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解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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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의 교체 시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인수인계하는 법률적 절차.

개설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해유의 의미를 “考滿職除曰解歷其殿最曰由”라 하였다. ‘고만(考滿)’, 즉 임기가 다 차서 직임이 해면된 것을 ‘해(解)’라 하고, 그 근무 성적을 매기는 것을 ‘유(由)’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유는 관리가 교체될 때 후임자에게 인계하는 사무와 관리하였던 물건을 자세히 기록하여 일정한 절차를 거쳐 심사한 후 그 책임을 면하는 행정절차를 말하였다.

조선시대의 해유는 오늘날의 인수인계 행정과 유사한 개념이긴 하지만, 내용과 성격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해유의 행정절차는 관료 교체 과정에서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보내는 관문(關文)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단계를 거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리와 부패 및 결손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추징하거나 법적 책임을 물었다. 해유제를 시행하는 목적의 하나를 재정 손실 보전에 둔 것은 국가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정책적 의도와 함께,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하여 관료 행정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재직 기간에 과실 등으로 해유장을 받지 못하였을 경우, 조사(朝謝)와 녹패(祿牌) 지급, 가자(加資) 등에서 제척(除斥) 사유가 되었다. 곧 다른 관직으로의 천전이나 녹봉 수령, 품계 승급 등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유는 단순한 인수인계 절차가 아니라, 재임 기간 중의 모든 직무 수행의 결과를 심의하여 책임을 부과하는 고과의 성격을 띤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해유의 행정절차는 제일 먼저 구관과 신관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신관이 해유 내용의 이상 유무를 점검한 뒤에, 이상이 없으면 다음 절차로서 상급 관청에 보고하였다. 이때의 상급 관청은 외관의 경우에는 관찰사나 절제사이며, 경관의 경우에는 병조와 호조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때에 올리는 문서를 첩정(牒呈)이라 하였다. 이 첩정은 일정한 공문서 형식을 갖추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해유첩정식(解由牒呈式)’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해유 과정에는 여러 유형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다. 신관의 상환(相換)·질병·친상(親喪) 등의 연고와 무해유(無解由) 및 공무 등으로 인한 부득이한 사유가 생겼을 때에는 절차상의 방법을 달리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해유첩정으로 보고받은 절제사와 관찰사 등은 이를 심사한 뒤, 이 첩정에 관문을 작성, 점연하여 호조나 병조에 이관하였다. 이때의 문서 양식 역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는데, 바로 ‘해유이관식(解由移關式)’이었다. 관찰사 등의 관문을 받은 병조나 호조는 탈유무를 심사하고, 그 결과를 이 관문에 배서한 뒤에 이조에 이관하였다. 경중의 각사와 관찰사가 해유를 모두 호조에 보고하는 행정절차의 규칙은 1430년(세종 12)에 수립되었다. 호조에서는 해유를 상고하여 흠결이 없으면 해유장 발급을 판서가 허락하고 그 뒤에 참의가 성첩하여 주었다. 그후 호조가 그 결과를 이조에 전보하면, 낭청이 조흘(照訖)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해유의 행정절차는 종결되었다.

해유제의 시행 목적은 당시 관료들의 책임 행정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재임 기간 중의 업무 수행 결과를 해유를 통하여 면밀히 따져, 과실이나 손실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왕조 성립 초기에 이미 지방 수령의 손실 책임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신관·구관의 재고 조사 철저와 그 결과에 따른 손실 보전 규칙이 그것이었다. 또한 공물(貢物)전조(田租)를 미납한 자는 해유에 빙고(憑考)하도록 하는 규칙도 마련되었다. 해유의 빙고는 재임 기간 중의 재정 결손 여부를 심사하여 책임 소재를 가리고 결손을 추징하는 주요 근거 자료가 되었다.

결손 잡물의 추징은 당연하다손 치더라도 해유제의 시행 목적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과실에 따른 인사고과상의 불이익을 부과하였다. 그 방법으로서는 먼저 구관이 천전(遷轉)한 뒤에 전임의 해유를 상고하고 나서 조사녹패(朝謝祿牌)를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만’으로 다른 관직으로 천전한다고 해도 해유를 마치지 않았으면 직첩과 녹봉을 받을 수 없었다. 또한 가자(加資)도 해유에 결격 사유가 없어야 했다. 이처럼 해유제는 인사고과의 성격이 짙은 제도였다.

해유의 행정절차 및 규식은 해유 문서를 통하여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보내는 관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단계의 절차를 거치도록 규정되어 있는 해유 행정절차는, 재정 손실을 보전할 목적으로 제정한 관료 행정의 인수인계 규칙이었다. 그 제도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경국대전』에는 ‘해유이관식’과 ‘해유첩정식’이 규정되었다. 그 후 해유이관은 발급자와 경유 기관의 차이로 말미암아 여러 형태의 문서 양식으로 분화되었다. 17세기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이러한 여러 형태의 문서 양식은 『전률통보(典律通補)』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실제 관료들의 문서 생활에서는 행정절차상의 관행에 어긋나거나 문서 양식과는 다른 기재 양식 혹은 용어의 사용이 이루어지고, 당해 기관에서는 고유의 문투를 정하기도 하였다. 관찰사나 병조에서 이조로 직송 이관하거나, 병조에서 호조로 보내는 문서 양식이 해유이관식과 다른 문투를 사용하는 것 등이 그 사례에 해당하였다. 해유첩정은 지방관이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올리거나 절도사가 병조에 올리는 문서였다. ‘첩정식’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 해유첩정도 여러 문서에서 해유 대신 첩보(牒報) 혹은 상고(上告) 등의 칭호를 사용하거나 문투에서 상이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더라도 현존하는 많은 해유 문서들의 사례를 문서 양식과 비교 검토해 본 결과, 조선후기 관료들의 문서 생활은 양식에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문서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문서의 목적과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는 융통성 있는 기재 방식과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관료 행정의 기술적 운용 능력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였다. 발급자에 따라 기재 양식을 달리하였다고 해서 이를 제척 사유로 삼아 환송한다거나 파기 내지 재작성을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그리고 해유 대상자의 소관 업무와 그 다양함, 재직 기간의 차이, 소속 기관의 특성 등으로 인하여 일률적인 행정절차와 계통 질서 및 문서 양식의 요구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관(移關)의 다양한 문서 양식을 창출해 내었다. 한편으로는 해유 대상자의 책임과 의무를 분명히 하고자 해당 기관에 의한 사안별 심의를 철저히 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려는 선진적인 행정제도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관행적으로 행해 오던 방식이 그 문서 양식의 본래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한, 해유 문서 양식은 조선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질 수 있었다.

