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해(崔有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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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8년(선조 21)∼1641년(인조 19) = 54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지(承旨)이다.자는 대용(大容), 호는 수묵(守默)·감파(紺坡)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주거지는 서울과 경기도 양주(楊州)이다.아버지는 양포(楊浦)최전(崔澱)이고, 어머니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신홍점(申鴻漸)의 딸이다. 군수(郡守)를 지낸 최여우(崔汝雨)의 손자이고, 해주목사(海州牧使)최기(崔沂)의 5촌 조카이며 대사헌(大司憲)최유원(崔有源)의 6촌 동생이다. 동고(東皐)최립(崔笠)·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시대의 활동

1602년(선조 35) 나이 15세에 이미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603년(선조 36)에 정언눌(鄭彥訥)을 찾아가서,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여러 글을 배웠다. 1612년(광해군 4) 25세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우의정이항복(李恒福)이 구원하여 주었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이어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 그가 한음(漢陰)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가서 알현하니, 이덕형이 그가 예학(禮學)에 밝은 것을 칭찬하고, 이어 문장에 대해서 충고하기를, “일찍이 내가 율곡(栗谷)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율곡 선생이 ‘글을 짓는 것도 마음이 도(道)를 통한 다음이라야 저절로 막힘없이 써내려갈 수 있다.’고 말씀하였다.”고 하였다. 최유해는 한음이덕형의 충고를 평생 잊지 않고 더욱 도학(道學)에 정진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6 「승지 최공유해 묘갈명(承旨崔公有海墓碣銘)」 참고. 이하 「최유해 묘갈명」이라 약칭함.)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1614년(광해군 6) 그의 종숙(從叔) 최기(崔沂)가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다가,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무함(誣陷)에 걸려서 <해주 옥사>가 일어났는데, 해주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모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많이 죽었다. 그때 사람들이 감히 그들을 위문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붙잡혀가는 사람들의 수레를 맞이하여 위로하여 보냈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1615년(광해군 7) 훈련도감(訓練都監) 낭청(郎廳)에 임명되었는데, 3월 훈련도감에서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군사들 가운데 중간에서 한가로이 놀고먹으면서 입번(入番)하지도 않고 부방(赴防)도 않는 자가 상당히 많았는데, 군색 낭청(軍色郞廳)최유해가 그 폐단을 살피고 여러 제조(提調)에게 말하여, 놀고먹는 군사를 차출하여 각 초소(哨所)에 군사의 결원이 있거나 부족한 곳에 내려보낸 사람이 2백 36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연소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남의 원망을 감수하면서 놀고먹는 군사를 유용한 군사로 만들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하고, 최유해를 포상하도록 요청하니, 광해군이 승진시키라고 명하였다. 그해 11월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훈련도감 낭청최유해는 매질을 너무나 함부로 하므로 군졸(軍卒)들이 원망할 뿐만 아니라, 대장 이하가 그에게 욕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는데, 제조도 금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최유해를 파직하도록 요청하니, 광해군이 그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참고.)

1617년(광해군 8) 좌의정이항복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려는 대북파(大北派)의 의논에 반대하다가, 쫓겨나서 교외에서 광해군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최유해는 날마다 찾아가서 문안 인사를 드렸다.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鄭仁弘) 등이 조정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궐의 뜰에 나아가 광해군에게 모후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정청(庭請)’을 전개할 때 최유해는 병을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다. 이리하여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좌천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하여 삭직(削職)되었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통제사(統禦使)이시언(李時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호서(湖西) 지방을 순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1622년(광해군 14) 호조의 청으로 조도어사(調度御史)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역에서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물건을 공급하다가,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광해군일기』·「최유해 묘갈명」 참고.) 그때 호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관원을 접대하는 방도는 오직 인삼을 선물로 주는 것뿐입니다. 최유해가 분호조(分戶曹)의 낭청으로 관서(關西) 지방에 있으면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조도 어사의 일을 전담하였는데, 이번에 최유해가 병조 좌랑에 임명되어 갑자기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금 인삼을 채취하는 시기가 임박하여 조치할 대책이 하루가 시급하니, 최유해를 속히 떠나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광해군이 전교하기를, “병조 좌랑을 교체하여 그를 빨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광해군일기』 참고.)

