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加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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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근무 성적·공로·왕명 등에 근거하여 관품을 올려 주거나 수여하는 제도.

개설

가자는 조선건국 직후부터 시행된 인사행정 중의 하나로, 관원의 고과(考課) 성적, 근무 일수, 왕의 특별명령에 따라 관계(官階)나 관품(官品)을 올려 주는 제도였다. 동시에 관료의 강(講) 혹은 제술 시험 우등자나 논상(論賞)·추은(推恩)·공로 등의 해당자에게도 가자가 행해졌다. 정해진 기간을 근무해야 자급(資級)을 올려 주는 순자법(循資法)과 자손 등이 대신 자급을 받도록 하는 대가제(代加制)와 연동하여 시행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1)에 제정된 관계 조직에서 문무 산계(散階)는 처음 벼슬길에 들어서거나 진급·퇴직하는 모든 문무관이 받게 되어 있었다. 산계는 관직 체계의 상하 질서를 나타내는 위계였기 때문에, 관직과 관계없이도 취득·승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산계제도는 세종조에 이르러 정비되었으며, 가자도 그에 발맞추어 체계화되었다. 가자는 관직자의 포폄(褒貶)을 비롯하여 관직 후보자의 선발, 공훈의 포상이라는 성격으로 인하여 폭넓게 시행될 수 있었다.

내용

가자는 모든 문무 관원과 군역에 종사하는 군사에게 시행된 관계 승진제도였다. 문무 관원은 근무 성적에 따라 가자되었고, 군사는 정해진 근무 일수가 찰 때마다 가자되었다. 또 왕실의 경사를 기하여 왕이 내린 특별명령, 친공신(親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 책록, 전쟁에 공로를 세운 장졸 등 수천 명 이하에게 1계(階)나 2~3계를 올려 주는 가자가 있었다. 이 경우는 근무 성적이나 근무 일수에 구애되지 않았고, 그 대상이 정3품 당상관 이상일 때에는 본인 대신 아들이나 형제 등에게 주었다[代加].

문무관 6품 이상은 5고3상(五考三上) 이상, 7품 이하는 3고2상(三考二上) 이상이면 1계가 가자되었다. 여기서 5고3상은 6개월마다 1회씩 총 5번의 고과에서 받은 근무 성적이 상등(上等)·중등·하등 중에서 3번 이상 상등을 받는 것이고, 3고2상이란 3번의 고과 가운데 2번 이상 상등을 받는 것을 말하였다. 무록관(無祿官)도 같았으며, 당상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겸사복(兼司僕), 내금위(內禁衛), 선전관(宣傳官),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충의위(忠義衛), 갑사(甲士), 족친위(族親衛), 파적위(破敵衛), 정병(正兵), 충순위(忠順衛), 충찬위(忠贊衛), 장용위(壯勇衛), 팽배(彭排), 대졸(隊卒) 등 각급 군사는 1년 내내 교대로 주어진 임무에 종사하였는데, 근무 일수가 39일~1,080일이 되면 1계가 가자되었다. 가령 충찬위는 39일, 팽배·대졸은 1,080일이었다.

왕의 즉위, 세자 질병 쾌차, 세자와 세손 탄생, 대행왕과 왕비 신위 종묘봉안 등 때에는 모든 백관에게 1계를 가자하거나 대가하였다. 태조 즉위에 공을 세우고 책봉된 개국공신과 태조 원종공신 이후 조선말까지 책봉된 모든 친공신과 원종공신은 1~3계를 가자받거나 1계를 대가받았고, 각종 변란에 공을 세운 장졸은 1~3계를 가자받았다.

