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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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개설

국가 또는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신호(功臣號)를 주고 등급을 나누어 포상하는 제도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 때에 이미 녹공(錄功)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도 공신호를 내리고 등급을 나누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문헌에서는 고려의 개국공신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의 개국시조 왕건 태조를 왕으로 추대한 공으로 홍유(洪儒) 등 약 2,000명이 3등으로 구분되어 각각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상을 받았다. 940년(태조 23)에는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공신당을 두어 1등 및 2등공신의 화상(畵像)을 벽에다 그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라고 일컫고 매년(해마다) 재회(齋會)를 열어 복을 빌었다. 또한 공신들에게는 훈전(勳田)을 내려 상속하게 하였으며 대대로 그 자손을 등용하였다.

이 후에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공신호를 내리고 토지, 노비 등을 상으로 주어 그 영예를 기렸다. 고려초에는 녹권(錄券)을 주어 공신을 증명하도록 하였으나 말기의 중흥공신(中興功臣)에게는 녹권 이외에 따로 공신교서(功臣敎書)를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이외에도 반정 또는 군사반란 진압, 역모사건 평정 등 커다란 정치적·군사적 사태 이후에 의례적으로 공신들이 책봉되었다. 이 결과 조선왕조 500년간 총 28차례의 공신이 책봉되었다. 공신 책봉을 야기한 28차례의 정치적·군사적 사태는 모두가 당대를 뒤흔든 대사건들이었다. 조선시대에 공신들이 자주 책봉되면서 공신과 관련된 각종 제도들이 정밀하게 마련되었다.

조선시대에 정치적·군사적 사태를 해결하면서 큰 공훈을 세운 공신들은 훈봉공신(勳封功臣)이라고 하였는데, 훈봉공신에는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있었다. 정공신은 정식으로 공신호를 받고 공신 등급을 받은 공신이었고 원종공신은 정공신 이외에 원종공신이라는 공신호를 받은 공신들이었다. 훈봉공신 이외에 종묘배향공신과 문묘배향공신도 공신으로 불렸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훈봉공신은 총 28차례에 걸쳐 책봉되었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을 필두로, 태조대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정사공신(定社功臣), 정종대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좌명공신(佐命功臣), 단종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을 숙청한 정난공신(靖難功臣), 단종대 금성대군과 혜빈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하게 한 좌익공신(佐翼功臣), 세조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敵愾功臣), 예종대 남이 장군의 역모를 평정한 익대공신(翊戴功臣), 성종의 즉위에 찬조한 좌리공신(佐理功臣),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즉위시킨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대 이과의 난을 평정한 정난공신(定難功臣), 명종대 을사사화를 일으킨 위사공신(衛社功臣), 선조대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광국공신(光國功臣), 선조대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평난공신(平難功臣), 임진왜란 중 선조의 의주 파천을 수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의 3대첩을 일군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중 서얼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공신(淸難功臣), 임진왜란 중 광해군의 항전활동을 보좌한 위성공신(衛聖功臣), 선조 말 세자 광해군을 위하여 유영경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정운공신(定運功臣), 광해군대 임해군 제거에 앞장섰던 익사공신(翼社功臣), 광해군대 김직재 역모를 평정한 형난공신(亨難功臣),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킨 정사공신(靖社功臣), 인조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진무공신(振武功臣), 인조대 이인거의 난을 진압한 소무공신(昭武功臣), 인조대 유효립의 역모를 평정한 영사공신(寧社功臣), 인조대 심기원의 역모를 평정한 영국공신(寧國功臣), 숙종대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평정한 보사공신(保社功臣), 숙종과 경종 그리고 영조대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을 상징하는 부사공신(扶社功臣), 영조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분무공신(奮武功臣)까지가 조선시대에 책봉된 훈봉공신이었다.

