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관(宣傳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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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측근에서 왕명 출납과 군무(軍務) 처리 등을 맡던 무반 경관직(京官職).

개설

선전관(宣傳官)은 1457년(세조 3)에 가전훈도(駕前訓導)를 선전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성립하였다. 군무를 비롯하여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였으나, 특별히 왕의 측근에서 왕명 출납을 맡아 서반(西班)승지(承旨)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시되었다. 이로 인해 서반의 경관직이면서도 문신이 임명되기도 했다. 선전관에는 법전에 규정된 정원의 선전관 이외에 여러 겸선전관(兼宣傳官)이 있었다. 본래 무예와 강서(講書) 시험을 통과한 문무 겸비자로 제수되었다. 선전관을 역임한 경우에는 공신(功臣) 자제들처럼 아들에게 음서 취재(取才)가 허용될 만큼 우대받는 관직이었다.

담당 직무

1457년 병조(兵曹)의 “가전훈도의 칭호는 근거가 없으니 선전관으로 개칭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이면서 선전관이 등장하였다(『세조실록』 3년 3월 20일). 가전훈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데, 진법(陣法)을 배우거나 왕의 명령을 받아 동상에 걸린 군사들을 구제하며, 선전표신(宣傳標信)을 가지고 가서 시위군(侍衛軍)의 지휘관 등을 처벌하는 일 등을 수행하였다. 무슨 경로로 설치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부족하여 밝히기 어려우나 ‘가전(駕前)’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왕의 어가(御駕) 앞, 곧 측근에 있으면서 왕명을 전달한 듯하다.

선전관의 직무에 관해 『경국대전』에는 구체적인 규정이 없으며 다만 2명이 형명(形名)으로써 대궐 안 근처에서 직숙(直宿)한다고 되어있다. 형명이란 깃발과 북 등을 사용하여 군사들의 서고 앉음과 나아가고 물러가는 등의 동작을 지휘하던 신호법의 하나였다. 왕의 행차나 훈련을 위해서 실시하는 사냥 등에는 반드시 형명 절차를 쓰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선전관이 이를 담당하였다는 것은 선전관이 왕의 측근에서 군대를 동원하는 과정에 참여했음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강무를 실시하고자 할 때 어가를 수행하는 선전관 등을 소집해서 형명 절차 따위를 강의하기도 했다(『세조실록』 7년 2월 21일).

선전관의 기본적인 임무는 시위(侍衛)·입직(入直)이었다. 특별히 왕의 가장 측근에서 수행하도록 하였다. 한때 선전관을 3명씩 입직시키기도 했지만 『경국대전』에는 2명으로 규정되었다.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출납하는 것도 기본 업무였는데, 군사 분야에 관한 사항을 주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성 내외의 야간 순찰을 감독하는 감군(監軍)으로 낙점을 받으면 대궐에 들어가 숙배하고서 행순(行巡) 사항에 대한 납패(納牌)·수패(受牌)를 담당해야 했다. 아울러 궐문을 지키고 여닫는 일을 담당하며 선전표신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전관은 기본 임무 외에도 군사 조치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활동에 간여하였다. 먼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군대를 징발하는 임무에 동원되었다. 일례로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터지자 선전관경임(慶絍) 등을 보내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의 병력 2,000명을 거느리고 오게 해서 교외(郊外)에 주둔하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던 적이 있었다(『세조실록』 13년 7월 21일). 최고위급 장군이 아닌 선전관을 파견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왕의 신뢰도가 높았으며 실제 왕의 측근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의미했다.

군사를 훈련시킬 때 마땅히 장수는 싸움에 임하여 적(敵)을 막아내는 조치를 익혀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병법을 습득하게 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에 선전관에게 병서(兵書)를 내려주고 읽도록 하였으며, 심지어 그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의 근거로 삼도록 했다. 즉, 선전관이 예비 장수로서의 자질을 닦아 유사시에는 즉각 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선전관은 치안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중앙과 외방을 망라하여 중대한 죄를 범한 죄수를 체포하는 일에 선전관이 동원되었다. 때때로 명을 받아 도성의 내외를 순찰하면서 도적들을 방비하거나 사나운 맹수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는 일, 화재 따위를 예방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선전관은 무관직이었지만 문관도 제수되어 군사 이외의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먼저 내관(內官)사관(史官) 등과 함께 제사(諸司)의 비위(非違)를 적발하는 일에 동원되었다(『성종실록』 2년 6월 17일). 사관과 함께 형옥(刑獄)을 살펴보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4년 1월 15일). 심지어 난리를 일으키려고 모의한 혐의가 있는 자의 집에 가서 문서를 수색하기도 했다(『중종실록』 14년 3월 2일). 임진왜란 중에는 내장산(內藏山)에 봉안(奉安)하였던 영정(影幀)과 사책(史冊)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기도 했다(『선조실록』26년 7월 17일).

