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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0 판




총론

[1469년(예종 1)∼1536년(중종 31) = 68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서예가. 이조 판서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선임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자는 희인(希仁)이고, 호는 이계(伊溪)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순창(淳昌)이다. 아버지는 여절교위(勵節校尉)신홍(申洪)이고,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는 헌릉 직(獻陵直)변균(卞鈞)의 딸이다. 영의정신숙주(申叔舟)의 막내동생 귀래정(歸來亭)신말주(申末舟)의 손자이고, 좌의정신용개(申用漑)의 6촌이다. 특히 예서(隸書)초서(草書)에 능하였는데, 역대 서예가의 글씨를 모아서 『해동명적(海東名迹)』을 간행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86년(성종 17)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 제1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8세였다.[『기재집(企齋集)』 문집(文集)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判書申公神道碑銘)」] 1495년(연산군 1)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

처음에 글씨를 잘 쓴다고 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 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고, 1497년(연산군 3)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여, 송아지 한 필을 하사 받았다. 승문원 주서(注書)가 되었다가, 1498년(연산군 4)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을 차례로 맡았다. 이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일손(金馹孫) 등을 심문하는 추국청(推鞫廳)의 추관 낭청(推官郞廳)에 참여하여, 임시 낭관인 가랑청(假郞廳)최한원(崔漢源) · 성희안(成希顔) · 남곤(南袞) 등과 함께 각기 가자(加資)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7월 27일]

1499년(연산군 5)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지평권세형(權世亨)이 아뢰기를, “홍문관의 관원을 차례대로 천전(遷轉)하는 것은 비록 성법(成法)이 있다 할지라도 마땅히 그 기간의 길고 짧은 것을 계산해야 하는데, 지금 그 차례대로 전임(轉任)하는 것이 모두 외람됩니다. 이 앞서 신공제는 승문원 주서에서 체임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고, 또 옮겨서 병조 좌랑이 되었는데, 그간의 월수가 5∼6개월에 그친 것이 아니지만,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시키는 데에 있어서 너무 빠르다고 논박하여 개정하였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이미 시행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 5월 21일)

할아버지 귀래정신말주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전라도능성현령(綾城縣令)으로 나갔다. 농민들에게 부세(賦稅)를 공평하게 거두었으므로, 능성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로의 칭송을 받았다. 조부 신말주는 일찍이 부모를 잃은 손자 신공조 형제를 키웠다. 1503년(연산군 9) 조부 신말주의 상을 당하여 능성 현령을 사임하고 전라도 순창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는데, 능성과 순창의 거리가 가까워서 능성 고을의 백성들이 연이어 순창으로 와서 무덤에서 함께 호읍(號泣)하며 차마 신공조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1506년(연산군 12) 조부 신말주의 3년 상례를 끝마치고 나서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정랑(正郞)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할머니 설씨(薛氏) 부인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갔는데, 1508년(중종 3) 조모 설씨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순천에서 3년 상을 끝마치고,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전례에 의정부 낭관(郎官)을 외직에 임명하지 않았는데, 이때 왜구가 영남(嶺南) 지방에 침입하여, 창원부(昌原府)가 병화(兵火)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으므로, 조정에서 문무(文武)의 자질을 겸비한 신공제를 창원 부사에 임명하였다. 그가 부임하자, 유망(流亡)한 백성들이 농업을 회복하여, 부고(府庫)가 가득차고, 포흠 문권(逋欠文券)을 불살라버리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고을의 준수(俊秀)한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치자 학교가 다시 부흥하였다. 관찰사가 신공제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기를, “근면하고 청렴하며 유능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잘 따릅니다.” 하니, 중종이 신공제에게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특별히 가자(加資)하였다. 중종은 신공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다. 1516년(중종 11) 경상도 수군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활을 당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사직하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1517년(중종 12)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소환(召還)되었다.이때 이조 판서남곤 등이 신공제를 문근(文瑾) · 김양진(金楊震)과 함께 승지(承旨)의 3후보자에 주의(注擬)하였으나, 문근이 동부승지로 발탁되고, 김양진은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신공제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12년 윤12월 26일) 1518년(중종 13) 마침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함경북도 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이조 판서안당(安瑭)이 아뢰기를, “변방에 사변이 있을 때에는 변장을 반드시 각별히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지금 북도(北道)의 병사(兵使)신공제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능하고 또 활도 잘 쏘나, 그곳의 병사를 지낸 위망(威望)이 있는 사람만 못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중종실록』중종 13년 8월 3일] 1519년(중종 14) 체임되어 고향 순창으로 돌아왔다. 곧 형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서[『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청주목사(淸州牧使)를 겸임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으나, 남곤의 훈구파(勳舊派)가 정권을 잡자, 중종은 신공제를 불러서 사림파의 빈자리를 메우도록 하였다. <기묘사화>때 조광조(趙光祖)가 죽자, 중종은 그 대신 능력 있는 신공제를 발탁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다.