인조 시대의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병조 정랑이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참고.)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그를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보내면서, 명나라 도독(都督)모문룡(毛文龍)이 군사를 이끌고 회령(會寧) 등지에 머물 것을 예상해, 그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관향사(管餉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1625년(인조 3) 광산현감(光山縣監)에 되었고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그때 나라에서 호패(號牌)를 신설하면서 호패청(號牌廳)을 설치하였다. 최유해는 그 낭청에 선발되었고, 특별히 어사에 임명되어 백성들이 호패를 제대로 착용하는지를 순찰하였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돌아와서 종부시(宗簿寺)정(正)이 되었고, 1626년(인조 4)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이 되었고 군기시(軍器寺) 정이 되었다.(『승정원일기』 참고.)1626년(인조 4)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하는 연접도감(延接都監)에 임명되었는데,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 낭비를 막아 그 비용을 크게 줄이자, 장만(張晩)이 극구 칭찬하며, “이것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다.” 하였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완평군(完平君)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양 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양주는 임금의 측근들이 부임하는 고을이어서 폐단이 많았는데, 모두 개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기(兵器)를 갖추고,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였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1627년(인조 5) 순안어사(巡按御使)에 임명되어, 충청 좌도를 순행하고 돌아와서,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1629년(인조 7)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의금부(義禁府) 문사 낭청(問事郎廳)에 김육(金堉) 등과 함께 임명되었고,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 참고.)

당시 요동(遼東)의 영원성(寧遠珹)에서 누르하치의 후금(後金) 군사와 싸우고 있던 명나라 독사(督師)원숭환(袁崇煥)이 조선에 요청하기를, “조선에서 지원병을 보내어 후금의 공략한 요동 지방을 배후에서 공격해 달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독사원숭환에게 회답하는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최유해가 그 자문을 가지고 가는 사신, 즉 재자사(齎咨使)에 임명되었다. 최유해는 1629년 9월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요동으로 떠났으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표류하였다. 명나라 관헌의 도움으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영원성에 도착하니, 독사원숭환은 이미 의종(毅宗)이 보낸 환관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뒤였다. 원숭환이 평안도 가도(椵島)에서 횡포를 부리던 도독모문룡을 영원성으로 불러서 임의대로 처형하였기 때문이었다. 최유해는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가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이듬해 4월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나중에 최유해는 배를 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한 기록을 『동사록(東槎錄)』 3권으로 엮어서 간행하였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권3 참고.)

1630년(인조 8) 장악원(掌樂院) 정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 앞서 그가 재자사로 영원성으로 가다가 표류하여 등주에 도착했을 때, 명나라 호부 낭중(戶部郞中)송헌(宋獻)과 만나서 왕가(王家)의 예절에 대하여 물었는데, 송헌은 “조선에서 마땅히 왕의 사친(私親)을 왕(王)으로 추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예론(禮論)을 글로 써서 주었다. 그러나 최유해가 귀국하니, 마침 조정에서 인조의 아버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는 문제로 말미암아 찬반 양론이 매우 시끄러웠다. 그는 시론(時論)의 공격을 겁내어 감히 이것을 인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나중에 송헌의 글을 이귀(李貴)에게 보여주었는데, 이귀가 바로 인조에게 보고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다. 최유새는 양주의 집에서 대죄(待罪)하였지만, 1631년(인조 9) 인조의 특명으로 파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승정원일기』·『묵재일기(黙齋日記)』 권2 참고.)

