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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詣兵部。是日晴。楊旺引臣等出玉河館門。顧見東衢有橋。橋兩傍建門。扁曰玉河橋。步由西衢。過上林院監,南薰坊鋪,大醫院,欽天監,鴻臚寺,工部。至兵部。有尙書余子俊坐一廳。左侍郞姓何。右侍郞姓阮。對坐一廳。郞中二員,主事官四員。連坐一廳。臣等先謁侍郞。次謁尙書。然後詣郞中主事官廳。郞中等不復問臣以漂來事。指庭中槐陰爲題。令做絶句。又以渡海爲題。令做唐律。又有職方淸吏司郞中戴豪。引臣至廳上。廳壁掛天下地圖。臣所經之地。一見瞭然。郞中等指謂臣曰。你發自何地。泊于何地。臣以手指其漂舟之地。所歷之海。所泊之渚。海路正經于大琉球國之北。戴郞中曰。你見琉球地乎。臣曰。我漂入。白海之中。遇西北風南下。望見山樣在有無中。且有人煙之氣。恐是琉球界也。然未可的知。又問曰。你所帶來人有死亡者乎。臣曰。我四十三人。賴 皇恩如海。皆得保性命而來。又問曰。你國治喪。用文公家禮否。臣曰。我 國人生子。先敎以小學,家禮。科擧亦取精通者。及其治喪居家。一皆遵之。又問你 國王好書否。臣曰。我王一日四接儒臣。好學不厭。樂取諸人。問畢。饋臣餠茶。唐敬引臣等還玉河館。夕。有姓名何旺者頗解我 國言。來謂臣曰。你國賀冊封使安宰相處良等二十四人來此館。留四十餘日。今三月二十二日還程云云。臣嘆其不得相見。何旺曰。你亦還國。何嘆之甚。臣曰。憔悴他鄕。四顧無親。若見本國人。則如見父兄。且父新死母當喪。弟又少不更事。家又貧窶。不保朝夕之際。我適漂海。其存其沒。家莫聞知。徒以爲鯨濤鼓天。滄海無涯。必見臭載。葬身魚腹。以貧窶之家。治重疊之喪。其老母弱弟之痛爲如何也。我若得遇安令公之行。一時還鄕。則得免道路之虞。若不得問歸。他先歸國。好傳吾消息。則可以少舒母弟之痛。天不恤我。只隔七日間。不得相見本國之使。胡可不自痛恨也。



병부(兵部)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양왕이 신 등을 안내하여 옥하관 문을 나오니 동쪽 거리에 다리가 보였습니다.

다리 양쪽 가에는 문을 세웠는데 '옥하교(玉河橋)'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습니다.

서쪽 거리로 걸어서 상림원감(上林苑監), 남훈방포(南薰坊鋪), 태의원(太醫院), 흠천감(欽天監), 홍려시(鴻臚寺), 공부(工部)'를 지나 병부에 이르렀습니다.

상서(尙書) 여자준(余子俊)이 한 청사에 앉아 있고, 하(何) 좌시랑(左侍郞)과 완(阮) 우시랑(右侍郞)이 다른 청사에 마주앉아 있으며, 낭중(郞中) 2인과 주사관(主事官) 4인[1][2]은 또 다른 청사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신 등이 시랑을 먼저 뵙고, 다음에 상서를 뵙고 난 뒤에 낭중과 주사관이 있는 청사로 갔습니다.[3]

낭중 등은 신에게 표류해 온 일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는 않고, 뜰 안의 홰나무[4][5] 그늘을 가리키며 시제(詩題)를 삼고는 절구(絶句)를 짓도록 하고, 또 도해(渡海)로써 시제를 삼고는 당률(唐律)을 짓도록 하였습니다.[6]

또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낭중 대호(戴豪)의 안내에 따라 대청 위에 이르렀는데, 청사 벽에 천하의 지도가 걸려 있어 신이 지나온 지역이 한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낭중 등은 지도를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 정박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손으로 배가 표류하기 시작한 땅과 지나온 바다와 정박했던 섬을 가리켰습니다.

가리킨 해로(海路)가 대유구국(大琉球國)의 북쪽을 지나고 있을 때 대(戴) 낭중이 말하기를, “유구 지방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표류하여 백해(白海)로 들어가 서북풍을 만나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멀리 보니 산 모양이 보일락말락 했고 또 인가의 기색이 있어 유구의 땅인 듯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43인은 바다와 같은 황제의 은혜를 입어서 모두 목숨을 보전하여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 나라에서 초상을 치를 적엔 주문공의 《가례》를 씁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를 가르치고, 과거(科擧)에서도 또한 이에 정통한 사람을 뽑으며, 초상을 치를 때나 일상생활에서 한결같이 《가례》를 따릅니다.”

