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군(上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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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군 조직인 오위(五衛)에 속하는 정3품 당하관의 무관직.

개설

고려시대 이군(二軍)·육위(六衛)의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이 고려말에 상호군(上護軍)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상장군이라 했다가 도위사(都尉使)로 바뀌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호군으로 회복되었다. 오위제가 수립되면서 그에 소속되어 궐내의 입직, 궁성문 밖의 숙직 등을 담당했으며, 대궐에서 행하는 비상 대처 훈련에 참가했다. 임진왜란 이후 오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관명(官名)만 남았다. 다만 체아직으로 활용되었다.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따르면 상호군의 정원은 9명이며 정3품 당하관이었다. 맡은 직무는 궐내의 입직, 궁성문 밖의 숙직, 대궐에서 행하는 비상 대처 훈련 참가 등이다. 먼저 궁궐에서 대호군(大護軍)·호군(護軍)과 함께 5번으로 나누어 호군청(護軍廳)에서 입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성 안팎을 출직 군사가 순찰하였는데, 이들을 감독하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운령관(運領官)을 임명하였다. 여기에 대호군·호군 등과 더불어 충당하되 부족하면 별시위(別侍衛)로서 6품 이상인 자도 보충하게 했다. 이때 번을 마치고 나가거나 당번으로 들어오는 군사의 장수는 대궐에 들어가서 숙배(肅拜)하고, 대궐 안에서 패(牌)를 바치거나 받아야 했다. 이때 운령관이 받을 패는 순장(巡將)이 모두 받아서 나누어 주었다. 만약 왕이 궁성(宮城) 밖에서 머물 때에는 승정원에서 패를 수납하도록 했다.

한편 병조에서는 궁성의 4문(門) 밖의 숙직 인원으로 각각 상호군·대호군·호군 중에서 1명을 임명하도록 했다. 부족하면 행직인(行職人)으로 임명하고 정병(正兵) 5명을 배정했다.

첩고(疊鼓)라 해서 임금이 대궐에 입직한 군사들을 갑자기 소집하고자 궁중에 있는 큰 북을 계속 두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평상시에 비상 대처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대내에서 큰 북을 거듭 치면 각 문을 파수하는 당직자 이외의 입직하는 제위의 군사는 근정전(勤政殿) 뜰에 모여서 각각 자기 위치를 찾아 줄을 서야 했다. 이때 상호군은 병조, 도총부 다음에 도열했다.

변천

고려시대 중앙군 조직의 근간이었던 이군·육위의 최고 지휘관이 상장군이었다. 고려말에 이르러 상호군으로 불리다가, 조선 건국 초창기에는 십위(十衛)의 지휘관을 다시 상장군이라 불렀다. 1294년(태조 3) 또 한 번 도위사로 바뀌었다가(『태조실록』 3년 2월 29일) 얼마 뒤에 상호군으로 되돌아왔다. 1457년(세조 3) 오위제가 수립되고 그에 소속되었을 때에도 변함이 없었으나 최고 지휘관의 자리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속대전(續大典)』에 오위의 병제(兵制)를 모두 혁파하고 관명만 남겨두도록 규정되었다. 이때 한 자리가 줄면서 정원이 8명이 되었다. 더불어 원록체아(原祿遞兒) 2명, 선전관(宣傳官) 1명, 사자관(寫字官) 1명, 제술관(製述官) 1명, 금군(禁軍) 3명 등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실질적인 직무는 담당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민현구, 『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차문섭, 「군사조직」, 『한국사 23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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