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水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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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연해의 각 포(浦)에 배치되어 해상이나 수상(水上)에서의 전투를 담당하던 병종.

개설

고려 이전에도 수상에서 전투를 하는 수군과 담당 관서가 존재하였고 전쟁에서의 활약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때까지는 수군 제도가 법적으로 확립되지 못하였다.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에 대비하여 수군 조직이 재건되었고 연해의 주요 거점인 각 포에 수군이 배치되어 교대로 입번하여 근무하도록 하였다. 최초에는 수군 보다는 기선군(騎船軍) 혹은 선군(船軍)으로 많이 불렸다. 수군은 세종대에 이르러 군액, 병선(兵船) 등의 규모와 제도가 정비되었고 전국 연안의 요충지에는 기선군이 두루 배치되어 해상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였다. 수군은 각 도별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의해 통괄되었지만 연안의 요충지인 포에 만호(萬戶)가 배치되어 기간 조직을 이루었다. 15세기 후반부터 수군은 점차 지위가 하락하면서 조선후기에는 칠반천역(七班賤役)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고려 말 왜구 격퇴에 큰 역할을 한 기선군은 조선 건국 초기에도 매우 중요시되어 육수군(陸守軍)과 함께 국방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후 기선군은 꾸준히 확장되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5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당시 조선군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기선군의 복무형태는 좌·우 두 영(領)으로 나눈 교대 근무였는데 이는 영진군이나 수성군이 4교대인 것을 고려하면 다소 과중하였다. 기선군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충청도, 경기, 황해도를 제외한 지역에는 약간의 수군이 있을 뿐이었다. 수군은 양인층의 의무 병종의 하나로 가장 군액이 많았다. 최초에는 연해민만을 대상으로 충원하였으나 이후 연해에서 먼 곳의 내지인(內地人)들도 충원 대상이 되었다.

성종 초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수군의 군액과 근무 형태, 편제 등이 법제화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총원은 48,800명이었고 2번으로 나누어 1개월씩 교대 근무하도록 하였다. 수군은 자손에게 수군역이 세습되고 다른 군역을 지지 않도록 하였다. 도목(都目)은 1월에 하였고 근무 일수가 360일이 차면 가계(加階)하여 종4품 영직(影職)에서 거관(去官)하였다. 거관하는 자가 계속 근무할 경우에는 450일까지 허용하되 정3품에서 그치도록 하였다. 수군들에게는 일종의 신분증인 둥근 원패(圓牌)를 주었다. 수군 편제도 육군과 같이 진관체제에 따라 각 도마다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편제되어, 주진에는 수군절도사, 거진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제진에는 만호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당번인 수군은 함상 근무가 원칙이었으나 성종 때부터 포진(浦鎭)에 성보(城堡)가 건설되면서 육상 근무가 많아졌다. 이로 인해 수군과 육군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따라서 수전을 포기하고 육상에서 왜구를 막자는 이른바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이 나타났다. 이는 수군의 허설화를 가져왔다. 아울러 16세기 군사체제의 이완과 함께 수군의 각종 잡역 동원 등이 나타났다. 1년 중 6개월의 과중한 부담과 함께 함상 근무와 각종 잡역 동원으로 인해 다른 병종에 비해 부담이 매우 과중하였다. 따라서 역 부담이 무거운 수군의 입속을 꺼리게 되면서 양인 중 세력이 없는 자만 수군에 충원되는 경향이 나타났고, 성종대 수군의 세전(世傳)이 규제되면서 점차 천역(賤役)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중 수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재정비되어 1593년 통제영(統制營)을 설치하여 경상, 전라, 충청의 3도 수군을 통제사가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도권과 강화도의 해상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 황해, 충청도의 수군을 지휘할 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하였다. 조선후기 수군의 인원이 부족하였으므로 숙종대에 수군 강화를 위하여 수군속오법(水軍束伍法)을 실시하였다. 수군속오법이란 양인, 천인을 혼성하여 종래 좌·우령이 교대로 근무하던 체제에서 3령으로 나누어 3교대하게 함으로써 복무 여건을 개선하기도 하였다.

의의

수군은 조선시대 단일 병종으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전국 연안의 요지에 두루 배치되어 사실상 국방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군사상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이에 따라 외침이 있을 때는 제일선에서 수군이 제지하고 적이 상륙하는 경우에는 영진군이 나서서 전투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울러 임진왜란 중 그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연해의 각 포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수군 체제는 통제영, 통어영을 통해 대규모로 편성되어 일본이나 청나라의 해상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방상현, 『조선초기 수군제도』, 민족문화사, 1991.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근세조선전기편』, 1968.
  • 장학근, 『조선시대 해양방위사연구』, 창미사, 1987.
  • 이재룡, 「조선전기의 수군」, 『한국사연구』5,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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