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崔鳴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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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6년(선조 19)∼1647년(인조 25) = 62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영의정이고, 봉작(封爵)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내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최업(崔嶪)이며, 조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최수준(崔秀俊)이다. 아버지는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는 병조 참판(參判)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공조 판서최래길(崔來吉)의 동생이고, 도승지(都承旨)최혜길(崔惠吉)의 중형이다.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과 현헌(玄軒)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과 <인조반정>의 계획

1605년(선조 38) 20세에 사마시(司馬試)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생원시(生員試)는 1등, 진사시(進士試)는 8등이었으며 바로 그 해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1609년(광해군 1) 예문관 검열(檢閱)에 추천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다. 1611년(광해군 3) 공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1612년(광해군 4)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 죽이고,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처형하였다. 그때 <김제남의 옥사>에 연루된 종성 판관(鍾珹判官)정협(鄭浹)이 최명길(崔鳴吉)의 아버지 최기남도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영흥 부사최기남은 서울로 잡혀와서 심문을 받고 공초하기를, “신은 김제남과 평생 두 번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결코 절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하니,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하고 석방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아버지 최기남은 경기도 가평(加平)으로 이사하여 시냇가에 ‘만곡정사(晚谷精舍)’를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계곡집(谿谷集)』 권13「최기남 신도비명」참고.)

1614년(광해군 6) 명(明)나라 사신이 왔는데, 광해군은 병조 좌랑최명길에게 명하여 사신들이 외부 사람과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설날 사신의 가노(家奴)들이 마음대로 길을 나다니다가 말썽이 일어났다. 이것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최명길은 관작을 삭탈당하여 문외(門外) 출송(出送)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참고.) 서울에서 쫓겨난 최명길도 가평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1618년(광해군10) 북인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작호를 삭탈하고 그녀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려고 조정의 여론을 일으킬 때, 백관들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광해군에게 소청(疏請)하는 <정청((庭請)>을 전개하였는데, 구성(具宬)을 비롯한 서인(西人) 38인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이첨 일당은 서인들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탄압을 더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구성의 동생 구굉(具宏)이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이서(李曙)와 공모하여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작정하고, 외사촌형 신경진(申景禛)과 큰 형의 아들 구인후(具仁垕)와 함께 반정(反正)을 계획하였다. 능양군은 구굉의 누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들이므로, 구굉은 인조의 외삼촌이고, 구인후는 외사촌이었다.

처음에 반정의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무인(武人)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젊은 문신(文臣)이 반정의 계획을 빈틈없이 수립할 필요를 느꼈다. 마침 신경진이 체찰사(體察使)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그의 사위 최명길을 눈여겨보고, 그를 반정의 모임에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젊은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계획에 깊숙이 관여하여, 그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신경진은 체찰사장만에게 그들이 거사할 계획을 은밀히 말하였으나, 장만은 위험하다고 끝내 군대를 움직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굉과 절친한 사이였던 조옥건(趙玉乾)이 호남 지방의 병력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주둔하자, 구굉이 그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조옥건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사림(士林)에서 추앙하는 김류(金瑬)와 원로 중신 이귀(李貴)를 반정의 모임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쿠테타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류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申砬) 장군의 종사관으로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서 함께 전사하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신경진은 김류를 친형처럼 따랐는데, 이때 신경진이 그를 설득하여, 반정군의 대장(大將)으로 삼았다. 또 최명길은 친한 친구 이시백(李時白)을 통하여 그 아버지 이귀(李貴)를 설득하였는데, 일찍이 최명길이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서 이시백·장유(張維)·조익(趙翼)과 함께 수학하면서 ‘4우(四友)’>라고 불릴 만큼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가 되자, 신경준이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를 준비하려 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정승 박승종(朴承宗)이 신경진을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에 임명하여, 멀리 내쫓았다. 신경진이 갑자기 먼 곳으로 떠나자, 최명길이 그 뒤를 이어받아서 반정의 계획을 짜고 거사 날짜를 정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이서가 장단방어사(長湍防禦使)에 임명되자, 최명길이 점을 쳐서 거사할 날짜를 3월 12일 한밤중으로 정하였다. 그날 밤중에, 이서가 장단부의 군사 7백 명을 거느리고 몰래 홍제원(弘濟院)으로 왔고, 대장 김류 등도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으로 집결하였다.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대장 김류가 1천여 명의 반정군을 이끌고 궁궐을 급습하여, 마침내 반정에 성공하였다.

