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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가(居家) 선비 유계린의 ‘거가십훈’, 신동아, 2016.02.01]</ref>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ref>[http://www.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392 비극적인 삶 마친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처가 따라 해남 행, 어초은 윤효정 등 해남육현 길러내, 표해록,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C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 해남신문, 2012.03.19]</ref> 해남정씨와 결혼해 해남인이 된 금남 최부는 호남의 4대 학맥 중 한 맥인 [[최부 학파]]를 형성하며 해남의 학문 시대를 열었다. 최부는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6%8C%ED%95%99(%E5%B0%8F%E5%AD%B8) 소학]이 도학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당시 후학들에게 도학을 가르치던 교육자였다. 이런 관점에서 [[최부의 표해록]]은 교육 서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거가(居家) 선비 유계린의 ‘거가십훈’, 신동아, 2016.02.01]</ref>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ref>[http://www.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392 비극적인 삶 마친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처가 따라 해남 행, 어초은 윤효정 등 해남육현 길러내, 표해록,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C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 해남신문, 2012.03.19]</ref> 해남정씨와 결혼해 해남인이 된 금남 최부는 호남의 4대 학맥 중 한 맥인 [[최부 학파]]를 형성하며 해남의 학문 시대를 열었다. 최부는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6%8C%ED%95%99(%E5%B0%8F%E5%AD%B8) 소학]이 도학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당시 후학들에게 도학을 가르치던 교육자였다. 이런 관점에서 [[최부의 표해록]]은 교육 서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span style="font-size: 150%;">최부는 내러티브에 강했다. 최부의 제주에 대한 기록을 보면 허벅으로 물 긷는 기록은 최부(崔溥, 1454~1504)의 <탐라시 삼십오절(耽羅詩 三十五絶)>의 '허벅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負甁村婦汲泉去)'라는 구절은 15세기에 허벅을 지고 물을 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http://m.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119 허벅]은 물 긷는 용구로서 비교적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좁다. 대구덕 안에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2730 허벅]을 앉히고, 물이 든 허벅의 입구를 새(茅)로 틀어서 막는다. 돌길이기 때문에 찰랑대는 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또 허벅은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만일 사돈집에 상(喪)이 났을 때 상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팥죽을 쑤어갈 때도 허벅은 한몫을 한다. <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74989 허벅을 지고 가는 제주 여인을 그리다, 제민일보, 2011.11.2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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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50%;">최부는 내러티브에 강했다. 최부가 남긴 제주에 대한 기록을 보면 허벅으로 물 긷는 기록은 최부(崔溥, 1454~1504)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의 '허벅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負甁村婦汲泉去)'라는 구절은 15세기에 허벅을 지고 물을 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http://m.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119 허벅]은 물 긷는 용구로서 비교적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좁다. 대구덕 안에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2730 허벅]을 앉히고, 물이 든 허벅의 입구를 새(茅)로 틀어서 막는다. 돌길이기 때문에 찰랑대는 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또 허벅은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만일 사돈집에 상(喪)이 났을 때 상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팥죽을 쑤어갈 때도 허벅은 한몫을 한다. <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74989 허벅을 지고 가는 제주 여인을 그리다, 제민일보, 2011.11.22]</ref>
  
<span style="font-size: 150%;">제주도 연등절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1487년 최부의 「탐라시 삼십오절」이다. 제주도의 연등하는 풍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부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에서는 15세기 후반 사찰에서 연등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탐라시 삼십오절」은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록**에 삽입되어 전해지며, 또 1681년에는 이증도 **남사일록**에 옮겨 놓고 있다. 「탐라시 삼십오절」은 최부가 제주도 활동 중인 1487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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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50%;">제주도 연등절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1487년 최부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이다. 제주도의 연등하는 풍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부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에서는 15세기 후반 사찰에서 연등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은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록**에 삽입되어 전해지며, 또 1681년에는 이증도 **남사일록**에 옮겨 놓고 있다.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은 최부가 제주도 활동 중인 1487년에 쓴 글이다.  
  
