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압사(管押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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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중국에 가던 사행의 하나로, 주로 말을 조공(朝貢)할 때 중국에 파송된 사절.

개설

관압사는 원칙적으로 해(亥)·묘(卯)·미(未)해, 즉 4년에 1번 정조사(正朝使) 또는 동지사(冬至使)와 함께 갔다. 관압사는 조선에서 피로(被擄)된 중국인이나 일본인, 그리고 외교 사건의 연루자 또는 범죄자를 중국(대체로 요동도사)으로 압송할 때 파견된 관송사(管送使)와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마도에 하사하는 물품을 가지고 파견되는 사물관압사(賜物管押使)도 있었다. 관압사는 정3품 이상의 문관 출신이 주로 선임되어 파견되었으나, 외교적 현안을 다루지 않을 때에는 무관(武官) 출신이거나 역학(譯學) 출신자 중에서도 선정되었다.

변천

관압사행은 고유한 임무가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다른 사행과는 별도로 파견하였으나, 사신의 잦은 왕래로 사행하는 길 주변의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가 커서 정조사와 함께 출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동지사가 정조사를 겸하게 되면서부터는 동지사와 함께 파견되기도 하였다. 관압사는 정조사나 동지사 일행과 같이 파견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들보다 먼저 귀국하는 등 북경이나 사행 중도에는 별도의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 관압사는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인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만 존속하였던 사행이라 하겠다. 대마도에 파견되는 사물관압사는 1426년(세종 31)과 1427년 두 차례 파견되는 데 그쳤다(『세종실록』 8년 2월 12일).

관압사행에 있어 정사는 다른 사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로 정3품 이상의 문관 중에서 차임되었으나, 때로는 무관·역관 출신 중에서 선정되기도 하였다. 관압사행에는 부사나 서장관 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

조선시대 명과의 외교 관계에서 4년마다 조공품을 진헌하고, 조선에서 피로(被擄)된 중국인이나 일본인, 그리고 외교 사건의 연루자를 자국이나 관련국에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왜구나 여진 등과 관련된 외교의 현안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연구-대명사신과 명 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56, 1998.
  • 박성주, 「조선초기 遣明 使節에 대한 一考察」, 『경주사학』 19, 경주사학회, 2000.
  • 박성주, 「高麗·朝鮮의 遣明使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이영춘, 「유중령의 『연경행록』」, 『조선시대사학보』 32, 조선시대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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