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金權)
총론
[1549년(명종 4)∼1622년(광해군 14) = 74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이조 정랑(正郞)과 호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이중(而中)이고, 호는 졸탄(拙灘)이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며,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릉참봉(顯陵參奉)김덕무(金德懋)이며,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충의위(忠義衛)윤린(尹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명인 김식(金湜)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예빈시(禮賓寺) 정(正)에 추증된 김숙필(金叔弼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가장 친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강계(江界)와 무안(務安)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西宮)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선조 시대 활동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81년(선조 14)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2년(선조 15)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이어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6)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교체되어, 예조 좌랑(佐郞)과 호조 좌랑·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585년(선조 18)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는데, 이때 의주목사(義州牧使)서익(徐益)과 함께 홍문관 수찬정여립(鄭汝立)에 대하여 “정여립이 못하는 말이 없을 만큼 율곡(栗谷)이이 선생을 헐뜯고 있는데, 만약 그 정상을 안다면 누가 정여립을 옳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통렬히 논박하다가, 동인(東人)들에 의하여 체직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8년 6월 1일) 1586년(선조 19) 병조 정랑이 되었고, 1588년(선조 21)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두 동생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정여립이 처형되었는데, 선조가 이전에 김권(金權)의 상소가 생각나서 “김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며 찾았다.(『선조수정실록』 22년 11월 1일)
1590년(선조 23)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23년 12월 25일),(『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이때 사헌부에서 좌의정정철(鄭澈)을 공박하려고 하므로, 예조 정랑으로 있던 김권이 이견(異見)을 내세우다가 파직되었다.(『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는 바람에 선조가 급하게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자, 미처 따라가지 못한 김권은 포천(抱川)의 산골짝으로 가는 사잇길을 거쳐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4년 2월 27일) 그해 10월 일행이 성천(成川)에 도착하였을 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에 임명되어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따라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분조(分朝)의 일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이조 좌랑을 겸임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선조실록』 26년 8월 16일),(『선조실록』 26년 8월 27일),(『선조실록』 26년 9월 21일) 한편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광해군 초기에 공신에 책훈되었다.[『잠곡유고(潛谷遺稿)』 권11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행가선대부호조참판김공시장(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嘉善大夫戶曹參判金公諡狀)」 이하 「김권시장」으로 약칭]
1594년(선조 27) 사간원 사간(司諫)으로서 어사(御史)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염찰(廉察)하였고, 1595년(선조 28)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을 거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선조실록』 27년 8월 17일),(『선조실록』 27년 9월 18일),(『선조실록』 28년 5월 25일),(『선조실록』 28년 6월 25일) 1600년(선조 33)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이 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사복시(司僕寺)정(正)으로 승진하였고, 그해 겨울에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선조실록』 33년 11월 4일],(『선조실록』 34년 1월 22일) 1603년(선조 36)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종부시(宗簿寺)정(正)이 되었다.(『선조실록』 36년 7월 19일),(『선조실록』 36년 11월 18일) 1605년(선조 38) 승문원 판교(判校)가 되었고, 1606년(선조 39) 상의원(尙衣院) 정이 되었다가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가 되었다.(『선조실록』 38년 7월 16일),(『선조실록』 39년 3월 21일),(『선조실록』 39년 6월 23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산릉도감(山陵都監) 낭청(郎廳)이 되어 목릉(穆陵 : 선조의 왕릉)을 조성하는 역사를 감독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6월 23일),(『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6일),[「김권시장」] 1609년(광해군 1) 목릉의 사석(莎石)이 무너지는 바람에 산릉도감의 관원들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었는데, 김권도 옥에 갇히고 자급(資級)이 깎였다. 곧 사도시(司䆃寺) 정에 임명되었다가 봉상시(奉常寺) 정으로 옮겼다. 1610년(광해군 2)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나, 1611년(광해군 3) 한강으로 조세 곡식을 실어 서울로 나르던 조선(漕船)이 여주의 경내에서 침몰하였으므로, 여주목사에서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광해군일기』 2년 3월 23일),[「김권시장」] 김권은 일찍이 종부시 정이 되었을 적에 선원록(璿源錄)을 감수(監修)한 노고가 있다고 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승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전주까지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청풍군(淸風君)에 봉해졌다.(『광해군일기』 4년 10월 9일) 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여, 춘추관(春秋館) 동지사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總管)을 겸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정권을 잡은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강화도(江華島)에 안치(安置)하였다가, 부사(府使)정항(鄭沆)으로 하여금 독살하게 하였다. 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경운궁(慶運宮)에 유폐시켰다. 모든 서인(西人)들이 이를 반대하였는데, 김권도 이에 반대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광해군일기』 7년 8월 18일),(『광해군일기』 8년 2월 12일) 그때 김권의 나이가 이미 67세였는데, 그는 노쇠하였다며 다리의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시사(時事)가 날로 더욱 참담해지자,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기 때문이다.[「김권시장」]
