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과(考課)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근무 태도와 실적 등을 기준으로 해마다 2번 관원을 평가하던 제도.

개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부터 고과가 시행되었다. 문무백관의 관제를 보면, 전최(殿最)의 고과는 이조(吏曹)에서 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근무 태도의 근면과 태만, 근무 일수, 송사 처결과 공부(貢賦) 납부 실적 등을 조건으로 고과의 항식을 제정하였다. 고과는 이조 고공사(考功司)의 직무로 배정되었는데, 내외 문무관의 공과(功過)와 선악(善惡)을 평가하였다. 고과가 제도로서 조금 더 체계를 갖춘 시기는 1423년(세종 5)이었으며, 그 후 수정 보완을 거쳐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과는 중앙과 지방 관료의 공적과 근만(勤慢)을 평가하여 출척(黜陟)을 공정하고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제도였다. 중앙집권의 정부 구조에서 왕권을 대행하는 관료가 잘 다스리도록 그들을 권면하고 징계하는 제도의 제정은 불가피하였다. 고과를 통하여 책임 있는 정치를 구현하고 백성들의 권익을 보호하여 국가와 사회의 안정된 질서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내용

고과는 근무시간과 일수 및 실적 등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첫째는 근무시간을 철저히 지켰느냐의 여부였다. 정부의 관원들은 근무시간이 묘시(卯時)부터 유시(酉時)까지였다. 해가 짧을 때에는 한 시진을 늦추어 진시(辰時)부터 신시(申時)까지로 정하였다. 묘시는 오전 5~7시, 유시는 오후 5~7시, 진시는 오전 7~9시, 신시는 오후 3~5시에 해당하였다. 주요 관사에서는 퇴근 후 1명이 직숙원(直宿員)으로 남아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초저녁에 직숙 관원의 명단인 생기(省記)를 작성해 밀봉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들은 야간 통행증인 표신(標信)을 승정원에서 받아 순찰하였으며, 다음 날 아침에 그 표신을 반납하였다. 자기 차례에 직숙하지 않은 관원은 파출(罷黜)하였다. 종묘서(宗廟署)·문소전(文昭殿)·활인서(活人署) 관원 및 사직서(社稷署)와 전곡(錢穀) 업무를 다루는 여러 관사의 관원은 적어도 1명은 공적 회합에 참석하지 않도록 하였다.

둘째는 근무 일수 및 잡고(雜故)의 통계였다. 연말마다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에서는 여러 관사 관원의 실제 근무 일수 및 잡고를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6품 이상은 근무 일수가 900일, 7품 이하는 근무 일수가 450일이 차면 관직을 옮겨 주었다. 종친부(宗親府)·의빈부(儀賓府)·돈령부(敦寧府) 관원 중에서 각 1명을 제외한 나머지 관원, 그리고 상서원(尙瑞院)직장(直長) 이하,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 이하,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관원, 체아직(遞兒職)을 받은 자는 근무 일수에 구애받지 않았다.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당하관도 근무 일수가 차면 모두 승진시켜 임명하고 그 나머지 관원들은 같은 직위에 전임시키되, 현능(賢能)하고 근로(勤勞)하는 자와 7품 이하의 관원은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근무 일수가 찬 관원에게는 관계(官階)를 올려 주었다. 무록관(無祿官)도 같았지만, 당상관은 그렇지 않았다. 6품 이상은 5고3상(五考三上)인 자에게, 7품 이하는 3고2상(三考二上)인 자에게 관계를 올려 주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기서 5고3상이란 5번의 고과를 치르는 가운데 3번 이상 상등(上等)을 받는 것이고, 3고2상이란 3번의 고과 가운데 2번 이상 상등을 받는 것을 말하였다. 의금부(義禁府)의 당하관과 제거(提擧)·제검(提檢)·별좌(別坐)·별제(別提)·별검(別檢) 등의 무록관은 근무 일수 360일이 차면 서용하였다.