1520년(중종 15) 조정으로 들어와서 호조 참판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경상도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도를 다스리는 자가 대부분 서류 결재를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여유 있게 일을 처리하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1522년(중종 17) 이조 참판이 되어서 인사 행정을 장악하였다.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이듬해 관압사(管押使)공서린(孔瑞麟)과 함께 돌아왔다.[『중종실록』중종 18년 3월 17일] 1524년(중종 19) 공조 참판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9년 12월 18일] 1525년(중종 20) 중시(重試)에서 당상관 중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당하관 중에서 수석한 차지한 정언조인규(趙仁奎)와 함께 특별히 제작한 활 한 정(丁)씩을 하사 받았다.[『중종실록』중종 20년 5월 15일]

1527년(중종 22)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이조 판서에 승진되어 문관(文官)의 전형(銓衡)을 맡아서 보았는데, 그는 평소 강직하고 청렴하여 인사 행정을 공평하게 시행하였으므로, 그의 집에 인사를 청탁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1528년(중종 23)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겨서, 성균관(成均館)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 항상 성균관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해 겨울에 호조 판서로 옮기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임하였다. 오래도록 호조를 맡아서 나라의 재정을 관장하면서 규모있게 나라 살림을 운영하였다. 1530년(중종 25) 경기도에 기근이 들자, 진휼(賑恤)을 중하게 여긴 중종이 신공제에게 경기도 관찰사의 직임을 맡아서 기민(饑民)들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육경(六卿) 곧 판서를 이유없이 외직으로 나가게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하자, 중종이 이를 그만두고, 1531년(중종 23) 그 대신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를 발탁하여 보냈다. 김안로는 인종의 친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의 부마 김희(金禧)의 아버지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이에 대해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안로를 다시 등용하게 되는 분위기가 여기에서 조성되었는데, 이것은 김근사(金謹思)와 심언광(沈彦光)의 소행이다.” 하였다.[『중종실록』중종 25년 6월 1일] 이를 보면, 중종은 신공제를 등용하여 김안로와 같은 측근으로 삼아서 의지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1531년(중종 26) 호조 판서신공제가 장악원(掌樂院)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가(『중종실록』 중종 26년 1월 23일),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중종실록』중종 26년 9월 21일] 1533년(중종 28) 조정으로 들어와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안로가 권력을 잡고 김근사와 심언광 등과 당파를 결성하여 세자(나중에 인종)를 받들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신공제도 그들에게 배척당하여, 1534년(중종 29)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서[『중종실록』중종 29년 4월 11일], 추운 겨울에 북풍을 맞으며 두만강변의 6진(鎭)을 순행하다가 풍토병을 얻었다. 1536년(중종 31) 조정으로 돌아와서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중종실록』중종 31년 5월 19일]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지병으로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8세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그때 그의 친한 벗 허암(虛庵)정희량(鄭希良)이 달려와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재상(宰相)의 그릇인데, 이와 같이 하다가 죽을 뿐이라면, 이것은 온당치 않다.” 하였다고 한다.

서예가 신공제

어려서부터 영기(英氣)가 있었고, 성장해서는 학행(學行)이 날마다 진보하였으며, 서예(書藝)가 절륜(絶倫)하였고, 교유하던 친구들은 모두 당대의 이름 있는 불우헌(不憂軒)정극인(丁克仁) 등과 같은 인사들이었다. 할아버지 신말주는 참판신장(申檣)의 5형제 중에서 막내아들로서 나주(羅州)의 오룡동(五龍洞)에서 태어났다. 귀래정신말주는 중형 신숙주와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고, 부인 설씨(薛氏)의 고향 순창에서 살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두 생존해 있을 때 아버지 신홍(申洪)과 어머니 변씨(卞氏)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어린 신공제는 조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신공제가 나이가 미처 어린아이가 되기도 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부모의 무덤 곁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는데, 그 애통해 하는 모습이 지나칠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신말주가 순창의 ‘귀래정(歸來亭)’에서 글과 글씨를 가르쳤는데, 손자 신공제가 글씨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 증조부 신장의 글씨를 주고 연습하게 하였다. 암헌(巖軒)신장은 고려 말의 유명한 서화가 신덕린(申德隣)의 손자로서 덕린체(德隣體)를 계승하여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다. 고려 말 목은(牧隱)이색(李穡)과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가 격찬한 덕린체는 중국 예서(隸書)의 팔분체(八分體)를 초서와 결합하여 독특하게 발전시킨 서체였다.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 보면, “지금 숭례문(崇禮門)의 편액은 바로 신장(申檣)의 글씨이다.”라고 하였다.[『완당전집』 권7] 신공제는 조부 신말주를 통해서 증조부인 집현전 부제학신장의 덕린체를 이어 받아서 일찍이 초서와 예서에 정통하였는데, 만년에 5대조 신덕린의 팔분체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독특한 촉체(蜀體)를 개발하였다. 촉체는 중국 송(宋)나라 동파(東坡)소식(蘇軾)의 서체를 말하는데, 소식의 고향이 중국 관중(關中)의 촉(蜀) 지방이었기 때문에 송나라 소동파의 글씨체를 촉체라고 하고, 원(元) 나라 명필(名筆)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송설체(松雪體)라고 한다.