<인조반정>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밤에 광해군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를 즐기면서 술에 취해 있었는데, 이이반(李而頒)이 고변(告變)하였다. 그날 오후에 이이반은 길에서 친구 이후원(李厚源)을 만났는데, 이후원이 “오늘 반정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함께 가기를 권하였으나, 이이반이 이를 뿌리치고 대궐로 달려가서 이후원에게 들은 반정 거사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 상소를 읽어보았으나, 술에 취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과 정승 박승종은 두세 번 광해군에게 속히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광해군이 명령을 내려서 한 밤중에 의금부(義禁府)당상관(堂上官)과 포도대장(捕盜大將)을 부르게 하고, 또 도승지이덕형(李德泂)과 병조 판서권진(權縉)을 입직하게 하였다. 대신 이하 관리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 모였다. 이때 비변사 당상관들도 모두 나와서 모였다. 광해군이 도감 대장(大將)이흥립(李興立)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게 하고, 천총이확(李廓)을 보내어 창의문(彰義門) 밖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자정이 넘어도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감 대장이흥립은 이미 비밀히 사위 장신(張紳)을 통하여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장신은 장유의 동생으로서 최명길의 지시를 받고 그 장인을 설득하여, 그 협력을 얻어냈다. 만약 이때 이흥립이 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면, 결코 <인조반정>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이 반정할 날짜를 정할 적에, 그는 이미 광해군이 연회에서 폭음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자정을 넘겨서 한 밤중에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날 밤에 구굉은 능양군을 모시고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다. 대장 김류, 부장 이귀 등은 최명길·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께 홍제원에 모였고, 장단 방어사이서도 이기축(李起築)과 함께 부하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또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이중로(李重老)·장유·신경유(申景裕) 등도 각각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모두 와서 모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참고.) 군사가 모두 1천여 명이었는데, 문무 장사(將士)가 2백여 명이었다.

초저녁에 홍제원에 모인 자가 겨우 수백 명뿐이고, 또 대장 김류는 밤이 깊도록 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위구심을 느끼고 웅성거리면서 곧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성부(李聖符)가 이귀에게 말하기를, “일이 다급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지체하면서 기다릴 수만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이괄에게 제의하기를, “내가 선봉을 맡겠으니, 주장은 장군이 아니고서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도 그 제안에 찬동하였다. 이리하여 이괄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부대의 배치를 끝마쳤는데, 그때에 비로소 대장 김류가 도착하였다. 이괄이 흥분하여 자기가 대장(大將)을 맡겠다고 고집하였으나, 이성부가 나서서 이괄을 달래기를, “비록 장수를 바꾸면 안 된다고 하지만, 오늘의 거사는 서로 협심하는 데 성패가 달려 있으니, 장군은 부디 양보하여 처음 논의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귀도 그를 달래니, 이괄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이성부와 함께 좌우의 선봉장을 맡았다. 나중에 이괄이 정사공신 2등에 책훈(策勳)되자, 이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때 이괄이 임시로 반정군의 주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한 밤중에 반정군이 대열을 정비하여 도성 가까이 진군하였으나, 군사의 위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지휘도 일사분란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성부가 말고삐를 잡은 채 칼을 빼어 들고 군중을 호령하기를, “본래 이번 거사를 도모한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여 죽음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뿔뿔이 흩어져서 아이들의 장난처럼 하자는 것인가? 한 사람이라도 감히 대오를 이탈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겠다.” 하니, 드디어 군중이 숙연해지며 불안해하는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성부는 최명길이 반정군에 끌어넣어 군율(軍律)을 바로잡도록 부탁한 사람이었다.

밤 3경에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가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에 도착했을 때, 도감 대장이흥립이 지휘봉을 버리고 와서 맞이했고,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궁성에 있던 대신과 여러 관리들은 반정군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서 도망가버렸다. 대장 김류 등이 단봉문(丹鳳門)을 열어젖히고 궁궐로 들어갔고, 능양군이 구굉 등과 함께 도착하니, 김류가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 위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 의자)에 앉게 하고, 여러 장사들이 그 앞에 줄지어 서서 시위하자, 원래 궁궐 안을 지키던 장졸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다.

