白鹿皮鞋一雙、襪一雙,程保以下四十二人,每人白三棱布衫各一件、小衣各一件、氈帽各一項、華各一雙、糖各一雙,又以全猪一頭、酒二盆,源謂臣曰:“三堂老爹說你回國200,以今日所受之物,俱要啟于國王前”云云,夕,程保等四十餘人,羅跪臣前,日:“自古漂流,船雖或不敗,或渴水,或陷海,或病死,死者十居其半,令我等屢經患難,俱無死傷,此一幸也,漂到他國者,或致邊將所疑,或翻轉,或拘囚,或鞭(桂)「達」,隨之以問按驗之,今我等一無被拘困苦,到處皆敬待,飽以餐飯,此二幸也,前此难義人從李縣監而漂死者頗多,拘攣亦甚,到皇都,無賞賜,
p.452 渴困苦,僅得生還,今我等到皇都,皇帝有賞賜,到廣寧,鎮守、三司賜衣裳帽華,軍人空手而來重負而還,此三幸也,凡此三幸,莫知其所由致也。”臣曰:“此皆由我聖上仁以撫眾,誠以大之德也。”
광녕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태감, 총병관, 도어사, 도사, 참장 등이 유원과 역서기(驛書記) 왕례(王禮) 등을 시켜 의복, 모자, 가죽신 등을 신고 광녕역에 와서 신과 종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신이 받은 것은, 생복청원령(生福靑圓領)198 1건(件), 백하포파(白夏布擺)199 1건, 백삼사포삼(白三布 )200 1건, 대전모(大帽)201 1정(頂), 소의(小衣)202 1건, 백록피화(白鹿皮華)203 1쌍, 전말(模) 1쌍이고, 정보 이하 42인이 받은 것은 1인당 백삼사포삼 각 1건, 소의 각 1건, 전모(帽) 각 1정, 가죽신 각 1쌍, 전말 각 1쌍씩이었습니다. 그 외에 통돼지 1마리, 술 2동이를 주어 위로하였습니다.
유원이 신에게, “삼당(三堂)204 대감께서 당신이 본국에 돌아가면 오늘 받은 물건을 모두 국왕에게 아뢰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
저녁에 정보 등 40여 인이 신의 앞에 죽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표류하면 배는 비록 파손되지 않더라도 마실 물이 떨어지기도 하고,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병들어 죽기도 해서 죽는 사람이 절반은 되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여러 번 환란을 겪었으나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행운입니다. 타국에 표류된 사람은 변장(邊將)에게 의심을 받아서 결박되기도 하고, 구금되기도 하고, 매 맞기도 하고, 또는 국문(問)하여 조사를 당하기도 했는데, 지금 우리들은 한 사람도 구금당해 고생한 적이 없고, 이르는 곳마다 모두 환대를 받아 밥을 배불리 먹게 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행운입니다. 이전에 정의현(佐義縣) 사람들은 이(李) 현감(縣監)을 따라서 표류하다가 죽은 자가 자못 많고 속박도 심했을 뿐더러 황도(皇都)에 도착해서는 상도 없었고 기갈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왔는데, 지금 우리들은 황도에 도착하니 황제께서 상을 내리시고 광녕에 도착하니 진수(鎭守), 삼사(三司)가 의복, 모자, 가죽신을 주어 군인들이 맨손으로 왔다가 가득 짊어지고 돌아가니 이것이 세 번째 행운입니다. 이 세 가지 행운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우리 성상께서 인(仁)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지고 성심으로써 대국을 섬기신 덕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9th Day. At Kuang-ning Station. This day it rained.
The Overseer, Regional Commander, Censor-in-Chief, Regional Military Commissioner, and Local Commander ordered Liu Yüan and Station Scribe Wang Li to bring clothing, hats and boots to the station and issue them to me and my followers. I received one bright blue round-collar, one white Chinese linen wrap, one white three-shuttle cloth gown, one big felt hat, one small gown, one pair of white deer skin boots, and one pair of felt socks. Each of the forty-two men from Chòng Po down received one white three-shuttle cloth gown, one small gown, one felt hat, one pair of boots, and one pair of felt socks. They also feasted us with one whole pig and two jugs of wine. Yüan said to me, “The three chiefs42 say that when you return to your country you should report everything you have received today to your King.” In the evening Chong Po and the other forty-odd men knelt round me and said, “From olden days, even when boats that have gone adrift have not been wrecked, some of the people have been parched for water, some have fallen into the sea, and some have died of sickness. Half of every ten have died. We have had to endure hardships, but none of us has died or been hurt. That is one blessing. Of those who drift to foreign countries, some are suspected by coast guards, some are bound, some are imprisoned, and some are whipped and then examined and judged. We, now, have not suffered a single imprisonment. Everyone has treated us respectfully and given us plenty to eat. That is a second blessing. Before this, a great many of the men who went adrift with Junior Director Yi died. [The group] were also violently seized, and when they reached the capital, they were not awarded gifts. They suffered from hunger and thirst and were barely able to return alive. When we, now, reached the capital, the Emperor awarded us gifts; when we came to Kuang-ning, the Three Authorities presented to us clothing, hats, and boots. The soldiers came with empty hands and return heavily laden. That is a third blessing. “We do not know what has brought about these three blessings.” I said, “They have all been brought about by the virtue of our sage Highness in benevolently caring for the people and sincerely serving China.”
198. 生은 生衣 즉 비단으로 만든 옷을 가리키고, 福은 福色 즉 紫色을 가리킨다. 圓領은깃이 둥근 官服, 199. 夏布는 곧 葛布이다. 李麻纖維로 만든 베로서 夏衣를 만드는 데 적합하다. 江西, 湖南, 廣東, 四川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布擺는 면포로 만든 홑치마. 200. 三布는 松江에서 생산되는 일종의 統絲이다. 白三布衫은 흰색 삼사포로 만든 적삼을 일컫는다. 201. 帽는 털모자를 뜻한다. 202. 內衣의 일종. 203. 白鹿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 204. 布政使와 按察使 및 都指揮使를 함께 지칭하는 말.
5월 20일
二十日,陰,大風,過察院、普慈寺,出城東門,即泰安門也,又過鍾秀橋、泉水、平面、潮溝等鋪,至盤山驛,有指揮楊俊來待饋以茶,瞬城北望有黑山、岐山、蛇山,山皆醫巫間之東支也。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찰원(察院)·보자사(普慈寺)를 지나 성의 동문으로 나오니 곧 태안문(泰安門)이었습니다.
또 종수교(鍾秀橋)·천수(泉水)·평전(平句)·조구(潮溝)등 포(鋪)를 지나서 반산역(盤山驛)에 이르니 지휘 양준(楊俊)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역성(驛城) 북쪽에서 바라보니 흑산(黑山)·기산(岐山)·사산(蛇山)이 있었는데, 그 산들은 모두 의무려산의 동쪽지맥(支脈)이었습니다.
20th Day. Cloudy. High winds. [We left the station and went as far as P’an-shan Station.]
5월 21일
二十一日,時而風。過要站鋪,至高平疇,過清泉鋪、新河橋、通河橋、通河鋪,至沙嶺驛,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요참포(要站鋪)를 지나서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고, 청천포(淸東鋪), 신하교(新河橋), 통하교(通河橋), 통하포(通河鋪)를 지나서 사령역(沙嶺驛)에 이르렀습니다.
21st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Yao-chan Stop to Sha-ling Station.]
5월 22일
二十二日,晴風,過高墩鋪,至新關門,有長土城,北附長城而南,關門正當其中,即成化年間所新築也,又過大臺、三官廟、河灣舖,至三叉河,河即遼河也,源自開原東北,經鐵嶺,至此與渾河、(泰)(太子河合流 為一,故名三汉,盖遼地瀕海而高亢,支河皆逆流,故泰子、渾河,皆自東而西,又有境外支河,皆自北而南,曲折紫迴,俱會于此,作浮橋,橫截河流,又挽舟而渡,號為遼河渡,有一官人坐于河岸小廳,以識察往來行人,其南有聖母媽媽廟,又過臨河橋,到牛家莊露,又過石井鋪、沙河在城鋪,至在城睾,睾在海州衛之城西門外,故名,衛亦巨鎮也,東有西车城山。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고돈포(高數鋪)를 지나서 신관문(新關門)에 이르니 장토성(長土城)205이 북쪽으로 장성(長城)에 붙어서 남쪽으로 뻗었고, 관문(關門)은 바로 그 복판에 있었으니 곧 성화(成化) 연간에 새로 쌓은 것이었습니다.
또 대대(大臺), 삼관묘(三官廟), 하만포(河灣鋪)를 지나서 삼차하(三가河)에 이르니 삼차하가 곧 요하(遼河)[63][64][65][66][67]였습니다.
그 원류는 개원(開原)의 동북으로부터 시작하여 철령(鐵嶺)[68][69][70]을 지나 이곳에 이르러서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206 와 합류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삼차하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요동 지대는 바다에 가깝지만 지대가 높아서 지류가 모두 역류하기 때문에 태자하와 혼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습니다.
또 이 지역 밖의 지류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굽이지고 빙 둘러서 모두 이곳으로 모이니 부교(浮橋)를 만들어 하류(河流)를 가로막아 끊었으며, 또 배를 당겨 건너게 되므로 요하도(遼河渡)라고 불렀습니다.
한 관인이 강가의 작은 청사에 앉아서 왕래하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남쪽에는 성모양양묘(聖母壤壤廟)가 있었습니다.
또 임하교(臨河橋)를 지나서 우가장역(牛家莊)에 이르고, 다시 석정포(石井鋪)·사하재성포(沙河在城鋪)를 지나 재성역(在城驛)에 이르렀습니다.
재성역은 해주위(海州衛)의 성 서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재성역이라 이름한 것이었습니다.
해주위 또한 큰 진(鎭)이었습니다. 동쪽에 서모성산(西牟城山)이 있었습니다.
22nd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Kao-tun Stop across the Liao River to Hai-chou Garrison, which was also a big market town.]
205. 명대 遼東 지역에 쌓은 邊牆. 206. 民國《遼陽縣志》 권2, 山川에는 '太子河'로 기재되어 있다. 康熙《遼陽州志》 권7, 山川에도 太子河가 혼하 및 요하와 합류하여 三叉河를 이룬다고 하고 있다. 《方輿記 要》에 의하면 “太子河는 곧 옛 衍水이다. 燕 太子 丹이 衍水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後人이 太子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월 23일
二十三日,至遼陽驛,是日,陰而雷,自曝傍城而西北而東,過遞運所、土河铺、甘泉鋪、關王廟,至鞍山睾,睾之東有遼高山,西有遼下山,又過武安王廟、長占鋪,至沙河鋪,有二水俱帶于鋪之東西,名皆沙河,盖自通州以來,地多沙土,故水以沙河得名者多,又過首山鋪,至遞運所城,城即八里莊也,過接官亭,至遼陽在城驛,驛在遼東城西,
이 날은 흐렸다가 천둥이 쳤습니다.
재성역에서 위성(衛城)을 따라 서쪽으로, 북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가서 체운소(遞運所), 토하포(土河鋪), 감천포(甘泉鋪)207, 관왕묘(關王廟)를 지나 안산역(鞍山驛)에 이르니 안산역의 동쪽에는 요고산(遼高山), 서쪽에는 요하산(遼下山)이 있었습니다.
또 무안왕묘(武安王廟), 장점포(長店鋪)를 지나서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니, 두 강물이 모두 포(鋪)의 동쪽과 서쪽을 두르고 있었는데 모두 '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통주(通州)로부터는 사토가 많았기 때문에 '사하'라고 불리는 강이 많았습니다.
또 수산포(首山鋪)를 지나서 체운소성(遞運所城)에 이르렀으니, 체운소성이 곧 팔리장(八里莊)[72]이었습니다.
접관정(接官亭)을 지나서 요양재성역에 이르렀는데, 역은 요동성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23rd Day. Arrival at Liao-yang Station. This day was cloudy, and there was thunder. [We went from the wall of the garrison to Liao-yang-tsai-ch'eng Station, which was west of the wall of Liao-tung.]
207.《全逸志》권1, 圖考, 遼陽城에는 井泉鋪로 되어 있다.
5월 24일
二十四日,晴,有僧戒勉者能通我國語音,謂臣曰:“僧系本朝鮮人,會祖父逃來于此,今已三世矣,此方地近本國界,故本國人來往者甚夥,中國人最怯懦無勇,若遇賊,皆投戈奔竄,且無善射者,必抄本國人向化者,以謂精兵,以為先鋒,我本國一人,可以當中國人什百矣,此方即古我高句麗之都,奪屬中國千有餘載,我高句麗流風遺俗,猶有未验,立高麗祠,以為根本,敬__不怠,不忘本也。嘗聞鳥飛返故鄉,狐死必首丘,我等亦欲返本國以居,但恐本國反以我等為中國人,刷還中國,則我等必服逃奔之罪,身首異處, 故心欲往而足超耳:”臣曰:“汝以清淨之流,宜在深山之中,何為僧冠俗行,出入於閩閣之中乎?”曰:“僧入山中久矣,今為官吏所招來”臣曰:“招以何事?”曰:“大行皇帝尊崇佛法,巨利半於天下,方袍多於編戶,會等安队飽食,以修釋行,新皇帝自為東宮,素惡僧徒,及即位大有剪去之志,今則 下詔天下,凡新設寺庵,並令撤去,無度牒僧刷令還俗之令,急於星火,故三堂老爹令吏招僧,自今日壞寺長髮云云,僧徒顧安所容一身
p.454 乎?”臣曰:“此乃撤寺利為民舍,毁銅佛為器皿,髮影首充軍伍之漸,乃知大聖人之所為,出於尋常萬萬也,汝徒嘗祝釐曰:“皇帝陛下萬萬歲,汝之祝釐如是,大行皇帝之崇佛如是,寺利僧佛之盛又如是,大行皇帝壽未中身,八音遠遏,汝之祝釐之勤,安在哉?”言未眠,勉辭謝而退,
맑았습니다.