신공제는 일찍이 고향 순창의 물과 바위를 사랑하여, 할아버지 신말주가 지은 귀래정에서 글을 배우고 글씨를 연습하였는데, 귀래정의 현판은 유명한 문필가 서거정(徐居正)이 써서 신말주에게 준 것이었다. 신말주는 이 정자에서 산수의 풍광을 즐기면서 노년을 보냈는데, 손자 신공제는 과거에 합격하여 그 곁을 떠나서 서울 등지에서 벼슬살이 하다가, 할아버지 신말주가 마침내 노병이 들자, 신공제는 할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전라도능성 현령으로 내려왔다.능성과 순창의 거리가 가까워서, 현감신공제는 순창에 자주 와서 할아버지의 병을 구료하였다. [『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1503년(연산군 9) 조부 신말주가 돌아가자, 신공제는 능성 현령을 사임하고, 순창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때 신공제는 귀래정 곁에 따로 정자 하나를 지어 ‘온진정(蘊眞亭)’이란 편액을 내걸고서, 스스로 자기 호(號)를 ‘이계 주인(伊溪主人)’이라고 불렀다. 그는 순창의 수석(水石)을 사랑하여 정자 위에서 ‘이천(伊川)에 흐르는 시냇물[伊溪]’을 바라보고 글씨를 쓰면서 ‘참된 마음을 쌓아가는[蘊眞]’ 은자(隱者)처럼 조용히 살고자 하였는데, 이는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서 고향에서 은거하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지금 전라남도 순창에 ‘온진정’은 남아 있고, ‘귀래정’은 없어졌다.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이 신공제의 집을 포목 3천 필에 사서 내흥청의 기녀(妓女)들을 수용하는 별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신공제의 서울 대저택이다. 이때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공제의 집값을 싯가[市準]에 따라 면포(緜布) 3천 필을 주고, 내흥청(內興淸)에게 내려주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8월 18일) 순창이 고향인 신공제가 서울에 궁궐 같은 대저택을 언제,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 매우 흥미롭다. 조부 신말주가 서울에서 화직(華職)을 지낼 때 샀을 수도 있고, 신공제가 글씨를 써주고 사례비를 받아서 산 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공제는 당대 청백리로 뽑힌 사람이다.

신공제는 젊어서부터 학문을 사랑하고 글씨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서예(書藝)의 명필(名筆)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글자를 모사(模寫)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써서, 관리로 있을 때에도 비록 장부(帳簿)가 번잡하고 안건(案件)이 가득하였으나, 그 가부를 결정하여 서면으로 처리하면서, 그는 붓을 잡고 서첩(書帖)에 글을 그침 없이 써내려갔다. 평소에도 그는 항상 일정한 방에 혼자 거처하면서 오직 문묵(文墨)으로써 스스로 글씨를 즐겼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신공제는 명필(名筆)을 열람하면서, 우리나라 신라 때 김생(金生)의 진체(眞體)를 비롯하여 세종 시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송설체(松雪體)까지 유명한 명필가의 글씨 흔적 곧 명적(名蹟)을 찾아내어 모사하여 책으로 엮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해동명적』이라는 서예 총람(總攬)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대표적 글씨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참판(參判)안침(安琛)의 묘비(墓碑)」와 전라도 남원(南原)에 있는 「판서(判書)윤효손(尹孝孫)의 묘비(墓碑)」 등이다.