이때 입직한 도승지이덕형 등이 반정군의 함성을 듣고 광해군의 침전(寢殿)의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미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하여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숨겨두고, 밤중에 몰래 출입하는 데에 이용하였는데, 이를 알고 있던 광해군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성을 넘어가서, 젊은 내시의 안내를 받고, 사복시(司僕寺) 앞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세자 이질(李侄)은 아버지 광해군을 뒤쫓다가 찾지 못하고 장의동(莊義洞) 민가에 숨었다.(『광해군일기』 권187 광해군 15년 3월 12일 기사 참고.) 그 뒤에 안국신의 고발로 광해군은 붙잡혀서 반정군 앞으로 끌려 왔다.

인조 시대 주화파(主和派)의 영수 최명길

1623년(인조 1) 3월 13일 아침에 대장 김류가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인조이다. 최명길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고,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이조 참의(參議)로 승진하였다. 정사공신 1등에 책훈되어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고,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약천집(藥泉集)』 권17 「영의정 문충 최공명길 신도비명(領議政文忠崔公鳴吉神道碑銘)」 참고. 이하 「최명길 비명」으로 약칭함.)

그해 윤10월 정사공신 53명을 책훈하였는데, 최명길과 김류·이귀 등 7명이 정사공신 1등이고, 이괄·장유 등 9명이 2등이고, 최래길(崔來吉) 등 나머지는 3등이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은 총독 부사(摠督副使)에 임명되어 원수(元帥)김류의 군영(軍營)에 소속되었다. 안현(鞍峴)의 싸움에서 이괄의 반란군과 싸우는 데에 많은 전략을 짜서 원수김류를 도왔다. 그해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 1625년(인조 3) 호패청(號牌廳)당상관(堂上官)이 되었고, 1626년(인조 4)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1627년(인조 4)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의 베이러[貝勒: 왕] 아민(阿敏)이 3만 명의 기병(騎兵)을 이끌고 안주(安州)와 평양(平壤)을 공략하고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취하고 여진족의 후금을 배척하였기 때문이었다. 후금의 칸[汗] 홍타지는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면서 조선을 복속(服屬)시켜, 명나라의 배후 세력을 없애려고 하였고, 또 가도(椵島)의 명나라 도독(都督)모문룡(毛文龍)과 조선이 연합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후금은 먼저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 강화도에 피난한 조선 정부는 김상헌(金尙憲)의 주전론(主戰論)과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이 팽팽히 대립하였다. 최명길은 주장하기를, “이미 자강(自强)하지도 못하면서, 또 약자도 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부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청컨대, 화의하고 싸움을 늦추소서.” 하였다. 후금의 사신이 와서 인조를 만나보는데, 최명길은 건의하기를, “양쪽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사신이 그 중간에 있으니, 주상이 뜻을 굽혀서 한번 접견하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인조가 사신을 만나 화의(和議)를 하니, 형제(兄弟)의 맹약을 맺고 후금의 군사가 물러갔다. 그러나 주전론자들은 그가 굴욕적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고 공격하고 유배할 것을 청하였다. 인조는 그를 보호하여 단지 추고(推考)하게만 하였다.(「최명길 비명」 참고.) 그때 조정 안에서 화의를 주장한 사람은 최명길 한 사람뿐이고 모두 김상헌의 주전론을 지지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으나, 최명길은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에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사실은 그의 손으로 세운 인조가 그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1628년(인조 6)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가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1629년(인조 7) 종부시(宗簿寺)제조(提調)가 되었다가,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여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그때 최명길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밀무역을 자행하는 잠상(潛商)에 대해 철저하게 금지하지 않는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최명길은 물자가 부족한 여진족 사회에 잠상들이 물건을 공급하는 것도 괜찮다고 판단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편 참고.)

