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庭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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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뜰에서 치르는 문무과 시험

개설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시험으로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이 정해졌다. 합격자들에게는 문과의 회시나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정식 과거로 처음 설행된 것은 1542년(중종 37)이었다. 조선시대에 설행된 정시는 모두 189회이며 급제자는 2,473명이었다.

정시가 정식 과거로 승격한 것은 1542년(중종 37)이었다. 정식 과거로 승격된 이후에도 종래 성격의 정시가 시행되었다. 선조 이후에 와서야 정시가 정식 과거로 시행되는데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을 정하며 녹명도 하지 않았고 상피제도 적용되지 않아 유생들이 몰려들어 공정한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초시의 제도를 두어 초시 합격자에게 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갖추어진 것은 1743년(영조 19)이었다. 정시의 운영 규정은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정시는 궁궐의 뜰에서 시험한다는 뜻이었다. 왕이 사학(四學)이나 성균관의 유생들을 궁궐 뜰에 모아 놓고 제술이나 강경을 시험하였다. 제술을 시험하는 것을 정시라 하고 강경을 시험하는 것을 전강(殿講)이라 하였다.

학문을 권장하는 목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으로 합격자는 문과 출신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에 따라 포상하였다. 한 품계씩 올려 주거나(『연산군일기』 7년 2월 12일), 수석한 사람에게는 전시 또는 회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直赴)의 특전을 내렸다(『중종실록』 2년 5월 26일)(『중종실록』 3년 2월 4일). 수석 이외의 합격자에게는 말을 내려 주거나 사슴 가죽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중종실록』 3년 3월 19일).

정시는 자주 설행되었다. 1509년(중종 4)의 경우 1년에 3번 설행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4년 3월 1일)(『중종실록』 4년 5월 16일)[(『중종실록』 4년 10월 24일). 성균관이나 사학의 유생에게 정시를 보일 때에는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을 기준으로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1520년(중종 15)의 경우 사관(史官)을 성균관과 사학에 보내어 유생의 출석부인 도기(到記)를 가져다가 원점을 헤아려 본 후 원점 30점이 되는 사람에게 정시에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5년 2월 24일).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이 매우 적을 때에는 원점을 15점 이상으로 낮추어 응시하게 하였다(『명종실록』 2년 2월 7일).

출석 성적이 좋은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에게 제술시험을 보여 그 우열에 따라 전시 또는 회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의 특전을 주었고, 성적에 따라 급분(給分)하여 4분(分), 3분, 2분을 주어 다음 과거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중종실록』 18년 8월 3일).

처음에는 유생을 대상으로 정시를 시행하였으나 1522년에 서반(西班) 군직(軍職)으로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정시를 볼 수 있게 하였다(『중종실록』 17년 5월 1일).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할 목적에서 실시된 정시는 처음에는 정식 과거로 설행되지 않았다. 정시의 절차를 전시(殿試)의 예에 따라 시험을 시행한 것은 1532년이었다. 합격자는 갑과(甲科) 1명, 을과(乙科) 1명, 병과(丙科) 3명을 차례대로 써서 방(榜)을 붙였다. 문무가 일체라는 뜻에서 무사들에게도 과장을 열도록 하였다(『중종실록』 27년 2월 11일).

전시의 예에 따라 시험을 시행하였다 해도 아직 정식 과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534년의 정시에서도 수석 합격자를 비롯한 성적 우수자에게 자급을 올려 주고 차등을 두어 말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중종실록』 29년 11월 1일).

변천

정시가 정식 과거로 설행되어 합격자에게 문과급제를 내린 것은 1542년(중종 37)이었다. 유생들을 근정전 뜰에서 시험 보게 하여 진사(進士) 이건(李楗) 등 4명을 뽑아 급제 출신(及第出身)을 주되 차등을 두었다(『중종실록』 37년 11월 12일). 실제로 『국조문과방목』에 ‘정시방(庭試榜)’이 처음 등장한 것이 1542년(중종 37)의 임인 정시방이었다. 방목에 의하면 도기(到記) 유생을 대상으로 시험하여 11월 15일에 갑과 1명, 을과 1명, 병과 2명으로 등제하였다. 이때부터 정시는 정식 과거로 문과와 무과를 함께 설행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7년 11월 13일).

정식 문과로 승격된 이후에 설행된 정시에서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거나 급분하는 기능은 유지되고 있었다. 명종대에 와서 정시가 자주 설행되었지만 재위 21년간 정식 과거로 설행된 것은 1559년(명종 14) 1회뿐이었다. 이 시험을 『국조문과방목』에는 ‘기미 정시방(己未庭試榜)’이라 하여 정시임을 밝히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일찍이 제술이나 강경, 사자(寫字)로 입격하여 상을 받은 사람들로만 시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은사과(恩賜科)’라 한다고 하였다. 문과에서 12명, 무과에서 4명을 뽑았다(『명종실록』 14년 9월 20일). 선조대에는 1583년(선조 16)의 정시를 시작으로 모두 8회의 정시가 정식 과거로 시행되었다. 정시는 알성시와 마찬가지로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 사관(四館)에서 녹명(錄名)하는 일이 없었다(『숙종실록』 22년 8월 22일). 또 상피제도 적용되지 않았다.

1회의 제술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정시의 운영 규정이 정식 과거에 비하여 응시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기에 정시에는 많은 유생이 몰려들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공정하지 못하다는 여론이 제기되어 숙종 연간부터 초시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실제로 정시에서 초시와 전시를 시행하는 법이 갖추어진 것은 1743년(영조 19)이었다. 정시초시의 선발 인원은 대정시(大庭試)에서는 1,000명, 소정시(小庭試)에서 800명을 뽑되, 모두 서울에 모아 3소(三所)로 나누어 시취하였는데, 예조·한성부·성균관을 시험 장소로 하였다. 부(賦)와 표(表) 두 과목을 시험하였다. 전시는 궁궐 뜰에서 실시하였다(『영조실록』 19년 1월 25일). 나중에 소정시는 500명으로 줄어들었다. 최종 선발 인원은 대정시에서는 10명에서 20명 이하를, 소정시에서는 10명 이하를 선발하였다.

초시와 전시는 『속대전』에서 법제화되는데 초시는 3개소로 나누고 시험 장소마다 시관으로 정3품 이하의 관원 3명씩을 임명하여 시험을 관리하게 하고, 감시관으로 감찰 1명을 두어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합격 인원은 왕의 품지로 정하고 시험 과목은 부 1편과 표와 전(箋) 중에서 1편으로 하였다. 전시의 시관은 종2품 이상 2명 또는 정3품관 이하 3명을 파견하여 시험을 관리하고 감찰 1명이 시험을 감독하였다. 왕이 친림하는 경우에는 알성시와 같이 초시 없이 1회의 시험으로 바로 그날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합격 정원은 왕의 품지에 따라 정하였다. 시험 과목은 대책(對策)·표·전·잠(箴)·송(頌)·제(制)·조(詔)·논(論)·부·명(銘) 중에 1편을 작성하였다. 실제로 표와 부가 많이 출제되었다.

정시는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설행하는 경과(慶科)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대로 갈수록 거의 매년 설행될 정도로 자주 설행되었다. 1766년(영조 42)의 경우는 1년에 4번의 정시가 설행되었다. 또 정시는 중시(重試)의 대거(大擧)로 시행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1년 11월 16일).

1844년(헌종 19)부터는 정시 초시를 지방에서도 설행되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초시를 서울과 지방에서 나누어 설행할 때 지방에서는 각 도 관찰사가 시험을 주관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index.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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