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千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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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진관체제(鎭管體制) 정비 이전에 지방군을 관할하던 하급 무관직.

개설

천호(千戶)는 원나라의 군제를 수용한 고려의 관직으로, 조선에서도 계속 존재하였다. 원래 만호(萬戶) 등과 더불어 관할하던 민가의 수를 나타내는 직책이었으나 점차 진장(鎭將)의 품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고려후기에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육군과 수군(水軍) 조직에 활용되었다. 몇 차례 개편을 통해 천호 5품, 부천호 6품으로 정해졌으며, 군을 통솔하던 토착 조직 체계의 속성은 엷어지고 무관직으로만 기능하였다. 진관 체제가 편성되면서 사실상 기능하지 못했고, 조운선을 호위하는 임무만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고려후기에 원나라의 군제를 수용하면서 사용했던 관직이었는데 조선왕조가 개창된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원나라에서는 만호, 백호(百戶) 등과 더불어 관할하는 민가의 수에 따라 이름이 붙은 관직이다. 그 후 점차로 진장의 품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변하였다. 특성상 고려후기 만호부가 설치된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설치되었는데, 이는 육군과 수군에 모두 해당되었다.

육군의 경우, 그 전형이 양계(兩界) 지역에서 발견된다. 양계에 설치된 만호부의 ‘만호’가 조선 창건 이후 약 10년이 경과할 무렵부터 소멸됨으로써 이 지역 특유의 국방과 행정을 결합시킨 익군(翼軍)을 지휘하는 토착 조직 체계는 천호를 정점으로 구축되었다. 이는 각 고을에 소속된 천호, 백호로 기능했을 것이다.

한편 만호부가 없어지는 것을 계기로 양계의 군익도(軍翼道)가 중·좌·우의 3익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 익군을 지휘하는 장교의 직책이 익천호(翼千戶)와 익백호(翼百戶) 등이었다. 1407년(태종 7) 각 익(翼)마다 3명의 천호를 두도록 규정되었고(『태종실록』 7년 9월 2일), 2년 뒤에는 각 익의 아래에 설치된 중·좌·우 소(所)마다 부천호(副千戶) 1명씩 두도록 하였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결국 각 익마다 중·좌·우의 천호소(千戶所)가 설치되고, 그것에 천호·부천호 각 1명씩을 두게 된 것이었다. 함길도의 경우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조직되었다.

군익도 소속의 당번 익군을 지휘하는 익천호와 익백호는 각 고을 소속 천호, 백호와 구별되었다. 하지만 양자가 원래부터 구분되지는 않았는데 전자의 모(母) 집단이 후자였기 때문이다. 익천호는 처음에는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인 산관직(散官職)으로서, 상천호(上千戶) 5품, 부천호 6품이었으며(『태종실록』 13년 7월 21일), 해당 품계에 맞는 중앙의 경관직(京官職)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앙 관료들의 반발로 토관(土官)과 마찬가지로 실제 자급을 내려 받았다.

본디 세습되는 천호직(千戶職)이 4군 6진을 비롯하여 북방 영토가 개척됨에 따라 새로운 인물이 임명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차츰 달라졌다. 군익도의 병마절제사가 도의 도절제사에게 천거한 뒤 시험을 거쳐 임명되도록 정해졌다. 아울러 봄가을로 근무 평가인 포폄(褒貶)을 실시하여, 다섯 번 가운데 네 번이 ‘중(中)’이거나, 한 번이라도 ‘하(下)’를 받으면 박탈되었다. 이로써 천호는 세습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그리고 점차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 조직이 갖춰져 천호의 기능을 대신함에 따라 약화되면서 소멸되었다.

수군의 경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1398년(태조 7)에 수군의 노고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관직을 설치하면서 천호의 품계를 4품 이상으로 정하였다. 육군에 비해 좋은 대우였다. 1413년(태종 13)에 5품은 천호, 6품은 부천호라고 정하여 육군과 일치시켰다. 그리고 1409년(태종 9) 수군만호와 천호에 대해서도 포폄을 실시하였다.

1414년(태종 14)에는 후임자에게 그 사무와 소관 물건을 인계하고, 재직 중의 회계와 물품 관리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는 제도인 해유식(解由式)을 적용하였다(『태종실록』 14년 12월 10일). 아울러 1416년부터 실제로 근무했던 달수를 헤아려 서용하였다. 이로써 예전의 요소는 없어지고 수군 조직 안에서만 기능하는 무관직으로 정착하였다.

변천

1457년(세조 3) 진관 체제 수립과 연관되어 지방 군제가 개편되자 천호는 육군과 수군 두 조직에서 모두 실제 역할이 없어졌다. 다만 바닷가에서 조세용 물품을 실은 조운선을 호송하는 역할만 남았다. 1455년(단종 3) 경기·충청·전라도 등에서 병선을 거느리고 관할 지역의 조운선을 호송하도록 하였다(『단종실록』 3년 1월 19일). 이는 왜구나 해적의 약탈에서 조세용 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배마다 영선(領船) 1명을 두고, 10척당 통령(統領) 1명, 20척당 천호 1명씩을 두도록 하였다. 영선과 통령은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선정하여 임명하며, 천호는 해운판관이 골라서 호조에 보고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만약 조세 물품을 실은 배 5척이 파손되면 천호에게는 장(杖) 100을 치고 근무 일수를 삭감하며, 10척이 파손되면 온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도록 하였다. 다만 풍랑 등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경우에는 그렇게 시행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재룡, 『조선초기사회구조연구』, 일조각, 1984.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이재룡, 「조선전기의 수군」, 『 한국사연구』 5,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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