우리말에 능통한 계면(戒勉)이란 중이 신에게 말하기를,
“소승(小僧)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소승의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도망 온 지 지금 벌써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본국(本國)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에 왕래하는 본국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겁이 많고 용맹스럽지 못하여 도적을 만나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어 반드시 본국인으로서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이라 하여 선봉으로 삼으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사람 열 명, 백 명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73][74][75][76][77][78][79][80][81]인데 중국에게 빼앗긴 지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옛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 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208고 하였으니, 우리들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다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간주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우리들은 반드시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목을 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이 머뭇거릴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청정(淸淨)의 무리209이므로 깊은 산 속에 있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중의 관(冠)을쓰고 속인(俗人)의 행동을 하면서 여염에 드나들고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소승은 산 속에 들어간 지 오래됐는데 지금 관리에게 불려온 것입니다."
“무슨 일로 부르던가?”
“대행황제(大行皇帝)께서 불법을 존숭하시어 큰 사찰이 천하에 반을 차지하고, 방포(方__)210가 편호(編戶)'보다 많았으며, 중들은 편안히 누워있고 배부르게 먹으면서 수행하였습니다.
새 황제께서는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중들을 미워하시더니 제위(帝位)에 오르시고는 아주 제거해 버릴 뜻을 가지셨습니다.
지금은 천하에 조칙(詔勅)을 내려 새로 설치한 암자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도첩(度牒)이 없는 중은 모조리 환속시키라는 명령이 성화(星火)보다 급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당(三堂) 대감께서 관리로 하여금 저를 불러서 오늘부터는 절을 부수고 머리를 기르도록 하라 운운하셨으니, 僧徒는 어디서 이 한 몸 받아 줄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신이 이르기를 “이것은 곧 사찰을 철거하여 민가로 만들고, 청동불상을 부수어 구리 그릇으로 만들며, 깎은 머리를 기르게 하여 군적(軍籍)에 충당시키시려는 의도이니, 이제야 대성인(大聖人)께서 하시는 일이 비범함을 알겠다. 너희들은 일찍이 '황제폐하 만만세'라 축원하였다. 너희의 축원이 이와 같았고 대행황제의 불교를 숭상하심이 이와 같았으며 사찰과 중들의 번성이 또 이와 같았으나, 대행황제는 장수(長壽)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으니, 213 너희가 축원한 수고로움은 어디 있는가?”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면은 하직하고 물러가버렸습니다.
24th Day. Fair.
A monk there, Chieh Mien, could understand our language. He said to me, "Originally my ancestors were Koreans, but my grandfather fled to this place. It has been three generations now. Since this region is near the border of the old country, a great many men from there come here to live. “The Chinese are extremely cowardly. If they meet bandits, they all throw away their spears and flee. They have no good bowmen, moreover, and must seize immigrants from the old country and use them as vanguards, calling them picked troops. One man from our country is a match for ten or even a hundred Chinese. “This region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into China over one thousand years ago, but the traditional customs of our Koguryo have not yet all died out. We have built a Koryð temple and use it as a center. We sacrifice regularly and do not forget our origins. “I have heard, ‘Birds fly home to die, and foxes head for their burrows.?43 We, too, want to return to our country to live, but we are afraid that our country will consider us Chinese and send us back to China. Then we should be charged with having fled and lose our heads. Our hearts, therefore, want to go but our feet hesitate.” I said, “As an anchorite, you ought to be deep in the mountains. Why do you frequent the streets like a layman in a monk's hat?” Chieh Mien said, “For a long time I was in the mountains; now I have been called out by the officials.” I said, “Why have you been called?” Chieh Mien said, “The late Emperor respected the Buddhist law. Great monasteries were built all over the Empire, and there were more monks than people. We lay at ease, ate our fill, and did the Buddhist rounds. “Since the new Emperor was Heir-Apparent, he has consistently hated the monks. When he took the throne, he was determined to do away with us. Now he has handed down an edict ordering all newly established temples and monasteries to be abolished. Monks who do not have official certificates are to be returned to the laity, and this is to be done in the greatest haste.44 The Three Chiefs, therefore, ordered sub-officials to call out the monks. From now on the temples will be destroyed, and the monks will have to grow their hair. That is why I am like this."45 I said, “That way, the abolished temples become people's houses, the destroyed bronze Buddhas become vessels, and the heads that once were bald and now are hairy fill the army ranks. These actions are the deeds of a Sage Emperor, far superior to the ordinary sovereign. “You people have prayed, saying, 'Long live His Majesty the Emperor.' If you so prayed for good fortune, and the late Emperor so respected Buddhism, and the temples and priests so flourished, what good was your earnest praying when the late Emperor died before he was middle-aged?” Before I finished speaking, Chieh Mien made excuses and left.
208.《進南子》권16 (說林)에 “鳥飛反鄕, 走歸窟, 狐死首丘”라는 말이 있다. 209. 죄악과 번뇌를 멀리하여 세속을 떠난 승려를 말함. 210. 方袍란 僧服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승려를 가리킨다. 211. 戶口冊에 편입된 人家. 212. 官府에서 尼에게 발급한 出家 증명서. 213. 成化帝는 재위시 많은 佛寺와 道觀을 만들고 長生術을 추구했지만, 만 40세가 되지 못한 나이에 급사했다.
5월 25일
二十五日,晴,通事千戶王憲、百戶吳鹽來語臣曰:“館夫不說你輩留此經日,故我等在家不知,所以來看之晚也”聖遂引程保、金重等,三堂大人根前,告以漂來首末,三堂大人都指揮使鄧玉、分守總兵官韓斌、布政司副使吳玉、巡按監察御史陳琳琳等也,夕,指揮使命吏將黃酒三盆、全猪一頭、稻米一斗、栗米一斛,來臣等,
맑았습니다.
통사인 천호 왕헌(王憲)과 백호 오새(吳靈)214가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관부(館夫)가 당신들이 이곳에 며칠 묵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까닭에 우리들은 집에 있으면서 알지 못하여 와서 뵙는 것이 늦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새는 마침내 정보, 김중 등을 이끌고 삼당(三堂) 대인의 앞에 나아가서 표류해서 온 전말을 고하였습니다.
삼당 대인은 곧 도지휘사(都指揮使)215 등옥(鄧玉), 분수총병관(分守總兵官) 한기(韓旗), 포정사부사(__政使副使) 오옥(吳玉), 순안감찰어사(巡按監察御史) 진림(陳琳) 등이었습니다.
저녁에 지휘사(指揮使)가 이속(吏屬)을 시켜 황주(黃酒)[82] 3동이, 통돼지 1마리, 쌀 1되, 좁쌀 1되를 가지고 와서 신 등을 위로하였습니다.
25th Day. Fair.
Chiliarch Wang Hsien and Centurion Wu Hsi, the interpreters, came and talked with me: “The porters at the inn did not tell us that you would stay here several days, and not knowing, therefore, we stayed at home. That is why we are late in coming to see you.” Wu Hsi took Chong Po, Kim Chung, and others to call on the chiefs of the Three Authorities. Before them, they reported the whole story, from our going adrift to our arrival. The chiefs of the Three Authorities were Teng Yü, Regional Military Commissioner; Han Pin,46 Deputy Regional Commander; Wu Yü, Administration Vice Commissioner [Pu-cheng ssu fu-shih]; and Ch’en Lin, Regional Inspector.47 In the evening, the General ordered an officer to bring us three jugs of yellow wine, one whole pig, one peck of rice, and ten pecks of millet for a feast.
214. 吳靈는 이 때보다 4년이 지난 후에 鳳凰城의 鎭撫가 되어 있었고, 명나라 사신 艾꽃이 곧 조선으로 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조선에 알려주었다. 《朝鮮成宗實錄》 23년 5월 乙酉. 215. 都指揮使司 및 行都指揮使司의 장관으로 정2품이다. 都指揮同知, 都指揮僉事와 함께 한 省의 軍政을 관장하였다. 司의 일을 총괄하는 자는 掌印이라 하였다. 1인은 練兵을, 1인은 屯田을 통괄하였는데, 僉書라고 불렀다. 巡捕, 軍器, 漕運, 操練, 備御 의 여러 직무를 모두 통괄하였다. 모두 流官으로 충임하였으며, 조정에서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5월 26일
二十六日,晴。王憲復來,曰:“貴國及海西、毛鄰、建州等衛,皆路經于此,貴國使臣往來,接待唯我與吳靈二人耳,我今年老畏暑,故總兵官差郵件送你,鄭亦好人,你可好還本國,可勿憂也,大抵道途之遠,客旅之中,四體不得息,寝食不以時,疾病易以纏,故不數月間,貴國使臣若韓鑽、李世弱相繼道死,其行道若是其難也,今你則歷盡鯨濤疆浪、越南、燕北,全其身全其從者而還,天所以置諸危而全之,措諸禍而福之,從可知矣!”臣曰:“我之保全而來,都是皇恩所賜,抑又我先人亡靈,必有陰佑之功故也。”
맑았습니다.
왕헌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귀국과 해서위(海西衛), 모린위(毛鄰衛), 건주위(建州衛)등으로 가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치게 되는데,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 접대하는 사람이 나와 오새 두 사람뿐입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많아 더위를 견디지 못하므로 총병관께서 오새로 하여금 당신을 호송하게 하셨습니다.
오새도 좋은 사람이어서 당신은 본국으로 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개 먼 길을 여행 중에는 몸을 쉬지 못하고 먹고 자는 것을 제 때 하지 못하여 병이 쉽게 생깁니다.
그런 까닭에 몇 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귀국의 사신 가운데 한찬(韓贊), 이세필(李世弼) 같은 이가 잇달아 길에서 죽었던 것18이니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험한 파도와 월남(越南), 연북(燕北) 지방을 두루 다 거치면서도 자신과 종자들이 모두 온전히 돌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이 위험에 처하게 했다가 온전히 구해주시고 재앙 속에 빠트렸다가 복을 내려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몸을 보전해 온 것은 모두 황제의 은혜 덕택이고, 또 저의 선친(先親)의 신령이 반드시 몰래 도와주신 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6th Day. Fair.
Wang Hsien came again and said, “The road to your country and those to Hai-hsi, Mao-lin, and Chien-chou garrisons pass through here. Only Wu Hsi and I are here to receive the envoys' of your country who pass to and fro. I am old now, and I dread the summer heat. The Regional Commander, therefore, has commissioned my colleague Wu Hsi to accompany you as escort. Wu Hsi is also a good man. Do not worry, you will get back safely to your country. “Generally, during a long trip the body gets no rest, and sleeping and eating are irregular, so that one easily falls sick. That is why within a few months envoys from your country like Han Ch’an and Yi Se-p’il died one after another on the way. So hard is the journey! Yet you, now, have passed through mountainous seas and come all the way from south of Yüeh to north of Yen. You are going home safe yourself and your followers safe; from that it is evident that Heaven has made dangers to save you and calamities to bring you through them in good fortune.” I said, “My arrival safe and sound is entirely a gift of the Imperial graciousness. It must also be because my dead father's spirit has been giving me secret help.”
5월 27일
二十七日,陰,吳璧來,曰:“總兵官差我以騎馬四十三匹、默載馬十五匹,送你等還國,其中一匹,乃我所騎,你等行李,約有多少?”臣曰:“我四十三人,原有行李合而載之,不滿一二默,但受賞於皇帝之胖綿榜,皆冬節之衣,又有所受於廣寧衣韓等物耳。”夔曰:“行李少則行路可便矣.”
흐렸습니다.
오새가 와서 말하기를, “총병관께서 나를 보내 타는 말 43필과 짐 싣는 말15필로써 당신들을 귀국시키도록 하셨는데 그중 1필은 내가 탈 것입니다. 당신들의 행장이 대략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43인이 원래 지닌 행장은 합하여 실어도 한 두 바리에 지나지 않고 황제에게 상으로 받은 반오(胖煥)와 면고(綿榜)가 모두 겨울옷이고, 그밖에 광녕에서 받은 의복과 가죽신 등 물품이 있을 뿐입니다.”
“행장이 적으면 길 가기가 편할 것입니다.”
27th Day. Cloudy.
Wu Hsi came and said, “The Regional Commander has commissioned me to escort you back to your country with forty-three horses and fifteen pack horses. One of the animals will be ridden by me. About how much baggage do you have?” I said, “If we loaded together the baggage the forty-three of us had originally, it would not fill one or two packs. But the padded jackets and trousers we received as awards from the Emperor are winter clothes. There are also the gowns, shoes, and other things we received at Kuang-ning, and that is all.” Wu Hsi said, “If there is little baggage, the trip can be easy."
5월 28일
二十八日,大雨,吳鑒又來,曰:“今日治任將行,天雨雨奈何?”臣曰:“以我式端之心,難過一刻之留,憂此兩者,我一人而已,今年大旱,自二月不雨,以至于今,幸而得雨,則其喜之者,人與萬物也,天實為之,謂之何哉?”璽日:“正是正是。”O遼東舊我高句麗之都,為唐高宗所滅,割屬中原,五代時為渤源(太)[大]氏所有,後又為遼、金、胡元所併,城中有都司、察院、布政司、大僕分司、閱馬司,又有左·右·中·前·後衛,自城西昇平橋,以至肅清、迎恩、澄清、楊武、威振、四路等門及進士門八座,以至高麗市間,民居可謂繁夥,揆之江南,可與嘉興府相頡頑矣,但嘉興城外,市間相接,遼東城外,雞鳴狗吠,不得相聞,海子路傍,土飄飄耳,城東又別築東寧衛城,首山、千山、木場、駱駝、太子、杏花諸山,環拱于城之西南東,其北則平曠無現之野,
큰비가 내렸습니다.
