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군(禁軍)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조선시대 국왕의 경호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던 친위군(親衛軍).

개설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던 국왕 친위군인 금군은 조선 건국 직후에도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다양한 친위군 병종이 창설되면서 구체화되었다. 15세기를 거치면서 필요에 따라 응양위, 사자위, 내시위 등이 창설되기도 하였고 이후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로 흡수 정리되었다. 이 세 병종은 조선전기 핵심 금군으로서 이후 효종대 북벌 준비의 일환으로 통합되기 시작하여 현종대에는 금군청이 창설되면서 그 소속 병종으로 개편되었다. 18세기 중엽 영조대 금군청은 용호영으로 개칭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 금군은 국왕에 대한 시위 및 왕실에 대한 호위, 그리고 의장 등을 담당하였던 친위군인 견룡군(牽龍軍), 공학군(控鶴軍), 순검(巡檢), 내순검(內巡檢), 중금(中禁), 도지(都知) 등의 병종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 금군은 최충헌의 집권 이후 무인정권 호위 등을 목적으로 다양한 병종이 새로이 출현하면서 기존 금군의 군사적, 정치적 중요성은 다소 약화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궁궐 숙위와 국왕의 호위 임무를 담당하던 금군으로 성중애마(成衆愛馬)가 있었는데 이들은 원나라 군제의 영향을 받은 병종이었다.

조선시대 금군은 1392년(태조 1) 7월 태조의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를 설치하고 궁성을 숙위하고 왕의 행행(行幸)을 시종하는 역할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404년(태종 4) 응양위(鷹揚衛), 1407년(태종 7) 내금위(內禁衛), 1409년(태종 9) 내시위(內侍衛), 겸사복(兼司僕), 1424년(세종 6) 내시위가 내금위에 통합, 1492년(성종 23) 우림위(羽林衛)가 차례로 신설되고 통합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국왕의 신변 보호, 왕궁 호위 및 숙위 그리고 친병 양성 등이었다.

이들 병종 이외에도 태조대 창설되어 세종 초반까지 존속하였던 별사금(別司禁), 1436년(세종 18) 창설되어 성종대 중반까지 존속한 어가 호위 특수 시위군인 100명 규모의 사자위(獅子衛), 그리고 태종대 공신 자손으로 편성된 자제위(子弟衛) 등이 있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금군의 직무는 크게 국왕 신변을 보호하는 시위와 왕실을 호위하는 입직(入直)으로 나눌 수 있다. 시위의 경우 상참이나 기타 궁내의 행사에서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시립(侍立)이나 어가가 움직일 때 따라가면서 호위하는 배종(陪從), 그리고 국왕의 위엄을 보이는 의장(儀仗)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내금위는 190명의 장번 군사로 편성되었으며 내금위장 3명이 교대로 입직하였다. 내금위는 국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를 맡았으므로 그 선발에 있어 탁월한 무재(武才)는 물론 왕의 신임이 중요하여 양반층의 유음자손(有蔭子孫)의 업무자(業武者)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정3품으로부터 종9품까지의 체아직을 배정받으며 근무일수가 108일에 정3품으로 거관하는 대우를 받았다. 겸사복은 정원 50인으로 장번 복무하면서 정3품으로부터 종9품까지의 체아직을 배당받았다. 근무일수가 180일에 정3품으로 거관하는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왕의 신변 보호와 함께 친병(親兵)의 양성 등을 맡았다. 우림위는 무재가 뛰어난 서얼 자손으로 편성하였는데 겸사복과 동일한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변천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 조선전기 금군의 핵심 병종을 금군삼청(禁軍三廳) 혹은 내삼청(內三廳)이라 불렸다. 조선후기 1652년(효종 3) 북벌 준비를 위해 군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분리 독립되어 있던 이들 병종을 하나로 묶어 600여 인의 군사를 좌·우 별장(別將)이 통솔하는 체제를 갖추었고, 아울러 전원 기병으로 재편하였다. 1666년(현종 7) 금군 세 병종을 통합하여 금군청(禁軍廳)을 설치하고 정원을 700명으로 정하고 병조판서 겸임의 대장과 금군 별감을 두어 금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들 금군은 전원 기병으로 구성하였고 이들을 보조하는 표하군(標下軍) 460명이 있었다. 1682년(숙종 8) 금위영이 창설되면서 금군을 금위영에 소속시켜 그 기병부대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호위 시에 금군이 금위영에 소속된다는 것은 금군의 기능 약화를 뜻하므로 얼마 지나서 다시 독립하였다. 1755년(영조 31) 금군청을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하였다. 용호영의 관제는 별장 1명, 번장(番將) 7명, 당상군관 16명, 교련관 14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1882년(고종 19) 군제 개혁으로 혁파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통위사가 용호영의 군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의의

조선초기 정치적 변동기에 국왕과 왕실의 안위가 중시되던 상황에서 이를 호위하던 금군은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다양한 정치상황에 따라 여러 금군 병종이 창설되었다. 이후 5위체제가 형성되어 전국의 군사제도가 일원적으로 파악되었지만 이와 별도로 금군 조직은 설치 운영되었다. 이는 5군영과 속오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후기 군사제도에도 마찬가지 양상이었다. 다만 조선후기 붕당정치 상황에서 왕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국왕의 직접 호위를 위한 금군 군영으로 용호영이 창설된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 송인주, 『고려시대 친위군 연구』, 일조각, 2007.
  • 김당택, 「무신정권시대의 군제」, 『고려군제사』, 육군본부, 1983.
  • 남도영, 「조선초기의 겸사복에 대하여」,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
  • 박홍갑, 「조선초기 금군과 숙위체제」, 『조선시대의 과거와 벼슬』, 집문당, 2003.
  • 차문섭, 「선초의 내금위에 대하여」, 『사학연구』18, 1964.
  • 최효식, 「조선시대 우림위의 성립과 그 편제」, 『동국사학』15·16합집,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