성품과 일화

신공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용모가 수려(秀麗)하였다. 고아(高雅)한 뜻을 마음에 품고서 옛 것을 좋아하고 정도(正道)를 지켰으므로, 일을 처리할 때 과단성이 있었다. 또한 명분(名分)과 의리(義理)에 대해 스스로 갈고 닦아서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으로서 내직(內職)과 외직을 출입하던 20여 년 동안 시종 절개가 한결같아 권세가들이 그를 꺼리고 미워하였으므로, 거의 위태롭게 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는 초연하게 이에 대처하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어려서 신공제가 한번은 종기를 크게 앓았었는데, 거의 고칠 가망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4촌형인 삼괴(三魁)신종호(申從濩)가 달려와서 어린 신공제를 얼싸 안으면서 말하기를, “이게 천명(天命)인가. 인명(人命)인가. 이 아이의 운명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 병이 점차 위독해졌는데, 할머니 설부인이 어린 손자를 품어 안고 어루만지면서 보듬고, 할아버지 신말주가 밤을 지새우면서 약물을 먹이고 극진히 간호하여 마침내 병을 치료하여 낫게 되었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1506년 <중종반정> 이후에 순창에 살던 할머니 설씨 부인이 병이 나자, 손자 신공제는 할머니의 병을 간호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남원 부사로 내려왔다. 남원에서 순창으로 오가면서 1년 이상 할머니 설씨 부인을 극진하게 간호하였다. 1508년(중종 3) 조모 설씨 부인의 상을 당하자, 남원부사를 사임하고 순천에서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신공제는 부모 대신에 자기들 3형제를 키워준 조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6년 동안 산소 옆의 여막(旅幕)에서 두 동생들과 함께 살면서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를 지키고 그 넋을 위로하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신공제가 전라도능성 현령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고을 빈농들의 성명을 나열하여 써 가지고 와서 고하기를, “이놈들은 원님의 순창 집에서 도망친 노비(奴婢)들인데, 아무아무 곳에 살고 있으니, 추심(推尋)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나 신공제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노비가 없다.” 하고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물러나서 말하기를, “저 고을 원님은 참 어리석다. 이렇게 공짜로 노비를 얻기가 어찌 그리 쉽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도망친 노비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으나, 신공제가 역시 받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내쫓아 버렸다. 당시 조관(朝官) 중에서 만일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양민(良民)이 노비가 되겠다고 원하는데 거절하고 받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지방관 중에서 염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양민(良民)을 강제로 억압하여 자기 사천(私賤)으로 삼았을 것이다.(『중종실록』 중종 4년 9월 29일)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가 죽자, 중종은 능력 있는 신공제를 그 대신 발탁하려고 하였다. 1530년(중종 25) 경기도에 기근이 들자, 중종이 신공제에게 경기도 관찰사의 직임을 맡아서 경기도 기민(饑民)들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신공제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대간에서도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자, 중종이 이를 그만두었다. 1531년(중종 23) 그 대신 척신 김안로를 발탁하였는데, 중종 말년에 정권을 잡은 김안로는 김근사와 심언광과 손을 잡고 문정왕후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실각하였다. 중종은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 등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전반기에는 조광조를 등용하였고, 말기에는 척신 김안로를 발탁하였다. 그 사이 중기에 신공제를 발탁하여 정권을 맡기려고 하였으나, 신공제는 정권에 대한 욕망이 없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청백리에 선임되었으나, 정승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그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자기 심복을 심고 자기 당파를 만들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그의 아들과 사위들을 관직 중에서 세력이 막중한 자리에 임명할 것을 권유하는 가까운 친척이 있었는데, 그는 곧 정색하고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문헌(文獻)이 의하면,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으며, 나의 지위도 최고에 달하였다. 사람으로서 태어나서 누군들 부귀하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우리 집안에서 이를 독점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치소(治所)의 홍복산(洪福山)에 있고, 그의 6촌 낙봉(駱峯)신광한(申光漢)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기재집(企齋集)』 문집(文集)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判書申公神道碑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인 호산군(湖山君)소평공(昭平公)이현(李鉉)의 딸인데, 5남 5녀를 낳았다. 장남 신연(申漣)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군수(郡守)에 이르렀으나 아들이 없었고,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차남은 신수(申澻)이고, 3남은 신영(申泠)이다. 4남 신번(申瀿)은 선공감(繕工監)봉사(奉事)를 지냈고, 5남은 신굉(申浤)이다. 장녀는 생원 설겸(偰謙)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안종전(安從㙉)에게 시집갔고, 3녀는 사간원 사간(司諫)유충관(柳忠寬)에게 시집갔고, 4녀는 경기도 관찰사정언각(鄭彦慤)에게 시집갔고, 5녀는 윤희로(尹希老)에게 시집갔다.[『기재집』 문집 권2 「판서 신공 신도비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기재집(企齋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청음집(淸陰集)』
  • 『저헌집(樗軒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충재집(冲齋集)』
  • 『용재집(容齋集)』
  • 『음애집(陰崖集)』
  • 『송재집(松齋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어우집(於于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