오새가 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행장을 차려 떠나려 했는데 하늘이 비를 내리시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의 조급한 마음으로는 한 순간도 머물기 어려워 이 비를 근심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입니다. 올해에는 크게 가물어 2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오늘에야 다행히 비가 내리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기뻐합니다. 실로 하늘이 하신 일인데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요동219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83][84][85][86] 당고종(唐高宗)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예속되었습니다.[87]
오대(五代) 시대에 발해(渤碑) 대씨(大氏)의 차지가 되었으나 후에 또 요(遼)나라 금(金)나라 원(元)나라에게 병탄되었습니다.
성안에 도사(都司)·찰원(察院)·포정사(布政司)·태복분사(太僕分司)·열마사(馬司)가 있고, 또 좌위(左衛)·우위(右衛)·중위(中衛)·전위(前衛)·후위(後衛)가 있었습니다.
성 서쪽의 승평교(昇平橋)에서 숙청문(肅淸門)·영은문(迎恩門)·징청문(澄淸門)·양무문(揚武門)·위진문(威振門)·사로문(四路門) 및 진사문(進士門) 등 팔좌(八座)로부터 고려시(高麗市) 사이에 민가는 번창하다고 할 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嘉興府)와 서로 겨룰 만하였습니다.
다만 가흥은 성 밖에까지 시가(市街)가 잇닿아 있었는데 요동의 성 밖은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았으며 해자(字) 길 가에는 흙먼지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성 동쪽에는 또 동녕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수산(首山)222 · 천산(千山)·목장산(木場山)·낙타산(協駝山)·태자산(太子山)·행화산(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 동쪽으로 빙둘러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툭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28th Day. Heavy rain.
Wu Hsi came again and said, “Today we were to pack the baggage and start, but it is raining hard; what shall we do?” I said, “It is hard for me, impatient as I am, to delay a moment. I alone am distressed by the rain. There has been a severe drought this year; it has not rained since the Second Month. Now that we are fortunate enough to get rain, men and all things are happy. If Heaven truly has done it, what can I say?” Wu Hsi said, “True, true.” XXX Liao-tung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and attached to China by T’ang Kao Tsung [r. 650-683]. Originally in the Five Dynasties period, it was held by the overlords of Po-hsieh.48 Later it was absorbed by Liao, Chin, and Barbarian Yuan. Inside the wall are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he Office of Surveillance [Ch’a-yüan],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the Local Office of the Imperial Stud, and the Inspectorate of Horses. 49 There are also Left, Right, Center, Forward, and Rear garrisons. From Sheng-p'ing Bridge west of the wall to Su-ch’ing, Ying-en, Ch’eng-ch'ing, Yang-wu, Wei-chen, and Ssu-lu gates; and between Chin-shih-men-pa-tso and Koreatown, the houses can be called dense. By standards south of the Yangtze, [the city] can be pitted against Chia-hsing Prefecture. But outside the wall of Chia-hsing Prefecture, villages stretch one after another; outside the wall of Liao-tung, neither the crowing of cocks nor the barking of dogs is to be heard. Along the Hai-tzu Road, there is nothing but great altars stretching like beads on a string. The wall of Tung-ning Garrison is built separately east of the city. Mt. Shou, Mt. Ch’ien; Mu-ch’ang, Lo-to, T'ai-tzu, and Hsing-hua mountains circle the city to the east, south, and west. To the north is a flat, endless plain. XXX
219. 요동은 넓게는 遼河의 以東 지방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좁은 의미의 遼東 즉 遼東都司가 위치한 遼陽을 가리킨다. 220. 唐의 제3대 황제(재위 649-683)로서 즉위 초기에 永徽律令과 律疏를 제정하고 《五經正義》를 반포 발행하여, 唐의 典章制度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655년 새로 則天武后를 황후로 맞아들인 뒤부터는, 武后에게 점차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다. 221. 渤海의 시조인 高王(재위 699-719) 大祚榮을 가리킨다. 696년 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88][89][90][91]과 말갈족을 이끌고 자립을 꾀하였다. 699년 지금 의 吉林省 敦化縣 지역인 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震, 연호를 天統이라 하였다. 이후 唐은 유화정책으로 나와 唐中宗이 705년 사신을 보내 왔고, 大祚榮도 아들 大武藝를 唐에 보냄으로써 답례하였다. 713년에 국호를 渤海로 바꾸었다. 222.《遼史》에 의하면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할 때 이곳에 주둔하고 石碑를 세워 戰功을 기록했다고 한다. 民國《遼陽縣志》 권2, 山川.
5월 29일
二十九日,自遼東登程,是日晴,吳鹽與千戶田福惜至驛,引臣等行,出驛城東門外,不一里,乃遼東城也,兩間有關王廟,行過兀良哈館、泰和門、安定門,至我朝鮮館,館前立(標)[標]1,扁畏天保國”四字,又過石河兒,入高麗洞,過大石門嶺、小石門嶺,兩嶺間有王都督墓,又過柳河
p.456 兒、湯河兒、頭巾站、狼子山,至顯得寨里而歇,里有三四家,乘昏,里人偷去臣之帽匣,匣中藏紗帽、囊佩及江南人所贈詩彙,程保告于璽,訊里人索之不得,鹽謂臣曰:“慢藏海盗,向誰给乎?”
요동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오새가 천호 전복(田福)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 등을 이끌고 출발하였습니다.
역성의 동문 밖으로 나와 채 1리도 되지 않는 곳이 요동성이었습니다.
두 성 사이에 관왕묘(關王廟)[92][93][94]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올량합관(元良哈館)[95]223. 태화문(泰和門) · 안정문(安定門)을 지나서 우리 조선관(朝鮮館)[96]224에 이르니, 조선관[97] 앞에 푯말을 세워 '외천보국(畏天保國)225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또 석하아(石河兒)를 지나서 고려동(高麗洞)[98][99]으로 들어와 대석문령(大石門嶺)과 소석문령(小石門嶺)을 지나니, 두영 사이에 왕(王) 도독(都督)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또 유하아(柳河兒)·탕하아(湯河兒)·두건참(頭巾站)·낭자산(狼子山)[100]을 지나서 현득채리(縣得寨里)에 이르러 쉬었는데, 마을에는 서너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황혼(黃昏)을 틈타 마을 사람이 신의 모자갑을 훔쳐 갔는데 모자갑 속에는 사모(紗帽)·낭패(囊佩)와 강남 사람이 지어준 시고(詩)가 들어있었습니다.
정보가 오새에게 알려서, 마을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오새가 신에게 말하기를,
“소홀히 간수하여 도적을 불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29th Day. Setting out from Liao-tung. This day was fair.
Wu Hsi and Chiliarch T’ien Fu came to the station and set out, leading us. Less than one li outside the east gate of the station wall was the wall of Liaotung. Kuan-wang Shrine was between the two walls. We passed Urianghai House, T’ai-ho Gate, and An-ting Gate and came to our Korea House. In front of the house stood a plaque with the (four) words, “Dread Heaven, Defend the State.” [We went from Shih-ho-erh to Hsien-te-chai Village, where we stopped.] There were three or four houses in the village. Under cover of dusk, villagers stole my hat box. I had packed light silk gauze hats, satchel pulls, and the manuscript of a poem presented to me by a man south of the Yangtze in the box. Chòng Po reported it to Wu Hsi, who questioned the villagers but did not get it. Wu Hsi said to me, “Carelessness in putting things away teaches others to steal. Who is at fault?”
223. 거쳐가는 元良哈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마련한 客館, 224. 조선 使臣을 접대하기 위한 客館으로 康熙《遼陽州志》권10, 〈驛站)에 舖遞의 항목으로 열거되어 있다. 《遼東志》의 〈遼東都司治衛山川地理之圖〉에 의하면 조선의 사신을 留宿시킨 懷遠館 즉 朝鮮館을 遼陽城 밖 동남방에 따로 지었다고 한다. 225. 畏天保國'이란 하늘을 두려워하며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지만, 여기서 '畏天'의 '天이란 결국 '天子'나 '天朝'의 뜻으로 즉 明朝를 가리킨다. 《春秋集義》에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畏天者, 保其國”이란 구절이 있다. 결국 '畏天保國'이란 네 글자를 朝鮮館 앞에 걸어 놓은 의미는 “明朝에 충실하게 事大를 함으로써 朝鮮을 잘 보존하도록 하라”는 암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월 1일
六月初一日,晴,日食,逾顯得嶺、青石嶺,二嶺間青石路,又過水河兒,西南望有黑山高險,橡子洞有塔寺,東南聯高嶺,嶺曬岩盤曲,過泰子河,至連山關,守關千戶黃文邀臣及吳璧、田福、房祥、張勇、沈榮,做飯以饋,福、祥、勇、榮及王升、馬牛忽、洪傑、吳洗、金清、周端等及百戶三十人、軍人二百餘人、館夫十人,皆遼東總兵官所差護送臣等者也,連山河而上,暮投白家莊民家,
현득령(顯得嶺)·청석령(靑石嶺)을 넘었는데 두 영 사이에는 청석(靑石)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또 첨수하아(括水河兒)를 지나서 서남쪽을 바라보니 높고 험준한 흑산(黑山)이 있었고, 상자동(豫子洞)에는 탑사(塔寺)가 있었습니다.
동남쪽으로 고령(高嶺)을 넘으니, 고개는 깎아지른 듯하고 바위는 꼬불꼬불하였습니다.
태자하(太子河)[103]를 지나서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니 관(關)을 지키는 천호 동문(董文)이 신과 오새·전복·방상(房祥)·장용(張勇)·심영(沈榮)을 맞이하여 밥을 지어 접대해 주었습니다.
전복·방상·장용·심영 및 왕승(王升)·마총(馬摠)·홍걸(洪傑)·오세(吳洗)·김청(金淸)·주단(周端) 등과 백호 30인, 군인 200여 인, 관부(館夫) 10인은 모두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의 명으로 신 등을 호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산하(連山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저녁에 백가장(百家莊)의 민가에 투숙하였습니다.
1st Day, Sixth Month. Fair. An eclipse of the sun.50
[From Hsien-te Range we came to Lien-shan Pass.] Tung Wen, the Pass Chiliarch, invited me, Wu Hsi, T’ien Fu, Fang Hsiang, Chang Yung, and Shen Jung [to join him). He had food prepared and served to us. Fu, Hsiang, Yung, and Jung; and Wang Sheng, Ma Tsung, Hung Chieh, Wu Hsi, Chin Ch’ing, and Chou Tuan, with thirty centurions, over two hundred soldiers, and ten porters from the inn, were men who had been commissioned by the Regional Commander of Liao-tung to escort us. We went up the Lien-shan River and at sundown stopped at people's houses at Pai-chia Village.
6월 2일
初二日,晴,朝至分水嶺,自嶺以北,地勢北下,豁豁諸水,俱會于泰子 河,西入于遼河,自嶺以南之水,俱會于八渡河,嶺之得名以此。至通遠堡,堡有新·舊城,龍宰山當其後,前有龍宰河,西南有德山,又其南有飯 山,一名簽北山,又過李海市,里人曰:“昨夜,千戶馬牛忽所管護送軍人,先到于此,有虎攬傷所乘馬,自昔無此患,故過此者,皆山行野宿,今適有之,亦可畏也。”過斜哨屯河,時水漲湍急暴下,軍人高福者蹉跌赴流,吳鑒適浴,見其溺而援之,至李勝屯.
맑았습니다.
아침에 분수령(分水嶺)[104][105][106]에 이르렀습니다.
분수령 이북은 지세가 북쪽으로 내려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太子河)로 모여서 서쪽으로 요하(遼河)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팔도하(八渡河)[107][108]로 모이니 '분수령'이란 고개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통원보(通遠堡)[109][110][111]에 이르니 통원보에는 신성(新城)과 구성(舊城)이 있었습니다.
용봉산(龍峯山)은 그 뒤에 있고, 앞에는 용봉하(龍峯河)가 있었으며, 서남쪽에는 덕산(德山)이 있었습니다.
또 그 남쪽에 증산(山)이 있었는데 일명 옹북산(瓷北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이해둔(李海屯)을 지나니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밤에 천호 마총이 관할하는 호송 군인들이 먼저 이곳에 도착했는데, 타고 온 말을 호랑이가 잡아채서 상처를 입혔습니다. 예로부터 이런 걱정은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산길을 걷고 들에서도 유숙했는데, 지금 마침 이런 일이 있으니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초둔하(斜哨屯河)를 지나는데 마침 물이 불어서 물살이 급하였습니다.
군인 고복이란 자가 미끄러져 넘어져서 떠내려갔는데, 오새가 마침 목욕하다가 빠진 것을 보고 건져주었습니다.
이승둔(李勝屯)에 이르렀습니다.
2nd Day. Fair.
[We went from Watershed Range to Li-hai-t’un, where] a villager said, “Last night escort soldiers commanded by Chiliarch Ma Tsung came here ahead of you. A tiger seized and wounded one of the horses they had been riding. We have not had that trouble since long ago; that is why everyone who passed here would walk in the mountains and sleep out of doors. Now that this has happened, there is reason to be afraid again.” We passed the Hsieh-shao-t’un River. The water was then a flooding torrent, racing violently downstream. Ko Pok, a soldier, slipped and fell into the stream. Wu Hsi happened to be bathing and saw him drowning and rescued him. We came to Li-sheng-t’un.
6월 3일
初三日,晴,過斜哨大嶺,至八渡河,以其八渡其水故名,或謂之半塗河,以其自我 朝鮮京城,至中國北京,此河正在其中界兩半故名,又過長嶺兒、薛里站、白言嶺、奴哥秀、奴哥河兒、奴哥嶺、干河兒,至鳳凰山,東寧衛方才撥軍夫,築城于此,吳鑒謂臣曰:“此城乃為貴國使臣往來,防道梗而築也。”過開州城、王斌吉塔里、餘溫者介河兒,至寬得洛谷,露宿焉,谷之東有海青山,又名松鶴山,
맑았습니다.