1630년(인조 8) 군적(軍籍)이 완성되었는데, 최명길이 이를 주관하였다. 그해 의금부 지사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인조실록』 참고.) 1631년(인조 9)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632년(인조 10)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예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 이때 후금은 조선에게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에 필요한 원병을 보낼 것과 물자를 공급하는 국경(國境)의 개시(開市) 등을 요구하였다, 이때에 또 조정에서는 주화론에 반대하는 주전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최명길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33년(인조 11) 조정에서 후금과 국교를 단절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최명길은 홀로 주장하기를, “적의 원한을 사서 화(禍)를 재촉하는 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으나, 별로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다.(『인조실록』 참고.) 1634년(인조 12)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문형(文衡)이 되어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옥책(玉冊)을 지어서 바쳤다. 1635년(인조 13)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하고, 호조 판서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 때 홍타지가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에서 청(淸)나라로 바꾸고 황제의 칭호를 쓴다고 공포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칭신(稱臣)하기를 요구하니, 조정의 척화파(斥和派)가 청나라 사신을 배척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노하여 곧바로 돌아가버리자 최명길이 아주 걱정하기를 “전쟁의 빌미가 생겼으니, 사전에 전쟁과 수비의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모두 강화를 배척하였으나 최명길이 혼자 강화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조정에 들어가면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번갈아 그를 비난하였고, 나가면 대간(臺諫)의 관료들이 번갈아 그를 탄핵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마침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직접 10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이 얼었을 때를 이용하여 강을 건넌 다음 의주·평양을 그대로 지나친 채 바로 남하하여 서울을 공략하였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려고 하다가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45일 동안 청 태종의 군사에게 포위당하여 고전하였다. 그때 최명길은 강화론(講和論)을 펴서, 김상헌의 척화론(斥和論)과 대립하였는데, 조정의 대소 관료들도 척화론에서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이미 적극적인 방어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현실적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다고 설득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칭신(稱臣)의 예”를 갖추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 청음(淸陰)김상헌이 강화 조약의 문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하니, 최명길은 그 조각을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서는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나 같이 주워 모으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청나라 군사가 물러간 뒤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위로는 인조를 위로하고, 아래로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다. <병자호란> 직후에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조선 정부의 3정승 6판서의 아들 한 사람을 심양(瀋陽)에 질자(質子)로 보내도록 강요하여, 최명길의 양자 최후량도 심양으로 잡혀가서 8년 동안 볼모 생활을 하였다. 그해 가을에 최명길은 좌의정이 되었고, 1638년(인조 16) 영의정에 올랐다. 1640년(인조 18) 영의정을 사임하였다가 1642년(인조 20)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한편, 최명길은 중 독보(獨步)를 명나라 홍승주(洪承疇)의 군영(軍營)에 보내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부득이 항복한 사실을 알렸는데,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중 독보가 오고간 사실을 고백하였다. 또 의주목사(義州牧使)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의 8기병(騎兵)이 요동의 금주(錦州)를 공격하는 때를 틈타서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나라의 배후를 치려고 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명나라로 도망한 일이 있었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청나라 장수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봉황성(鳳凰珹)에 보내어, 최명길을 잡아오게 한 다음 그를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최명길은 모든 것이 자기 혼자 한 일이고, 나라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홍타지는 최명길에게 형구(形具)를 씌워서 심양으로 압송토록 한 다음, 사형수만을 수용하는 북관(北關)에 가두어 두었다가 이듬해 남관(南館)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곳의 감옥에서 그 앞서 붙잡혀 간 김상헌·이경여(李敬輿) 등을 만나서 서로 껴안고 통곡하더니 마침내 화해하였다. 그곳에 3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질자로 잡혀와서 있던 아들 최후량을 자주 만났다. 1644년(인조 22) 청나라 태종이 죽고 세조(世祖)순치제(順治帝)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北京)으로 천도(遷都)한 다음, 1645년(인조 23) 김상헌 등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돌아와서 어영청(御營廳) 제조(堤調) 등을 역임하다가, 1647년(인조 25) 5월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2세였다.

성리학(性理學)양명학(陽明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또 글씨에도 중국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본받아 서예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저서로는 『지천집(遲川集)』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남아 있다.

최명길의 학문과 국제 정세의 인식

최명길은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양명학을 혼자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은 주자(朱子)의 성리학이 만연하여,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은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다만 왕수인의 제자 서애(徐愛)가 쓴 『전습록(傳習錄)』이 들어와서 학자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이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서 이를 반박하였으므로, 양명학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주자(朱子)가 살아 있을 때 상산(象山)육구연(陸九淵)이 주자를 만나서 그의 성리학을 비판하였는데, 송나라 육구연의 학통을 명나라 양명(陽明)왕수인이 이어받아 양명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가장 핵심되는 논쟁은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해석이다. 주자는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을 주장하였으나, 육구연과 왕수인은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였다. 양명학의 기본 사상은 심즉리(心卽理), 지양지(至良知), 지행합일설이다. 심즉리(心卽理)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불교의 선학(禪學), 도교의 노장(老莊) 사상과 가까웠다. 양지(良知)를 가장 중요시하여 “양지(良知)에 이르는 것[至良知]”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목적이며, 양지(良知)에 이르면, “지식과 행동이 하나가 된다[知行合一說]]”고 믿었다. 최명길이, 주자학만을 숭상하던 조선 중기 사회에서 청나라의 실세(實勢)를 인정하고 청나라 태종과 타협하려고 하였던 것도 양명학의 토대 위에서 주자학의 이상론과 양명학의 현실론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의 마지막 ‘정통 왕조(正統王朝)’인 명나라는 당쟁(黨爭)북로(北虜)·남왜(南倭)로 인하여 망할 수 밖에 없는 약체의 왕조였고, 만주족의 정복왕조(征服王朝)인 청나라는 태조(太祖)누르하치부터 태종홍타지까지 ‘8기병(八騎兵)’을 거느리고 중국 명나라의 요동를 공략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시키기 직전에 있었다. 홍타지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영명한 군주였다. 그는 명나라의 후원 세력을 없애려고 먼저 몽고와 조선을 차례로 침입하여 복속시킨 다음에,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때 최명길은 조선을 점령하려는 것보다 복속시키려는 것이 홍타지의 목표라고 판단하여, 전쟁의 피해를 줄이려고 화의를 주장하였다.

