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침(安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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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안침 |
한글표제 | 안침 |
한자표제 | 安琛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중종 |
집필자 | 홍현보 |
자 | 자진(子珍) |
호 | 죽창(竹窓), 죽제(竹齊), 죽계(竹溪) |
시호 | 공평(恭平)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45년(세종 27) 2월 12일 |
사망 | 1515년(중종 10) 2월 1일 |
본관 | 순흥(順興)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8번지 |
증조부 | 안종약(安從約) |
조부 | 안구(安玖) |
부 | 안지귀(安知歸) |
모_외조 | 상주 박씨(尙州朴氏) : 박이창(朴以昌)의 딸 |
형제 | (형)안호(安瑚), 안선(安璿) (동생)안종(安琮), 안기(安璣) |
처_장인 | 광주 이씨(廣州李氏) : 이수철(李守哲)의 딸 →(자녀)4남 2녀 |
자녀 | (1자)안처명(安處明) (2자)안처선(安處善) (3자)안처성(安處誠) (4자)안처신(安處身) (1녀)신렴(申濂)의 처 (2녀)남세준(南世準)의 처 |
저술문집 | 『풍소궤검(風騷軌範)』 |
작품 | 「밀성군이침신도비(密城君李琛神道碑)」, 「좌찬성한계희신도비(左贊成韓繼禧神道碑)」, 「월성군이철견신도비(月城郡李鐵堅神道碑)」, 「황치신신도비(黃致身神道碑)」, 『성임신도비(成任神道碑)」, 「황희신도비(黃喜神道碑)」, 「어유소장군신도비(魚有沼將軍神道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침(安琛) |
총론
[1445년(세종 27)~1515년(중종 10) = 71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중종(中宗) 때의 문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고, 자는 자진(子珍)이며, 호는 죽창(竹窓), 죽제(竹齊), 또는 죽계(竹溪)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안지귀(安知歸)이고,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박이창(朴以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안구(安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이다. 문장과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62년(세조 8) 18세의 나이로 작은형 안선(安璿)과 함께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함께 합격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맏형 안호(安瑚)와 나란히 고성(高城)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의정부(議政府)사록(司錄)을 걸쳐 1468년(세조 14)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예종실록(睿宗實錄)』예종 즉위년 10월 10일, 『용재집(容齋集)』 권10 「공조판서안공신도비명(工曹判書安公神道碑銘)」 이하 「안침신도비명」] 이때 사헌부에서 안침이 등급을 넘어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며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예종실록』예종 즉위년 10월 10일, 예종 즉위년 10월 22일, 예종 즉위년 10월 23일]
이어 1469년(예종 1)부터 1472년(성종 3)까지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의 편수관 기사관이 되어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이 공을 인정받아 1471년(성종 2)과 1472년(성종 3)에 각각 1자급씩 승품하였다.[『세조실록』 부록, 『예종실록』 부록, 『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2년 12월 18일, 성종 3년 5월 10일] 한편 1471년(성종 2) 성종(成宗)은 집현전(集賢殿) 고사(故事)에 따라 예문관(藝文館)을 설치하고 당시의 명사들을 가려 뽑아 충원하였는데, 이때 안침은 예문관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청(經筵廳) 검토관(檢討官)이 되었다.[「안침신도비명」] 그리고 예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1473년(성종 4) 통덕랑(通德郞)행(行)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어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성종 3년 12월 16일, 성종 4년 12월 1 3일, 성종 6년 1월 17일]
1477년(성종 8) 8월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는데, 이무렵 조대(朝對)에서 공주의 저택이 국가의 법제를 어겼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8년 8월 17일, 성종 8년 9월 29일, 「안침신도비명」] 당시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이던 임광재(任光載)의 아버지 임사홍(任士洪)이 간원(諫院)의 장(長)으로서 대간의 의논이 모아진 뒤에 아뢸 것을 주장하자, 안침은 “언관은 저마다의 생각을 다 아뢰어야 하는 법이니, 만약 기다리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언로에 장애가 될 것이오.”라고 반박하였다. 그래도 임사홍은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성종은 임사홍과 안침을 모두 체직시켰다.[『성종실록』성종 8년 10월 1일, 성종 8년 10월 2일, 성종 9년 4월 27일, 「안침신도비명」] 이후 안침은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인 1478년(성종 9) 4월 흙비가 내리자 사간원과 사헌부 등에서는 하늘의 경고라며 금주령을 내릴 것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성종 9년 1월 27일, 성종 9년 4월 1일, 성종 9년 4월 7일] 그러나 당시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였던 임사홍은 흙비만으로 금주령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임사홍은 결국 탄핵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주(義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성종실록』성종 9년 4월 27일, 성종 9년 5월 8일] 이때 안침 또한 이 탄핵에 동참하여 임사홍에 대한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다.[『성종실록』성종 9년 4월 28일, 성종 9년 4월 30일]