사초대령(斜哨大嶺)을 지나서 팔도하에 이르렀는데 강물을 여덟 번 건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습니다.
반도하(半塗河)[112]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 조선의 경성(京城)으로부터 중국의 북경에 이르자면 이 강이 바로 그 중간의 절반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또 장령아(長嶺兒)· 설리참(薛里站)·백언령(白言嶺)·노가독(奴哥)·노가하아(奴哥河兒)·노가령(奴哥嶺)·간하아(干河兒)를 지나서 봉황산(鳳凰山)[113]에 이르니, 동녕위(東寧衛)에서 이제 막 군부(軍夫)를 뽑아 이곳에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114]
- 봉황성: http://www.palhae.org/sogilsu/travel/cholli-12.htm
- 건주여진정벌(建州女眞征伐)
- 건주삼위
- 여진족을 둘러싼 명과 조선의 각축[115]
오새(吳__)226가 신에게 말하기를,
- 이만주의 아들 귀순[116]
“이 성은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길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개주성(開州城)·왕빈길탑리(王法吉塔里) · 여온자개하아(餘溫者介河兒)을 지나서 관득락곡(寬得洛谷)에 이르러 노숙하였습니다.
관득락곡의 동쪽에 해청산(海靑山)[117]이 있었는데, '송골산(松巖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3rd Day. Fair.
We passed Hsieh-shao Great Range and came to Eight Crossings River, which was named for its eight ferries. Some called it Halfway River. It was so named because it was exactly halfway between Ching-ch'eng [Seoul] of our Korea and Peking of China. We passed [several places] and came to Fenghuang-shan-tung-ning Garrison. Military laborers had been sent out and were just then building a wall there. Wu Hsi said to me, “That wall is being built to protect the road along which envoys from your country pass.”?51 [We went from K’ai-chou Wall to Hai-ch’ing Mountain.]
226. 吳璽는 4년 후에 鳳凰城을 수비하는 鎭撫로 승진하였음이 확인된다. 《朝鮮成宗實錄》 23년 5월 乙酉.
6월 4일
初四日,渡鴨綠江,是日晴,清晨,過湯山站、名不記二小河,至九連城。城額只有土築舊址,又謂婆婆堡,堡前有江,即楓浦也,又舟渡吾夜江,二江同源而分,復合為一,通謂之狄江,又舟渡鴨綠江,牧遣軍官尹遷善,慰臣于江邊,薄暮,又舟渡難子江,二江亦以一而分,下又合流,夜三更,馳入義州城,城正當唐人、野人等往來之衝,城之制,狹小顏殘,城中里開零落,良可恨也。
自牛頭外洋至桃诸所一百六十餘里,自桃诸所至寧海縣四百餘里間,俱是沿海僻地地,無館驛,到越溪巡檢司,始有鋪,到寧海縣,始見白崎驛,自白崎過西店、連山、四明、車廠、姚江、曹娥、東關、蓬萊、錢清、西興,至杭州府武林驛,自桃诸所至此一千五百有餘里也。又自武林過吳山、長安、__林、西水、平望、松陵、姑蘇、錫山、毗陵、雲陽,至鎮江府
p.458 京口驛,自杭州至此一千有餘里也,過楊子江,至揚州府廣陵驛,自此以後, 路分水陸,水路則有邵伯、孟城、界首、安平、淮陰、清口、桃源、古城、鍾吾、直河、下邳、新安、房村、彭城、夾溝、泗亭、沙河、魯橋、南城、開河、安山、荊門、崇武、清陽、清源、渡口、甲馬營、梁家莊、安德、良店、連窩、新橋、磚河、乾寧、流河、奉新、楊青、楊村、河西、和合,至通州潞河水馬驛,自楊州至此共三千三百有餘里也,陸路則有大柳、池河、紅心豪、梁王莊、固鎮、大店、睢陽、夾濟、桃山、黃澤、利國、膝陽、界河、城、昌平、新嘉、新橋、東原舊縣、銅城、淮山、魚丘、天平、安德、東光、阜城、樂城、瀛 海、鄂城、歸義、汾水、涿鹿,至固節驛,自楊州至此二千五百有餘里也,水有紅船,陸有鋪馬,凡往來使命、貢獻、商賈,皆由水路,若或因旱乾,開河水淺,不能通船,或有火馳星報之事,則由陸路,盖楊州府近南京,只隔三驛,且閱湖以南,皆路經此府,以達 皇都,故驛路甚大,陸購相距,或六十里,或七八十里,水驛則自武林至兴山三十里,自潞河至會同館四十里,皆水路中之陸路,故相距近,其他則或六七十里、八九十里,或過百里,相距甚遠,鋪之相距,或十里,或二三十里,自楊州後,水邊又設淺,或六七里,或十餘里,以記里,臣所經自牛頭外洋至桃诸所,至杭州,至北京會同館,大哭共六千有餘里,自會同館,過潞河、夏店、公樂、漁陽、陽樊、永濟、義豐、七家镇、灣河、盧峯口、榆關、遷安、高嶺、沙 河、東關、曹家莊、連山島、杏兒、小凌河、十三山、間陽、廣寧、高平、沙嶺、牛家莊、海州在城、鞍山、遼陽等驟,至遼東城,遼陽即遼東 在城驛,驛相距,或三四十里,或五六十里,共千七百有餘里,山海關以內,十里置煙臺,以備烽火,過關後,又間五里置小墩,立標以記里,自遼東,過頭官、__水、通遠堡、斜里、開州、湯站等站,至鴨綠江,又三百有餘里,山海關以東,又築長墙,置堡子,以防野人,瞬遞皆有城,與防禦所一般,又不設府州縣,置衛所,雖若驛遞之官,皆以軍職填之,臣又傳聞,自三叉河,又有一路,過海州衛、西木城、矫岸城、驚拿河屯、牢房林子屯、獨塔里屯、林江河、蒲蘆葫屯,至鴨綠江,僅二百餘里,亦是中大路,路左有舊城基,廢為安市里,證傳拒唐兵處,大明洪武間,又築長墙以禦胡,頭接秦長城東而來,三叉河以西不可詳也,以東則北過長靜、長寧、長安、長勝、長勇、長營、靜遠、上榆林、十方寺等堡,又東過平洛泊堡,至(潘)【潘】陽城,又北過蒲河、懿路縣、凡河、鐵嶺衛、腰站等城,至開原城,又過東撫順所城,南至東州、馬跟單、清河、鹹場、靈陽、十叉口等堡,至鴨綠江,凡數千餘里,回抱定遼左二十五衛巡城,亦有路云云,然未可的知。
奉化縣以南並海濱,多高山峻嶺,奇岩亂石,溪澗榮繞,花卉明媚,大江以南,地多塗泥波滞,然天台、四明、會稽、天目、天平諸山,錯綜橫巨乎其間,淮河以南,地多湖浸泥淖沮,以北則地多墳起,漕河跟岸,高於平地,決圈流移,水陸變遷,濟寧州之北,有分水廟,自願以南,水勢皆.
p.460 南下,以北則皆北下,武城縣以北,地多泥沙,若長蘆等處,斥鹵多鹹,即《禹貢》海濱廣斥之地,天津衛以北,水勢又皆南下,通至張家灣,平沙無際,隨風流轉,至北京則天壽等諸山,環拱于北,其西支則通連大行、王屋諸山,以達于河南之境,其東支則東走過三河、蓟州,至玉田縣之北為燕山,又東過豐潤縣,至榛子鎮,又分為二支,其南支則東過藻州昌黎縣,至碣石山,直抵于海,其北支則通連燕山之脉,東過遷安、永平,至撫寧之東,直抵于山海關,關外又蜿蜒而東,至廣寧衛之西北為醫巫闊山,自北京以至于此,山皆童不毛,其間,大江以北,大行以東,燕山·醫巫圖以南數千里間,四野平衍,東通大海,延入于廣寧之東、海州衛之西、遼東之北為大野,即所謂鶴野也,海州衛之東,始有鞍山紫紅,而南為千山,自此以後,幫宰疊嶂,如列戟圍屏,東南抵于鴨綠江,東入野人之境,遼東之南,有分水嶺,自嶺以北,則水勢皆北下,以南則皆南下,石門嶺以南,山多林木茂密,潤水澄碧,自北京以至鴨綠江,其間名為河者,都是小川,皆雨漲旱乾,唯藻河、三叉河為大,其次若白河、大·小凌河、泰子、八渡等河也,大江以南,地多軟石,陸則皆璧石鋪路,或橫截渴淖,跨上山脊,如寧海、奉化縣等處為多,水則皆鍊石建虹門橋,築堤捍江湖,如吳江縣等處為多,淮河以北,一無石橋,或有造舟為浮橋,或有略設木橋者,陸路則沙塵漲天,自連山關以後,鳥道如線,荒草合,蚊虻撲面,行者甚苦,自淮河以南,地多水田沃饒,稻梁為暖,徐州以北無水田,遼東以東,天又晚懷早寒,五穀不盛,惟泰生之,在昔江湖福建以南漕運,皆會于大江,浮于海,達于潞河,以至于北京,胡元順帝時,始鑿運河,築堤置閘,以通漕轉,至我永樂間,決黃河,注于准,導衛河,通于白河,大加修築,水瀉則置堰壩以防之,水淤則置堤塘以捍之,水淺則置閘以貯之,水急則置洪以逆之,水會則置嘴以分之,壩之制,限二水內外兩傍,石築作堰,堰之上植二石柱,柱上橫木如門,橫木鑿一大孔,又植木柱當横木之孔,可以輪迴之,柱間盤亂孔,又劈竹為繪纏結於木柱,以短木爭植亂孔以辰之,乾舟而上,上壩逆難,下壩順而易,聞之制,兩岸築石堤,中可容過一船,又以廣板塞其流以貯水,板之多少,隨水淺深,又設木橋於堤上,以通人往來,又植二柱於木橋兩傍,如壩之制,船至則撤其橋,以索繫之柱,勾上廣板通其流,然後木奢丹以過,過復塞之,洪之制,兩岸亦築石堰,堰上治手牽路,亦用竹系覽以逆挽之,挽一船,人獎則百餘人,牛則十餘頭,若若若洪,皆有官員,聚人契牛隻以待船,至堤塘與嘴皆石築,亦或有木栅者,浙江鎮守差楊旺,送臣等于皇都,限在四月初一日,故楊旺率臣等督行畫夜,順風則懸机,逆風則木舟,水淺則撑舟,水深則掉舟,驛支口糧,遞運所換船,凡使命及貢獻往來皆然,
大抵百里之間,尚且風殊俗異,况乎天下風俗,不可以一躯論之,然其大柴以楊子一江分南北而觀,其人煙盛衰,則江以南諸府城縣衛之中,繁華壯麗,言不可悉,至若鎮、若巡檢司、若千戶所、若寒、若驛、若鋪、若里、若壩所在附近,或三四里,或七八里,或十餘里,多或至二十餘里間,闇闇撲地,市肆夾路,樓臺相望,軸髓接纜,珠玉·金銀·寶貝之產、稻梁·鹽鐵·魚蟹之富、羔羊·鵝鴨·雞豚·聽牛之畜、松拿·藤棕·龍眼·荔枝·橘柚之物甲于天下,古人以江南為佳麗地者以此,江以北若楊州、淮安及淮河以北若徐州、濟寧、臨清,繁華豐阜,無異江南,臨清為尤
p. 462 盛,其他若官府所治之城,則亦間有富盛繁夥者,若鎮、若寒、若驛、若鋪、若里、若集、若嘴、若廠、若灣、若鳩、若蘭、若壩、若遷之間,人煙不甚繁盛,里開蕭條,通州以東,人煙漸少,過山海關行百里,僅得一里社,不過二三草屋,唯羔羊雞豬聽駱牛馬之畜,籠絡原野,楊柳桑案之樹,茂騎交柯,八道河以南,荒曠無人居,其弟宅,則江南,盖以一瓦,鋪以颠,階砌皆用鍊石,亦或有建石柱者,皆宏壮華麗,江北,草屋矮小者,殆居其半.其服飾,則江南人皆穿寬大黑糯榜,做以綾羅、網網、匹段者多,或戴羊毛帽、黑匹段帽、馬尾帽,或以巾帕裏頭,或無角黑中、有角黑中,官人紗帽,喪者白布巾,或麗布巾,或着難,或着皮鞋、革翁輕、芒簇,又有以巾子纏脚,以代護者,婦女所服皆左,首飾,則寧波府以南,圓而長而大,其端中約華飾,以北,圓而銳,如牛角然,或戴觀音冠,飾以金玉,照耀人目,雖白髮老姻,皆垂耳環,江北服飾,大樂與江南一般,但江北好着短窄白衣,資遺懸翡者,十居三四,婦女首飾,亦圓而尖,如雞喙然,自滄洲以北,女服之,或左或右,至通州以後,皆右,山海關以東,其人皆麗,衣冠系藍縷,海州、遼東等處人,半是中國,半是我國,半是女真,石門嶺以南,至鴨綠江,都是我國人移住者,其冠裳語音及女首飾,類與我國同,人心、風俗,則江南和順,或兄弟、堂兄弟·再從兄弟,有同居一屋,自吳江縣以北,間有父子異居者,人皆非之,無男女老少,皆踞繩床交椅,以事其事.江北人心强悍,至山東以北,一家不相保,關國之聲,戲開不絕,或多有劫盗殺人,山海關以東,其人性行尤暴悍,大有胡狄之風,且江南人以讀書為業,雖里閉童稚及津夫、水夫,皆識文字,臣至其地,寫以問之,則凡山川、古蹟、土地、沿革,皆曉解詳告之,江北則不學者多,故臣欲問之,則皆曰:“我不識字,就是無識人也,且江南人業水虞,乘飛艋,載答奢,以單單简算取魚者千百爲墓,江北則唯濟寧府南旺湖等處外,不見捕魚之具,且江南婦女,皆不出門庭,或登朱樓,捲珠簾以觀望耳,無行路服役於外,江北則若治田掉舟等事,皆自服勞,至如徐州、臨清等地,華粧自籌,要價資生以成風,且江南人號為官員者,或親執役,為卒徒者,或踞胡床,冠帶無章,尊卑無位,似若殊無禮節,然在官衙,則威儀整肅,在軍中,則號令嚴切,正伍循次,無敢喧嚣,一出令時,聞一鋅聲,遠近雲集,莫或有後,江北亦然,但山東以北,凡出合,非鞭不能整之,且江南戎器,則有缩、劍、矛、乾,其甲、胃、桶等物,皆火書勇字,然無弓箭戰馬,江北始有帶弓箭者,通州以東及遼東等地,人皆以馬為業,然箭竿以木為之,且江南好治容,男女皆帶鏡盒、梳、宽、刷牙等物,江北亦然,但不見帶之者,江南市中使金銀,江北用銅錢,江南市兒以錫約臂,江北以鉛穿鼻,江南力農工商賈,江北多有遊食之徒,江南陸路行用轎,江北或馬或臆,江南無良馬,江北馬大如龍,江南人死,巨家大族,或立廟族門者有之,常人略用棺不理,委之水傍,如紹興府城邊,白骨成堆,江北如楊州等地,起墳坐或於江邊、或田畔里開之中,江南喪者、個人或食肉不食董,江北則皆血食茹董,此江南、江北之所以異也,其所同者,尚鬼神,崇道佛,言必搖手,怒必麼口唾沫,飲食鹿糖,
p.464 同卓同器,輪以食,蠟蟲必咀嚼,砧杵皆用石,運磨使聽牛,市店建帝(標)(標],行者擔而不負戴,人皆以商賈為業,雖達官巨家,或親袖稱鍾,分析貓蛛之利,官府]常刑,如竹片決杖、續指、「擔石之屬,其他若山川形勝、臺樹古蹟有膽灸人口者,雖盡毛穎,不能悉記,而臣之歷覽,千載難又,然在衰經之中,不敢觀望遊賞,採取勝釀,令陪史四人逐日觀標榜,問地方,掛一漏萬,記其大略耳.