嫌將歲月虛抛擲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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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50%;">嫌將歲月虛抛擲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照里鞦韆傳自昔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照里鞦韆傳自昔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僧刹了無香火時  절에는 향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僧刹了無香火時  절에는 향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騈闐簫鼓燃燈夕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김찬흡 외 옮김, **역주탐라지**(푸른역사, 2002), 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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騈闐簫鼓燃燈夕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김찬흡 외 옮김, **역주탐라지**(푸른역사, 2002), p.24-25.</span>
  
 
<span style="font-size: 150%;">최부는 연등날 밤 사찰에서 행해지는 제주도의 연등 풍속을 묘사하였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가 예로부터 전해져 지금도 시행되는 모습에서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연등회의 풍속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연등날 저녁이면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동원하여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절에 모여 향을 공양하고 악기를 동원하여 왁자지껄한 연등날 저녁을 즐기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백희가무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고려시기 연등회의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상원연등회가 금지된 시기였으나 민간에서는 고려시기의 연등 풍속의 특징을 잃지 않고 북과 퉁소로 흥을 돋우며 사찰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span style="font-size: 150%;">최부는 연등날 밤 사찰에서 행해지는 제주도의 연등 풍속을 묘사하였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가 예로부터 전해져 지금도 시행되는 모습에서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연등회의 풍속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연등날 저녁이면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동원하여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절에 모여 향을 공양하고 악기를 동원하여 왁자지껄한 연등날 저녁을 즐기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백희가무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고려시기 연등회의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상원연등회가 금지된 시기였으나 민간에서는 고려시기의 연등 풍속의 특징을 잃지 않고 북과 퉁소로 흥을 돋우며 사찰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2020년 10월 7일 (수) 10:19 판

교육자 최부

그동안 금남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의 가치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명나라 표해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많은 표해 기록 중에서 왕명으로 간행이 이루어진 것은 최부의 표해록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필가로서의 역할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즉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삶이다. 해남정씨[1]는 금강동(현 해리)에서 살았는데 해남정씨와 통혼한 5가문도 모두 금강동에 자리 잡아 이후 금강동은 해남 사족들과 학문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최부는 이곳에 와서 관서재를 열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금남을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고 했다. 첫째는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2]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3] 해남정씨와 결혼해 해남인이 된 금남 최부는 호남의 4대 학맥 중 한 맥인 최부 학파를 형성하며 해남의 학문 시대를 열었다. 최부는 소학이 도학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당시 후학들에게 도학을 가르치던 교육자였다. 이런 관점에서 최부의 표해록은 교육 서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부는 내러티브에 강했다. 최부가 남긴 제주에 대한 기록을 보면 허벅으로 물 긷는 기록은 최부(崔溥, 1454~1504)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의 '허벅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負甁村婦汲泉去)'라는 구절은 15세기에 허벅을 지고 물을 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허벅은 물 긷는 용구로서 비교적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좁다. 대구덕 안에 허벅을 앉히고, 물이 든 허벅의 입구를 새(茅)로 틀어서 막는다. 돌길이기 때문에 찰랑대는 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또 허벅은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만일 사돈집에 상(喪)이 났을 때 상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팥죽을 쑤어갈 때도 허벅은 한몫을 한다. [4]

제주도 연등절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1487년 최부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이다. 제주도의 연등하는 풍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부의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에서는 15세기 후반 사찰에서 연등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은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록**에 삽입되어 전해지며, 또 1681년에는 이증도 **남사일록**에 옮겨 놓고 있다.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은 최부가 제주도 활동 중인 1487년에 쓴 글이다.

嫌將歲月虛抛擲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照里鞦韆傳自昔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僧刹了無香火時 절에는 향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騈闐簫鼓燃燈夕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김찬흡 외 옮김, **역주탐라지**(푸른역사, 2002), p.24-25.

