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氷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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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얼음의 저장·보관·지급을 담당하던 예조 소속의 아문 또는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

개설

삼국시대 이래 나라에서 얼음을 저장하여 여름철에 나눠 주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시대에도 예조 소속 아문으로 빙고를 설치하였다. 빙고는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하는 동빙고, 고위 관료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저장하는 서빙고, 그리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하는 대궐 안의 내빙고 2곳을 합하여 모두 4곳이 있었다. 빙고에서는 11월 초에 얼음을 떼어 내는 장빙(藏氷)에 앞서 한강의 수신(水神)인 현명(玄冥)에게 사한제(司寒祭)를 지냈다. 사한제를 지낸 뒤 두모포(豆毛浦)와 저자도(楮子島) 사이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각 빙고에 저장하였다. 이듬해 춘분 이후 빙고의 문을 열어 각 관청과 종친 및 문무 당상관의 시제(時祭)와 내시부(內侍府) 소속의 당상관과 70세 이상의 한산(閑散) 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얼음은 이틀에 한 번씩 나누어 주었는데, 얼음 저장량이 모자랄 경우, 얼음을 나눠 주는[頒氷] 대상과 횟수를 줄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국가에서 얼음을 저장한 기록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나타난다. 『삼국유사』에는 28년(신라 유리왕 5)에 장빙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505년(신라 지증왕 6) 11월에 처음으로 소사(所司)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케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얼음을 저장하고 이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빙고전(氷庫典)이라는 기구가 있었고, 여기에 관원으로 대사(大司)와 사(司)를 두었다.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주도하여 얼음을 저장하였다. 겨울에 얼음을 저장한 다음, 입하절(立夏節)을 계기로 얼음을 꺼내 왕실이나 관청, 또는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왕조에서도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동빙고와 서빙고를 건설하였다. 동빙고는 국가 제사용 얼음을, 서빙고는 왕실용 얼음과 고위 관료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저장하였다. 동빙고와 서빙고의 설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1405년(태종 5) 육조(六曹)를 나눌 때 빙고를 예조에 속하게 한 것으로 보아 동·서빙고는 1405년 이전에 이미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에 있는 내빙고는 세종 때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여름철에 어육(魚肉)이 썩지 않도록 대비하자고 청하여 건립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빙고의 관원은 겸직인 제조(提調) 1명과 전임직으로는 종5품 별좌(別坐), 정6품 또는 종6품 별제(別提), 정8품 또는 종8품 별검(別檢)의 다섯 자리가 있었는데, 그중 4명만을 임명하였다. 별좌 이하의 정원은 4명인 셈이다. 빙고는 별좌가 책임자인 종5품 아문이었다. 그러나 『속대전』과 『대전통편』 단계에서는 종5품 별좌를 없앴고, 별제와 별검을 각 2명씩 증원하여 동빙고와 서빙고에 배치하였다. 빙고의 책임자가 종6품 별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대전회통』에서 빙고는 종6품 아문으로 강등되었다. 빙고에는 원래 경아전으로 서리(書吏) 4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그 후 서리를 서원(書員)으로 격을 낮추고, 동빙고·서빙고에 각 2명씩 배치하였다. 이 외에도 빙고에는 얼음을 떼어 내는 장빙을 담당하는 감역부장(監役部長)과 벌빙군관(伐氷軍官) 등이 있었다.

빙고는 동빙고·서빙고 1곳씩과 내빙고 2곳을 합하여 모두 4곳이었다. 각 빙고의 규모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전란이 있거나 흉년이 들 경우 빙고를 수시로 감축하였기 때문이다. 빙고 한 동(棟)을 채라고 했는데, 경(梗)이라 쓰고 채로 읽었다.

대궐 내에 있는 내빙고 2곳은 창덕궁의 북쪽과 남쪽에 있었다. 북쪽 빙고는 한성부에서 담당했으므로 한성부채, 남쪽 빙고는 자문감(紫門監)에서 담당했으므로 자문감채라고 했다. 내빙고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1채로 감축되었다가, 다시 1645년(인조 23)부터 2채로 복구되었다. 그 후 1789년(정조 13) 대궐 내의 내빙고를 양화진으로 옮기면서, 내빙고는 혁파되었다.

동빙고는 지금의 서울 옥수동 한강변 즉 동호대교 북단에 해당하는 두모포에 있었다.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관할하였다. 동빙고는 14칸의 1채였는데, 한 칸의 규모는 서빙고보다 배나 되어 규모가 매우 컸다. 동빙고에는 한성부 남부 주민이 소속되어 장빙역(藏氷役)을 수행하였다.

서빙고는 둔지산 기슭에 있었는데, 왕실과 문·무 정2품 이상 관리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저장하였다. 서빙고의 규모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8채였다가 임진왜란 직후에 6채로 줄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3채로 줄었다가 이후 1644년에 4채, 1645년에 5채로 늘었다가 1670년(현종 11)에 다시 4채로 줄었다. 그러나 그 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세기에는 6채로 정착되었다. 서빙고의 각 채마다 장빙역을 책임진 아문이 있었는데, 이를 주채관(主梗官)이라고 했다. 주채관도 중앙 각 사 재정 형편에 따라 수시로 변동했는데, 서빙고 채수와 주채관의 시기별 변동 상황을 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서빙고의 장빙역은 주채관의 주관하에 중앙 각 아문과 한성부의 중부, 동부, 서부, 북부 주민이 수행하였다.