“당신의 국왕은 글 읽기를 좋아합니까?”

“우리 국왕은 하루에 네 번 유신(儒臣) 을 접견하고, 배우기를 즐겨하여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의 장점을 취하기를 좋아하십니다.”

다 묻고 나서는 신에게 떡과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당경이 신 등을 인도하여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우리말을 제법 할 줄 아는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신에게,

“당신 나라의 하책봉사(賀冊封使)인 안처량(安處良) 재상(宰相)[7] 등 24인이 이 옥하관에서 40여 일을 머물다가 이 달 3월 22일에 돌아갔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8]

신은 그들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하왕이 말하기를,

“당신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찌 그리 심히 한탄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타향에서 고생에 시달려 초췌해지고 사고무친의 처지에 본국 사람을 만난다면 마치 부형을 만난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갓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상사(喪事)를 치러야 하는데 아우는 어려서 경험이 부족하고, 집안은 또한 가난하여 조석(朝夕)도 보전하지 못하는 마당에 내가 바다에 표류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집에서는 알 수 없을 터인데, 다만 하늘에 솟구치는 큰 파도와 가이없는 푸른 바다 속에서 배가 뒤집혀 필시 물고기 밥이 되었을 줄로 여길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거듭되는 상사를 치르게 되었으니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우의 비통함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만약 안(安) 영공(令公)의 행차를 만나서 같이 고향에 돌아갔다면 길에서 생기는 근심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만약 함께 돌아가지 못하였더라도 그가 먼저 본국에 돌아가서 내 소식을 잘 전해 준다면 내 어머니와 아우의 아픔을 조금 덜어줄 수 있을 것인데, 하늘이 나를 돌보지 않아 겨우 7일이 어긋나 본국 사신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29th Day. Going to the Ministry of War. This day was fair.

Yang Wang took us outside the gate of Jade River House. Over our shoulders we saw that on East Street there was a bridge, on both sides of which gates had been built. A plaque said, “Jade River Bridge.” We walked along West Street past the Directorate of Imperial Parks, Nan-hsün Ward Stop, Imperial Academy of Medicine, Directorate of Astronomy, Court of State Ceremonial, and the Ministry of Works and came to the Ministry of War. Yü Tzu-chün, the Minister, was there, sitting in one hall. Left Vice-Minister Ho and Right Vice-Minister Yüan were sitting in a hall across from him. Two Senior Secretaries and four Administrative Secretaries were sitting in a row in another hall. First we went to the Vice Ministers, next to the Minister, and afterwards to the hall of the Senior and Administrative Secretaries.

The Senior Secretaries and the others did not question me again on my drifting there. They pointed to the shadow of a Japan pagoda tree (huai) in the garden and ordered me to write a quatrain (chüeh-chü) on that subject. Then they ordered me to write an eight-line poem in the T’ang style on the subject “Crossing the Sea.” Tai Hao, Senior Secretary for the Bureau of Maps,3 took me up into the hall, on a wall of which a map of the Empire was hung. The places through which I had passed were clear at a glance. The Senior Secretary pointed at it and said to me, “Where did you start and where did you land?” I pointed out the place where the boat had gone adrift, the sea through which we had passed, and the island on which we had landed. Our course passed directly north of Great Ryukyu. Senior Secretary Tai said, “Did you see Ryukyuan land?” I said, “While drifting in the white sea, we met a northwest wind and went south. We saw vague mountainous shapes, and there was also an aura of settlement. I suspected that it was the shore of Ryukyu, but still I do not know.”

He asked, “Did any of the men who accompanied you die?” I said, “All forty-three of my men, trusting to an Imperial benevolence as great as the sea, kept alive.” He asked, “When you observe mourning in your country, do you use Wen Kung's Chia li?”. I said, “When my countrymen have children, they first teach them from the Hsiao hsuëh and Chia li. Even in the examinations, we choose those wellversed in it. It governs our mourning, and everyone follows it in daily life.”