관찰사(觀察使)도사(都事)는 근무 일수 360일, 수령은 1,800일, 당상관이나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 수령·훈도(訓導)는 900일이 차면 바로 전임시켰다. 임지를 옮긴 수령은 전의 근무 일수를 통산하여 전임시켰다. 농번기에는 전임시키지 않으며, 춘분(春分) 전에 근무 일수가 50일 이하인 자는 전임시킬 수 있었다. 병조에서 관직을 옮기고 품계를 올려 주는 규정도 이조와 같았다. 중추부(中樞府)의 1명, 훈련원(訓鍊院)정(正)이나 주부(主簿) 이상의 1명, 도총부(都摠府)의 부장(部將) 이외에는 모두 근무 일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관직을 옮겨 주었다.

반면에, 결근한 날의 수가 많은 자에게는 일정한 제재를 가하였다. 만 1년 동안에 병으로 30일을 결근한 자는 파직시켰다. 또 종친(宗親)이나 대소인원(大小人員)으로서 회합할 때에 병을 핑계 삼아 참석하지 않은 자는 사헌부와 종부시(宗簿寺)에서 조사하여 왕에게 아뢰고 논죄하였다. 녹사(錄事)나 서리(書吏) 중에 사유가 있어 근무하지 못한 날이 100일이 차거나 사유 없이 출근하지 않은 일수가 30일이 찬 자는 근무 일수를 삭제·파출하였으며, 29일 이하인 자는 속전(贖錢)을 거두고 도로 임용할 수 있었다. 파출된 자가 뒤에 도로 그 자리에 취직하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주었다. 상중(喪中)에 있던 자가 상기(喪期)를 마치고 도로 임용될 때에는 상을 당하기 전의 근무 일수를 통산하여 주었다. 서리의 명부(名簿)는 예조에서 날인하여 근만(勤慢)·간위(奸僞) 등의 근무 태도를 살피도록 하였다.

셋째는 업무 실적에 대한 평가였다. 외방의 경우 관찰사는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실적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수령칠사란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할 때 힘써야 할 7가지 사항으로서, 농상(農桑)을 성하게 하고, 호구(戶口)를 늘리며, 학교를 진흥시키고, 군정(軍政)을 닦으며, 역(役)의 부과를 균등하게 하고, 소송을 간명(簡明)하게 하며, 아전들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는 것을 말하였다.

사송 업무를 담당하는 형조·한성부·개성부·장예원(掌隸院)은 계절마다 마지막 달에 당하관이 그들의 송사 처결(處決) 건수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송사의 업무 부담은 대·중·소사로 구분하였다. 각 계절의 3개월 동안에 한성부와 장예원은 소사의 경우 30건, 대사의 경우 20건을 기준으로 하였다. 형조는 소사의 경우 50건, 대·중사의 경우 30건을 기준으로 하였다. 실적이 이 기준에 미달한 관원은 1계(階)를 강등시켰다. 한편 개성부는 건수에 구애받지 않았다.

넷째는 범죄의 유무였다. 의친(議親)이나 공신(功臣)이 십악(十惡) 외에 사죄(私罪)를 5번 범하면 사면(赦免) 전의 사건을 가리지 아니하고 왕에게 보고하여 파직시켰다. 한산인(閑散人)은 1년이 경과된 뒤에야 서용하였다. 한산인은 의친이나 공신으로 산관(散官)이 된 자를 일컬었다. 그리고 포폄(褒貶)에서 하등급의 성적을 받은 자와 사죄(私罪)를 범하여 파직된 자는 2년이 지나야 서용하였다. 의친이나 공신이 하등급의 성적을 받으면 1년이 경과되어야 서용하며, 당상관은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고신(告身)을 회수당했다가 도로 받은 자도 역시 파직된 날로부터 근무 일수로 계산하였다. 이 규정은 병조도 같았다. 또 죄를 범한 자와 하등급의 성적을 받은 자는 장부에 적어 두어 참조할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4가지 기본 평가 항목 외에, 고과에는 권장(勸獎)을 목적으로 특별 규정을 두기도 하였다. 강(講) 시험의 성적에 따라 고과 횟수나 그 성적을 상벌로 적용하여 관원의 자질 향상과 사기 진작을 도모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총민한 문신들은 식년(式年)마다 간택하여 경서(經書)를 1부(部)씩 나누어 주어 강습하게 하고, 왕 앞에서 전강(殿講)을 시키거나 명관(命官)이 강 시험을 보았다. 이 시험에서 연달아 3차례 통(通)을 받은 자는 고과 1번을 받은 것으로 쳐 주고, 연달아 3차례 불통(不通)을 받은 자는 고과 1번을 삭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관원에게는 10일마다 제조(提調)가 그들이 읽은 책을 강하게 하고 또 이문(吏文)을 짓게 하여 분수(分數)를 주고, 연말에 통산하여 등급을 정하였다. 1등은 3명을 넘지 못하게 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1등으로 합격한 자는 고과에서 상(上) 1개를 받은 것으로 쳐 주고, 5차례 1등을 한 자는 품계를 올려 주었다. 당하관의 최고 품계인 계궁(階窮)일 경우에는 관직을 올려 주었다.