1617년(광해군 9) 대북의 이이첨 등이 마침내 대간(臺諫)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를 폐위시키자는 논의를 제기하였다. 허균(許筠)과 김개(金闓) 등도 유생(儒生)을 동원하여 하루에도 6~7차례나 상소하고, 또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에게 연명으로 상소하여 인목대비를 폐위하도록 청하게 하니, 광해군은 대신들에게 논의를 명하였다. 이때 기자헌(奇自獻) 등의 서인들이 차자(箚子)를 올려 인목대비의 폐위가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이 백관들을 정부의 뜰에 모아놓고 인목대비의 폐위를 의논한 다음에 왕에게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각자 올리게 하였는데, 이것을 <정청운동(庭請運動)>이라고 한다. 이때 병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헌의(獻議)하게 하였다. 서인들은 대다수 참여하지 않았는데, 김권은 눈물을 흘리며 “어찌 차마 이를 따를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대간에서 김권을 논죄하여, 마침내 평안도 강계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전라도 무안으로 이배(移配)시켰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4일),(『광해군일기』 10년 1월 13일),(『광해군일기』 10년 2월 4일),(『광해군일기』 10년 2월 6일),(『광해군일기』 10년 2월 7일),(『광해군일기』 10년 2월 15일),[「김권시장」]
김권이 무안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는 해인 1622년(광해군 14) “서궁의 대비(大妃)가 이미 시역(弑逆)을 당하였다”는 근거 없는 말이 사방으로 퍼졌다. 이때 서울에서 온 자가 김권의 배소(配所)에 도착하여 이에 대하여 말하니, 김권이 놀라 쓰러져 종일토록 통곡하였다. 이로부터 병을 얻어 식사는 이따금씩 하고 잠을 자지 않으며 오로지 술만 마셨다.(『광해군일기』 14년 2월 27일) 결국 병이 더욱 심해지자 자제에게 이르기를, “이 병을 나는 벌써 얻었다. 상구(喪具)를 빨리 준비하라”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나는 한이 없으나, 다만 늙은 누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 될 뿐이다”하였다. 병을 앓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그해 2월 13일에 적소(謫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은 74세였다.(『광해군일기』 14년 2월 27일),[「김권시장」]
성품과 일화
김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나, 내면은 강하고 곧아서,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4년 2월 27일) 키가 헌칠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하였다. 겉은 너그러운 듯하였으나 속은 실로 굳건하였다. 몸가짐이 겸손하고 말은 어눌하여, 평소 한 번도 남들에게 모질게 말한 적이 없었다.[「김권시장」]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접할 때 한결같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하였으나,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심해져 비록 일찍이 친절했던 사람일지라도 그 하는 일이 크게 옳지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매우 미워하여 단연코 교제를 끊었고, 비록 혹시 한 자리에서 마주치더라도 더불어 같이 말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에 백성들에게 오직 자상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간략하고 평이(平易)하게 다스렸으므로, 비록 혁혁한 명성은 없었으나, 그가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항상 그의 은덕을 기렸다.[「김권시장」]
김권은 일찍이 청요직(淸要職)을 거치다가, 1601년(선조 34) 이후 10여 년간 벼슬길이 침체되어 한직에 머물렀는데, 친구들이 모두 벼슬길이 트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으나 그는 마음 편하게 자기 분수를 지키며 개의치 않았다. 말년에 광해군 때 녹훈되고 봉군(封君)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기뻐하는 빛 없이 수심에 잠겨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게 무슨 공이 있겠느냐.” 하였다. 대체로 벼슬을 얻거나 잃거나 하는 영광과 치욕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 간소하고 조용하게 살았으며,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그의 대문 앞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쓸쓸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청빈한 생활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거친 음식을 즐겨 먹었는데, 벼슬길에 나선 지 40여 년 동안에 한결같았다.[「김권시장」]
김권의 누나 집이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었는데, 김권은 봉직(奉職)하는 날 이외의 여가에는 날마다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으며, 이유가 있어서 찾아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람을 보내어 그 이유를 알렸다. 새로운 물건을 얻거나 별미가 있으면 반드시 누나에게 나누어 보냈다. 대체로 김권과 누나는 나이 1년 차이로서 성장하면서 먹거나 쉴 때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5~6세 때에 누나와 함께 밤을 주으려 뒷동산에 올라갔는데, 누나의 광주리에 밤을 다 채운 다음에 자기 광주리에 밤을 담았다.[「김권시장」]
김권이 일찍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시가(市街)에서 외삼촌의 늙은 첩을 만났는데, 옷이 남루하여 거지같았다. 그러나 김권은 초헌(軺軒)에서 내려 공손히 읍(揖)을 하고 다정하게 말을 하였다. 온 시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김권은 내외 친척과 계(契)를 모아 사철 아름다운 계절마다 잔치를 벌여, 젊은이 노인 모두 모여 차례로 앉아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등 지극히 즐기다 헤어졌는데, 해마다 거듭되었고 명칭을 ‘수목계(修睦契)’라고 하였다.[「김권시장」]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洲) 금촌(金村)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형 김비(金棐)의 손자로 영의정을 지낸 잠곡(潛谷)김육(金堉)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 강원도 제천의 봉강서원(鳳岡書院)과 전라도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광해군 때 받은 공신 봉작은 추탈(追奪)되었으나, 인조가 잠저(潛邸) 때부터 김권과 가깝게 지내고 그 청빈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장사랑(將仕郞)이한장(李漢墻)의 딸인데, 1남을 낳았다. 아들 김흥상(金興祥)은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김전(金㙉)과 김경(金坰)을 낳았다. 김권의 부인 한산 이씨는 남편보다 32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김권은 죽어서 부인의 무덤에 같이 묻혔다.[「김권시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축록(己丑錄)』
- 『간양록(看羊錄)』
- 『동문선(東文選)』
- 『면암집(勉菴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송자대전(宋子大全)』
- 『사계전서(沙溪全書)』
- 『고대일록(孤臺日錄)』
- 『후광세첩(厚光世牒)』
- 『우계집(牛溪集)』
- 『월사집(月沙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정무록(丁戊錄)』
- 『청백일기(靑白日記)』
- 『포저집(浦渚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