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령수(巡令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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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어가(御駕)나 각 군영의 고위 지휘관을 호위하면서 왕이나 군영의 최고 지휘관 명령을 군인들에게 전달하던 군사.

개설

순령수는 1637년(인조 15) 7월 『승정원일기』의 기사 등에서 확인되지만,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순령수는 중앙과 지방 군영에 설치되었다. 순령수는 뇌자(牢子)와 함께 보는 사람을 압도시켰으며 어가를 앞에서 호위하거나 군영의 고위 지휘관을 호위하였고, 왕이나 군영의 최고 지휘관 명령을 군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정부는 순령수에게 죽 등의 음식이나 상을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으며, 서총대(瑞蔥臺)에서 시행하는 조총 시험 등을 통해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도 주었다. 순령수는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 등이 변화하였는데, 맨 마지막으로 호위국에 소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즉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순령수는 『만기요람』에서 확인되는 ‘호위청에 10명, 용호영에 22명, 훈련도감에 111명으로 이 중 복마군이 6명, 금위영에 76명으로 이 중 복마군이 5명, 어영청에 91명으로 이 중 복마군이 6명’이었다. 충청수영에 12명 등 지방 군영에도 설치되었다. 장용영 순령수 115명은 서자지[書字的] 1명과 패두(牌頭) 1명을 비롯하여 ‘입번(入番) 46명, 대장소 39명, 도제조소 10명, 향색제조소(餉色提調所) 8명, 종사관소 5명, 복마군 5명’으로 구성되었다. 호위청 순령수는 매달 급료로 쌀 9말과 봄·가을의 피복비로 무명 4필을 받았다.

순령수는 어가의 호위와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즉 순령수 는 1752년(영조 28) 왕이 도성 안이나 당일에 되돌아올 수 있는 능(陵)으로 거둥하면 뇌자와 함께 각각 5쌍이 어가의 앞을 호위하였고(『영조실록』 28년 1월 12일), 영기(令旗)를 지니고 가서 1746년(영조 22) 작문(作門)에 잡인을 들이지 말고 1756년 서수문·수구문을 닫지 말라는 영조의 명령을 군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어가의 앞을 시위한 순령수는 1840년(헌종 6) 무명[木] 1필, 1797년(정조 21) 왕명을 전달한 순령수는 무명 2필과 포(布) 1필, 어전(御前)에서 명령을 기다린 순령수는 무명 1필과 포 1필을 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명령을 잘못 전달하면 1731년(영조 7) 훈련도감 순령수가 곤장 20대를 맞은 것처럼 처벌을 받았다.

변천

순령수 5쌍은 왕이 거둥할 때 뇌자 5쌍과 함께 어가의 앞을 시위하였으나, 1730년(영조 6)을 계기로 왕이 도성 안이나 당일로 돌아올 수 있는 왕릉에 거둥할 때는 종전처럼 5쌍을, 그리고 왕이 먼 왕릉에 행차하여 대궐 밖에서 하룻밤을 묵을 경우에는 각각 10쌍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886년(고종 23) 어가의 모든 거둥에 용호영 5쌍, 친군별영 15쌍 등 20쌍을 배치하였다.

순령수는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는 물론이고, 장용영 순령수가 1782년(정조 6) 6명에서 1793년(정조 17) 115명으로 증가한 것처럼 정원 등에도 변화가 있었다. 특히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 군대가 모두 폐지된 후 협련군(挾輦軍)·협여군(挾轝軍) 등의 임무는 ‘공병대→호위군→호위대→호위국’으로 이속되었는데, 1907년(고종 44) 5월 18일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 기부자에 호위국 소속 순령수 70명의 성명이 기재된 것에서 순령수의 최종 소속처가 호위국임을 알 수 있다.

순령수는 1907년 군대 해산 때 호위국과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 제도』, 혜안, 2000.
  •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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