1479년(성종 10)에는 평안도 위원군(渭原郡)에 불이 나서 큰 피해가 나자 경차관(敬差官)으로서 평안도에 간 후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1480년(성종 11)에는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성종실록』성종 10년 3월 27일, 「안침신도비명」] 이어 1481년(성종 12) 8월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1483년(성종 14)에는 군기시(軍器寺)정(正)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성종실록』성종 12년 8월 1일, 성종 12년 8월 2일, 성종 14년 8월 17일, 성종 14년 11월 10일] 그런 가운데 1484년(성종 15) 그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는데, 이때 안침은 불교가 백성들에게 무익하다며 사사전(寺社田)의 징세를 여러 차례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성종실록』성종 15년 6월 1일, 성종 15년 6월 8일, 성종 15년 6월 9일, 성종 15년 6월 14일] 이와 더불어 불교 우대 정책도 폐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이 또한 수용되지 않았다.[『성종실록』성종 15년 7월 24일, 성종 15년 8월 4일] 그해 그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및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인 1485년(성종 16) 6월에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15년 8월 6일, 성종 15년 9월 3일, 성종 15년 10월 26일, 성종 16년 6월 21일] 그런데 이때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정이보(鄭二寶)의 노비 입안 송사(訟事)와 연관되면서 체직되고 말았다.[『성종실록』성종 16년 7월 29일, 성종 16년 8월 1일, 성종 16년 8월 10일]
이어 1486년(성종 17) 안침은 관압사(管押使)로서 정조사(正朝使)유자광(柳子光)을 따라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이듬해인 1487년(성종 18) 2월에 돌아왔다.[『성종실록』성종 17년 10월 21일, 성종 18년 2월 28일] 이어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는데, 이때 조정에서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 함경도),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출신으로 다른 지역에 유입된 백성들을 쇄환하자 경기(京畿)는 인구가 적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쇄환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요청하여 윤허를 받았다.[『성종실록』성종 18년 5월 27일, 성종 18년 12월 21일] 1492년(성종 23) 예조 참의(參議)를 거쳐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는데, 이때 사헌부 대사헌김여석(金礪石) 등과 함께 여러 번 상소하여 도승법(度僧法)을 개정하여 사찰 및 승려를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요청하였다.[『성종실록』성종 22년 4월 12일, 성종 22년 11월 5일, 성종 23년 1월 29일, 성종 23년 2월 17일, 성종 23년 2월 18일, 성종 23년 2월 21일] 이후 도승법이 혁파되자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는 이에 반대하여 불교 보존을 요청하였으나, 안침은 민심을 생각해서라도 이를 따르지 말 것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대비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성종실록』성종 23년 11월 21일, 성종 23년 11월 23일, 성종 23년 11월 24일, 성종 23년 11월 27일, 성종 23년 11월 28일, 성종 23년 11월 29일, 성종 23년 12월 1일 성종 23년 12월 2일, 성종 23년 12월 3일, 성종 23년 12월 4일, 성종 23년 12월 5일]
1493년(성종 24)에는 이조 참의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라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고, 이어 천추사(千秋使)의 일원으로 북경에 다녀왔다.[『성종실록』성종 24년 2월 23일, 성종 24년 6월 1일, 성종 24년 7월 11일, 성종 24년 12월 3일, 성종 24년 12월 24일] 이때 그가 북경에서 구준(丘濬)이 편찬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구하여 오자, 성종은 이를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명하였다.[『성종실록』성종 25년 1월 7일] 이듬해인 1494년(성종 25)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성종 25년 1월 23일, 성종 25년 7월 29일]
한편 1484년(성종 15) 안침은 성현(成俔) 등과 함께 시작(時作)에 참고하기 위하여 중국의 고시(古詩)를 모아 45권 분량의 『풍소궤검(風騷軌範)』을 편찬하였다. 분량 및 시체와 유형 등이 다양하여 조선 전기 한문학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며, 이후 한시(漢詩)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성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이조 참판이던 안침은 성종의 국상(國喪)에 재(齋)를 올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유배를 가게 된 정희량(鄭希良) 등을 위해서 언로를 열어줄 것을 요청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1월 26일, 연산군 1월 27일, 연산군 1년 1월 30일, 연산군 1년 2월 1일] 이어 그해 8월 노사신(盧思愼)이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존을 거론하자 안침은 불가함을 말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8월 15일] 1497년(연산군 3) 2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안침의 인재 등용에 문제를 제기하자, 안침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임의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2월 14일, 연산군 3년 2월 15일, 연산군 3년 2월 16일, 연산군 3년 2월 19일, 연산군 3년 2월 20일] 그러다가 그해 8월 다시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처조카 이간(李諫)을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삼아 상피(相避)를 어겼다는 사헌부의 탄핵이 있었고, 이에 다시 사직을 청하였으나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8월 6일, 연산군 3년 8월 7일, 연산군 3년 8월 13일, 연산군 3년 9월 13일]