1633년(인조 11)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나갔다가,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승진하였다. 그때 명나라 장수 심세괴(沈世魁)가 모문룡 대신에 가도에 주둔하고, 천총(千摠)하성공(河成功)을 정주에 보내어 재화를 요구하였다. 목사최유해가 들어주지 않자, 하성공이 노하여 난동을 부려서, 최유해가 그의 칼날에 중상을 입었다. 이것을 보고 격분한 조선 군(軍)·민(民)들이 집단으로 하성공을 폭행하였다. 명나라 장수 심세괴가 하성공이 정주의 난동에서 죽었다고 조선을 협박하자, 조정에서 최유해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강원도 양구(楊口)로 귀양보냈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가도에 가서 하성공을 만나서 그와 함께 이야기까지 하고 돌아와서 그가 살았다고 보고하자, 최유해는 석방되어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임명되었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화의를 맺자,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7년(인조 15)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서,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고, 치욕을 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인조가 그를 우대하였다. 1638년(인조 16)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수찬을 거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나갔다.9『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그때 길주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아서 고을 사람들이 1천 7백 명이나 죽었는데, 그가 창고의 곡식을 풀고 약을 조제하여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또 길주에 둔전(屯田)을 널리 개간하였고 또 별도로 병기(兵器)를 준비하였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1640년(인조 18) 함경도관찰사가 장계(狀啓)하기를, “길주 목사최유해가 둔전을 개간하여 별도로 3천여 섬의 곡식을 장만하였습니다.” 하니, 인조가 숙마 1필을 내려주었다.(『인조실록』 참고.)1641년(인조 19)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는데,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1641년 10월 18일 갑자기 쓰러져서 돌아가니, 향년이 54세였다.

그는 의약과 복서(卜筮)·천문(天文)에도 밝았다. 저서로는 『동사록』·『서명천견록(西銘淺見錄)』·『길주사적기(吉州史蹟記)』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묵수당집(默守堂集)』이 남아 있다.

<김직재의 옥사>와 최유해

1612년(광해군 4) 봄에 봉산 군수(鳳山郡守)신률(申慄)이 도적 김제세(金濟世)를 붙잡아 심문하니, 김제세가 죽음을 모면하려고, “문관(文官) 김직재가 반역(反逆)을 도모하였습니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황해 병사유공량(柳公亮)과 관찰사윤훤(尹暄)이 반역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김직재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조정에서 김직재를 국문하자, 김직재가 거짓으로 고백하기를, “황혁(黃赫) 등과 함께 모의하여 순화군(順和君)의 양자(養子)인 진릉군(晋陵君)이태경(李泰慶)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혁의 딸이 순화군의 부인이고, 진릉군의 양모였다. 황혁을 비롯하여 정경세(鄭經世)·정호선(丁好善)·최유해 등 많은 사람들이 옥사가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당했는데, 황혁은 곤장을 맞고 감옥에서 죽었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1 참고.) 그 뒤에 무고임이 밝혀져서 그 해 3월 10일에 최유해·정호선·정경세 등 26명이 모두 석방되었다.(『순암집(順菴集)』 권27 참고.)

<김직재 옥사>는 봉산 군수신률이 그 아버지 신순일(申純一)과 원수 사이인 황혁의 아버지 황정욱(黃廷彧)을 모해하려고 도적떼 유팽석(柳彭錫) 등과 손을 잡고 일부러 무고하기를, “황혁이 진릉군이태경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라고 고발하게 하였다. 당시 권신 이이첨은 신순일과 가까운 친척 사이여서 평소에 신률과 가깝게 지냈다. 이이첨과 신률은 서로 결탁하고 옥사를 거짓으로 날조하였다. 마침내 황혁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황혁과 그 아들·손자들을 잡아 감옥에 넣고 문초하였다. 황혁은 감옥에서 차남 황곤건(黃坤健)과 손자 황상(黃裳)과 함께 매를 맞다가 모두 죽었다.