홍타지는 명나라와 싸우는 데 필요한 전쟁물자와 지원군을 요구하였는데, 최명길은 화의를 맺고 홍타지의 요구에 응하여 세폐(歲幣)를 보내고 원군을 파견하였다. 최명길은 청나라의 실세를 인정하고 굴욕적인 외교 관계를 개선하여, 볼모로 잡혀 있는 소현세자와 대신들의 자제들을 송환(送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직후에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또 조선은 청나라와 종래 명나라 때의 외교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1644년 9월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죽고, 어린 아들 세조순치제가 즉위하였는데, 그의 숙부 예친왕(睿親王)도루곤이 ‘8기병’을 이끌고 명나라 북경을 점령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곧바로 청나라 정부는 심양서 북경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이때 최명길의 동생 최혜길이 동지사(冬至使)로서 청나라에 갔는데, 동지(冬至) 때까지 심양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다가, 청나라가 수도를 연경(燕京)으로 옮기는 바람에, 최혜길 일행도 북경으로 따라가서 새 수도 연경의 자금성(紫禁城)에서 순치제를 알현하고, 동짓날 하례(賀禮)를 드렸다. 이것이 조선 사신으로서 연경에서 청나라 황제를 알현한 최초의 기록이다.(『인조실록』 참고.)

그런데 이때부터 조선에서 정조사(正朝使)·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 등을 파견할 때마다 주자의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의 유신(儒臣)들은 연경으로 사신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천자(天子)는 중국 한족(漢族)에서 나오고 동이(東夷)의 만주족에서 나올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로 말미암아 조선 지식인들의 가치관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누군가 사신을 가서 청나라 만주족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에는 최명길의 외교적 실리론(實利論)이 김상헌·송시열의 명분론(名分論)보다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성품과 일화

최명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체격이 왜소하여 몸집이 잔약하고 키가 작았으나 말을 잘하고 지략이 많았다. 그 앉아 있는 모습이 금석(金石)처럼 단단하고 중후하여, 그 무거운 기운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번지는 듯하였다. 집에서 자제들도 무서워하여 감히 우러러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였다. 안으로 정신이 밝고 밖으로 총명함이 드러났다. 비록 몸은 옷도 가누지 못할 만큼 깡마르고 말은 겨우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지 못할 만큼 가늘었으나, 큰 의리를 주장하거나 큰 어려움에 당면할 때에는 남보다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고, 양단(兩端)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다.(「최명길 비명」 참고.)

젊어서부터 성리학과 양명학에 대한 글을 모두 섭렵하여 안으로 실력을 함양하고 밖으로 자기 주장을 쏟아냈는데, 주먹을 불끈 움켜잡고 당시의 세상을 모두 제도할 뜻이 있었다. 백사이항복과 현헌신흠 두 상국(相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 두 사람이 모두 최명길을 “원대한 그릇”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포저(浦渚)조익과 계곡(谿谷)장유와 연양(延陽)이시백 세 사람과 일찍이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4우(四友)’라고 일컬었다.(「최명길 비명」 참고.)