해유 문서의 특징을 보여 주는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지방 수령 외에 홍문관 교리나 휘릉별검, 자여도찰방, 공충병마우후, 원주판관, 공조 정랑 등을 역임한 자들이 남겨 놓은 문서들이었다. 이들 문서는 문서 양식이라든가 행정절차 등에서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홍문관 교리 최상중(崔尙重)은 2개월이 채 못 되어 병으로 체직되었으므로 다른 관직으로 천전하는 데 있어 해유에 구애되지 않았다. 문서전장(文書傳掌)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호조의 관문에는 반드시 기재되어야 할 ‘해유성급(解由成給)’이라는 문구가 빠져 있었다.

휘릉별검김재일과 관련한 해유 문서는 경관직 문서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찰방김낙일의 해유 문서는 겸순찰사에서 이조로 직송 이관하는 데 절차상의 결함이 발생하여 첩정의 재작성과 호조 및 이조로의 이관 절차가 원칙대로 다시 진행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군우후 유억의 해유 문서는 절도사가 이조로 직송 이관한 사례였다. 호조에서 이조로의 이관은 4년 이상이 경과한 뒤였는데, 그 이유는 추측하건대 역시 행정 절차상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공조 정랑 안담수(安聃壽)의 사례는 사일(仕日)이 열흘이 차지 않아 무해유(無解由)에 해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변천

1391년(공양왕 3) 5월에 처음 반포된 해유제는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곧 계승되었다. 해유에 관하여 가장 먼저 제정된 세부 시행 규칙은 1394년(태조 3)에 마련된 신구 수령의 재정 손실 추징안이었다. 기본적으로 전곡을 담당하는 관사의 관리는 경관과 외관을 막론하고 해유 대상자였다. 전곡을 담당하지 않더라도 각사의 관원 또한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경관직의 경우 1477년(성종 8)에 정비된 결손 잡물의 징수 기관과 방법에 관한 수교에 의정부를 비롯해서 중앙의 정부 기관이 모두 포함된 것으로 보아, 해유 대상에 포함된 시점은 서로 다를지라도 이들 중 직무의 성격상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해유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행정이 체계화·구조화되면서 해유제의 필요성이 갈수록 증대되었고, 그 적용 대상 범위 또한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특히 세종대에는 문무 관료 중에서 겸직자와 무록관(無祿官), 체아직까지도 해유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한 모든 도감(都監)들도 해유와 전장의 절차를 이행하였다. 세조 연간에는 해유 대상에 대한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전에 적용되지 않던 당상관 이상의 지방 수령을 해유 대상자로 지정하였다는 사실이었다. 1461년(세조 7)에 단행된 이 조치는 세조의 권력 강화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유제는 결국 『경국대전』의 이전(吏典)호전(戶典)에 성문화되었다. 이전의 해유조에는 “무릇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에는 해유를 고찰한다.”고 하고, 그 주에 “병조도 같다.”고 한 바와 같이, 해유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유 대상에서 제외되는 예외 조항을 둔 것도 아니었다. 거의 모든 관리들이 해유를 준수해야 할 의무가 법전에 명시됨으로써 해유제는 정착되었다.

해유 대상자가 확대되고, 재무 및 물품 등 종합 행정이 성숙되어 감에 따라 해유 기재 사항도 증가하였다. 전곡(錢穀)이야 기본 항목이므로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정부와 각 관청의 중요 정책이나 사안에 따라 해유 관련 항목이 잇달아 추가되었다. 해유가 각 관청의 재무 및 기물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재물 조사서였던 셈이었다.

의의

조선시대의 해유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칙에 철저하였다. 재임 기간 중의 직무에 대한 충실도 및 공과 등이 여지없이 드러날 수 있도록 각종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결손이나 결함이 없을 경우에는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으나, 그 반대일 경우에는 추징을 비롯하여 월봉을 지급하지 않는다든가 인사상의 불이익을 줌으로써 모든 관료로 하여금 자신의 직무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는 책임 행정을 구현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해유 행정에 대한 기본자세는 인의(仁義)로써 득인심(得人心)을 실현하는 왕도 정치의 근본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해유제 시행이 국가의 궁극적 존재 가치인 민심을 사로잡는 일환이었던 셈이었다. 관료의 책임 행정을 국가에서 요구하기 이전에, 국민을 상대로 하는 관료는 인과 의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도덕성과 자질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는 제도가 해유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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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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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민혁, 「조선 후기 해유행정의 문서 양식과 그 실제」, 『고문서연구』 2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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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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