빙고의 규모를 알기 위해 각 빙고에 저장된 얼음양을 보면 다음의 <표 2>와 같다.

<표 2>에서 보면 관영 빙고의 총저장량은 대체로 20만 정 내외였다. 1680년에 비해 1808년의 얼음 저장량이 줄어든 것은 정부의 얼음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 18세기 이후 민간 장빙업이 성행하여 관영 빙고에서 얼음을 저장할 필요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얼음을 캐는 장빙에서 나눠 주는 반빙의 전 과정을 1년 단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11월 초에 예조에서 장빙사목(藏氷事目)을 반포하여 장빙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였다. 장빙사목을 반포한 후 12월 초에는 한강의 수신인 현명에게 사한제를 지냈고, 사한제가 끝난 뒤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였는데, 이를 벌빙(伐氷)이라 하였다.

얼음의 채취는 도끼로 수면을 나눈 다음 길이 45㎝, 폭 30㎝로 나누어 채취하였다. 얼음의 두께는 한강 얼음이 두껍게 얼 때는 30㎝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20㎝ 정도면 좋은 것으로 쳤다. 얼음 채취는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얼음 채취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채빙공(採氷公)이 전담하였다. 얼음 한 덩어리는 정(丁)이라고 하며 무게는 20㎏ 정도이다. 이 얼음을 지게나 소달구지에 싣고 빙고까지 운반하였다. 채취한 얼음을 동빙고나 서빙고 또는 내빙고까지 운반하는 역을 운빙역(運氷役)이라고 하였다.

빙고에서 얼음이 녹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빙고에 얼음을 효과적으로 채워야 했다. 그러므로 빙고에 얼음을 채워 놓는 작업도 숙련된 저장공이 담당하였다. 크게 벌빙과 운빙으로 이루어진 장빙 과정은 빙고의 별제 두 사람과 감역부장, 벌빙군관이 감독하여 이루어졌다. 감독관들은 칡 끈을 신발에 동여매어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변에는 장작을 피워 얼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의약을 상비하여 다친 사람을 구제하였다.

만약 날씨가 따뜻하여 한강이 얼지 않을 때는 기한제(祈寒祭)를 올렸다. 한강에 얼음이 얼지 않을 경우 동·서빙고의 얼음은 한강 상류에서 경기도민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벌빙하거나 또는 계곡의 하천에서 채취하였다. 내빙고의 얼음은 경회루에서 채취하기도 하였다. 장빙역은 한강에 얼음이 얼지 않은 따뜻한 때가 훨씬 고역이었다. 상류에서 채취한 얼음을 빙고까지 운송해야 하는 운빙역이 몇 배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에 시일이 촉박하면 얇게 언 얼음이라도 저장했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두껍게 언 얼음을 채취하여 다시 저장하기도 하였다.

장빙이 끝난 후, 이듬해 춘분이 되면 빙고의 문을 여는데 이때도 사한제를 지냈다. 춘분 이후 국가 제사용 얼음을 담당하는 관직자와 궁궐·각 관청·종친의 정2품 이상의 재추(宰樞), 내시부 소속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한산(閑散) 당상관에는 서빙고에서 얼음을 받아 갈 수 있는 빙표(氷票)를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서빙고에 가서 빙표를 제시하여 얼음을 수령하였다. 또한 활인서(活人署)의 병자(病者)들과 의금부(義禁府), 전옥서(典獄署)의 죄인들에게도 얼음을 지급하였다. 얼음을 나누어 주는 일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큰일[大事]로 여겼으며, 이를 관할하는 빙고의 관원들은 번갈아 숙직하면서 이른 새벽에 빙고 문을 열어 직접 나누어 주었다. 얼음은 이틀에 한 번씩 나누어 주었는데, 얼음 저장량이 모자랄 경우 얼음을 나눠 주는 대상과 횟수를 줄였다.

변천

궁궐에 소재했던 내빙고는 1789년(정조 13) 양화진으로 옮김과 동시에 주민들을 동원하여 얼음을 저장하던 방식이 민영빙고에서 얼음을 구입하여 저장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동빙고와 서빙고는 한말 시기까지 존속하였지만, 이곳의 얼음저장 방법도 한성부 주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장빙하는 방식에서 빙계공인(氷契貢人)과 민간 장빙업자들에게 구입하여 저장하는 무빙제(貿氷制)로 변하였다. 예조 소속이었던 빙고는 1894년 갑오개혁기 관제 개혁 때 궁내부 산하의 사옹원(司饔院)에 소속되었는데, 그 폐지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T00011305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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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장빙등록(藏氷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 도시사』, 태학사, 2007.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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