압록강[118]을 건넜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이른 새벽에 탕산참(邊山站)[119]과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두개의 작은 강을 지나서 구련성(九連城)[120][121]에 이르렀습니다.
성은 무너져버리고 흙으로 쌓은 옛 성터만 남아 있었는데 파사보(婆婆堡)라고도 하였습니다.
파사보 앞에 강이 있었으니 풍포(楓浦)였습니다.
다시 배로 오야강(吾夜江)을 건넜습니다.
두 강이 연원은 같으면서 나누어졌다가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었는데 통칭 '적강(狄江)'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배로 압록강을 건너니 목사(牧使)가 군관(軍官) 윤천선(尹遷善)을 보내어 신을 강가에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황혼에 또 배로 난자강(難子江)을 건넜는데 두 강 또한 연원은 하나로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합류한 것이었습니다.
밤 3경에 말을 달려 의주성(義州城)으로 들어가니 의주성은 바로 당인(唐人)과 야인(野人)228 등이 왕래하는 요충에 해당하였습니다.
성의 규모는 협소하고 퇴락했으며 성 안 민가도 보잘 것 없었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挑者所)까지는 160여 리, 도저소에서 영해현(寧海縣)까지는 400여 리인데 모두 바닷가 외진 땅이므로 객관(客館)과 역사(驛舍)가 없었습니다.
월계순검사(越溪巡檢司)에 도착하니 비로소 포(鋪)가 있었고, 영해현에 도착하니 비로소 백교역(白崎驛)이 보였습니다.
백교역에서 서점(西宮)·연산(連山)·사명(四明)·거구(車)·요강(姚江)·조아(曹娥)·동관(東關)·봉래(蓬萊)·전청(錢淸)·서흥(西興)을 거쳐 항주부(杭州府)의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는데, 도저소에서 이곳까지는 1천5백여 리였습니다.
또 무림역에서 오산(吳山)·장안(長安)·조림(自林)·서수(西水)·평망(平望) · 송릉(松陵)·고소(姑蘇)·석산(錫山)·비릉(此陵)·운양(雲陽)을 거쳐 진강부(鎭江府)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렀는데, 항주에서 이곳까지는 천여 리였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양주부(揚州府)의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수로와 육로로 나뉘어졌습니다.
수로는 소백(邵伯)·우성(孟城)·계수(界首) · 안평(安平)·회음(淮陰)·청구(淸口)·도원(桃源)·고성(古城)·종오(鍾吾)·직하(直河)·하비(下邪)·신안(新安)·방촌(房村)·팽성(彭城)·협구(夾溝)·사정(泗亭)·사하(沙河)·노교(魯橋)· 남성(南城)·개하(開河)·안산(安山)·형문(前門)·숭무(崇武)·청양(淸陽)·청원(淸源)·도구(渡口)·갑마영(甲馬營)· 양가장(梁家莊)·안덕(安德)·양점(良店) · 연와(連)·신교(新橋)·전하(傳 河)·건녕(乾寧)·유하(流河)·봉신(奉)·양청(楊靑)·양촌(楊村)·하서(河西)·화합(和合)을 거쳐서 통주(通州)의 노하수마역(路河水馬驛)에 이르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합계 3천3백여 리였습니다.
육로는 대류(大柳)·지하(池河)·홍심(紅心)·호양(濠梁)·왕장(王莊)·고진(固鎭)·대점(大店)·수양(雕陽)·협기(夾기)·도산(桃山)·황택(黃澤)·이국(利國)·등양(勝陽)·계하(界河)·주성(都城)·창평(昌平)·신가(嘉)·신교(新橋)·동원(東原)·구현(舊縣) · 동성(銅城)·임산(産山)·어구(魚丘)·태평(太平)·안덕(安德)·동광(東光)·부성(阜城)·낙성(樂城)·영해(爐海)·근성(근城)·귀의(歸義)·분수(가水)·탁록(鹿)을 거쳐서 고절역(固節驛)에 이르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2천5백여 리였습니다.
수로에는 홍선(紅船)229이 있고 육로에는 포마(鋪馬)230가 있었습니다.
왕래하는 사자(使者)·공헌(貢獻)·상고(商賈)들은 모두 수로를 이용하였습니다.
만약 가뭄으로 인하여 갑하(開河)의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할 수 없거나 빨리 달려가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으면 육로를 이용하였습니다.
양주부는 남경과 가까워 단지 세 역(驛) 정도만큼 떨어진 거리였고, 또 복건과 절강 이남 지방에서 모두 이 부(府)를 경유하여 황도(皇都)에 갔기 때문에 역로(驛路)가 매우 넓었습니다.
육로의 역은 그 사이의 거리가 60리 혹은 70-80리 정도 되었습니다.
수로의 역은 무림(武林)에서 오산(吳山)까지 30리, 노하(路河)에서 회동관(會同館)까지 40리였는데, 모두 수로 중의 육로였던 까닭에 그 사이가 가까웠습니다.
그 외에는 60-70리, 80-90리, 혹은 100리가 넘기도 하여 그 사이가 매우 멀었습니다.
포(鋪) 사이의 거리는 10리, 혹은 20-30리였습니다.
양주 이후로는, 물가에 천(淺)을 6-7리, 혹은 10리마다 설치하여 이수(里數)를 기록하였습니다.
신의 경로는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 항주로 해서 북경의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렀으니 대개 합계 6천여 리였습니다.
회동관에서 노하(路河)·하점(夏店)·공락(公樂) · 어양(漁陽)·양번(陽樊)·영제(永濟)·의풍(義豊)·칠가령(七家嶺)·만하(灣河)·노봉구(盧峯口)·유관(關)·천안(遷安) ·고령(高嶺) 사하(沙河)·동관(東關)·조가장(曹家莊)·연산도(連山島)·행아(杏兒)·소릉하(小凌河)·십삼산(十三山) · 여양(固陽)·광녕(廣寧)·고평(高平)·사령(沙嶺)·우가장(牛家莊)·해주재성(海州在城)·안산(鞍山)·요양(遼陽) 등 역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렀는데 요양역, 곧 요동재성역(遼東在城驛)이었습니다.
역 사이의 거리가 30~40리, 혹은 50~60리였는데 합계 1천7백여 리였습니다.
산해관에서 안쪽은 10리마다 연대(燃臺)232를 설치하여 봉화(陰火)를 갖추어 놓았고 산해관을 지난 후에는 5리 간격으로 작은 돈대(數臺)233를 설치하여 푯말을 세워서 이수(里數)를 기록하였습니다.
요동에서 두관(頭官)·첨수(話水)·통원보(通遠堡)·사리(斜里)·개주(開州)·탕참(湯站) 등 여러 참(站)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또 300여 리였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또 긴 원장(垣墻)을 쌓고 보자(堡子)를 설치하여 야인(野人)을 방비하였습니다.
역체(驛遞)에는 모두 성이 있었으니 방어소(防禦所)와 같았습니다.
또 부(府)·주(州)·현(縣)을 두지 않고 위소(衛所)를 설치하여 역체의 관원 같은 것도 모두 군직(軍職)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신이 또 전해 듣건대, 삼차하(三叉河)에서부터 또 한 길이 있어 해주위(海州衛)·서목성(西木城)·수안성(鎬岸城)·앵나하둔(篇拿河屯)·뇌방림자둔(牢房林子屯)·독탑리둔(獨塔里屯)·임강하둔(林江河屯)·포로호둔(蒲蘆屯)을 거쳐서 압록강에 이르는데 겨우 200리로서 중대로(中大路)라 합니다.
길 왼편에 옛 성터가 있어 황폐하여 안시리(安市里)가 되었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당 나라 군사를 막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또 긴 원장을 쌓아 오랑캐를 방어했는데 머리 쪽이 진 나라 장성(長城)에 닿아 동쪽으로 나왔습니다.
삼차하에서 서쪽은 상세히 알 수 없지만 동쪽은 북으로 장정(長靜)·장녕(長寧)·장안(長安)·장승(長勝)·장용(長勇)·장영(長營)·정원(靜遠)·상유림(上林) · 시방사(十方寺) 등 보(堡)를 지나고, 또 동으로 평락박보(平洛泊堡)를 거쳐서 심양성(瀋陽城)에 이르고, 또 북으로 포하(蒲河)·의로현(路縣)·범하(凡河)·철령위(鐵嶺衛)·요참(腰站) 등의 성을 지나서 개원성(開原城)에 이르고, 또 동쪽 무순소성(撫順所城)을 지나서 남으로 동주(東州) 마근단(馬跟單)·청하(淸河)·함장(誠場)·애양(駿陽)·십차구(十口) 등 보를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수천 리입니다.
정요좌(定遼左)235 25위(衛)의 돌아서 포진하고 있는 성(城)을 빙 둘러서 또 길이 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봉화현(奉化縣)에서 남쪽은 모두 해변으로 고산준령과 기암괴석이 많고 시내가 빙 둘러 있으며 화훼(花軒)가 아름다웠습니다.
대강(大江)에서 남쪽은 습지와 호수가 많았지만 천태산(天台山)·사명산(四明山)·회계산(會稽山)·천목산(天目山)·천평산(天平山) 등 여러 산들이 그 사이에서 서로 얽혀서 가로 뻗어 있었습니다.
회하(淮河)에서 남쪽은 호수, 진흙, 습지가 많았고 북쪽은 솟아 오른 땅이 많았습니다.
운하의 방죽이 평지보다 높았으므로 언덕이 터져 물이 흘러내리면 수로와 육지의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제녕주(濟寧州)의 북쪽에 분수묘(分水廟)가 있었는데, 분수묘에서 남쪽은 물이 모두 남쪽으로 흐르고 북쪽은 모두 북쪽으로 흘렀습니다.
무성현(武城縣)에서 북쪽은 진흙이 많았고 장로(長蘆) 등지와 같은 곳은 개펄로서 염분이 많았으므로, <우공)에서 이른바 '해변은 넓고도 소금기가 많다236고 한 땅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천진위(天津衛)에서 북쪽은 물이 또 모두 남쪽으로 흘러 장가만(張家灣)에 이르는데 평평한 모래톱이 끝이 없어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북경에 이르니 천수산(天壽山) 등 여러 산들이 북쪽에서 빙 둘러 있었으며, 그 서쪽 지산(支山)은 태항산(太行山)·왕옥산(王屋山) 등 여러 산에 이어져 하남(河南)의 경계에 도달하고, 그 동쪽 지산은 동쪽으로 달려서 삼하(三河), 계주(州)를 거쳐 옥전(玉田縣)의 북쪽에 이르러 연산(燕山)이 되고, 또 동쪽으로 풍윤현(豊潤縣)을 거쳐 진자진(榛子鎭)에 이르러 다시 두 지산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남쪽 지산은 동쪽으로 난주(漢州)와 창려현(昌黎縣)을 지나서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로 바다에 도달하고, 그 북쪽 지산은 연산의 산맥으로 죽 이어져 동쪽으로 천안(遷安), 영평(永平)을 거쳐서 무령(撫寧)의 동쪽에 이르러 바로 산해관에 도달했으며, 산해관 밖에서 또 산맥이 길게 연하여 동쪽으로 광녕위(廣寧衛)의 서북쪽에 이르러 의무려산(醫巫山)이 되었습니다.