He asked, “Does the King of your country like books?”. I said, “Our King receives the Confucian ministers four times a day. He never grows tired of learning, and he likes to select worthy scholars. When all had stopped asking questions, they served me tea and cakes. T'ang Ching took us back to Jade River House. In the evening one Ho Wa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somewhat, came and said to me, “Prime Minister An Ch’ð-ryang, an Envoy of Congratulations, and twenty-three men from your country came to this guest house and stayed more than forty days. They set out to return on the 22nd Day, Third Month.”5 I expressed sorrow that we had not met. Ho Wang said, “You will return to your country, too. Why do you grieve so much?”

I said, “I am suffering abroad, with no relatives anywhere around me. If I should see someone from my own country, it would be like seeing my father or elder brother. My father, moreover, has died recently, and my mother is in mourning. My younger brother is young and inexperienced. The family is poor and insecure from morning to night. “I drifted out to sea, and whether I am dead or alive my family have not heard. They can only assume that in the mountainous, heaven-shaking waves of the great, endless sea, I must have blackened my name and buried myself in a fish's belly. My poor family will be observing double mourning. How great must be the grief of my old mother and weak, little brother! “If I had met His Excellency An's party and returned home at the same time as he, I should have avoided mishaps on the road. If I had not returned with him but he had gone home first and kindly delivered word of me, it would have been possible to mitigate a little my mother's and younger brother's grief. Heaven has no pity on me; I have missed meeting an envoy from my own country by only seven days. How can I not have deep regret?”




二十九日

诣兵部。是日晴。杨旺引臣等出玉河馆门,顾见东衢有桥,桥两旁建门,匾曰玉河桥。步由西衢过上林院监、南熏坊铺、太医院、钦天监、鸿胪寺、工部至兵部。有尚书余子俊坐一厅,左侍郎姓何、右侍郎姓阮对坐一厅,郎中二员、主事官四员连坐一厅。臣等先谒侍郎,次谒尚书,然后诣郎中主事官厅。郎中等不复问臣以漂来事,指庭中槐阴为题令做绝句。又以渡海为题令做唐律。又有职方清吏司郎中戴豪引臣至厅上,厅壁挂天下地图,臣所经之地一见了然。郎中等指谓臣曰:“你发自何地?泊于何地?”臣以手指其漂舟之地、所历之海、所泊之渚。海路正经于大琉球国之北。戴郎中曰:“你见琉球地乎?”臣曰:“我漂入白海之中,遇西北风南下,望见山样在有无中,且有人烟之气,恐是琉球界也。然未可的知。”又问曰:“你所带来人有死亡者乎?”臣曰:“我四十三人赖皇恩如海,皆得保性命而来。”又问曰:“你国治丧用文公《家礼》否?”臣曰:“我国人生子,先教以《小学》、《家礼》,科举亦取精通者,及其治丧、居家一皆遵之。”又问:“你国王好书否?”臣曰:“我王一日四接儒臣,好学不厌乐取。”诸人问毕,馈臣饼茶。唐敬引臣等还玉河馆。夕,有姓名何旺者颇解我国言,来谓臣曰:“你国贺册封使安宰相处良等二十四人,来此馆留四十余日,今三月二十二日还程”云云。臣叹其不得相见。何旺曰:“你亦还国。何叹之甚?”臣曰:“瞧悴他乡,四顾无亲,若见本国人则如见父兄。且父新死母当丧,弟又少不更事,家又贫窭不保朝夕之际,我适漂海,其存其没,家莫闻知,徒以为鲸涛鼓天,沧海无涯,必见臭载,葬身鱼腹。以贫窭之家治重迭之丧,其老母弱弟之痛为如何也?我若得遇安令公之行,一时还乡,则得免道路之虞;若不得同归,他先归国好传吾消息,则可以少舒母、弟之痛。天不恤我,只隔七日间,不得相见本国之使,胡可不自痛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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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외교)
  • 인명-조선
  • 심리(허망, 안타까움, 한탄)



  • 직방청리사주사였던 원황 [9]

표해록역주 p.428
  1. 명나라와 청나라의 관직 요약
  2. [1]
  3. 명대(明代) 관제(官制)와 군제(軍制) : 중앙과 지방을 중심으로
  4. 산시(山西) 천년의 역사를 지닌 홰나무
  5. 서울 조계사 홰나무
  6. 일암 김주호선생 한시작법 제1강
  7.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일 병신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8. 성종실록 211권, 성종 19년 1월 21일 병진 1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이조 참판 안처량을 북경에 보내어 중궁의 책봉을 하례하게 하다
  9. 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