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具宬)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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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성 |
한글표제 | 구성 |
한자표제 | 具宬 |
분야 | 왕족/외척,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원유(元裕) |
호 | 초당(草塘), 초당(草堂) |
봉작 | 능해군(綾海君), 능해부원군(綾海府院君) |
시호 | 충숙(忠肅)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8년(명종13) |
사망 | 1618년(광해군10) |
본관 | 능성(綾城)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낙동(洛東) 고좌리(古佐里) |
증조부 | 구희경(具希璟) |
조부 | 구순(具淳) |
부 | 구사맹(具思孟) |
모_외조 | 평산신씨(平山申氏): 신화국(申華國)의 딸 |
형제 | (동생)구홍(具宖), 구용(具容),구굉(具宏) (누이)심엄(沈㤿)의 처, 권유남(權裕男)의 처, 김덕망(金德望)의 처,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조(仁祖)의 어머니, 이박(李璞)의 처 |
처_장인 | (첫째부인)하동정씨(河東鄭氏): 정억령(鄭億齡)의 딸→(자녀)3남 2녀 (둘째부인)전주이씨(全州李氏): 이갱(李鏗)의 딸→(자녀)1녀 |
자녀 | (1자)구인기(具仁基) (2자)구인후(具仁垕) (3자)구인학(具仁壆) (1녀)이잠(李潛)의 처 (2녀)유충걸(柳忠傑)의 처 (3녀)박린(朴潾)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성(具宬) |
총론
[1558년(명종13)~1618년(광해군10) = 6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원유(元裕)이고, 호는 초당(草塘)·초당(草堂)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좌찬성(左贊成)구사맹(具思孟)의 맏아들이고 좌의정(左議政)구인후(具仁垕)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구사맹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서 학문을 대성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판서(判書)이식(李植)·정승심지원(沈之源) 등이 배출되었다. 인조(仁祖)도 잠저에 있을 때 외삼촌인 구성(具宬)에게 글을 배웠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18)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옮겼다. 1591년(선조24) 이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서,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선조(宣祖) 일행이 몽진(蒙塵)하다가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오늘의 변란은 모두 수상(首相) 이산해(李山海)가 국사를 그르친 탓이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서 백성들에게 사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결국 이산해가 물러났는데, 이때부터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592년(선조25)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선조가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로 승진하였으며, 사헌부집의(執義)·사간원사간(司諫)·시강원 필선(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1593년(선조26)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좌부승지(左副承旨)·우승지(右承旨)·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 그 뒤 형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29) 주문사(奏聞使)로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장례원(掌隷院)판결사(判決事)·해주목사(海州牧使)·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35) 북인(北人)정인홍(鄭仁弘)·기자헌(奇自獻) 등이 서인(西人)을 공격할 때 우계(牛溪)성혼(成渾) 일파로 몰려서 홍주(洪州)로 유배되었다. 1604년(선조37) 아버지 구사맹이 죽자, 선조가 그를 석방하여 부친상을 치르도록 하였다. 1605년(선조38) ‘호종(扈從) 2등 공신’의 녹권(錄券)을 하사 받고, 유배에서 풀려났다.
광해군 시대 탄압
광해군 때 부총관(副摠管) 겸 특진관(特進官)으로 발탁되었으나, 북인 정인홍·유영경(柳永慶) 등이 정권을 잡자, 그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1618년(광해군10) 북인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는 대론(大論)을 일으킬 때, 백관들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광해군(光海君)에게 소청(疏請)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서인들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때 구성은 이미 병을 얻어 눈이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장서서 “이 논의에 나는 결코 참여할 수 없다.” 하고, 빈우(賓友)들에게 불참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구성 등 38인을 정청에 불참하였다고 불러서 경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간(臺諫)에서는 그들을 멀리 유배시키는 논의를 발의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심한 압박을 받던 구성은 1618년 2월 21일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는데, 향년 61세였다. 막내 아우 구굉(具宏)과 둘째 아들 구인후 등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획한 발단이 구성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순후하고 질박하였다. 그는 말을 몹시 더듬었는데, 비록 남들이 말을 더듬는 자기를 비웃더라도 결코 기세가 꺾이거나 풀이 죽지는 않았다. 선조가 의주에 몽진하고 있을 때 승지(承旨)인 그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말을 더듬거리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았으므로, 그 뒤에 선조가 다시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선조 앞에서 북인 이산해와 최영경(崔永慶)을 논박할 때는 당당하고 굽히지 않았다.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아서, 한번 글을 읽으면 깊은 뜻과 어려운 말들을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또 그는 마치 칼로 실을 끊듯이 사물의 이치를 정확히 분석하고 풀이하였는데, 경적(經籍)에 널리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전고(典故)나 씨족(氏族)의 보첩(譜牒)에도 두루 정통하였다. 그는 문장을 아름답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한결같이 익숙한 일반적 문투를 골라서 사용하였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낙동(洛東) 고좌리(古佐里)에 있다. 반정에 의하여 즉위한 인조는 외삼촌인 구성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하고, 능해부원군(綾海府院君)으로 추봉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택당집(澤堂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백사록(白沙錄)』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