북경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산들이 모두 민둥민둥하여 초목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의 대강(大江)에서 북쪽, 태항산에서 동쪽, 연산, 의무려산에서 남쪽의 수천 리 사이는 사방의 들이 평탄하고 넓었습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통하고 광녕(廣寧)의 동쪽과 해주위(海州衛)의 서쪽과 요동의 북쪽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서 큰 들판이 되었으니 곧 이른바 학야(鶴野)란 곳입니다.
해주위의 동쪽에 비로소 안산(鞍山)이 얽혀 있고 남쪽이 천산(千山)이었습니다.
이 뒤부터는 중첩된 산봉우리들이 마치 죽 벌여 놓은 선창과 둘러 친 병풍 같았는데 동남쪽으로 압록강에 도달하고, 동쪽으로 야인(野人)의 땅으로 뻗어 들어갔습니다.
요동의 남쪽에 분수령(分水嶺)이 있으니, 분수령에서 북쪽은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르고 남쪽은 모두 남쪽으로 흘렀습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은 산에 삼림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맑았습니다.
북경에서 압록강까지는 그 사이에 명색이 강이지만 모두 작은 내였으므로 비가 오면 물이 불었다가 가물면 말라버렸는데, 난하(溪河)와 삼차하(三河)만이 크고 그 다음이 백하(白河)·대릉하(大凌河)·소릉하(小凌河)·태자하(太子河)·팔도하(八渡河) 등의 강이었습니다.
대강에서 남쪽은 연한 돌이 많아 육로는 모두 돌을 캐서 길에 깔았는데, 진흙길을 가로지르거나 산등성이에 걸쳐 오르기도 했는데 영해현(寧海縣), 봉화현(奉化縣) 등지에 많았습니다.
수로는 모두 돌을 다듬어 홍문교(虹門橋)를 세우고 제방을 쌓아 강과 호수를 막았는데 오강현(吳江縣) 등지에 많았습니다.
회하(河)에서 북쪽은 돌다리 하나 없었는데 배로 부교(浮橋)를 놓기도 하고 나무다리를 대강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육로는 모래 섞인 먼지가 공중에 가득하였습니다.
연산관(連山關) 이후부터는 조도(鳥道)가 실과 같았으며, 거친 풀이 사방에 우거지고 모기가 얼굴을 물어뜯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습니다.
회하에서 남쪽은 대부분 비옥한 수전(水田)이어서 벼와 메조가 흔하였습니다. 서주(徐州)에서 북쪽은 수전이 없었으며, 요동에서 동쪽은 기후가 또 더디게 따뜻해지고 일찍 추워지므로 오곡은 잘 자라지 못하고 기장만 날뿐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강소(江蘇)·절강(浙江) ·복건(福建)의 이남에서 조운(遭運) 할 적에는 모두 대강으로 모여들어 바다로 나가 노하(路河)에 도달한 뒤 북경에 이르렀는데, 원(元) 나라의 순제(順帝) 238 때에 와서 비로소 운하(運河)를 파서 제방을 쌓고 갑문을 설치하여 조운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239 우리 영락(永樂) 연간에 이르러 황하(黃河)를 터서 회하로 끌어대고, 위하(衛河)를 이끌어 백하(白河)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240
크게 수축(修築)을 가해서 쏟아지는 물은 보[]와 방죽을 설치하여 막고, 진흙이 가라앉은 물은 제방을 쌓아 막고, 물이 얕으면 갑문을 설치하여 저장하고, 물이 급히 내려가면 홍(洪)을 설치하여 늦추고, 물이 모이면 귀때를 설치하여 나누었습니다.
방죽 제도는 두 물의 안팎 양옆으로 돌로 쌓아 보[]를 만들고 그 보의 위에 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는데, 돌기둥 위에 문처럼 나무를 가로지른 뒤, 그 가로지른 나무에 한 개의 큰 구멍을 뚫고, 또 나무기둥을 세워 가로지른 나무의 구멍에 맞춰서 수레바퀴처럼 돌도록 하고, 기둥 사이에 여기 저기 구멍을 뚫고 또 대나무를 쪼개 새끼를 만들어서 배를 얽어 나무기둥에 매고는 짤막한 나무를 여기 저기 있는 구멍에 끼워서 이를 고정시키고 배를 당겨 올립니다.
방죽 위로 올리는 것은 역류여서 어렵고 방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순류여서 쉬웠습니다.
갑문 제도는 양 언덕에 돌 제방을 쌓고 가운데는 배 한 척이 지나갈 만하게 하고 또 넓은 판자로 그 흐름을 막아서 물을 모아 두는데, 판자의 많고 적음은 물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하였습니다.
또 나무다리를 제방 위에 설치하여 사람들이 오고가게 하고, 다시 두개의 기둥을 나무다리의 양옆에 세우기를 방죽 제도와 같이하여, 배가 이르면 그 다리를 치우고는 새끼로 기둥에 매고 넓은 판자를 당겨 올려서 그 흐름을 통하게 한 후에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고, 배가 지나가면 이를 다시 막았습니다.
홍(洪)의 제도도 양 언덕에 돌로 보堰]를 쌓고, 그 보 위에 배를 끌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나무로 만든 닻줄을 사용하여 이를 거슬러 당기니, 한 척의 배를 당기는 데 인부는 100여 명이 들고 소는 10여 마리 들었으며, 방죽·갑문 · 홍에 모두 관원이 있어 인부와 소를 모아놓고 배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방과 귀때 모두 돌로 쌓았는데 더러 목책(木)인 것도 있었습니다.
절강진수(浙江鎭守)가 양왕(楊표)을 시켜서 신 등을 황도(皇都)로 호송케 하였습니다. 기한이 4월 초1일이었기 때문에 양왕은 신 등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독촉하여 가는데, 바람이 순풍이면 돛을 달고 바람이 역풍이면 배를 당겼으며, 물이 얕으면 상앗대를 쓰고 물이 깊으면 노로 저었습니다.
역에서는 식량을 지급하고 체운소에서는 배를 바꾸어 주었으니, 사자(使者)와 공헌(貢獻)이 왕래할 적에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대개 백 리의 사이에서도 오히려 풍속이 다른 법인데 하물며 천하의 풍속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략 양자강으로 남북을 나누어 본다면 그 인가의 성쇠는 강남 여러 부·성(府城)과 현·위(縣衛)의 번화· 웅장·화려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진(鎭)·순검사(巡檢司)·천호소(千戶所)·채(寨) 241. 역(驛)·포(鋪)·리(里)·파(廟) 등의 소재지 부근에 3-4리, 7-8리, 10여 리, 혹 20여 리 사이에 여염(周潤)이 가득하고 상점이 즐비했으며, 누대(樓臺)는 서로 바라다 보이고 배는 죽 이어져 있었습니다.
주옥 금은보화의 산출과 도량(稻梁)· 염철(鹽鐵) · 어해(魚蟹)의 풍부함과 염소 · 양 · 거위 ·오리·닭·돼지·당나귀·소의 축산과 송황(松掌)·등종(藤綜)·용안(龍眼)·여지(枝)·귤유(橘袖)의 물산은 천하의 으뜸이었습니다.
옛날 사람이 강남을 살기 좋은 아름다운 땅으로 보았던 것은 이때문이었습니다.
강북의 양주(楊州), 회안(淮安) 같은 곳과 회하에서 북쪽 의 서주(徐州), 제령(濟寧), 임청(臨淸) 같은 곳은 번화하고 풍부하기가 강남과 다를 바 없었는데 임청이 특히 번화하였습니다.
그 외에 관부(官府)의 소재지 또한 간혹 번성한 곳이 있었습니다.
진(鎭)·채(寨) · 역(驛)·포(鋪)·__(里)·집(集)·취(嘴)·창(r)·만(灣)·오(烏)·파(歸)·갑(間)·천(遷)같은 곳에는 인가가 그다지 번성하지 않고 마을도 쓸쓸하였습니다.
통주(通州)에서 동쪽은 인가가 점점 적어져서 산해관을 지나 100리를 가니 겨우 마을 하나가 있었으나 초가집 두세 채에 지나지 않았으며, 양·염소·닭·돼지 · 노새·낙타·소·말 등의 가축이 들판에 널려 있고 미류·버들·뽕· 대추나무가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팔도하(八渡河)에서 남쪽은 거칠고 텅 비어서 인가가 없었습니다.
주택은 강남은 기와를 얹고 벽돌을 깔고 계단은 모두 다듬은 돌을 쓰는데 돌기둥을 세우기도 하여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습니다.
강북은 조그마한 초가가 거의 절반이었습니다.
복식은 강남 사람들은 모두 넓고 큰 검은 속옷과 바지를 입었는데 능라(綾羅)·견초(絹)·필단(匹殺)으로 지은 옷이 많았습니다.
양모모(羊毛帽)· 흑필단모(黑匹殺帽)·마미모(馬尾帽)를 쓰기도 하고, 두건과 머리띠로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귀가 없는 흑건(黑巾)이나 귀가 있는 흑건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관인은 사모(紗帽)를 쓰고 상인(喪人)은 백포건(白布巾)이나 추포건(麗布市)을 씁니다.
가죽신을 신기도 하고 솜을 넣은 장화와 짚신을 신기도 했으며 또는 수건으로 다리를 감아서 버선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녀가 입는 옷은 모두 좌임(左)242 이었습니다.
머리장식은 영파부(寧波府)에서 남쪽은 둥글면서 길고 크게 하고, 그 중간에 화려한 장식을 돌렸으며, 북쪽은 둥글면서 뾰족하여 마치 소뿔처럼 생겼습니다.
관음관(觀音冠)을 쓰기도 했는데 금과 옥으로 장식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하였습니다.
비록 백발노인일지라도 모두 귀고리를 달았습니다.
강북의 복식도 대개는 강남과 같았지만 강북에서는 짧고 좁은 흰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가난하여 해진 옷을 입은 이가 10명에 3-4명은 되었습니다.
부녀의 머리장식 또한 둥글면서도 뾰족하여 닭의 부리와 같았습니다.
창주(滄洲)에서 북쪽은 여자의 옷이 좌임도 있고 우임(右狂)도 있었으나, 통주로부터는 모두 우임이었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사람들이 모두 누추하고 비루하며 의관은 남루하였습니다.
해주, 요동 등지에는 중국인 · 조선인 · 여진인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으로부터 압록강까지의 주민은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어서 관(冠)과 의복과 말씨와 여인의 머리장식이 대개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인심과 풍속은, 강남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형제나 당형제(堂兄弟), 재종형제가 한 집에 같이 살기도 했는데, 오강현(吳江縣)에서 북쪽은 간혹 부자도 따로 살아 사람들이 모두 이를 그르게 여겼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승상(床)243과 의자에 걸터앉아서 일을 하였습니다.
강북은 인심이 사나워서 산동에서 북쪽은 한 집안 안에서도 화목하지 못하여 싸움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약탈하고 도적질하며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많았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사람들의 성품과 행실이 더욱 사나워서 오랑캐의 기풍이 강하였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글 읽기를 즐겨하여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나 진부(津夫)와 수부(水夫)일지라도 모두 문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이르러 글자를 써서 물어보면 산천, 고적, 토지, 연혁도 모두 환해서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강북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신이 물으려고 하면 모두 “나는 글자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곧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지소(池沼), 하천의 일로 직업을 삼으므로 거룻배에 종다래끼를 싣고 그물과 통발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강북은 제령부(濟寧府)의 남왕호(南旺湖) 등지 외에는 물고기를 잡는 도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강남의 부녀들은 모두 문밖을 나오지 않고 주루(朱樓)에 올라주렴(珠簾)을 걷고 밖을 바라볼 뿐이며 길을 다니거나 밖에서 일하는 자가 없었는데, 강북은 밭 매는 일이나 노 젓는 일들을 모두 부녀자들이 직접 하였습니다.
서주와 임청 같은 지방의 부녀들은 화려한 단장을 하고 몸을 팔아서 생활을 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은 관원이라 칭하는 자가 몸소 일을 하기도 하고 졸도(卒徒)라 칭하는 자가 호상(胡床)에 걸터앉기도 하였으며, 관대(冠帶)에는 무늬가 없고 존비에는 서열이 없었으니 전혀 예절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아(官衙)에서는 위의(威儀)가 정숙하고, 군중(軍中)에서는 호령이 엄정하고 대오가 바르며 감히 시끄럽게 구는 자가 없었습니다.
호령을 내릴 때 징 치는 소리가 들리면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뒤처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북도 그러했지만 산동에서 북쪽은 무릇 호령을 내릴 적에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정돈시킬 수 없었습니다.
또 강남의 무기로는 창·검·세모창·미륵창이 있고, 갑옷 · 투구·방패 등에는 모두 불로 용(勇)이라고 새겨 넣었지만 활과 화살·전마(戰馬)는 없었습니다.
강북에서야 비로소 활과 화살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통주에서 동쪽과 요동 등지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일삼았지만 화살대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또 강남에서는 얼굴을 단장하기를 좋아하여 남녀가 모두 거울달린 화장갑 ·빗·빗치개 · 칫솔 등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강북도 그러했지만 이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강남은 시중에서 금은을 사용하고 강북은 동전을 사용하였습니다.
강남의 건달244은 주석으로 팔뚝을 묶고, 강북은 납으로 코를 뚫었습니다.
강남은 농업 · 수공업·상업에 힘을 썼는데 강북은 놀고먹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강남은 육로로 갈 때는 교자를 이용하고 강북은 말이나 당나귀를 이용하였습니다.
강남은 좋은 말이 없었는데 강북은 말의 크기가 용(龍)과 같았습니다.
강남은 사람이 죽으면 거가대족(巨家大族)으로서 사당과 정문(雄門)을 세우는 자가 있고, 일반인은 대개 관(棺)을 사용하되 매장하지 않고 물가에 버리니, 245 소흥부성(紹興府城) 가에는 백골이 쌓여 있었습니다.
