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훈원(表勳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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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훈장 수여 업무를 담당하던 기구.

개설

표훈원은 1899년(광무 3) 훈장 수여를 위해 설립된 기구이다. 훈장을 수여하는 방식은 서구와 일본의 것을 모방하였지만, 훈장의 명칭이나 사용된 문양 등은 대한제국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화(李花) 문양은 대한제국의 상징과 다름없는 것으로 덕수궁 석조전 등에서도 발견된다.

훈장 수여 내역을 보면 1905년 이후로는 러일전쟁의 공훈을 세운 일본군 장교나 친일 인사들에게 남발되고 있다. 표훈원 조직은 191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으나, 표훈원을 통한 훈장 수여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던 것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 훈장을 수여하는 서훈(敍勳)에 관한 업무는 조선시대 충훈부(忠勳府)에서 맡아보고 있었다. 1894년(고종 31) 7월 11일 의정부 관제 개정에서는 충훈부를 기공국(紀功局)으로 개칭하여 의정부에 속하게 했다. 1899년 8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제정되던 시기에는 표훈원이 설립되고, 1900년부터 훈장의 종류가 정해져 훈장 수여가 시작되었다. 즉 황제권 공고화와 훈장 수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1899년 7월 4일 표훈원 관제에 따르면, 첫째, 훈위(勳位)·훈등(勳等)과 연금(年金)에 관한 사항, 둘째, 훈장(勳章)·기장(記章)·포장(褒章) 그리고 기타 상을 주는 데 관한 사항, 셋째, 외국 훈장·기장을 받거나 차고 다니는 문제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 직원은 칙임관인 총재, 부총재 1인, 의정관(議政官) 5인 이내, 주임관인 참서관(參書官) 1인, 판임관인 주사 2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표훈원은 내·외국인에 대한 훈장 수여 업무를 실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910년까지 전체 1,757명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는데 외국인이 1,172명으로 한국인 585명에 비해 2배가 넘었다. 외국인과 한국인 모두 1901년과 1902년에 20~30명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가 1904년 약간 증가한 후 1905년 이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 시기 러일전쟁의 공훈 명목으로 일본군 장교 및 민간인들에게 훈장 수여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변천

1904년 1월 11일 표훈원은 의정부 소속의 표훈국으로 바뀌었다가 같은 해 3월 12일 다시 표훈원으로 복구되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역할은 동일하였지만, 직제 일부가 개정되어 칙임관인 총재 1인, 의정관 15인 이하, 주임관인 제장국장(製章局長) 1인, 참서관 1인, 기사 2인, 판임관인 주사 2인, 기수(技手) 5인 이하로 구성되었다. 1905년 2월의 표훈원 관제에서는 제장국장이 없어졌으나 직원 수는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이처럼 표훈원은 1910년 한일병합 때까지 조직이 유지되었고, 훈장 수여 기능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본래 대한제국의 자주적 권위를 과시하고자 만들었던 훈장 제도는, 1904년 이후 러일전쟁이나 한일 친선에 공을 세운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공로를 표창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참고문헌

  •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 이강칠, 『대한제국시대 훈장제도』, 백산출판사, 1999.
  • 박현정, 「대한제국기 오얏꽃 문양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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