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壯勇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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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왕권 강화와 군제 개혁을 위해 도성과 수원에 창설한 군영.

개설

정조가 보위에 오른 후 왕권의 강화와 친위세력의 양성을 위해 설치한 군영이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도성의 내영과 화성의 외영으로 두 개의 군영을 가지고 있었다. 도성의 장용내영은 1788년 창경궁 입구인 중부의 어영청 건너편 이현(梨峴)에 설치되었다. 장용외영은 1793년(정조 17) 기존의 장용영을 내외영체제로 확대하면서 화성에 설립되었다. 정조는 화성에 현륭원과 행궁을 조성하면서 장용외영을 설치하여 수호군으로 삼았다. 장용외영은 도성의 장용내영에 비해 규모나 병력 면에서 월등하였으며, 오군영의 재원과 병력을 전용하였다. 정조는 장용외영의 설치를 통해 오군영에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의 약화와 함께 분산된 군사 통솔권의 일원화와 군사 재정의 절감을 이루고자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조는 친위세력의 확보를 위해 1785년 기존의 무예청(武藝廳) 소속 무예별감(武藝別監)들을 신설한 장용위(壯勇衛)에 배속시켰다. 또한 병조 판서의 지위를 격상시켜 군영을 통제하도록 했으며 국가 재정의 절감을 이유로 군영의 통폐합을 기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홍국영의 종제인 홍복영(洪福榮)이 일으킨 역모사건은 친위부대의 창설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군영대장인 구선복(具善復)의 반역을 처벌하면서도 장용영의 설립 취지를 합리화했다(『정조실록』 11년 7월 2일).

장용영을 설립하기 위한 친위부대의 근간은 무예출신(武藝出身)이었다. 무예출신은 훈련도감의 별기군에서 선발한 무예별감 가운데 무과에 합격한 자들이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정조는 이들을 이용하여 먼저 장용위(壯勇衛: 한자 중복 삭제)를 설치하였다. 정조가 무예출신을 장용위로 전환한 것은 선대의 사례를 이용한 것이다. 정조는 인조대 훈련도감 출신으로 청(廳)을 설치한 것과 숙종대 무예별감 출신을 국출신청(局出身廳)에 전속한 것, 그리고 영조대 금위영 출신으로서 별기위를 설치한 고사를 근거로 하였다(『정조실록』 9년 7월 2일).

정조는 선대의 군제 운영에서 장점만을 선택해서 장용영을 설립하였다. 군병을 취재하거나 출신으로 한 것은 내금위의 국출신(局出身)을 뽑는 데서, 선기대(善騎隊)에 기마에 재간이 있거나 기예를 가진 자를 뽑은 것은 마대(馬隊)에서,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게 한 것 등은 훈련도감에서 그 선례를 찾았다. 또한 장수를 두고서 관직은 사(使)로 일컫고 문서에는 대장이라 한 것은 어영청에서, 내사(內使)를 두고 또 외사(外使)를 둔 것은 용대장(龍大將)과 호대장(虎大將)에서, 중군(中軍)을 두지 않고 별장(別將)을 두어 조련할 때의 호령을 승접(承接)한 것은 세조대 좌상(左廂)과 우상(右廂)의 경우와 숙종대 정초청(精抄廳) 제도에서, 천총(千摠)을 두지 않은 것은 중국 남방 군대의 제도 등에서 참고하였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장용영은 기존 군영의 병력을 흡수하면서 성장하였다. 『장용영신정향군절목(壯勇營新定鄕軍節目)』을 보면 수어청 15초(哨)둔아병(屯牙兵)에서 매 초마다 25명을 줄여 장용영의 좌·우·후초로 만들었다(『정조실록』 12년 7월 19일). 이는 장용영이 새로운 군영으로 창설된 것이 아니라 기존 오군영 군병의 일부를 이속시키는 것이므로 자연히 오군영의 군사력를 약화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더욱이 장용영으로 이속된 군병은 오군영의 정예군으로 기존 군문체제가 약화되면서 장용영의 군력(軍力)이 강화되었다(『정조실록』 12년 1월 22일). 따라서 오군영이 군신들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설치된 연혁과 달리 장용영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하에서 운영되었다(『정조실록』 13년 5월 26일).