강북의 양주 등지에서는 봉분을 강가나 밭가 혹은 마을 가운데에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강남은 상제와 중이 더러 고기를 먹지만 훈채는 먹지 않는데 강북은 모두 고기와 훈채를 먹었습니다.
이상이 강남과 강북의 다른 점입니다.
동일한 점은 귀신을 숭상하고 도교와 불교를 존숭합니다.
말할 때는 손짓을 하고 성낼 때는 입을 찡그리며 침을 뱉습니다.
변변찮은 음식을 한 탁자와 식기를 사용하여 젓가락을 돌려가며 먹습니다.
이는 입에 넣어서 씹고, 다듬잇방망이는 모두 돌을 사용하며, 맷돌을 돌릴 적에는 당나귀나 소를 부리고, 시점(市店)에는 주기(酒旗)를 세웁니다.
길가는 사람은 짐을 메기는 해도 머리에 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상업을 직업으로 삼아 비록 고관이나 거가대족의 사람일지라도 몸소 저울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소한 이익을 따집니다.
관부의 통상적인 형벌은 대나무 조각으로 매를 때리고 손가락을 끼우며 돌을 메도록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 외에 산천의 뛰어난 경치와 대사(臺)246의 고적으로서 인구에 회자되는 것들을 비록 붓이 다 닳더라도 모두 기록할 수 없습니다.
신이 두루 돌아 본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상중(喪中)의 몸이라 감히 유람하며 구경하거나 빼어난 경치를 찾아보지 못하였고, 단지 배리(陪吏) 4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표방(標榜)을 보고 지역을 묻도록 했으나, 하나를 건지면 만(萬)을 흘린 셈이므로 그 대략만을 기록할 따름입니다.[122]
4th Day. Crossing the Yalu River. This day was fair. At dawn we passed T’ang-shan Stop and two small rivers, whose names I do not remember, and came to Chiu-lien Wall. The wall was in ruins; there were only the old foundations made of earth. It was also called P’o-so-pao. A river in front of it was the Feng-p’u. We crossed the Wu-yeh River in boats. The two rivers rose together, split, and then reunited; together they were called the Ti River. We crossed the Yalu River in boats. The Prefect had sent Yun Ch’onsõn, a military officer, to comfort me at the river bank. In the evening we crossed the T’anja River in boats. These two rivers, too, split from a single one and flowed together again downstream. Hurrying, we entered the wall of Diju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The wall was squarely at a crossroads for passing Chinese and barbarians. It was of skimpy dimensions, and it was in ruins. The streets inside the wall were desolate and depressing. XXX [A summary list of the stations between Ning-hai and Peking, and a list of stations on an alternate land route from Yang-chou to Peking.) On water there are red boats and on land relay horses. All envoys, tribute, and commerce come and go by water. If either the water in the locks and rivers is too shallow because of drought to let boats pass or there is a very urgent matter, the overland route is taken. The fact is that Yang-chou Prefecture is near Nanking, only three stations away. All the roads from Fukien, Chekiang, and places to the south, moreover, go through it to reach the capital. For that reason, its stations are big and the roads wide. Some of the land stations are sixty li apart, some seventy or eighty li. As to water stations, the thirty li from Wu-lin to Wu-shan and the forty li from the Lu River to the Central Post Hotel are land passages within the water route. Those intervals, therefore, are short. Otherwise, some [stations] are sixty or seventy li apart, some eighty or ninety li apart, and some as much as over one hundred li apart. Between stops the intervals are sometimes ten li and sometimes twenty or thirty li. After Yang-chou, shoals have also been made at the water's edge, some six or seven li apart, some over ten li apart, to mark the distances. Altogether, the distance over which I passed from Niu-t’ou-waiyang to T’ao-chu Chiliad, Hang-chou, and the Peking Central Post Hotel was approximately six thousand li or more. [From the Central Post Hotel we passed more stations, coming to Liaotung.] The intervals between stations were sometimes thirty or forty li, sometimes fifty or sixty li. Altogether they exceeded 1,700 li. Inside Shan-hai-kuan, beacon towers had been built every ten li to hold signal fires. Beyond the pass, too, small earth mounds had been put up at intervals of five li, and on them signs had been stood to mark the distance. From Liao-tung we passed T’ou-kuan, T’ien-shui, T’ung-yüan, Pao-hsieh-li, K’ai-chou, T’ang-chan, and other stops (chan) and came to the Yalu River. That was another three hundred li or more. From Shan-hai-kuan east, another long wall had been built and earthwork strongholds put up to guard against nomads. All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had walls and were of the same type as defense points. Prefectures, departments, and counties had not been established, but garrisons and chiliads (wei-so) had been put up. The officials who manned them, though like those of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were all military. I also heard it said that from Three Branch River there was another road, which passed Hai-chou Garrison, Hsi-mu-ch'eng, Hsiu-an-ch'eng, Ying-naho-t’un, Lao-fang, Lin-tzu-t’un, and P’u-lu-hu-t’un and reached the Yalu River in a mere two hundred li or so. It was also a main road. To the left of the road were the foundations of an old wall that, abandoned, had become An-shih Village. According to legend, it was the place where the T’ang troops had been resisted. In the Hung-wu period (1368-1398] of Great Ming, another long wall had been built to ward off the Mongols. It started from the Great Wall of Ch’in and came east. I do not know its exact course from Three Branch River west, but from there east52 it went north past Ch’ang-ching, Ch’ang-ning, Ch’ang-an, Ch’ang-sheng, Ch'ang-yung, Ch'ang-ying, Ching-yian, Shang-yü-lin, and Shih-fang-ssu places. It then went east past P’ing-lo-po-pao as far as the wall of P’an-yang [Mukden?]. Then it went north past P’u-ho, l-lu-hsien, Fan-ho, T'ieh-ling, and Wei-yao-chan towns and came to the wall of K’ai-yuan. It then went east, passing south of the wall of Fu-shun-so and, touching Tung-chouma, Ken-tan, Ch'ing-ho, Hsien-ch’ang, Ai-yang, and Shih-ch’a-k’ou places, reached the Yalu River. Altogether it curved round several thousand li and made secure the twenty-five garrison and patrol stations left of the Liao. There is another road - but I cannot know that for certain. XXX XXX From Feng-hua County south, many high and steep mountain ranges with fantastic cliffs and scattered rocks line the coast. Rivulets and mountain torrents wind sparkling among green growth. From the Yangtze River south, the land is often soft, miry, and watery; but the T’ien-t’ai, Ssu-ming, K’uai-chi, T'ien-mu, and T’ien-p’ing mountains lie helter-skelter across it. From the Huai River south, the land has many lakes and swamps. From there north, the land is often rolling. The Grand Canal within its banks is higher than the plain. It erodes [the banks] and shifts its course, land and water exchanging places. North of Chi-ning Department is Watershed Shrine. From the shrine south all waters flow south; from there north all flow north. From Wu-ch'eng County north the land is frequently muddy and sandy, as at Ch’ang-lu and other places. It is salt land, with much brackish water; the land of Yü kung's [statement], "Near the sea were wide tracts of salt land” [Legge, III: 102]. From T’ien-chin Garrison north, all the waters flow south to Chang-chia-wan. Flat sands stretch endlessly, streaming and shifting with the wind. At Peking, the T’ien-shou and other mountains curve round in the north. Their western branch joins the Tahsing and Wang-wu mountains and extends to the border of Honan. Their eastern branch runs east past San-ho and Chi-chou and, as the Yen-shan, reaches north of Yü-t'ien County. It continues east past Feng-jun County and reaches Chen-tzu Market. It then splits into two branches, of which the southern branch goes east past Luan-chou and Ch'ang-li County to Chieh-shih Mountain and directly reaches the sea; and the northern branch joins the Yen-shan range, goes east past Ch’ien-an and Yung-p’ing to east of Fu-ning and directly reaches Shan-hai-kuan. Outside the pass it wriggles about and goes east to northwest of Kuang-ning Garrison as the l-wu-lü Mountains. The mountains from Peking there are bare of green growth. In that space, from the Yangtze River north, Ta-hsing east, and Yen-shan and l-wu-lü Mountains south, everywhere for thousands of li a fine, level plain reaches east to the ocean. It extends east of Kuang-ning, west of Haichou Garrison, and north of Liao-tung as a great plain, that which is called Hao-yeh. There were the An Mountains for the first time east of Hai-chou Garrison. They twisted round toward the south as the Ch’ien Mountains. After that, peaks rose in range after range, like a screen of ranks of halberds. They extended to the Yalu River in the southeast and crossed the nomads' boundaries in the east. South of Liao-tung was a Watershed Range. From the range north, all waters flowed north, and from there south, all flowed south. From Shih-men Range south, the mountains were many, the woods thick, and the streams clear and blue. From Peking to the Yalu River, everything named river (ho) was a small stream (ch'uan). All of them flooded in rains and dried up in droughts. Only the Luan River and Three Branch River were big; after them were such rivers as the Pai River, Ta-ling River, Hsiao-ling River, and T'ai-tzu and Eight Crossings rivers. From the Yangtze River south were many places with soft stone. Everywhere on land the stone was cut and laid on roads or across mud and salt flats. There were many places, such as Ning-hai and Feng-hua County, where it capped mountain ridges. Everywhere on water arched gates and bridges were built up of the stone. There were many places, such as Wu-chiang County, where levees against rivers and lakes were built of it. From the Huai River north, there was not a single stone bridge. Either boats were made into floating bridges or wooden bridges were put crudely up. Along the roads, sand and dust filled the sky. After Lien-shan Pass, the winding roads were like threads. Wild grass grew on all sides. Travellers, their faces bitten by mosquitoes and gadflies, suffered cruelly. From the Huai River south were many irrigated fields, rich with paddy, and grain was cheap. From Hsü-chou north, there were no irrigated fields. From Liao-tung east, the weather was hot in the evening and cold in the morning, and the five grains did not thrive. Only glutinous, panicled millet (shu) grew there. In olden times, all water transport from Chekiang and Fukien south met at the Yangtze River and sailed by sea, passing up the Lu River to reach Peking. The Grand Canal was first dug in the period of the barbarian Yuan Shun Ti [r. 1333-1367]. Levees were built and locks put into place to let the transport pass. In our Yung-lo period [1403-1424], the Huang River was opened into the Huai, and the Wei River was led into the Pai River. There was much enlarging and rebuilding. Where water overflowed, dams were put up to prevent it. Where water brought silting, levees were put into place to resist it. Where water was shallow, locks were established to hold it. Where water was swift, floods were laid to hinder it. Where wood jammed, wedges were placed to split it. 53 The plan for embankments: At the nearest point between two bodies of water, dams are built on both the inner and outer sides. Two stone posts are stood on top of each dam. A wooden beam is laid like a gate across the posts and a large hole bored in it. Then a wooden post is inserted into the hole of a cross-beam so that it can be turned. Irregular holes are bored along the post. The boat is fastened to the wooden post, split and twisted bamboo being used for line. A short wooden pole is forced into an irregular hole and turned, and the boat is pulled up. It is hard to move it up the embankment, there being resistance; it is easy to let it down, there being gravity. The plan for locks: On both banks, stone levees are built so as to allow one boat to pass between them. Then the current is blocked with wide planks and the water held. The number of planks depends on the depth of the water. A wooden bridge is set up on top of the levees to let people pass. Two posts are also implanted at both ends of the bridge, as in the plan for embankments. When boats come, the bridge is removed, and they are tied to the posts. After the wide planks have been drawn up with hooks and [the water] let flow, the boats are pulled past. When the boats have passed, [the river] is again blocked. The plan for floods: Again, dams of stone are built on both banks. Tow-paths are laid on top of the dams, and bamboo line is used again for the pulling. It takes over one hundred laborers or ten oxen to pull one boat. At all embankments, locks, and floods are officials who gather laborers and oxen to be ready for the boats. | All dams and wedges are built of stone. There are also some that have wooden palisades. When the Chekiang Grand Defender commissioned Yang Wang to escort us to the capital, he set a time limit of the 1st Day, Fourth Month. Yang Wang, therefore, led us forward night and day. In favoring winds we set sail, in head winds we pulled the boats. If the water was shallow we poled the boats, if the water was deep we rowed them. At the stations we were issued rations, and at the transfer stations we changed boats. The traffic of all envoys and tribute was like that. XXX XXX Generally, there are different manners and customs within a hundred li; how much more is that so in the Chinese Empire. It is impossible to discuss the customs and manners of the whole. I shall consider them in broad outline, taking the Yangtze River as the boundary between north and south: As to the prosperity of the settlements, they are elegant and beautiful beyond words in all the prefectural towns, counties, and garrisons from the river south. Whether it is market town, police station, chiliad, fortress, station, stop, village, or embankment post, sometimes for three or four li, sometimes for seven or eight li, sometimes for over ten li, and often for as much as twenty li around them, village gates crowd the ground, markets line the roads, towers look out on other towers, and boats ply stem to stern. The product-pearls, jade, gold, silver, and