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黨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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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당쟁 |
한글표제 | 당쟁 |
한자표제 | 黨爭 |
동의어 | 붕당지쟁(朋黨之爭) |
관련어 | 당화(黨禍), 당론(黨論), 당의(黨議), 붕당(朋黨), 붕당지화(朋黨之禍), 붕당지폐(朋黨之弊), 붕당화(朋黨禍), 붕당지해(朋黨之害) |
분야 | 정치/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당쟁(黨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보궐정오』 45년 2월 21일, 『영조실록』 2년 2월 25일, 『효종실록』 4년 1월 6일 |
붕당 상호 간의 대립과 분쟁.
개설
당쟁은 붕당 사이의 대립과 분쟁을 지칭하는데, 당대 자료에는 이와 관련하여 당화(黨禍)·당론(黨論)·당의(黨議)·붕당(朋黨) 등으로 표현되었다. 당쟁과 권력 투쟁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나 있었다는 점에서 통시적(通時的)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특히 붕당이 형성된 후의 정치 형태를 당쟁으로 표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서 당쟁이란 용어는 1719년(숙종 45) 2월 사망한 서종태(徐宗泰)의 졸기에 사관(史官)이 그의 정치적 성향을 표현하면서 “당쟁이 나라를 해치는 것을 심히 미워했다[深惡黨爭病國].” 한 것이 유일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숙종실록보궐정오』 45년 2월 21일). 다만, 이와 유사한 의미로 당화·당론·당의·붕당 등으로 표현되거나, 붕당지화(朋黨之禍)·붕당지폐(朋黨之弊)·붕당화(朋黨禍)·붕당지해(朋黨之害) 등으로 표현되었다(『영조실록』 2년 2월 25일) (『효종실록』 4년 1월 6일).
당쟁으로 표현되는 조선시대 붕당 상호 간의 대립과 분쟁은, 결과적으로 쟁권 쟁탈을 목적으로 한 권력 투쟁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 투쟁은 있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투쟁하는가 하는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근대 시대의 권력 투쟁은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칼을 휘둘러 권력을 잡으려는 무치주의(武治主義)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칼을 쥐어야 권력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붓으로 하는 권력 투쟁인 문치주의(文治主義)도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당쟁이 문치주의에 해당하는데, 중국의 신·구법당의 당쟁 같은 경우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인 신법의 시행 여부를 둘러싸고 그 계획자인 왕안석을 지지하는 신법당과 그 반대자인 사마광을 추종하는 구법당 사이의 대립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쟁이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나 등장한다는 점에서 통시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16세기 후반인 선조 연간 붕당이 형성된 후 정치 형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시기 정치 형태에 대해서 일제의 관학자인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를 당쟁의 기원으로 삼고 이후 당쟁을 동인과 서인의 붕당 형성, 노론과 소론의 분당 등으로 살폈다. 그리고 그 원인을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 송시열과 윤증의 개인 간 감정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의 붕당을 “주의(主義)를 가지고 상립(相立)하는 공당(公黨)이 아닌 사리(私利)를 가지고 상호 배제하는 사당(私黨)”으로 규정하였다. 시데하라의 이 같은 부정적 논리는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의 하나인 당파성론을 창출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이후 당파성론은 일제강점기 어용학자인 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나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등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되며,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 같은 부정적 논리에 대신해 안확(安廓)은 조선시대 정치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분이었고 대부분은 당파성론에 입각한 부정적 인식에 그쳤다. 해방 이후 상당 기간 일제강점기의 부정적 당파성론이나 당쟁론 등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도 이루어졌다. 4·19혁명 이후 이기백(李基白)은 정파 사이의 대립과 항쟁은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나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조선의 당쟁도 중앙 정계를 무대로 한 권력 대립에서 나타난 역사적 산물일 뿐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일제강점기의 당파성론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으며, 그 대표적인 연구 성과가 ‘붕당정치론’과 ‘사림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붕당정치론’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핵심은 공론을 앞세운 붕당 사이의 상호 비판과 공존 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붕당정치론’은 붕당 정치가 선조대와 광해군대의 과도기를 거쳐 인조 때 본격적으로 구현되고 숙종 때 파탄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이는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상을 정치사적 측면에서 밝히는 계기를 조성하여 이후 이 시기 정치사 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열게 하였다.
반면 ‘붕당정치론’의 핵심 논리인 붕당 공존이 권력 구성에서 보면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을 전제로 ‘사림정치론’이 제기되었다. ‘사림정치론’에서는 ‘붕당정치론’이 정치 운영 방식에 의거해서 제시된 개념이기에 이 시기 정치 형태를 규정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 시기 정치사를 주도한 세력은 사림으로, 이들은 성리학을 이론으로 하며 사대부이면서도 현덕(賢德)을 갖춘 군자들이 학문과 도덕과 도의를 강론하는 세력이었다. 그리하여 사림은 성리학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최종 목적을 두었다. 정치 운영 방식으로는 공론을 앞세우며 언관의 재상 비판과 견제, 그리고 붕당 상호 간의 의리와 명분 논쟁을 통한 상호 비판과 견제로 정의하였다.
조선시대 붕당 사이에 대립과 분쟁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현종대에 두 차례 발생한 예송(禮訟)이라고 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예송을 당쟁이 치열하여 그 폐해가 노골화된 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리학을 신봉하고 도학 정치의 실현을 정치적 이상으로 했던 사림에게 도학의 현실적인 구현 방식인 예법이 갖는 의미는 크다. 따라서 이를 당쟁이나 당쟁의 폐해로 표현하기보다는 사림 정치의 발전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붕당 형성 이후의 정치가 붕당 간의 대립으로 일관되지만은 않았다. 인조대 원종(元宗) 추숭 논의나 척화론(斥和論)은 서인과 남인의 상호 협의에 의한 공조 체제하에서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대동법 시행 등과 같이 붕당과 무관한 정치 문제도 있었다. 당쟁으로 표현하고, 당쟁의 안목에서만 본다면 이런 정치 현상은 간과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당쟁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의미하거나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을 가리키기에 하나의 정치 형태라고 볼 수는 없다.
결국 권력 투쟁에만 초점을 맞춘 당쟁이라는 개념으로 조선시대의 정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조선시대, 특히 붕당 형성 이후의 정치는 사림 정치 시기를 거쳐 왕이 주도하는 탕평 정치 시기, 그리고 이후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 시기 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시기별로 각각의 특징과 기능을 갖고 있었다.
참고문헌
- 『택리지(擇里志)』
- 『당의통략(黨議通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2』, 동방미디어, 2000.
- 이성무 외,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이종욱 외, 『한국사상(韓國史上)의 정치 형태』, 일조각, 1993.
-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이태진 편,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사화·당쟁편』, 범조사,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