1626년(인조 4)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仁獻王后)구씨(具氏)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의논할 적에, 최명길과 이시백·조익·장유 네 사람이 각각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소장을 올려 쟁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인정이나 의리면에서 볼 때 형제와 같은데, 조정의 커다란 의논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다르고 서로 같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고, 마침내 한곳에 모여 끝장 토론을 벌여 해가 기울었는데도 끝내 서로 합치되지 않았다. 그들이 논쟁하는 것은 여전하였고 서로 배척하는 말도 또한 많이 하였지만, 네 사람의 친구들은 서로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인조의 생부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고, 생모는 구사맹(具思孟)의 딸 인헌왕후이다.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 어머니의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부르고, 1632년(인조 10) 아버지 정원군의 종호(宗號)를 원종(元宗)으로 추봉하면서 어머니도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봉하였다. 1626년(인조 4) 1월 인헌왕후가 돌아가자, 초상(初喪)에 김장생(金長生)은 인조가 선조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므로 ‘숙질(叔姪)의 복(服)’을 입어야 한다고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인조가 기년복으로 정해서 시행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9 참고.) 이때는 이귀와 최명길의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

최명길은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났는데, 문외출송 당하여 도성 밖에서 살다가, <인조반정>을 계획하여, 명망이 있는 김류·이귀 등을 끌어들여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정사공신 1등에 책훈되고, 1년 만에 그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자, 당시 출세하려는 젊은이들이 그를 많이 추종하였다. 이때 김류가 오래된 명망을 지닌 원훈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젊은 최명길은 김류에게 굽신거리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의 사이가 점차 벌어졌다.

목릉(穆陵: 선조 왕릉)을 개장(改葬)하는 문제 때문에 우참찬최명길이 좌의정김류와 서로 힐난하다가, 인조의 면전에서 김류가 희릉(禧陵: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의 옛 이야기를 인용하자, 최명길이 자신을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에 비견한 것에 대하여 엄청 분노하였다. 최명길은 병을 칭탁하고 상소하여 벼슬을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인조가 모두 윤허하지 않았었다. 김류와 최명길은 서로 의심하여 사이가 벌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더욱 앙숙이 되었다.

최명길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 이외에는 세상일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어서 사물을 잘 살피지 않았다. 한번은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왔는데, 최명길이 놀라면서, “네 말의 귀가 어찌 그리 기냐.” 하므로, 조카가 웃으며, “이것은 나귀이지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8 참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에 최명길이 화의를 주장하여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한 뒤로는 선비들이 최명길을 추종하는 자가 거의 없었는데, 오직 구봉서(具鳳瑞)만이 그의 심복이 되었다. 최명길이 이조 판서가 되자, 구봉서를 끌어들여 이조 정랑으로 삼고, 그가 말하는 것이면 모두 그대로 따랐으므로, 이에 무변(武弁)이나 음사(蔭仕)가 그의 손에서 나온 자가 많았다. 뒤에 구봉서가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을 때 사간원 정언(正言)김익희(金益熙)가 이것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인조실록』 참고.)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대율리(大栗里)의 언덕에 있는데, 두 부인과 합장하였다. 약천(藥泉)남구만(南九萬)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약천집(藥泉集)』 권17 「영의정 문충 최공 신도비명(領議政文忠崔公鳴吉神道碑銘)」) 박천(博川) 지천사우(遲川祠宇)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 별집 4 참고.)

첫째부인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의정부 좌찬성장만의 딸이고, 둘째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宗廟署)영(令)허인(許嶙)의 딸인데,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첫째부인이 아들이 없어서, 동생 최혜길의 아들 최후량을 후사로 삼았다. 그 뒤에 둘째부인이 아들 최후상(崔後尙)을 낳았다. 그 전에는 나라 풍속이 후사를 세운 뒤에라도 새로 아들을 낳으면 새 아들이 제사를 주관하였는데, 최명길이 말하기를, “이미 아비와 자식이 정해지면 저절로 천륜(天倫)의 순서가 생기므로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원하여, 최후량을 후사로 삼아서 세대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예를 아는 사람들이 옳다고 찬성하였으므로, 이를 조정의 법령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최후량은 아버지의 관작을 이어받아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다. 최후량이 최명길의 아들로서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서 8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최후량의 둘째아들이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이고, 셋째아들이 좌의정최석항(崔錫恒)이다. 최후상은 홍문관 응교(應敎)인데, 최석정을 후사로 삼았다.(「최명길 비명」 참고.)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약천집(藥泉集)』
  • 『명곡집(明谷集)』
  • 『곤륜집(昆侖集)』
  • 『서계집(西溪集)』
  • 『계곡집(谿谷集)』
  • 『계산기정(薊山紀程)』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담헌서(湛軒書)』
  • 『동계집(桐溪集)』
  • 『면암집(勉菴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당집(修堂集)』
  • 『순암집(順菴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연평일기(延平日記)』
  • 『우서(迂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곡집(霞谷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한수재집(寒水齋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