이외에도 장기간 문교 부서에 근무하는 관원의 근무 의욕 고취, 문무관의 재예 향상, 치적이 뛰어난 외관의 표창 등을 위한 특별 가자제가 실시되었다. 예문관에 결원이 생기면 그 관직에 차하위 관직자를 차례로 승진시키고 품계를 올려 주었다. 성균관(成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박사(博士) 이하와 훈련원(訓鍊院)참군(參軍) 이하도 이와 같았다. 영안도(永安道) 홍원(洪原) 이북(以北)·평안도(平安道) 박천(博川) 이서(以西)의 교관(敎官)은 임명할 때 1계를 올려 주었다. 경관(京官)과 외관(外官)은 포폄과 고과에서 각각 10번 모두 상(上)을 받은 자에게 상(賞)으로 1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문신과 제술을 담당하는 관서의 관원에게는 일정한 시험을 통하여 우등자에게 가자를 시행하였다. 여러 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사사(私師)에게도 가자를 행하도록 하였다. 문신은 종3품인 중직대부(中直大夫) 이하의 경우 해마다 봄·가을로 의정부에 모이게 하여 의정부 및 제관(諸館) 당상관이 표(表)·전(箋)·시(詩)·문(文) 중 1가지를 시험 보였는데, 그 성적의 차례를 왕에게 보고하여 1등은 1차에, 2등은 2차에, 3등은 3차에 차례로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제술 담당 관서로는 홍문관과 승문원이 대상이었다. 홍문관 관원은 각기 읽은 책을 장부에 기록해 두고 당상관이 매월 1차례 강(講) 시험을, 3차례 명제(命題)를 내어 제술 시험을 보였다. 나이 40세가 찬 자는 시험을 면제하였다. 그 성적을 월말에 왕에게 보고하고, 연말에 그동안의 성적을 통산하여 5차례에 걸쳐 1등을 한 자는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승문원 관원에게는 10일마다 제조(提調)가 그들이 읽은 책을 강(講)하게 하고, 또 이문(吏文)을 짓게 하여 분수(分數)를 주고 연말에 통산하여 등급을 정해 왕에게 보고하였다. 1등은 3명을 넘지 못하였다. 1등으로 합격한 자는 고과에서 상(上) 하나를 받은 것으로 쳐 주고, 5차례에 걸쳐 1등을 한 자는 품계를 올려 주었다.

유생의 스승에게도 가자의 혜택이 부여되었다. 예조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유생에게 날마다 독서하게 하거나 가르침을 준 스승의 관직과 성명을 장부에 기록하여 관리하였다. 과거를 치른 뒤에 이 장부 기록에 근거하여 가르친 유생 중 문과 급제한 서울 유생 3명(지방은 1명) 혹은 생원(生員)·진사(進士) 10명(지방은 5명 이상)을 배출한 스승은 왕에게 보고하여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였다.

이외에 10관(貫) 이상의 절도를 5번 먼저 고발한 자, 강도를 3번 먼저 고발한 자는 품계를 받았는데, 원래 품계를 가지고 있는 자는 기존의 품계에 더하여 주도록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 시행된 가자는 고공사(考功司)에서 담당하였다. 989년(고려 성종 8)에 경관(京官) 가자제를 시행하여, 5품 이상은 왕의 명을 받는 취지(取旨)로, 6품 이하는 4번의 고과 기간을 거치는 4고(四考)로 각각 가자하였다. 이것이 공양왕 3년에는 3년마다의 공적 평가 3재고적(三載考績), 3번의 고과로 출척하는 3고출척법(三考黜陟法)으로 개정되었다.

이러한 고적법(考績法)의 일부로 시행된 가자제는 조선시대에도 적극 수용되었다. 건국 직후에 경관은 문반과 무반 당상관에 한하여 15개월에 1계를 올려 주는 가자를 시행하였다. 무반 3품 이하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 후 고적의 성적에 따른 포상으로써, 경관은 5고3상, 곧 3상부터 5상까지 가자하고, 수령도 5고3상 이상이면 가자하며, 현령(縣令)이나 현감(縣監)을 제수할 때에는 마땅히 4품으로 가자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5일). 수령은 매년 2번씩 고과를 통하여 근무 성적을 평가하였는데 5고3상은 5번의 고과에서 3번 이상 상(上)의 성적을 받았음을 말한다.