사자(寫字)하는 자도 또한 성적을 매겨 두었다가 전최(殿最)할 때 참작하였다. 부본(副本)·주본(奏本)·자문(咨文)·표(表)·전(箋)·방물장(方物狀) 중 20건을 서사(書寫)한 자는 고과에서 상(上) 1개를 받은 것으로 쳐 주었다. 한어(漢語)·이문(吏文)·사자(寫字)에 뛰어난 자는 비록 범죄를 저질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더라도 중범(重犯)이나 사죄(私罪)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계속 근무하게 하였다. 7품 이하는 4계절의 중간 달에 도제조와 제조가 모여 앉아 그들이 읽은 책의 3곳을 강하게 하여, 다 약(略) 이상의 성적을 얻은 자에게는 예에 따라 승진시켜 주고, 조통(粗通)의 성적을 얻은 자는 승진시켜 주지 않으며, 불통의 성적을 얻은 자는 파직하였다. 훈련원 습독관이나 선전관 등도 고강하여 얻은 분수(分數)를 고과에 참작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의 고과는 고려의 제도를 수용하여 건국 직후부터 시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현종 9) 8월에 관리들의 1년 동안 실제 근무한 날짜와 휴일을 적어서 올리게 하고 공과를 고과하는 연종도력(年終都歷)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1370년(공민왕 19)에는 고공관(考功官)에게 각사의 근무 태도를 고과하게 하였다. 관직자는 해가 뜨는 시각에 출근하고 한낮이 되어서야 퇴근하게 하였으며, 매월 육아일(六衙日)에 육부(六部)와 대성(臺省)의 관원들이 직접 이 정사를 왕에게 아뢰게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고과제는 조선에 이르러 더욱 발전된 체계를 갖추어 시행되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에는 조선태조 즉위 때 교시한 고과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보면, 평정은 선(善)·최(最)·악(惡)·전(殿) 등 4등급으로 나누어졌다. 각 등급의 기준은 선이 공(公)·염(廉)·근(勤)·근(謹), 최가 전야 확대[田野闢]·호구 증가[戶口增]·부역 균등[賦役均]·학교 진흥[學校興]·사송 간결[詞訟簡], 악이 탐(貧)·포(暴)·태(怠)·열(劣), 전이 전야 황폐[田野荒]·호구 감손[戶口損]·부역 번다[賦役煩]·학교 피폐[學校廢]·사송 지체[詞訟滯] 등이었다. 이 기준에는 각각 분수(分數)를 정하여 매겼으며, 그 분수의 많고 적음을 고찰해서 상·중·하를 정하여 승진시키고, 선·최가 모두 없는 자는 내쫓도록 하였다.