최부는 연등날 밤 사찰에서 행해지는 제주도의 연등 풍속을 묘사하였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가 예로부터 전해져 지금도 시행되는 모습에서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연등회의 풍속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연등날 저녁이면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동원하여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절에 모여 향을 공양하고 악기를 동원하여 왁자지껄한 연등날 저녁을 즐기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백희가무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고려시기 연등회의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상원연등회가 금지된 시기였으나 민간에서는 고려시기의 연등 풍속의 특징을 잃지 않고 북과 퉁소로 흥을 돋우며 사찰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풍작을 기원하는 놀이였다. 그네뛰기는 봄이 되면 여자들이 생산의 의미나 풍작의 주술적 의미를 담고 하던 놀이였다. 고려시대에는 궁중과 상류사회에서 성행하였고 백희가무에서 그네뛰기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층에서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멀리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평상시에도 즐겼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이다. 제주도 연등 풍습을 표현한 최부의 시각에서도 연등회가 제천기농(祭天祈農)의 성격을 이어가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5]


목차

소학

본문은 크게 내편(4권)과 외편(2권) 등 총 386장으로 돼 있다. 내편은 입교(立敎, 교육의 길), 명륜(明倫, 인간의 길), 경신(敬身, 수양의 길). 계고(稽古, 고대의 도) 등 총 214장이다. 외편은 가언(嘉言,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 착한 행동) 등 총 172장이다. 각 편의 모든 글은 기존 문헌에서 따왔다. 내편에 인용된 주요 문헌은 『논어』 『맹자』 『예기』가 전체 76퍼센트(162장)를 차지하고, 외편은 송대 사대부의 행실 사례가 64퍼센트(110장)를 차지한다.[6]

<소학>의 내편은 입교(入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그리고 계고(稽古)로 구성되는데, 앞선 세 가지를 3강령이라고 하며, 마지막(계고)은 성현의 행적을 통해 이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입교는 태교부터 가정교육을, 명륜은 오륜을, 경신은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실천자세를 서술한다. 외편은 계고와 마찬가지로 <소학>의 3강령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한대 이후 북송까지의 현인들의 행적을 담고 있다.

3강령은 교육, 윤리, 그리고 수양을 위한 실천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 입교는 스무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루고, 서른 살이 되면 아내를 맞이하는 것과 같이 일상생활의 의례를 포함한다. 이것은 아무래도 교육 방침이 제대로 지켜져야 이후 다른 교육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명륜은 각종 경전에 기록된 부부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인간이 왜 짐승과 다른지에 대한 유학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경신은 세 번째로 경건한 마음가짐, 몸가짐 등 태도의 중요성을 서술한다. 앞서 입교와 명륜이 교육의 기본적인 방향과 내용을 서술했다면, 경신은 그런 것을 실천하기 위한 자세를 논했다. <대학>의 3강령과 서술 방식에서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소학계’ 는 고려와 조선의 일반적인 契가 가지는 의미와는 달리 조선에 『소학』 교육을 정착시킨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둘째 ‘소학계’의 내용 전반은 『소학』이 실천서로서 조선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이 몰고 온 반주자학적 현실정치는 유교적 질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림들은 이 문제로 고뇌하였고, 결국 ‘수기치인’을 통하여 무너졌던 강상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나선 이들이 ‘소학계’였으며, 그 중심에 점필재 김종직과 그의 문인이자 조선의 대표적인 도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이었다.‘소학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로, 수기적 학문의 성향을 강하게 보인 김굉필ㆍ정여창 등의 부류와, 치인적 성향과 경세적 경향을 띤 남효온 등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일원은 아니었지만 함께 어울렸던 준걸재사에 정여창ㆍ박연이 포함되어 있고, 이심원 역시‘소학계’의 일원은 아니었다. 이러한 정황들은 이들이 같은 시기에 『소학』의 실천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보여 ‘소학동자’로 불리었던 김굉필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7]

사림파는 성종 치세 초반부터 소통과 교류의 장을 찾았다. 강응정(姜應貞), 남효온 등의 '소학계(小學契)'나 김굉필, 최부(崔溥) 등의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 등이었다.[8][9] 금남 최부는 수기적 모습을 보인 김굉필과 경세적 경향의 남효온을 합쳐 놓은 인물로 보인다.