선전관을 군자감(軍資監) 등 여러 관사(官司)에 나누어 보내 전세(田稅)의 수납을 감찰하게 하였다(『성종실록』 7년 6월 2일). 흉년이 심하게 들어 굶주리는 백성이 늘어나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했던 진제장(賑濟場)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선전관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성종실록』 2년 3월 23일). 비가 몹시 내려 수재(水災)가 일어났을 때 가옥이 무너진 곳을 살펴보고 구원하는 일도 선전관이 맡았다(『세조실록』 10년 7월 17일). 때때로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보내 유생이 얼마나 기거하고 있는지를 파악하였다. 정시(庭試)를 실시하기에 앞서 유생이 식당에 출입한 횟수를 적은 도기(到記)를 가져와서 살피게도 했다.

선전관은 지방에 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구리 채굴을 감독하는 일에도 종사했는데, 구리를 캐는 데 군인을 동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세조실록』 10년 8월 5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전관을 보내기도 하였다(『세조실록』 6년 10월 13일). 온천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보내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4년 3월 6일).

변천

『경국대전』에 의하면 선전관의 정원은 8명인데 정3품, 종3품, 종4품, 종5품, 종6품, 종7품, 종8품, 종9품 각각 1명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선전관이 활동하였다. 다른 관직으로서 선전관직을 겸한 겸선전관이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1507년(중종 2) 병조에 지시하여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차출하되, 원래 설치한 선전관 8명과 겸선전관 10명 모두 무과 출신으로 추천하여 임명하라.”고 하였다(『중종실록』 2년 9월 19일). 이처럼 때때로 겸선전관의 숫자가 정원보다 많았다. 후대의 『속대전』이나 『대전통편』에서는 아예 법으로 규정되었다.

겸선전관의 설치 시기는 가전훈도를 선전관으로 개칭했던 때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1457년 9월 기존의 문무 관직자에게 겸직으로 선전관 임무를 맡기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미 초창기부터 문관이 선전관을 겸할 수 있었다. 특히 문신 장군인 유장(儒將)을 양성한다는 이유로 무예에 출중한 문신을 골라서 임명하는 사례가 많았다(『중종실록』 4년 1월 24일). 다만 대간이나 홍문관원에게는 선전관을 맡기지 않았다. 대간은 그 임무가 막중하고 홍문관은 경연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너무 신진 관원으로만 채워지면 업무에 능숙하지 못해 일 처리가 어렵다며 군무(軍務) 능통자와 당상관을 선전관으로 제수하기도 했다.

선전관은 원칙상 시험에 통과해야 임명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시험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당하관(堂下官)·부장(部將)의 시험과 동일했다. 즉, 득점한 화살 수가 4발[矢] 이상이고 강서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다만 현임(現任) 내금위(內禁衛)는 강서 시험만으로 뽑았다. 과목의 경우 우선 표적의 거리가 240보(步)인 경우에는 목전(木箭)으로 1발 이상을 득점하면 강서 시험만으로 뽑았다. 표적 거리가 180보인 경우에는 1발 이상을 득점해야 했다. 강서에서는 『병정(兵政)』·『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 가운데 1서(書)에 통(通)하고, 무경칠서 즉, 『손자(孫子)』·『오자(吳子)』·『사마법(司馬法)』·『울요자(尉繚子)』·『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삼략(三略)』·『육도(六韜)』와 『병요(兵要)』 가운데 스스로 원하는 1서에서 약(略)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했다. 즉, 문무를 겸비해야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선전관은 사수(仕數), 즉 근무한 날이 720일이 되면 교체하도록 하였다. 다만 처음으로 관직을 받은 자는 사수를 계산하지 않고 근면이나 태만 정도를 고찰하여 승진 또는 강등시켜 임명하게 했다. 참상관은 사만(仕滿), 즉 정해진 근무 일수 900을 채워야 가계(加階)할 수 있었으며 7품 이하는 사수 450일만 채우면 되었다. 고위직 관원이 지나치게 빨리 품계가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선전관은 왕 측근에서 군사를 비롯한 중요 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특별히 우대받았다. 공신이나 실직(實職) 3품 이상의 자손 등과 함께 선전관을 지냈던 자의 아들에게는 매년 1월에 실시하는 음자제(蔭子弟)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시험에 합격하면 품관직에 서용하였는데 녹사직(錄事職)을 원하면 들어주었다.