훈봉공신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책봉되었다. 국가나 왕실을 위협하던 정치적·군사적 사태가 일단락되면 먼저 왕이 공신책봉을 명령하였다. 특별히 공신을 책봉할 것도 없는데 왕이 공신책봉을 명령할 경우에는 대신이나 삼사(三司)에서 반대하여 취소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강력하게 공신책봉을 추진하면 그대로 시행되곤 하였다. 공신을 책봉하기 위해서는 공신의 등급과 공신의 명칭을 결정해야 했다. 공신의 등급은 왕이 지명하는 원훈(元勳)과 대신이 모여서 결정하였다. 원훈은 국가나 왕실을 위협하던 정치적·군사적 사태를 수습한 최대 공로자로서 누가 어떤 공훈을 세웠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대신은 영의정이나 좌의정 그리고 우의정의 3정승이었다.

원훈과 대신은 함께 모여서 공신 대상자 및 공신 등급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등급을 감정한 결과는 감훈단자(勘勳單子)에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감훈단자에는 1등공신·2등공신·3등공신의 대상자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감훈단자를 접수한 왕은 단자에 기록된 각 공신의 구체적인 공훈 내용을 기록해 올리게 하였다. 즉, 공적조서를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원훈이나 대신이 공훈도 없는 사람을 사적인 연유로 공신에 추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왕은 감훈단자와 공적조서를 비교·검토한 후에 책봉을 허락하였다. 만약 공적조서의 내용이 책봉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누락시키거나 등급을 변경시키기도 하였다.

공신 등급이 결정되면 이어서 공신의 명칭을 결정하였다. 공신의 명칭은 공훈의 내용을 적절히 표현하는 글자로 정하였는데, 보통 대제학이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대제학은 공신의 명칭으로서 3가지를 추천해 올리는데, 왕이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였다. 공신의 명칭은 긴 경우에는 12자, 짧은 경우에는 8자로 되었는데 대부분 10자였으며, 이 중에서 맨 뒤의 두 글자를 대표로 하였다.

예컨대 인조대 심기원의 역모를 평정한 후 공신을 책봉하였을 때, 대제학이식은 공신의 명칭으로서 ‘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效忠奮威炳幾決策寧國功臣), 병충소의결기분무제난공신(秉忠昭義決幾奮武濟難功臣), 병위분충협책익운광사공신(秉威奮忠協策翊運匡社功臣)’의 3가지를 추천하였다. 이 중에서 인조는 첫 번째를 낙점하였는데, 이 공신이 이른바 ‘영국공신’이었다. 영국공신의 전체 이름은 ‘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의 10글자이지만, 그중 마지막 두 글자인 ‘영국’을 대표로 하여 ‘영국공신’이라고 하였다. 영국공신의 전체 의미는 ‘충성을 바치고 위엄을 떨치며 기미를 살피고 대책을 결정함으로써 국가를 편안하게 한 공신’이라는 뜻이었다(『인조실록』 22년 6월 6일).

마지막 두 글자로 대표되는 공신의 명칭은 1등공신·2등공신·3등공신이 모두 동일하지만 전체 이름에서는 차등을 두었다. 즉, 등급이 내려갈수록 사용할 수 있는 글자의 수를 줄인 것이었다. 예컨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책봉한 좌익공신의 경우 1등공신은 ‘수충위사동덕좌익(輸忠衛社同德佐翼)’의 8글자였지만 2등공신은 ‘수충경절좌익(輸忠勁節佐翼)’의 6글자, 3등공신은 ‘추충좌익(推忠佐翼)’의 4글자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공신등급과 공신명칭이 결정된 이후에는 공신회맹제와 공신연(功臣宴)의 시행 그리고 맹족(盟簇), 공신교서, 공신초상화와 같은 공신의 징표를 수여하였다. 이러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보통 녹훈도감이라고 하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공신도감이라고도 하였다. 녹훈도감은 책임자인 당상관과 실무자인 낭청 그리고 공신징표의 제작을 감독할 감조관(監造官) 및 공신징표를 직접 제작하는 장인과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공신회맹제가 끝난 뒤 왕은 공신들을 불러 함께 잔치를 베풀고 이 자리에서 징표를 나누어 주었다. 이 공신징표는 녹훈도감의 장인들이 제작하였는데, 맹족·공신교서·공신초상화 등이었다.

