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영(龍虎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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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영조 31) 왕의 호위와 궁궐의 숙위(宿衛)를 담당하던 금군청(禁軍廳)을 개칭한 친위부대.

개설

용호영은 조선시대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금군(禁軍)의 한 부대이다. 조선시대 금군이라는 명칭은 1652년(효종 3)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셋을 합하여 금군청을 두면서 생겼다. 겸사복은 조선 초기에 50여 명을 두면서 시작된 호위 부대이며, 내금위와 우림위는 1470년대 설치되었으므로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이후 1755년(영조 31) 금군청을 용호영으로 개칭하였는데, 1754년에 금군에서 금위영(禁衛營)이 분리된 후 용호영도 별도로 구성한 것이다. 원래 용호영은 임시로 사용하던 명칭이었으나 영조가 용호영으로 명명(命名)하게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용호영의 명칭은 통일되지 않아 어떤 사료에는 호용영(虎龍營)으로 되어 있다. 1791년(정조 15)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면서 100명을 줄여 6개 번(番)으로 만들었다가 장용위(壯勇衛)를 만들면서 100명 줄인 것은 유명무실해졌다. 1808년(순조 8) 병조 판서김이익(金履翼)의 건의에 의하여 다시 용호영의 기능이 부활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용호영은 조선전기 금군으로 시작한 병력인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가 효종대 내삼청(內三廳)으로 확대된 것을 영조대 독립된 군영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금군의 지휘자인 금위대장은 병조 판서가 겸직하였으나 영조는 왕이 임명하는 자리로 바꾸어 왕을 호위하는 친위 세력으로 용호영을 양성하였다. 용호영은 금여(禁旅)라고도 불렸으며, 정조대에는 장용영에 병력을 나누어 주고 600명으로 구성하였다. 순조 때 장용영을 혁파하면서 다시 100명이 늘었다.

순조는 장용영의 혁파 이후 호위청과 용호영이 왕실과 도성을 호위하는 금군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호위청은 인조대부터 왕실 호위를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별장(別將) 1명과 호위군관 35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정조대에 이르러 궁궐의 방어를 위해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면서 호위청의 규모는 1/3로 축소되었다. 호위대장은 의정(議政)이라도 훈신(勳臣)이나 척신(戚臣)만이 임명되었다. 이는 정조가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호위청의 존재를 친위적인 성격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장용영의 설치와 함께 호위청은 장용영에 흡수되었으며, 순조 등극 이후 심환지의 주청에 따라 독립된 군영으로 재탄생하였다. 용호영과 호위청은 왕과 궁궐을 시위하는 핵심 병력이었지만 순조 재위기 이들에 대한 통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용호영을 총괄하는 병조 판서를 순조가 마음대로 기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 금군의 정원은 대개 190명이었는데, 1506년(중종 1)에 250명으로 정하였다가 1512년 1,500명으로 늘렸다. 현종대에는 700명으로 정하고, 7개 번으로 나누어 번마다 장(將) 한 명을 두었다. 1652년에 금군을 더 설치하고 좌·우별장 각각 1명과 내금위장 6명, 겸사복장 2명, 우림위장 2명을 두었다. 1666년(현종 7)에 좌·우별장을 고쳐 별장으로 하고, 내금위장 3명을 감원하였다. 영조대 용호영을 설치한 뒤에는 병조 판서가 용호영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종사관(從事官) 1명은 병조의 색랑관(色郞官)이 겸임하였다.

효종대 금군을 증원한 것은 중국 당(唐)나라의 좌·우무위대장(左·右武衛大將)을 모방한 것이었다. 효종은 벼슬의 등급이 높은 무장(武將) 2명을 내삼청의 도별장(都別將)으로 삼아 나누어 거느리도록 하고 병조 판서에게 예속시켰다. 이처럼 용호영의 성장은 왕이 주도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역할은 주로 왕의 호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는 근위 부대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변천

1782년 수어청(守禦廳)의 창고가 부족하여 곡식을 쌓을 곳이 없다는 이유로 용호영의 관서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1791년에는 정조가 군영의 폐단 가운데 용호영이 유독 심하다면서 규례는 없어지고 병사의 복장은 남루하며 기마(騎馬)들이 병들어 가는 것이 해가 갈수록 날로 더욱 심하다고 할 정도로 군영의 기능은 저하되었다. 특히 정조가 용호영 군사들에게 활쏘기를 시켜 비교하고 말 타기를 시켜 시험하였으나 1순(巡)에 다섯 번 맞힌 자를 듣지 못하였고 열 걸음에 아홉 번이나 넘어지는 경우도 발생하였다(『정조실록』 15년 5월 26일). 이런 용호영 군병의 모습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정조는 이런 이유로 장용영에 용호영의 병사를 넘기며 용호영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그 후 용호영은 순조대 장용영이 해체되면서 다시 부활하였다. 1881년(고종 18)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면서 실시된 구 군영 개편에 의해 1882년 용호영이 무위영(武衛營)으로 합쳐지고, 1885년에는 친군(親軍) 용호영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에 따른 군제 개편으로 통위영(統衛營)에 합쳐지면서 용호영은 다시 사라졌다.

참고문헌

  • 『홍재전서(弘齋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최효식, 「용호영에 대하여」, 『경주사학』4,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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