『경국대전』 「병전」 ‘번차도목’에는 단지 정원 8명만 근무 때에만 녹봉을 받는 체아직(遞兒職)으로 둔다고 했을 뿐 소속 관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후에 선전관을 정직(正職)으로 만들고 인원수도 늘리며 관청도 별도로 설치하였다. 『속대전』에 이르러 선전관이 정3품 아문으로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한다고 규정되었다. 정원은 21명으로 정3품 당상관이 1명이다. 종6품 이상이 3명인데 품계를 정하지 않으며[無定品], 종9품은 19명으로 하되 그 안에 음서 출신자가 제수되는 남행(南行) 2명을 두었다. 겸선전관은 모두 55명으로 정했다. 겸선전관은 종6품 이상으로는 문신겸선전관이 5명이며 무신겸선전관은 38명이다. 종9품으로는 무신겸선전관만 12명 두었다. 품계를 정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다른 관직에서도 보이는데 관직에 대응되는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적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합당한 자리를 수여하기 위하여 마련한 제도였다.

친공신(親功臣)의 아들에게는 선전관의 취재 시험을 면제해주었다. 공신에 대한 우대 조치이며 그만큼 선전관이 중요한 직위였음을 말해준다. 참상관을 선전관으로 임명할 때에는 품계를 전에 지냈던 관직의 품계에 따라서 하도록 했다. 품계를 정하지 않는 무정품이었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참외관(參外官) 두 자리와 무신겸참외관 한 자리는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인사인 도목(都目) 때마다 금군(禁軍) 중에서 천거를 받은 자에게 실시한 시험에 합격한 자를 심사하여 임명하도록 했다. 참외관은 모두 사수 720이 차면 6품으로 승진하도록 했다.

『대전통편』에서는 선전관의 정원을 다시 조정하여 24명으로 하였다. 당상관은 3명을 더 두어 모두 4명으로 만들었으며, 그중 1명을 행수(行首)라 하여 수석으로 삼았다. 참상관은 6명, 종9품은 14명으로 했다. 겸선전관은 모두 52명인데 참상관은 40명이며, 그중 문신겸선전관이 2명이다. 이들은 다른 관직으로 옮겨도 여전히 선전관의 직함을 띠도록 했다. 종9품의 겸선전관은 12명이었다.

한편 당상관과 당하관을 막론하고 네 자리는 승전기(承傳岐)로 삼아 왕명의 전달을 전담시켰다. 이들은 6개월간 근무한 후 승진되거나 또는 선전관 내 다른 관직으로 이동했다. 당상관 가운데 변방의 방어사(防禦使)를 지낸 적이 없다면 선전관 임기가 끝난 후 즉시 방어사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미 방어사를 거친 자는 즉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추천하였다. 참상관은 6품으로 선전관이 되어 5품으로 임기를 마친 경우 곧바로 4품으로 추천하는 등 품계마다 1계(階)를 더하였다. 이 경우 만약 지방의 3품 수령이나 병마우후(兵馬虞候)를 거쳤으면 선전관 임기 후에는 당상관직에 제수하였다. 참하관으로서 근무 일수가 15개월이 차면 6품으로 승진시켰다. 선전관의 수석인 행수는 문신이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 경우 이조(吏曹) 참의(參議)나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副提學) 임용 후보자 가운데 임용이 확정된 사람을 추천하여 제수하였다.

『대전회통』에서는 선전관의 정원을 참상관 1명을 더 두어 25명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무신겸선전관은 50명으로 하였는데 이 가운데 참상관은 40명, 참하관은 10명으로 조정했다. 문신겸선전관으로는 홍문관·예문관 참외관과 주서(注書)로서 6품에 승진하는 자로 임명하였다. 무신겸선전관으로는 선전관 후보자로 천거받은 자만 임명될 수 있었다. 즉, 문무관 중에 정예에 해당되는 자를 선전관에 임명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박홍갑, 「조선 전기의 선전관」, 『사학연구』 41, 1990.
  • 장필기, 「조선 후기 선전관 출신 가문의 무반 벌족(閥族)화 과정」, 『군사』 42,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