조선시대 총 28차례에 걸쳐 훈봉공신이 책봉되었지만 이들 모두가 조선시대 내내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아니었다. 28번의 공신 중에서 6번의 공신은 아예 삭제되었다. 즉, 명종대에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공신이 되었던 위사공신, 광해군대에 책봉되었던 위성공신·정운공신·익사공신·형난공신 전부, 그리고 경종대에 책봉되었던 부사공신은 왕이 바뀐 직후에 모두 삭제되었다. 숙종대에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평정하고 책봉되었던 보사공신은 삭제되었다가 다시 녹훈되는 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이외에 공신에 책봉되었다가 역모사건 등에 연루되어 삭제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공신에서 삭제된 사람들은 공신이 누리는 모든 포상과 특권도 박탈당하였다.

반면 온전히 보전된 공신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포상과 특권을 부여받았다. 국가나 왕실의 위기를 구한 공신은 국가와 영원히 생사고락을 함께하기에 공신들이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시대 공신의 특권은 공신 자신이 받는 각종 특권과 그 특권이 자손에게 상속되는 세습특권으로 이루어졌다. 공신이 받는 포상과 특권은 보통 공신교서에 명문화되었는데, 공신의 등급에 따라 약간씩 등급의 차이가 있었으며, 그 내용은 명예적 측면, 경제적 측면, 행정적 측면, 형사적 측면 그리고 세습적 측면 등 다양하였다.

조선시대 28차례에 걸쳐 책봉된 훈봉공신 중 정공신은 대부분 10~50명 정도의 적은 수에 불과하였다. 이에 따라 공신책봉에서 제외된 무수한 유공자들을 포상하기 위하여 원종공신을 또 책봉하였다. 원종공신은 정공신에서 빠진 모든 유공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수천 명씩 책봉되곤 하였다. 개국공신이 책봉되었을 때의 원종공신은 1,600명이 넘었으며 선무공신의 경우에는 9,000여 명의 원종공신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원종공신을 중국에서는 ‘원종(元從)’이라고 하였는데 처음부터 수종한 공신이라는 의미였다. 이에 비하여 조선에서는 ‘원종(原從)’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명나라 태조의 이름이 원(元)이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원종공신은 정공신보다 격이 떨어지기에 책봉 방법이나 포상도 정공신보다 격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공신은 공신이기에 정공신에 준하여 책봉이 이루어졌다. 원종공신의 선정은 녹훈도감에서 주관하였으며, 명칭은 정공신의 대표 명칭 다음에 원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컨대 정공신이 소무공신이라면 원종공신은 소무원종공신이라고 하였다. 원종공신의 등급도 정공신의 예에 따라 1등원종공신·2등원종공신·3등원종공신으로 구별하였다. 원종공신에 대한 포상은 원종공신의 증명서라 할 수 있는 녹권(錄券)에 규정되었다. 왕명을 받아 승지가 작성한 녹권은 녹훈도감에서 해당자에게 발급하였다.

공신도감이 해체된 후 공신에 관한 일상적인 업무는 충훈부(忠勳府)에서 관장하였다. 충훈부는 공신으로서 봉군(封君)된 당사자에 대한 인적 사항과 행정적 사항을 관리하였으며 공신이 사망한 후 공신호의 승습 등에 관한 업무도 관장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공신에 관한 일반적인 업무를 맡아 보던 충훈부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서 기공국(記功局)으로 바뀌었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표훈원(表勳院)으로 바뀌었다.

의의

왕조시대의 공신은 왕조의 창업 또는 왕조의 위기극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로서 당대의 정치·사회·문화를 주도하였다. 따라서 공신은 전통시대의 개인인물사와 문중사는 물론 정치사·사회사·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 신명호, 『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 김광수, 「고려태조의 三韓功臣」, 『사학지』 7, 1973.
  • 박천식, 「개국원종공신의 검토」,『사학연구』 38, 1984.
  • 노명호, 「고려후기의 공신녹권과 공신교서」,『고문서연구』 13, 1998.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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