이 고과법의 반포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397년(태조 6)의 기사를 보면, 각 도 감사(監司)로 하여금 대소 군민관(軍民官)의 정치 성적, 유학(儒學) 및 의학교수관과 역승(驛丞)의 유·무능 여부를 조사하여 기록하고 아뢰게 한 바 있다(『태조실록』 6년 8월 23일). 그러다가 태종대에는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유 없이 출근하지 않는 자는 파직시키는 궐사파직(闕仕罷職)의 법을 세웠다. 『대명률(大明律)』에는 1일이면 태(笞) 10대이고, 1일마다 1등의 죄를 더하여 최대 장(杖) 80대까지 벌주고 과오를 기록해 둔다고 하였다. 『육전(六典)』에는 1일이면 그 이름 아래에 권점(圈點)하고 3일이면 종[奴]을 가두며 20일이면 계문(啓聞)하여 파직한다고 하였다. 태종대에는 후자인 『육전』을 따르도록 하였는데, 이는 『경제육전』의 20일을 결근하면 파직시킨다는 법을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태종실록』 14년 10월 17일). 이 조항은 후의 『경국대전』 체제에서 일수를 30일로 늘려 완화시켰다.

조선의 행정과 조직 체계가 점차 안정되어 나가자, 고과의 평가 기준과 상벌은 보다 구체화·세분화되었다. 1423년(세종 5)에 경외관의 고과법이 제정되었는데, 외방 수령들은 해마다 2번씩 성적을 고과하여 5번의 고과를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3상(三上)부터 5상(五上)까지는 가자(加資)하고, 3중(三中)부터 5중(五中)까지는 먼저 받은 품질을 그대로 두며, 1하(一下)가 있으면 모두 파면시키도록 하였다. 경관(京官)도 또한 5번의 고과를 채웠는데 3상부터 5상까지는 가자하고, 3중부터 5중까지는 이전의 품질대로 두되 통정대부에 이르러 그치고, 1하(一下)가 있으면 모두 파면시키도록 하였다. 그중 그 관직에 성과가 있는 자는 본관(本官)에 그대로 두어 공조(工曹)·인수부(仁壽府)·인순부(仁順府)의 낭청(郎廳)으로 올려서 제수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5일).

이러한 평가 기준은 무관인 삼군진무(三軍鎭撫)에도 적용되었다. 다른 관직으로 옮길 때 5번 고과에 3번 상등이었던 자는 4품 이상은 승자(陞資)하고, 5·6품은 예전대로 초자(超資)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참외진무(參外鎭撫)의 고과는 모두 없애 버렸다(『세종실록』 21년 5월 19일). 그리고 승문원의 훈도관과 학관의 경우에는 근무 일수뿐 아니라 독서한 것, 이문의 제술도 고과 대상이었다. 이들은 범죄로 인하여 산관(散官)이 되었을지라도, 중범(重犯)과 사죄(私罪)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본품(本品)의 권지(權知)를 시켜 본원에 항상 출근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월 3일).

의정부의 사인(舍人)·검상(檢詳), 승정원의 주서(注書), 사헌부와 사간원은 본래 근무 상황을 기록하는 공좌부(公座簿)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예종대에 이르러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공좌부를 두어 근무 일수를 계산하는 근거로 삼도록 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5일). 그들은 날마다 기록하는 장부를 근거로 근무 일수를 계산하였으나 이 경우 사실 검열에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 초에는 특히 수령의 지방 통치를 중시하여 각 도 관찰사의 포폄(褒貶)을 강화하거나 왕이 직접 지방관의 고과를 점검하고자 하였다. 상고(上考)에 있는 자가 만약에 가벼운 범죄를 저지르면 파(罷)하고, 장오(贓汚)·불법 등의 일이 있으면 관찰사도 추국(推鞫)하여 죄를 처단하였다(『성종실록』 2년 5월 12일). 그리고 수령이 교체되어 해유(解由)를 발급할 때에 빙고(憑考)할 수 있도록 각 도 관찰사가 여러 고을의 호구의 수를 연말 회계에 기록하고, 다시 증감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성종실록』 5년 1월 16일).

이러한 지방관의 고과는 나중에 왕이 열람할 수 있도록 지방 수령의 현부(賢否)를 기록한 첩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1708년(숙종 34)에 처음 만든 이것을 숙종은 ‘대주첩(代柱帖)’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영조대에도 수령 중 10번의 고과에서 10번 상(上)을 받은 사람을 뽑아 첩(帖)을 만들어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이름을 ‘속대주첩(續代柱帖)’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사강목(東史綱目)』
  • 『반계수록(磻溪隨錄)』
  • 『삼봉집(三峰集)』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