precious things —; the riches – rice, kaoliang, salt, iron, fish and crabs —; the animals -- sheep, geese, ducks, chickens, pigs, donkeys, and cattle-; and the things – pines, bamboos, vines, coir palms, longans, lichees, oranges, and pumelos - are first in the Empire. It was because of that that men of old considered the land south of the river a beautiful land. From the river north, both Yang-chou, Huai-an, and from the Huai River north; and Hsü-chou, Chi-ning, and Lin-ch’ing, are handsome and prosperous, the same as places south of the river. Lin-ch’ing is the most thriving. There are other places, such as among the walled towns governed by public offices, that are also prosperous and thronged. But among the market towns, fortresses, stations, stops, villages, markets, wedges, storehouses, bays, banks, locks, embankments, and camps, the settlements are not very thriving, and the streets are desolate. From T’ung-chou east, the settlements gradually become fewer. After Shan-hai-kuan, one can go one hundred li and barely find a single village altar and not more than two or three houses with thatched roofs. There are, however, animals - sheep, chickens, pigs, donkeys, camels, and horses – ruling the wild plain. Willows, mulberries, and jujubes grow thickly, their branches intertwining. The land from Eight Crossings River south is a plain without houses. As to houses, south of the river they are roofed with tile and paved with brick. All steps are built of stone, and sometimes stone pillars are also erected. All [the houses) are spacious and beautiful. North of the river, about half the houses have thatched roofs and are low and small. As to dress, south of the river all the people wear big, black jackets and trousers. Many things are made of silk gauze, raw silk, and satin. Some wear wool hats, black satin hats, or horse-tail hats. Some wrap their heads in turbans, either cornerless black turbans or cornered black turbans. Officials have light silk gauze hats. Mourners have white cloth turbans and coarse cloth turbans. Some wear boots, some leather boots, Wu boots, and straw sandals. There are some who bind their legs in cloths (chin-tzu) instead of socks. Everything worn by women is buttoned to the left. As to the head-dress, from Ning-po Prefecture south, it is curved, long, and large. Pretty ornaments are attached to the ends and the middle. From there north, it is curved and pointed like an ox's horn. Some wear Kuan-yin caps decorated with gold and jade and dazzling to the eye. Even white-haired old women wear earrings. Dress and ornaments north of the river are generally of the same sort as south, but north of the river short, narrow, white gowns are often worn. Three or four of every ten are threadbare and ragged. The women's headdress is also curved and pointed like a chicken's beak. From Ts'ang-chou north some women button their clothes on the left and some on the right. From T’ung-chou on, everyone buttons his on the right. From Shan-hai-kuan east, the people are rough and their clothing ragged. In Hai-chou, Liao-tung, and other places, some of the people are Chinese, some are from our country, and some are Jurchen. From Shih-men Range south to the Yalu River, all the people are emigrants from our country. Their clothing and speech and the women's head-dress are the same as those of our country. As to the temperament of the people and the manner and customs, south of the river they are peaceful and compliant. Brothers, paternal first cousins, or paternal second cousins live together under one roof. In some places from Wuchiang County north, there are fathers and sons living separately. All the people frown on this. The people, whether male or female, young or old, sit on their beds and chairs and do their work. The people north of the river have violent dispositions. From Shantung north, those of a single family do not defend each other. Quarreling voices clamor endlessly. There are apt to be many bandits and murderers. From Shanhai-kuan east, the people's passions are most explosive. There is a strong barbarian influence. People south of the river, moreover, read books. Even village children, ferrymen, and sailors can read. When I came to their region and wrote questions to ask them, they understood everything about the mountains, rivers, old ruins, places, and dynastic changes and told me about it minutely. North of the river, the unschooled are many. That is why when I wanted to ask them something they would all say, “We do not understand the characters.” They were illiterate. The work of the men south of the river is the mastery of the waters. Hundreds and thousands of them get into small boats carrying bamboo baskets and catch fish with traps. North of the river, I did not see fishing equipment except at Nan-wang Lake, Chi-ning Prefecture and some other places. None of the women south of the river goes outside the house. Some go up red towers, roll up the pearl-embroidered screens, and look out, but that is all. They do not walk in the streets or work outside. North of the river they work fields, row boats, and do other labor themselves. At some places, such as Hsü-chou and Lin-ch'ing, they make themselves up and sell their charms. They demand money, on which they live. Some of the people called officials south of the river do tasks themselves like servants. Some, their caps and belts without insignia, sit in armchairs without regard for rank as if they had lost all decorum. But at the office, their behavior is correct and serious. In the army, orders are strict, and the regular ranks fall into formation, not presuming to complain. When a command is given a clang is heard, and [the men) gather like clouds from near and far. There are no laggards. That is so north of the river also, but from Shantung north, a command given can never be effected without whips or sticks. Weapons south of the river are spears, swords, lances, and halberds. The word “valor” (yung) is branded into all the helmets, armor, and shields. But there are no bows, arrows, or war horses. There were first men with bows and arrows north of the river. From T’ung-chou east and in places in Liao-tung, the men occupy themselves with bows and horses. The shafts of the arrows are made of wood.54 South of the river, people pay much attention to their appearance. Both men and women carry mirror cases, coarse and fine combs, and toothpicks.55 North of the river there is the same [liking], but I did not see anyone carrying those things. South of the river, gold and silver are used in the markets; north of the river, copper cash are used.56 Children for sale south of the river have their arms braceleted with tin; those north have their noses pierced with lead. [People] work hard at farming, manufacturing, and commerce south of the river. North of the river there are many wastrels. Travelers by land south of the river use sedan-chairs; those north use horses or donkeys. There are no good horses south of the river; the horses north of the river are as big as dragons. When people die south of the river, some of the great families put up shrines and banner gates. Most people simply use coffins and do not bury them but simply leave them by the water. 57 At such places as Shao-hsing Prefecture, white bones make piles beside the wall. At such places as Yang-chou north of the river, burial mounds are made at the edge of a river, between fields, or at a village gate. Mourners and priests south of the river sometimes eat meat but not garlicky or oniony plants. North of the river, everyone eats such plants and meat. Those are differences north and south of the river. As to similarities, [the people] honor gods and demons and revere the Taoist gods and the Buddha. When they talk, they always wave their hands. When they are angry, they always purse their lips and slaver. Their food is coarse. They eat with chopsticks at a common table and from common bowls. They always chew their lice. They use stone for all their laundry blocks and beaters. To turn mills they use donkeys and oxen. The shops are marked with signs and pennants. Travelers carry baggage across their shoulders but not on their backs or heads. Everyone does business; even some successful officials and men from powerful families carry balances in their own sleeves and will analyze a profit of pennies. The usual punishments of the public offices are those like the “bamboo strips,” “flogging,” “pressing the fingers,” and “carrying stones.”'58 There are other things, such as mountains, rivers, strategic places, towers, pavilions, and old ruins known to all. Even if I were to wear all the hair off my brush, I could not record them all, nor could one see them all, even if one had a thousand years. I, moreover, did not care to go sightseeing or to pick out scenic spots while I was in mourning. I'merely ordered my four secondary officials to look at honors lists and inquire about localities every day. I have noted a little and missed much. I have recorded only a summary.
The End
228. 동북 변경의 女眞族을 가리킨다. 229. 遞運所에 갖추어 놓은 배로서 300料에서 600까지 4種이 있다. 1油로 칠하여 꾸몄으므로 紅船으로 불렸는데 官用物資 등을 수송하였다. 230. 陸驛 즉 馬驛에 갖추어 놓은 馬匹. 231. 淺이란 않은 여울에 배를 끌기 위하여 설치한 淺鋪를 가리키는데 일종의 교통시설에 해당한다. 주로 揚州府 高郵에서 徐州府 沛縣 일대 사이에 두어졌다. 232. 봉화대를 말함. 233. 위급한 상황의 신호를 보내는 臺. 234. 山海關에서 鴨綠江에 이르는 邊牆으로 遼東邊牆이라고도 한다. 235. 左軍都督府 소속 遼東都司의 定遠左衛를 가리킨다. 明은 전국의 衛所를 五軍都督府로 나누어 각 도독부에 귀속시켰다. 左軍도독부에는 留守左衛를 비롯한 ‘在京衛와 浙江都司, 요동도사, 산동도사 소속 위소가 귀속된다. 요동도사에는 定遠左衛를 비롯한 20개 衛가 포함된다. 《諸司職掌》 권5, 兵部). 236. 원문에서 斥은 짜서 소금을 만들 수 있다는 말로 '와 같은 의미이다. 237. 험준하고 좁은 산길. 238. 원의 마지막 황제(재위 1333-1370)이다. 궁궐 안의 파벌 싸움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1332년에 황제가 된 친아우인 寧宗이 재위 43일 만에 죽자, 이듬해 황제가 되었다. 文宗(제9대) 이후의 漢文化 존중주의로 돌아가 遼, 金, 宋 세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등 원나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 재정적으로는 실패하여 1351년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반란이 확대되어 1368년에 수도가 함락되자 피신하였다가 應昌에서 죽었다. 239. 元 惠宗 至正11년(1351) 總治河防使 賈魯가 주관한 黃河 水利 사업을 가리킨다. 240. 永樂 연간 宋禮 등이 주관한 會通河 일대의 水利 사업과 陳道 등이 주관한 淮河 유역의 水利사업을 가리키는 듯하다. 241. 宋代 諸어나 중요 지역에 巡檢司가 두어져 그 소속 兵士의 屯所를 높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軍의 城專가 두어진 곳이 村落化하여 寨라는 地名으로 바뀌게 되었다. 242. 옷을 입을 때 오른 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밈. 243. 접을 수 있는 의자로 胡床이라고도 한다. 隋代에는 交床으로 부르던 것을 唐代에 繩床이라 改名하였다. 244. 원문은 市兒이다. 市兒는 시정 바닥에서 활동하는 건달 혹은 무뢰배를 가리킨다. 245. 水葬 또는 海葬이라고 부르는 漢族의 喪葬 풍속 중 한 가지로서 중국의 동남 연해지방에서 성행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을 거행한 다음 물 속에 넣어 葬事를 지내는데, 때로는 棺을 해변에 두었다가 밀물이 들 때 자연스럽게 바다 속으로 쓸려 보내기도 한다. 《中國風俗辭典》(上海辭書出版社, 1990). 246. 臺는 흙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세운 전망대, 는 목조로 높이 만든 정자.
출처/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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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적인 삶 마친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처가 따라 해남 행, 어초은 윤효정 등 해남육현 길러내, 표해록,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C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 해남신문, 201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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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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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기의 도읍 평양의 진짜 위치 탐구중입니다”, 한겨레신문, 2015.06.11
- ↑ [https://www.yna.co.kr/view/AKR20090623182700005 "장수왕 천도 평양은 평양 아닌 랴오양" , 연합뉴스, 2009.06.23]
- ↑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아닌 요양
- ↑ 랴오양(遼陽)이 고구려의 평양? 中요동 고구려계 고분벽화 국내 공개, 동아일보, 2016.04.08
-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북드라망, 2014, p.94-95
- ↑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신동아, 2015.08.21
- ↑ 고대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코리안스피릿, 2016.07.11
- ↑ 고려 평양이 중국 요양이라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 ↑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517 HOME 이슈 평양 위치가 중국? 엉터리 연구에 놀아난 한국'수학으로 푼 고지도의 비밀', 뉴스토프, 2018.01.22]
- ↑ [경제학자의 우리 술 이야기중국 황주와 우리 술, 경향신문, 2014.11.07]
- ↑ 여호규 교수, ‘고구려, 광개토왕 때도 요동 벗어나지 못했다’,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즈2017.10.27
- ↑ [역사산책 고구려와 한나라의 요동 전쟁, 동포뉴스, 2016.04.21]
- ↑ 고구리의 요동·요서는 어디인가? (4부), 고구려역사저널, 2015.10.10
- ↑ 태조대왕의 요동진격 이야기, 민플러스, 2018.05.24
- ↑ 삼국사기 > 髙句麗本紀 第十 > 보장왕(寶藏王) >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한국 속 중국 고선지 장군, 중국 역사를 만든 고구려의 후손, 중앙일보, 2018.01.29]
- ↑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나폴레옹보다 낫다", 오마이뉴스, 2011.04.04
- ↑ 고구려 후손 고선지 장군①…파미르 고원을 넘다, 오피니언유스, 2018.04.07
- ↑ 고구려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20여만명 끌려가, 오피니언뉴스, 2018.03.24
- ↑ 관왕묘
- ↑ 서울동관왕묘
- ↑ [전북 남원 관왕묘(關王廟)_삼국지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
- ↑ 조선(朝鮮)을 받아들인 올량합(兀良哈)의 정체(6)-누루하치는 오도리(吾都里) 출신-
- ↑ 기획특집-평택 밖의 평택, 중국에서 평택 찾기 6 - 홍익한·오달제의 흔적, 심양 삼학사 유적-2, 평택시사신문, 2013.10.10
- ↑ 연원직지(燕轅直指) / 봉황성기(鳳凰城記)
- ↑ 고려동 유적 정비의 필요성에 대하여
- ↑ [경남 문화재 여행 함안 고려동유적지, 경남일보, 2015.07.20]
- ↑ 삼류하
- ↑ 성종실록 270권, 성종 23년 10월 18일 을묘 2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문신으로 조심성 있고 치밀한 자를 선택하여 천문과 산학을 익히게 하다
- ↑ 천문학(天文學)
- ↑ [13]
- ↑ 대륙분수령
- ↑ 백산정계비를 세운 청대 분수령(分水嶺)은 명대 분수령과 같은 준령 (完)
- ↑ 분수령
- ↑ 팔도하
- ↑ “八渡河”考
- ↑ 조천일기
- ↑ 열하일기
- ↑ [계산기정(薊山紀程) 통원보에 얽힌 설화]
- ↑ 조선의 압록은 베이징북쪽 칠도하가 맞더라
- ↑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 ↑ 성종실록 217권, 성종 19년 6월 4일 병신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
- ↑ [14]
- ↑ 단종실록 14권, 단종 3년 윤6월 5일 기유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세조가 이두리를 의정부에서 만나보다
- ↑ 해동청
- ↑ 고려 압록수(鴨綠水)는 북한 압록강이 아닌 중국 요하(遼河)?, 동아일보, 2016.06.15
- ↑ 관화약초(關話畧抄)
- ↑ [고구려대탐험 4.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 경기신문, 2008.01.09]
- ↑ 단동의 호산장성은 가짜 구련성이다
- ↑ 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 1월 14일 을유 3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최부를 인견하고 표류할 때의 일 등을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