그해 2월 광해군이 서청(西廳)에 나아가서 죄인을 친국하였다. 영의정이원익, 좌의정이덕형, 우의정이항복 등이 입시하였다. 광해군이 그 주모자를 자세히 물었는데, 도적 김제세가 공초하기를, “그들이 논의한 일은 역모였습니다.” 하고, 최유해는 공초하기를, “제가 살고 있던 뒤쪽에 불당(佛堂)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글을 읽으려고 올라갔을 때 이 사람이 중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묵었는데 모두들 생원(生員)이라고 했습니다.” 하고 그가 본 바를 자세히 진술하였다. 그해 9월 우의정이항복이 아뢰기를, “최유해는 법으로 논할 경우 별로 근거로 삼을 만한 단서가 없었으므로 일찍이 보방(保放)하였습니다. 최유해는 비록 김제세의 공초에 나왔으나, 그가 역모에 참여해 알고 있었다는 단서가 없습니다.” 하였다. (『광해군일기』 참고.) <김직재의 옥사>에서 우의정이항복이 그를 구원하여 주었는데, 최유해의 스승 최립은 백사(白沙)이항복과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도 최립의 제자였다.

성품과 일화

최유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최유해 묘갈명」 참고.) 그는 태어난 지 1년이 되어 아버지 최전이 세상을 떠났고, 5년이 지나 어머니 신씨를 여의었다. 외가에 가서 자랐는데, 어린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삼으로 머리를 묶어 달라.”고 간청하고, 상주(喪主)노릇을 하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자, 외할아버지 신홍점을 아주 정성스럽게 섬겼는데, 외할아버지는 후사가 없어서 후일의 일을 외손자 최유해에게 부탁하였다. 관직에 나온 뒤에 최유해는 외가의 일가붙이를 찾아가서 할아버지의 제사를 맡기고, 그 재산을 모두 돌려주었다. 일찍이 남창(南窓)김현성(金玄成), 풍옥(風玉)조수륜(趙守倫)에게 글을 배우다가, 당대의 최고 문장가 간이(簡易)최립의 임소(任所)로 찾아가서 시문(詩文)을 배웠다. 그때 최립이 최유해에게 먹을 것을 주자, 최유해가 대뜸 사양하며, “책을 가지고 천리 먼길에 찾아온 것은 어찌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이겠습니까?”라고 하여, 최립을 놀라게 만들었다.

최유해가 일찍이 어떤 친구와 같이 학당(學堂)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의 부형(父兄)이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고관(高官)이었다. 그는 짐을 싸가지고 곧바로 그 곁을 떠나서 그 혐의를 피하였다. 그 뒤에 한강정구를 찾아가서 수학(修學)하였는데, 정구가 그 말을 듣고 매우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선친이 율곡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율곡 선생이 마침 과거 시험을 주관하자,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지금 너를 보니, 더욱더 너의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하였다. 최유해는 그 뒤로 정구를 다시 찾아가지 않았는데, 그는 말하기를, “경계의 말씀은 하지 않고 면전에서 칭찬만 하시니, 나로서는 상당히 감당할 수 없었다.” 하였다.

최유해는 일찍이 돌아간 부모의 묘소를 이장(移葬)하고 나서 소급해서 3년 상복(喪服)을 입으려고 하다가, 집안 어른들이 예가 아니라고 하자, 단지 소식(素食)하고 바깥채에서 거처하고 3년 동안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았다. 최유해는 계곡(谿谷)장유(張維)와 매우 친하여 같이 노닐면서 ‘이기(理氣)와 선악(善惡)이 모두 천리(天理)라는 설’에 대해 토론을 벌였는데,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두 사람의 주장이 모두 옳았다고 칭찬하였다. 항상 부모를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긴 나머지, 부모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한 달 동안 재계하고 소식하였다. 중부(仲父)를 마치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처럼 섬기고 여러 종제(從弟)들을 가르치고 기를 때 자기 성심을 다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 감파(紺坡)에 있는데, 우암송시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 권176 「승지 최공유해 묘갈명」)

첫째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장령조응문(趙應文)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둘째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군수홍경소(洪敬紹)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셋째부인 김씨(金氏)는 감역(監役)김광윤(金光潤)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낳았다. 3남 최선(崔渲)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2녀는 현감허찬(許纘)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곡집(谿谷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백사집(白沙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농포집(農圃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우당집(四友堂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월봉집(月峯集)』
  • 『월사집(月沙集)』