이 시기에 서반의 가자법도 제정되었다. 포폄하는 법이 없어 가자할 수 없었던 서반에서, 삼군(三軍)상호군(上護軍)·대호군·호군·내금위(內禁衛) 등은 매년 봄·가을에 기사(騎射)·보사(步射)·무경(武經)을 시험하여 동반과 동등하게 5고3상 이상이면 가자하였다. 칠서(七書)에 능통한 자는 기사·보사에 합격하지 못하였더라도 가자하도록 하였다. 갑사(甲士)의 경우 실제 근무 기간이 만 30개월이 된 자는 정한 식(式)에 의하여 가자하고, 또 이미 4품으로 관직을 그만둔 자는 가자하더라도 본디 품계보다 높지 않도록 하였다(『세종실록』 7년 7월 13일).

이러한 문무의 가자 규정은 1444년(세종 26)에 일부 개정되었다. 경외의 문무 참외관은 당상관이나 참상관과 달리, 3고2상 이상이면 1계를 가자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1월 6일). 30개월의 5고를 15개월의 3고로 그 기간을 축소해 주는 대신에, 평가는 보다 엄격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가자법은 세종 연간에 대체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고적법이 확대되자 가자의 적용 대상 관원의 범위가 늘어났다. 각 관(官)의 교도(敎導)와 내의원 등의 의원이나, 도승(渡丞)과 역승(驛丞), 전함겸대별좌(前銜兼帶別坐)에게도 가자의 혜택을 부여하였다. 길주(吉州)·경성(鏡城)·경원(慶源)의 각 익(翼)천호(千戶) 등도 4상(上)인 자에게 가자하도록 하였고, 외관으로서 경관에 임명된 자는 달수와 성적을 통산하여 가자하도록 하였다. 숙위를 담당하는 내금위는 30개월이 차면 가자하고, 겸사복(兼司僕)도 이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함길도 4진(鎭)의 자제는 숙위에 보충하였다가 2년이 차기를 기다려 가자시켜 체차하고, 돈령부(敦寧府)에서 유복지친(有服之親)을 서용할 때에는 벼슬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면 처음에 8품을 제수하고 관직에 제수된 자는 15개월 만기를 기다려서 가자하였다. 승문원 이문전업자(吏文專業者)의 가자법 개정에서는 역서와 산학 생도에게 도목 때마다 강하여 통(通)을 많이 받은 자를 가자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확대 경향은 1471년(성종 2)에 이르러 모든 조관(朝官)에게 적용되었다. 참상(參上)은 근무 일수 900일을 채우고 포폄이 5고3상인 자, 참하(參下)는 근무 일수 450일을 채우고 포폄이 3고2상인 자에게만 가자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의친(議親)으로 구성된 돈령부는 직사(職事)가 없는 관서의 특성상 포폄의 등제(等第)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포폄을 없애고 단지 근무한 날만을 상고하여 가자하게 하였다(『성종실록』 2년 6월 4일).

가자는 본래 경외관의 고과의 일부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시행 과정에서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 및 개정이 이루어져 『경국대전』에서는 여러 규정으로 완성되었다. 가자는 국가와 사회의 통합과 질서 유지를 위한 한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은 관원이 아닌 자에게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공신의 논상(論賞), 전쟁과 정벌에서의 군공(軍功), 해청(海靑) 진상의 감고(監考)에 대한 포상, 관인의 복권(復權), 국가 행사 후의 상전(賞典), 과거와 시취(試取) 우등자, 도적의 퇴치 공로자, 왕실의 경사로 인한 추은(推恩), 충효열 포상과 노인의 우대 등을 사유로 가자가 행해지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가자제는 조선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나갔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최승희, 「조선시대 양반의 대가제」, 『진단학보』 60, 1985.
  • 한충희, 「조선 세조~성종대의 가자 남발에 대하여」, 『한국학논집』 12,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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