특히, 정조가 화성에 장용외영을 설치한 것이 현륭원과 행궁 호위만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와 성격이 단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용외영을 화성에 두면서 기존 오군영의 군병과 물자를 이관시켜서 상대적으로 기존 군영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양차의 호란 이후 정립된 오군영이 노론을 비롯한 정파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상황에서 정조는 근왕병(勤王兵) 양성과 신도시 수호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용외영을 설치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장용외영이 현륭원의 보호와 화성행궁의 수호라는 임무를 지닌 군대였다고는 하지만, 화성과 도성 사이의 거리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도성에 웅거한 정조의 반대 정파와 군영 세력을 견제하는 무력으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장용외영이 화성에 설치된 배경에는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 군사적 방법이 이중적으로 작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에 장용외영이 설치되면서 도성에 주재하고 있던 장용영은 내영으로 불렸다. 도성의 내영 지휘자는 장용내사로 불렸으며, 장용외영은 장용외사로 불리며 화성유수가 겸직하도록 했다. 장용외사는 화성의 행궁을 담당하는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면서 신도시와 현륭원을 수호하는 것이 고유의 임무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장용영은 오군영의 장졸을 이첩받았으므로 직업군인과 상번군의 입번으로 이루어졌다. 『장용영대절목』에 따르면, 장용영에는 마보군(馬步軍) 5,245명, 당보수(塘報手) 66명, 장막군(帳幕軍) 50명, 별장표하군(別將標下軍) 40명, 4사파총표하군(四司把摠標下軍) 120명, 선기장표하군(善騎將標下軍) 18명, 선기대(善騎隊) 3초 345명, 중사(中司) 5초 615명, 전좌우후사(前左虞侯事) 20초 2,540명, 사후군(伺候軍) 52명, 공장아병(工匠牙兵) 26명 내 도편수(都邊首) 1명, 치중복마군(輜重卜馬軍) 40명, 별중사표하군(別中司標下軍) 58명, 별후사표하군(別後司標下軍) 23명, 별아병장표하군(別牙兵將標下軍) 23명과 뇌자(牢子) 118명 내 입번(入番) 46명으로 대장소 43명, 도제조소 10명, 향색제조 7명, 종사관소 5명, 순령수(巡令手) 115명 내 입번 46명으로 대장소 39명, 도제조소 10명, 향색제조 8명, 종사관소 5명, 취고수(吹鼓手) 95명 내 입번 88명, 대기수(大旗手) 100명 내 입번 93명, 등롱군(燈籠軍) 60명 내 입번 26명, 牙兵->아병(牙兵) 57명 내 입번 32명으로 대장소 20명 등의 입번군이 있었다.

변천

장용외영의 설치 배경은 정조의 사후에 벌어지는 장용영 혁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만약 장용외영이 정조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면 정조의 반대세력인 노론 벽파들이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그렇게 빨리 장용영의 내영과 외영을 혁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장용영의 무력과 재물을 기존의 오군영으로 환원시킨 점도 장용영 설립의 목적을 엿보게 한다. 정조가 현륭원과 화성행궁의 수호 및 기존 군영 운영에서 비롯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계획이 장용외영의 설치라는 점을 노론 벽파들이 모르지 않았을 것임에도 시급하게 장용외영을 해체해버린 것은 장용영이 지니는 정치적 상징성과 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조가 재위 기간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장용외영의 무력이 순조 초기의 정치세력에게는 부담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배경으로 장용외영의 해체를 본다면, 그 설치 배경도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결단에서 이루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순조실록』 2년 1월 20일).

의의

장용영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조선시대 최대의 군영이며, 근왕 병력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책을 계승하면서, 안정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의 신장을 주도하였다. 왕권 강화 정책의 하나가 장용영의 설치였으며, 그 세부계획에 화성 신도시와 행궁의 설치 및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의 건설이 이어졌다. 정조는 장용영의 설치에 필요한 재원과 군병을 부세를 통한 백성의 부담으로 만들지 않고 기존 정치권과 연계되고 있었던 오군영에서 차출하여 군통수권의 일원화와 군사 재정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또한 화성의 수호를 위해 설치한 장용외영은 신도시의 성장을 위한 인구와 재물의 유입을 가속화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정조대 장용영의 설치는 기존 오군영처럼 군사력을 증가시킨 것만이 아니라 정조대 정국의 변화와 국가 정책의 방향까지 좌우한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장용청절목초(壯勇廳節目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김준혁,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노영구, 「정조대 오위체제 복구 시도와 화성 방어체제의 개편」, 『진단학보』 93, 2002.
  • 이왕무, 「『本營圖形』을 통한 조선후기 장용영의 모습」, 『장서각』21, 2009.
  • 최홍규, 「정조대의 화성경영과 장용외영 문제」, 『경기사학』창간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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