소학동자들[10]

  • 김종직, 김굉필, 윤효정, 유계린, 임우리

기축옥사에서 화를 가장 많이 당한 것이 최부의 제자들[11]

  • 이발, 이중호

격물치지

주희는 진리탐구를 중시하고 왕수인은 도덕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해석의 차이는 먼저 글자의 뜻을 달리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치지의 ‘격(格)’을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한다’, 즉 ‘궁리(窮理)’의 뜻으로 이해한 반면 왕수인은 격에 자격의 뜻이 있다고 하여, 격을‘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 즉 ‘정기부정(正基不正)’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할 경우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지만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여야 할 ‘주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왕수인은 평소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주자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사상은 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용어에 포괄된다. 가톨릭이 객관주의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주관주의다. 가톨릭은 객관적 권위(교황)를 절대화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이 바이블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업이 객관주의라면 상업은 주관주의다. 농사는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상업에는 매번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16세기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농업에서 상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집권체제와 정착민의 삶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체제와 유목민의 삶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양명학이 대두되었지만 주자학에 밀려 세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주자학과 양명학을 중용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신유학을 구축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일이 아닐지.[12]

멀리 있으면 잘 알 수 없던 사람의 됨됨이가 가까이 대해 보면 잘 드러난다는 의미의 인격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격(格)은 가까이 마주 대한다는 뜻을 가진다. 물(物)은 질량이 있는 물질과 질량이 없는 빛을 통틀어서 물질세계의 모든 것을 일컫는다.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것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치지(致知)는 아는 것의 극치, 즉 대충 아는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정확하고 자세히 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격물치지는 사물을 놓고 최선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은 남들이 적당히 보고 넘기는 일을 철저히 관찰하고 조사하는 데서 발전한다. 물을 끓이는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한 와트나 바람에 날려 온 곰팡이로부터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 등 흥미로운 예는 무수히 많지만 나는 격물치지의 극치로 허블의 안드로메다 연구를 들고 싶다. 하늘의 별 중에는 금성이나 목성처럼 밝은 행성도 있고, 시리우스처럼 크고 밝은 별도 있지만 겨우 보일 정도로 멀리 있는 별들도 많다. 베텔기우스 같이 붉은 별도 있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보면 별 같기는 한데 구름처럼 퍼져 보이는 천체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안드로메다 성운(星雲)이다. 20세기 초반에는 이미 우리가 속한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의 집단인 것이 알려졌고, 자연스럽게 은하수가 우주의 전부인 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도 물론 은하수에 들어있는 좀 별난 천체로 치부되었다.

1920년대 초에 허블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안드로메다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윌슨산의 100인치 망원경을 사용해서 장시간 빛을 모아 사진건판을 현상하는, 지금 눈으로 보면 원시적인 방식으로 몇 년 동안 끈기 있게 안드로메다를 조사하던 허블은 그 성운 안에서 은하수 크기의 10배 이상 거리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했다. 내 키는 2m가 안되기 때문에 20m 거리에 있는 어떤 물체가 내 몸의 일부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드로메다는 은하수의 일부가 아니고 또 하나의 은하인 것이 밝혀진 것이다.

-철저한 관찰·조사에서 시작-

우주의 두 번째 은하를 발견한 허블은 그 후 수년에 걸쳐 20여개의 은하를 더 찾아냈다. 윌슨산 꼭대기 천문대에서 외롭게 성운 하나하나와 맞대결한 결과이다. 이처럼 1920년대에 허블이 관찰한 은하들은 모두 1천만 광년 이내의 거리에 있는, 비교적 우리에게서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 후 채 한 세기가 지나가기 전 오늘날 인간은 약 1백억 광년 거리에 있는, 그러니까 허블이 1920년대에 보았던 은하들보다 1,000배나 멀리 있는 은하까지 보면서 우주의 기원과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까지도 파악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인문적인 의문의 답도 격물에서 얻어진다니 역시 격물은 치지의 출발점인 모양이다.[13]