이듬해인 1498년(연산군 4)에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5월 10일] 그런데 이 해에 『성종실록』이 편찬되던 과정에서 훈구파(勳舊派)였던 실록청(實錄廳)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신진파(新進派) 김일손(金馹孫)의 사초 속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극돈은 유자광(柳子光)에게 이것은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것이라며 문제 제기를 하면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였다. 이에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尹弼商) 등과 함께 김종직의 세조 비방은 대역부도한 것이라며 연산군(燕山君)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이 김종직의 교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직접 볼 것을 요구하였으나, 안침과 이극돈 등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며 거절하다가 결국 일부를 절취하여 올렸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7월 11일] 이후 김일손은 처형되었고, 아울러 문제의 사초를 보았으면서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안침은 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좌천되어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7월 27일, 연산군 4년 7월 28일]
그리고 그해 10월 안침은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499년(연산군 5) 12월에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어 경연을 중지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10월 30일, 연산군 5년 12월 23일, 연산군 6년 1월 12일] 이어 그는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가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거쳐 1502년(연산군 8)에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는데, 이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성현(固城縣)에 보와 봉화대를 쌓아 왜인(倭人)들을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2월 27일, 연산군 6년 5월 29일, 연산군 8년 7월 1일, 연산군 8년 10월 11일] 그해 11월 안침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예문관 제학(提學), 형조 참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예조 참판, 주청사(奏請使) 주문사, 중추부 지사(知事),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11월 18일, 연산군 10년 4월 18일, 연산군 11년 6월 2일, 연산군 11년 10월 15일, 연산군 12년 4월 20일] 이러는 동안 그는 1503년(연산군 9)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1505년(연산군 11)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각각 승품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이 즉위하였을 때 평안도관찰사였던 안침은 1508년(중종 3)에는 성균관 동지사가 되었으며, 이어 1509년(중종 4)에는 중추부 지사를 거쳐 1510년(중종 5)에는 돈녕부(敦寧府) 지사가 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년 9월 22일, 중종 3년 10월 22일, 중종 4년 3월 22일, 중종 5년 6월 5일, 「안침신도비명」] 1514년(중종 9)에는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치사(致仕)하길 청하여서 윤허를 받았다.[『중종실록』중종 9년 10월 1일, 중종 9년 12월 5일] 그리고 그로부터 3달 후 안침은 1515년(중종 10) 2월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중종실록』중종 10년 2월 1일]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예(禮)에 따라 장례에 쓸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공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안침신도비명」]
한편 안침은 문장과 해서에 능하여서 일찍부터 명필로 뽑혔는데, 특히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따랐다.[『미수기언(眉叟記言)』「낭선군(朗善君) 서첩(書帖)의 발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4 「문예전고(文藝典故)」] 대표적인 글씨로는 『밀성군이침신도비(密城君李琛神道碑)』, 『좌찬성한계희신도비(左贊成韓繼禧神道碑)』, 『월성군이철견신도비(月城郡李鐵堅神道碑)』, 『황치신신도비(黃致身神道碑)』, 『성임신도비(成任神道碑)』, 『황희신도비(黃喜神道碑)』, 『어유소장군신도비(魚有沼將軍神道碑)』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안침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젊어서 재주가 있다고 알려졌으나, 재물을 탐내고 의리를 가볍게 생각하였다. 연산군 때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연산군의 뜻에 영합하여 은밀히 적거(謫居)해 있는 사람을 박해하였다.[『중종실록』중종 10년 2월 1일]
다른 한편으로는 성품이 민첩하고 문아(文雅)한 기풍이 있으며, 시문에 능하여 시 짓기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다. 그리하여 성종이 자주 책을 내리고 그 제목을 쓰게 하였으며, 또 일찍이 금종이[金牋]를 내려서 글씨를 쓰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감상한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총애를 받는다고 일컬었고, 청직(淸職)을 두루 지내어 당세에 명사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2년 5월 14일] 아울러 문장을 지을 때에는 뜻을 전달하는 것을 중시하였고, 사물을 만나면 그에 따라 구상하여 음운(音韻)이 절로 잘 어울렸다. 필적은 전아(典雅)하고 장중하였다.[「안침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안침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8번지에 있으며, 부인 광주 이씨(光州李氏)와 합장묘로, 형 안호의 묘 아래에 있다. 이행(李荇)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광주 이씨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이수철(李守哲)의 딸로, 4남 2녀를 두었다. 1남 안처명(安處明)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고, 2남 안처선(安處善)은 병조 좌랑(佐郞)을 지냈는데, 형 안호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3남 안처성(安處誠)은 군자감(軍資監) 정을 지냈으며, 4남 안처신(安處身)은 빙고(氷庫)별제(別提)를 지냈다. 1녀는 인천부사(仁川府使)신렴(申濂)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승정원 우승지남세준(南世準)에게 출가하였다.[「안침신도비명」]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가집(四佳集)』
- 『송계만록(松溪漫錄)』
-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두산백과』
- 『국어국문학자료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