표해록 관련 참고내용

https://www.ilovesea.or.kr/img_upload/20140424/8340A97AB96E4DD58654882CBFDF850A.pdf https://www2.dhii.jp/nijl_opendata/searchlist.php?md=idl&bib=200014032 http://www.digerati.kr/mediawiki/index.php/%EC%B5%9C%EB%B6%80(%E5%B4%94%E6%BA%A5)_%EC%9D%BC%ED%96%89_%ED%91%9C%EB%A5%98%EC%82%AC%EA%B1%B4

https://kicho.tistory.com/tag/%EB%8A%98%EC%96%B4%EC%A7%80%EB%A7%88%EC%9D%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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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왜적, 요동 외교: 조공, 황화집, 표류인, 해양사 지리: 조선, 중국의 여정 문화: 조선, 중국 각각 관제, 과거시험, 학교제도, 복식, 음식, 명절 등 역사: 조선, 중국의 역사, 임정청사(상하이, 항주) 한문학: 조선, 중국의 문학가 번역: 한문, 고증 경영: 인사 경제: 자본주의 철학: 유교, 불교, 도교 과학: 기후, 천문, 수차 건축: 교량, 성 인물: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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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권1

喪人臣崔薄,自濟州漂流, 泊甌東, 過越南, 經燕北,以今六月十四日到靑 坡驛,敬奉. 傳旨, 一行日錄撰集以進.

상인(喪人)인 신(臣) 최부(崔薄)[14][15]는 제주(濟州)로부터 표류해서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I. Ch'oe Pu, while in mourning, went adrift from Cheju,1 landed east of Ou, and passed from south of Yüeh to north of Yen.2 On the 14th Day of this Sixth Month [July 22, 1488] I reached Ch’ðngp’a Station” and respectfully received a Royal edict for a diary of the journey. I have compiled it and now submit it.

1. 喪人=喪制라고도 한다. 부친상을 당한 최부가 喪中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自稱이다. 2. 는 秦漢시대 浙江 남부에 있었던 東國을 말한다. 甌東이란 東盛의 동쪽 지역 즉 절강 동남부 연해 지역을 가리킨다. 3. 越은 春秋戰國時代에 江蘇일대에 있었던 越國을 가리킨다. 越南은 월국의 남쪽 지역 즉 오늘날 강소 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4. 燕은 戰國時代 北京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燕國을 가리킨다. 燕北은 연국의 북쪽 지역 즉 河北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5. 이 해는 성종19년으로서, 明 弘治 원년이고, 서기 1488년이다. 6. 朝鮮 漢陽의 崇禮門 밖 약 3리의 거리에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지역에 해당한다. 한양을 出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驛으로서 兵曹의 직할이었다. 驛에는 3등馬 50필이 배정되어 傳命을 받으면 즉시 달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의 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세조3년(1457) 驛丞을 察訪이라 개칭하고 전국에 538개의 역을 두고, 이를 4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을 두었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察訪驛이라 불렀다. 역은 대체로 30리에 하나씩 두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형 등의 형편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성화(成化)23년 정미년 가을 9월 17일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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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참고

  1. 해남과 초계정씨(草溪鄭氏), 해남군민신문, 2015.11.28
  2. [http://shindonga.donga.com/Print?cid=521574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거가(居家) 선비 유계린의 ‘거가십훈’, 신동아, 2016.02.01]
  3. 비극적인 삶 마친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처가 따라 해남 행, 어초은 윤효정 등 해남육현 길러내, 표해록,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C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 해남신문, 2012.03.19
  4. 허벅을 지고 가는 제주 여인을 그리다, 제민일보, 2011.11.22
  5. 제주도 영등굿의 유래-연등회에서 영등굿으로의 변천
  6. '소학(小學)'은 어떤 책인가 - 구성과 내용
  7. [1]
  8. [정지교부계의 인물은 김굉필 선생을 비롯해 본관이 야로인 생원 송석충, 강진인 진사 최보, 고령인 진사 박담손, 고령인 진사 신희연 다섯명이었다]
  9. 15세기 후반 '기억투쟁과 철학운동'의 현재적 의미 [이종범의 사림열전 '사림열전'을 마치며]
  10. [조선 유학에 오늘을 묻다 ‘소학’ 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바꿨나?, [2257호]2013.05.20]
  11.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12. [주자학과 양명학, 어떻게 다른가 [2017년 5월 12일 / 제121호]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61 http://www.wooriy.com/news/articleView.html?idxno=3721]
  13. [[과학칼럼]격물치지와 안드로메다, 경향신문, 2005.08.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508181817061#csidxfe4253de8ceb1a3a1f3067d7b2b8564]
  14. Choe Bu
  1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